14. 네 꿈인데… 낯설지?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앞서 그 작품들은 여백의 미를 충분히 잘 살린 것은 물론이고 다양하고 강렬한 색채로 물결치며 의지를 갖고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한번 보면 계속 눈길이 가고 마는 듯한 마성(魔性)이라도 깃든 듯이 그림 하나하나가 매력적인 존재감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물론, 이 그림 중 몇몇(안견의 몽유도원도, 정선의 진경산수화, 신사임당의 초충도 등등)은 내가 예전에 교과서나 박물관 등에서 본적도 있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오늘 본 그 동일한 작품들과는 확실히 뭔가가 달라보였다.
겉으로 뿜어내는 기세라든가 저절로 드러나는 품격이라든가?
뭐라고 딱 떨어지는 적절한 단어를 바로 골라낼 능력은 아직 없지만 내가 예전에 본 그 작품들은 모조리 다른 사람이 흉내 낸 싸구려 모작처럼 느껴졌던 것만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때는 그 작품들이 유명한 사람이 그린 것이며 가격 또한 비쌌고 하여간 훌륭한 작품이라는 소릴 귀에 딱지가 않을 정도로 많이 듣다보니 그런 것인가 하고 그저 감탄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난 이 작품들이야말로 진심으로 마음속을 뜨겁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나 할까?
머릿속에서 깨달음의 새하얀 벼락이라도 내리치는 듯이 여태껏 들어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리는 듯한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실로 품위 있고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가득 넘쳐나는 서예 작품과 발그레한 소녀의 뺨처럼 생기가 도는 색채의 오묘한 아름다운 그림 작품에 일순 내 심장이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듯 크게 두근거렸다.
그 많은 작품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이 두 눈이 죄다 멀어버릴 것만 같은 순간이라도 맞이한 듯 이 자체가 꿈결인 듯 대단하고도 굉장한 기분에 홀딱 빠져 이 작은 몸은 단지 우뚝 멈춰 서서 멍하니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
대체··· 이거 전부 다 어디서 모은 거래? 정말 엄청난 부자인가 봐. 림네 부모님은! 비록 꿈속이지만 역시 우호적인 관계로 굉장히 자알 지내야겠다! 림. 우하하하!
그런데 왜 저리도 작품들이 잔뜩 넘쳐나고 있어도 어찌하여 이곳이 답답해 보이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만 그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는 거였다.
즉 모든 이유는 이 방의 규모가 한층 커진 탓이었다.
이 방안이 림 혼자 사용하는 공간 치고는 다소 넉넉한 편이긴 했지만 조금 전엔 대체로 아담하게 느껴졌던 방안의 공간이라고 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원래 있던 공간에서 10배 정도는 가뿐히 뻥튀기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우지끈~ 와장창~ 대는 소리도 없이 고요히 어느덧 공간이 넓혀져 버렸다고나 할지, 소리 소문 없이 공간이 장악 당했다고나 할지, 내 몸은 어딘가로 밀려나가거나 휘청대지도 않았건만 방은 자연스레 엄청나게 커졌던 거였다.
혹시나 림이 허공에 부어낸 마법가루가 내 눈을 마비시켜 버린 지도 몰랐다.
저런 엄청난 착각을 일으키다니 말이다.
확 달라진 넓어진 이 공간감에 내 영혼의 영역마저도 한층 더 넓어진 듯해서 탁 트인 시야에 동조하여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오오~! 너, 넓어졌어! 굉장해!”
넓어졌다는 감각에 확신을 대대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과거’에 내가 경쾌한 소릴 내며 부수고 들어왔던 그 방문 때문이었다.
한때는 아름다운 꽃무늬 형상의 나무 창살에 한지가 발렸던 그 문이 지금은 한 눈으로 다 훑기에도 벅찼다. 그것의 덩치가 장난 아니게 커졌던 거였다.
물론, 바보가 아니라면 금방 척하고 알아차리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지금 그 문이 단지 규모를 부풀린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부서지기 전의 원래 상태로 차근차근 저절로 그 형태를 복구되어가는 것도 말도 안 나오게 신비롭고도 놀라웠던 일이다.
두 개가 한 쌍을 이루었던 그 문이 어느새 베란다 창문을 연상시키듯 4쌍의 문으로 넓게 그 기운을 떨치며 펼쳐져 간다. 게다가 문 각각의 높이도 폭도 한층 더 크게 변해버린다.
내가 한때 부수고 들어왔던 그 문은, 좌우 양쪽에서 문을 활짝 열어 굳이 꾸역꾸역 구겨 넣자면 성인 셋 정도까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지금의 문은 단번에 시야가 훤히 트여 마치 영화관의 영화를 보기 위한 스크린 막을 연 듯 확 커져버려서 성인 50여명은 충분히 일렬로 쭉 늘어서서 넉넉히 걸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커진 문의 너비였다.
이런저런 상황들이 꽤 황당하긴 했지만 역시 정말로 멋지단 생각만이 끝에 남는다.
어느새 내 옆으로 슬금 다가와 있던 림이었다.
“아. 이게 원래 사이즈.”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림은, 지금 이 순간 왠지 자신만만하고 한층 거만하고 우월적인 존재로 보였다.
이 얼마나 자기현시욕(자랑할 만한 것을 남에게 드러내어 보여주려는 욕구)이 엄청나게 강한 녀석이란 말인지···. 아니,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 이건가?
근데 왜 ‘자살’을 원하는 것일까? 정말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이런 마술쇼라니, 아니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법한 마법쇼···려나? 림은 대체 뭐지? 내가 아까 허접하게 상상했던 대로 혹시 드래곤? 용왕님?
하여튼 녀석은 굉장했다! 엄청!
그럼 어쩌면 외계인? 초능력자? 잊혀진 종족? 흐음. 그렇구나. 그런 걸 딱히 ‘인간’의 범주에 넣진 않으니까. 아니다. 많이 양보해서 넣어주려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른 건가? 림한테 직접 물어볼까? 아··· 이런 건 진짜 물어보기 애매하네.
앗! 그래! 아까도 내가 ‘그럼, 넌 뭔데?’라고 물었을 때 그냥 림은 슬쩍 말을 돌려버린 거 같았는데. 인간은 아니라면서 자신이 뭔지는 제대로 말해주기 싫다는 건가?
뭐···, 상관없나? ‘꿈’이니까? 그게 아니라도 그리 상관없지 않나?
이거, 계속 비현실적인 상황만 들이닥치니까. 나도 조금 지치는 걸. 아~ 생각이란 것도 계속하니까 더 배고프네. 이거 꿈속치곤 너무 지나치게 배가 고픈 거 아닌가? 으~~. 배고파 죽겠네.
근데, ···뭐하고 있는 거냐고! 림?
그 휘황찬란한 ‘집 꾸미기’보다도 다른 게 먼저였잖아? 까먹은 거냐. 은인이 이리 굶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냐고? 응?
“그럼···. 먹을 거는? 림? 없어?”
하지만, 역시 배는 고픈 거다. 멋진 쇼가 배고픈 것까지 막아주는 못한다.
백두산도 식후경이고 식후 전에 가면 산도 먹고 싶어질 뿐이다.
백두산 천지의 깨끗하고 맑음의 상징인 물조차도 다 먹어버릴 거 같고, 그거로도 모자라서 백두산 용암지대의 온천 속 쩔쩔 끓는 물에 계란이라도 노릇노릇 삶아먹고 싶을 뿐인 거다.
한없이 배가 고파 머릿속이 점점 피곤해진다. 생각하기 점점 싫어진다.
꼬르르르~륵.
역시 이 소리가 절정에 다다를 듯 백토의 뱃속에서 열심히 메아리 치고 있었다.
“이봐. 조금 있으면 곧 올 거야.”
림의 느긋한 그 말에 고개를 갸웃대며 그를 바라보던 백토,
“응? 너 무슨··· 배달 음식이라도 시켰냐?”
말하는 것도 배고픈 나머지 너무 귀찮았지만, 백토는 ‘음식’의 도착여부나 도착시간 등등이 굉장히 궁금하여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하하. 백토 네 꿈속인데도 참 낯설지? 이런 거···. 꼭 다른 사람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이건 내 꿈속이라니까 그러네! 낯설 수도 있지. 뭐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앗! 근데 너 지금까지 전화 한통도 건 적 없잖아? 그럼 어떻게 내가 먹을 음식을 시켰다는 건데?”
“그런 거 필요 없어. 다 방법이 있어. 어쨌든 그건 내가 알아서해. 배달음식이든 뭐든. 넌 알려줘도 모를 테니 설명은 관둘래.”
“림. 너 그 비단옷 바지 주머니에 혹시 핸드폰···! 그거 있었던 거야? 하긴 단축번호로 지정해놓으면 버튼 하나만 눌러도 충분히 통화하는 게 가능하겠지. 역시 그럴 틈이라면 너라면 엄청 많이 가질 수가 있었을 거야. 난 아까부터 쭉 네 방을 감상하느라고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으니까. 역시 너라면 당연히 가능했을 거야!”
“백토. 너 핸드폰이라니. ‘이런데서’ 핸드폰 타령이냐? 아. 그거라면 나도 갖고 싶을 정도야. 그 ‘세상’과 연결된 핸드폰이라···. 갖고 싶네. 그거.”
림은, 이곳이 단지 ‘꿈’이라고 그저 꿈에만 집착하던 백토 앞에서, 왠지 이곳이 어딘지 말해줄까 어쩔까 하는 그런 고민은 물론 해봤었다. 하지만 그걸 말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는 너무도 진지하게 이곳이 꿈임을 확신하고 있는데다, 만약에 내가,
“그러니까. 여긴 라스의 섬, 통상 ‘플루토(Pluto)의 창(窓:창문)’이라고 불리고 있어.”
라고 한다면, 그의 대답은 뭘까. 그건 당연히.
“아~아. 내 꿈속에서 이곳을 ‘플루토의 창’이라고 부르는 거구나.”
라고 해댈게 분명하다고 지금의 난 생각한다. 저 바보 녀석은 그럴 게 분명했다.
대체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진 줄도 모르는데다가 그 활용법도 모르고 있고 대체 어디서 왔는지 그 조차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백의 시멘트라 불리는 이 백토란 그 녀석에게 그런 정보까진 필요가 없을 거다.
이러고 나와 한가하게 잡담이나 하고 밥이나 기다리고 있는 백토를, 이곳 ‘플루토의 창’을 감시하는 ‘그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아마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만, 내 자살을 말리려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모를 그들 따위의 말을 들어서 뭐한단 말인지.
하여간, 백토란 놈은 내 결계까지 알아서 제 발로 뚫고 들어온 녀석이니, ‘그들’이 백토를 찾더라도 그 녀석은 위기에 닥치면 저절로 제 힘을 발동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든다.
원래 ‘난 아무것도 모르쇠’로만 일관하는 녀석의 ‘숨겨진 모습’이란 어쩌면 굉장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마치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하게 운전하는 몇몇 드라이버들처럼 말이다. 아직 그 ‘운전대’를 잡지 못한 모양이니, 그걸 잡기만 하면 뭔가를 뻔뻔하게 해낼지도!
어쩌면 그것이 이뤄진다면야 매우 유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뭐하는가, 아직은 전혀 실현 가능성조차 없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니 더는 볼 것도 없다.
난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하던 대로 살아가면 된다.
나는 나대로 계속 자살준비를 하고, 이곳에서 죽어서 반드시 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더는 저런 바보 같은 놈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을 순 없다.
아주 잠깐 고민되는 게 있다면,
-“그···래. 결국··· 이것도 ‘당신의 의지’였다는 건가?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둔거란 건가? 하! 그 치밀함에 너무 놀라서 치를 떨겠군. 정말! 알아봐야겠어. 배후에 ‘당신’이 있는지 어떤지를.”
나는 백토로 인해 자살에 실패한 후, 그를 가장 먼저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백토를 여기로 보낸 건, 다름 아닌 내 스승 ‘이데’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라고 할까···?
지금껏 나를 가장 괴롭혀왔고 예초에 나를 이런 데에 끌고 와서는 이젠 자기 편할 대로 굴고 있는 그 질 나쁜 청소년 납치범.
바로 그 ‘이데’라는 놈이 더할 나위 없이 신경 쓰인다는 거다.
지금은 대체 어디서 뭘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더 화가 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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