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우리 모두 너를 생각해.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순이의 비현실적인 대사에 철수는 짐짓 놀랐다지만, ‘농담이지?’하며 순간 순이를 달래보려고도 했으나, 순이는 교복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순식간에 나이프를 하나 꺼내들며 철수의 눈앞을 위협적으로 겨누며 ‘어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라고 말하자, 조금 머뭇대던 철수는 ‘순순히 네 말대로 한다면 영희를 죽이지 않는다는 건가?’라며 뒤로 한발자국 서둘러 물러서며 등 뒤에 숨겨둔 명검을 휘릭 뽑아낸다.
‘웃기지마. 난 영희가 좋아.’라며 철수의 말이 이어진 뒤, 둘은 한 차례 혈투를!
생존을 건 순이와 철수의 명승부가 이어진다. 허나 결국에 철수는 순이 아래에 깔리고 순이는 철수의 무기를 저 멀리 내던진 후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네 앙탈 덕에 이제 영희의 목숨은 없다. 그리고 넌 지금부터 내 노예야.’라고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순이는 악마처럼 웃어댔다.
그때, 철수는 고개를 돌린 채 ‘내가 졌다. 처분은 마음대로 해. 젠장.’이라며 움켜쥔 주먹으로 복도 나무 바닥을 힘껏 내리치며 분한 감정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이런저런 상상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던지 씨익 웃음기를 담아낸 마린의 얼굴은 괴이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간 야금야금 먹어댄 아이스 바가 이제 한 덩어리만 남아 그녀의 입속에 다이빙을 하고,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휘릭. 나풀나풀.
어느새 마린 옆 자리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화화가 도착한다. 그녀는 착석 후 마린에게 당연하단 듯 한 손을 척 내밀었다. 그러자 마린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넸다.
그걸 포장지를 찢고 입에 가볍게 베어 물고 살살 녹이며 삼키자 입안 가득히 퍼져가는 그 달콤함에 얼핏 젖어들면서도 한편으론 가슴 답답함에 한숨을 내뱉던 화화였다.
후으.
“아. 마린. 오늘 정말 피곤한 날이야. 림도 짜증나고. 이데님도 정말 짜증나!”
“왜? 내 사랑 이데님? 아니었어? 화화?”
이내 뽀로통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던 화화, 참으로 생동감 넘치고 있는 자태였다.
“왜긴! 얼굴도 안 보여주고 자기 혼자 여기 저기 돌아다니니깐 그렇지.”
“요즘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잖아. 이데도 ‘라스’니까. 정보수집 한다고 바쁘겠지. 그래도 이틀에 한번이면 소식도 자주 듣고 있는 편이잖아? 뭐가 불만이야?”
지금 우울한 표정을 짓던 화화가 칭얼대고 있다. 그런 게 확 느껴지던 마린이었다.
“그렇지만. 우린 ‘연인’이라고. 더 딱 달라붙고 싶단 말이야. 칫.”
마린의 말에 위로를 받는 듯싶다가도, 왠지 울컥하는 기분에 화화는 그 언젠가의 과거를 끄집어내듯 그녀에게 말을 전한다. 진지한 음색을 담아서.
“그때부터였지?”
“아. 음. 그래.”
그때, 그것은 바로 림이 ‘자살’시도를 하기 시작한 후부터랄까, 라스의 과제로 힘들어하다가 뭔가 음습한 생각으로 가득하던 림이 자살에 성공할 듯 말듯 그 경계가 불안할 정도로 아슬아슬해졌을 때부터랄까.
그것이 점점 심해질수록 어느새 의욕을 잃어버린 채 우중충해진 림에게, 그때 이데는 림을 향해 대놓고 기분 나쁜 듯 불쾌한 듯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한편으론 그것이 림이 자살시도를 그만두면 안 된다는 듯 계속 해도 괜찮다는 듯 보이기도 한 그의 행동이 더욱 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림도 더욱 상처를 받는 듯한 눈치였다. 그렇게 림이 자살하는 이유에 이데의 꾸중도 어느새 한 몫 하는 듯 보였다.
그 당시 이데의 모진 꾸중-대체로 행동력 무력으로-을 받던 림의 눈빛에는 이데는 내 스승이면서 내 편도 안 들어준다는 듯한 내 마음도 몰라준다는 듯한 그런 야리꾸리한 타박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림에게 꾸중을 한 날에도 이데는 마치 성격파탄자나 이중인격자 또는 다중인격자처럼 자신의 몇몇 친구들이나 자신의 부하로 동료로 가족으로 대하던 선녀들 몇몇에겐 쾌활하게 웃으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어쩌면 냉혈한인가 싶을 정도로 림을 신경 쓰지 않는 말투였다.
“이거 한 건 해내면 한동안 느긋하게 쉴 수 있겠어. 그럼 우리 바캉스나 갔다 오자. 한적한 섬이 좋을까나? 아니면 사람이 북적대는 축제현장? 아 어디가지? 이봐 좋은 의견들 없어?”
그 한 건이 뭔지 잘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뭔가 이야기는 산으로 강으로 흐르고, 그 한 건을 끝내고 놀 궁리에 앞장서 있던 이데였다. 그리고 덧붙이며 본론을 이야기하던 그였다.
“그러니까. 림은 아직 죽어선 안 돼. 좀 더 시간을 끌어야해.”
그런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던 선녀들의 말에 이데는,
“흠. 하여간 림이 그 ‘자살시도’인가 뭔가를 벌일 때 그게 늘 아슬아슬하게 ‘실패’하게 해줘. 부탁할게.”
림의 자살시도 사건, 그것은 얼핏 별일 아닌 듯 여겨졌지만, 그것이 반복되어감에 따라 이곳의 똑똑한 라스들 몇몇은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데에게도 알렸고, 그런 연유로 이데는 이제 림이 설마 마음이 바뀌어 자살시도를 벌이지 않을까봐 초조해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림을 구박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말았다.
다행히 자신의 맘을 알아줬던 것인지, 림은 무엇에 홀린 듯이 반복적으로 그 짓을 하고 있었고, 그때 이데의 마음은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하고 때론 본인도 내가 내 후계자를 가지고 뭔 짓을 하고 있나 싶어 씁쓸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라스들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랬다. 라스들이 깨달은 사실은, 라스의 후계자인 림 녀석이 이곳 ‘플루토의 창’에서 최초로 자살시도란 것을 하자 그것이 지구의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세상’ 속 세 종류의 인간(태양, 달, 석양)에게, 특히 그 중 한 종류의 인간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
“화화. 그건 그렇고, 단풍은 저기 그대로 나둬도 괜찮아? 이제 쓸모도 없는데다 방해만 될 텐데. 그냥 이리로 부르지 그래?”
마린의 그 말에 아이스크림을 살짝 혀로 핥던 화화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얼른 손사래를 쳐댄다.
“아, 아냐. 귀찮아. 그냥 내버려둬. 그래봤자 지가 뭘 하겠어? 아~ 진짜! 막내라고 있는 게 왜 저렇게 엉뚱한지. 왜 계속 눈치 없게 림 편을 드는 거야? 아까 그 침입자 녀석 처리할 때도 네가 옆에 없었으면 또 무슨 짓을 했을지.”
그 모습에 마린이 피식 웃으며 말을 전하기를,
“아니. 내가 옆에 있어도 그 침입자를 돕고 있는 림을 돕는 심정으로 헛손질을 하고 있었어. 단풍은. 내가 보기엔 그래. 아주 열심이더라. 넌 림이랑 한판 뜬다고 몰랐겠지만. 내 눈은 피할 수가 없었을 테지.
원래 공격에도 서툰 단풍이라 그런지 그 헛손질마저 서투르다는 것쯤은 척 보면 알지. 오히려 그 헛손질이 자칫 심한 공격으로 이어져서 내가 그걸 조율해내느라 지루하진 않을 정도였지. 정말 도움이 안 되지만 그러니까 막내잖아?”
마린의 그 말투에 화화는 금세 작은 미소를 입가에 매단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 상황이 재밌다.’는 거지? 마린? 그런 게? 하여간 이해 안 된다.”
“아. 응. 나름 재밌어. 이데도 그랬잖아? 불리한 짐을 들고 싸운다는 건 스릴만점이거든. 예측불가라서 좋지. 하지만 다음엔 이런 심심한 거 기권할래. 누굴 봐주면서 싸운다니 내 생애 최초란 기분이야. 그래도 림 녀석 잘하더군.”
“뭐, 그러니까 이데님의 제자란 느낌이지? 역시. 후후.”
금방 우울해했다가 다시 자신의 연인이 자랑스러워서 우쭐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여인의 마음을 더 이해 못하겠던 솔로 마린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친구 화화의 모습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 어쨌든 대강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네.”
“뭐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러며, 화화는 서열 2위의 애플진과 서열 3위의 애플티를 슬쩍 떠올려보았다.
선녀의 그 ‘서열’관계란 그저 힘으로 정한 게 아니었다. 그냥 다들 별로 신경 쓰지 않자 이데가 나섰고, 곧 그가 요구한 대로 그가 제일 좋아하는 화화를 1번으로 했고 마지막 5번은 막내인 단풍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셋은 그냥 제비뽑기 같은 걸로 그냥저냥 알아서 뽑아둔 거였다.
“화화. 저것 봐. 저 위에 림 똘마니도 와있어.”
“뭐? 아아. 그 똘마니라면, 그 용 말하는 거지? 마린?”
화화도 공격 후 뭔가 그 ‘손맛’이 느껴지지 않아 설마 하는 기분이었고 이내 역시 하는 기분으로 의심을 품었고 결국 저 용을 확인하게 되었고, 저걸 어쩔까 하고 고민 중이었다만 이미 자신은 지쳤다.
원래 계획대로 차근차근 목표에 접근해가기로 했는데, 림과 싸우다보니 왠지 순간 욱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과한 에너지를 쏟아 부어 거대 빌딩을 만들어내 림을 자극하고 그 침입자를 공격했다.
아마도 이걸로 림은 더욱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고소하지만 한편으론 그리 좋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데님도 알 것이다. 림과 싸우고 있는 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인지 말이다.
어쨌든 그 침입자가 살아남았다니, 의외긴 해도 이런 경우도 없지 않았으니 별 문제될 건 없었다. 우린 늘 여러 경우를 염두에 두고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하게 싸워왔으니까.
하긴, 이번 침입자는 참 독특했다.
자신이 알기로 림은 자살시도에 앞서 그간 우리들의 분명한 방해공작으로 죽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며 제대로 죽기로 결심하고 늘 ‘결계’를 만들어왔다만, 그 ‘결계’가 만만하지 않음에도 그걸 통과하고 멀쩡히 ‘림네 집’에 버젓이 들어와 있다니, 저 침입자가 보통 녀석이 아님을 인정했다.
허나, 림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면, 그가 만든 결계가 우리한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가 알게 되면 더 비참해질 터이니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림의 결계가 유효하다는 척 하고 있어 왔다.
만약 저 용이 당장 저 침입자를 들고 림에게 가서 ‘살아있습니다.’라고 외쳐댄다면 그 전에 마린과 자신이 나서서 필요하다면 다른 녀석들도 불러서 저걸 어딘가로 끌고 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그 전에 저 용은 고민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침입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룰이 이곳 ‘플루토의 창’에 엄연히 존재하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저러고 가만있는 걸 보면 림과 선녀들과의 결전이 다 끝나고 림에게 몰래 다가가서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 그 용. 근데 괜찮아? 저거? 또 개입하려나?”
화화와 마찬가지로 아까 이미 한 차례 저 용이 개입한 것을 눈치 챈 마린이었다. 예리한 눈빛을 품던 마린이 저 위를 슬금 노려보고 있자, 화화가 별 위기감 없이 말을 잇는다.
“아니, 안 할걸. 하지만 림이 정말 위험해졌다면 돕겠지. 림이 죽으면 자신도 죽어버리니까. 림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그 용은 그런 용이잖아? 거기다가 자기 몸 엄청 사리는 용이니까 괜찮을 거야. 생각보다 정신 연령도 어린 것 같고 말이야.”
“흐음.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우리’와는 다르네. 화화.”
“다르지. 우리 이데님이 그래서 림을 아끼잖아. 림은 정말로 특별해서. ‘라스’가 된다면 정말 대단한 녀석이 될 거라나? 내가 검을 빼들게 만든 것도 그렇고, 조금 진심으로 상대할 뻔 했다니까?
약간 놀랐어. 이데님의 실력 일부를 얼추 복사해 내다니. 그 짧은 기간 내에 이 정도로 해내다니 정말 별종이라니까. 그런데도 아직 진짜 전력을 다한 본심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고 우릴 생각해주는 척 마음을 숨기고 하여간 기분 나쁜 녀석이야. 애플티와 애플진이라면 그걸 해낼지도 모르겠지만.”
“화화. 왜 그래? 너도 이미 그 녀석이 왜 그러는지는 그 이유쯤은 다 알고 있잖아? 그건 바로 이데 탓이잖아. 우리도 동참했으니까 이데와 우린 이미 한 패라고.”
“하지만, 불쾌한 건 불쾌한 거야. 진짜. 우릴 대하는 태도하곤! 아. 몰라. 흥.”
삐친 척 고개를 돌리는 화화, 림의 뒤통수라도 노려보고 있는 듯한 기세였다.
곧, 마린이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듯 말을 끄집어낸다.
“그러고 보니 림이 여기 온지 벌써 7년이나 흘렀네. 그거에 비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성과구나. 그 자살시도건만 빼면 오점은 없겠는데 말이야.”
“맞아. 마린! 후후. 지금은 좀 빌빌대고 소심하게 굴어서 그렇지만. 이번 일을 겪다보면 림도 좋은 눈빛을 가지게 될 거라고 우리 이데님이 말했으니까.”
그러며 활짝 꽃처럼 웃음 짓던 화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때 싸늘하게 림을 몰아붙였던 그 화화가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
선녀들의 결계 안,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일이던 림의 모습이 잡힌다.
자신의 심장소리가 과격하게 끈끈하게 이어지며 처연히 떨리고 있음을 느끼는 림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렇다. 백토가 죽고 말았다!
그것의 실체는 바로 백토가 죽었다는 의미일 터인데, 그 의미는 뜻을 상실하고 어떤 다른 것으로 뒤바뀌어 마치 ‘내가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있는 나는 대체 무엇인가 싶을 정도로 큰 혼동에 휩싸였다.
세상이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제멋대로 풍경이 일그러져 간다. 새까만 혼돈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림을 덮쳐갔다.
그런 것들은 어쩌면 정말 별 거 아닌 일로 보였다. 그런데 몹시 신경이 쓰였다.
백토가··· 아니, 내가 죽고 말았다는 그 사실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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