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그는 모자이크 따윈 모르는 멍청이.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내가 그때 바란 것은 진정 ‘자살’이었나? 아니다. 누군가 말려주길 원했다. 내가 절망과 고뇌에 가득 차올라 지독한 악몽을 꾸면서도 라스의 과제를 풀려고 끝까지 매달릴 때에도 이젠 그만해도 된다고 누군가는 말해주길 바랐다.
이제 ‘라스’따위 된다던가 하는 건 신경 쓰지 말고 ‘세상’에 나가게 해줄 테니 그러면 ‘가에’도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며, 그러니 모든 걸 훌훌 털고 자유롭게 여길 떠나도 좋다고 허락해주길 원했다.
여길 나가는 조건으로 ‘기억’같은 건 잃어도 상관없으니까. 또 다른 대가를 요구하면 그것 따윈 흔쾌히 해줄 테니까 나는 미친 듯이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수많은 ‘소문’을 내고 있었다.
나는 ‘라스 후계자’가 되기에도 ‘라스’가 되기에도 부적합한 자라고 나를 붙들고 있는 그 무겁고도 끔찍한 손을 어서 놓아달라고 말이다.
분명히 이곳 ‘플루토의 창’에서 나가는 방법이 오로지 라스가 되는 그 방법 하나만이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해본다만, 이데는 더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차라리 신에게 빌라느니,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뿐이라니, 정말 바라는 말은 한 마디도 전달해주지 않는다. ‘라스 후계자’에서 탈락되는 방법도 있을법한데도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왜 말해주지 않는 거야? 이데?
그랬다. 이데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살시도만 하는 비참한 자신의 제자인 나를! 나더러 죽어도 좋다면서, 콱 죽어버리라고 말만 그러는 거였다. 언젠가부터 선녀들로 하여금 날 감시하고 있는 그 눈길을 난 알아챘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결론은 어째서인지 ‘내가 반드시 라스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 후엔 라스가 된 나와 한판 화끈하게 싸워보길 원하는 바람으로 굳건히 이어지고 있었다.
왜 그것이 ‘나’여야만 하는지는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내가 ‘라스’가 된다고 해도 나는 그가 바랄만큼 탐낼 만큼 굉장히 강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아니, 내가 그 정도로 강해진다는 가설은 그것에 대한 확신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데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괴로운 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까? 내가 그의 첫 번째 제자라는 건 그저 말뿐인가? 그런 애정은 배려 같은 것 따윈 예초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그저 ‘필요’에 의한 요구뿐이려나? 이용가치에 대한 것뿐인가? 난 그런 존재였나.
그렇게 이데는 내가 바라는 내가 실천 가능한 ‘세상’으로 가는 방법은 단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절대로!
*
나는 죽고 말았는데, 또 다시 나는 태어나버린 것일까?
이곳에!
이제, 복수할 수 있을까? 백토?
금세 일으킨 림의 몸은, 눈앞의 단풍을 지나치고 그 앞으로 나아간다.
저벅 저벅.
아주 잠시 순간적으로 분노의 빛을 담던 림의 눈이 다시금 차분하게 내려앉으며 눈앞의 그녀에게 애플진에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자고?”
아니,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가-일까? 지금부터?
난 아까 죽었고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의 인연은 몰라. 다시 이렇게 태어난 순간 이어진 게 전생에 대한 기억이라면, 이 손으로 그 ‘전생’에 대한 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리고 또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만 남은 걸까.
근데 그 전에, 침입자 백토를 죽이고도 저 선녀들에겐 또 무슨 볼일이 더 남았지?
내가 자살시도 직후에 백토가 오고 나를 말리고 조금 쉬려나 싶은 타이밍에 선녀들이 들이닥치고 공격하고 정신없이 몰아치고, 그러다보니 잊었던 게 하나 있었다.
이 선녀들은 이데의 부하였다. 그런데 평소 선녀들답지 않은 비효율적이고 느슨한 대처를 곳곳에 보였다. 그랬기에 시간도 질질 끌고 나로 하여금 백토의 생존여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선녀들의 이상한 결계 안에 갇혀 한껏 혼란과 붕괴를 처절할 정도로 경험했다.
이데가 그랬듯, 그녀들 나름대로도 철저히 나를 분석하고 나를 공략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나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일까? 내 정신력이 조금만 더 굳건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까지 견디고 있지는 못했겠지.
“생각보다 화가 안 나는 모양이야? 어차피 죽을 녀석이었지만, 네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서 죽어버린 거나 마찬가지 아냐? 근데 이렇게나 침착하다니. 림. 넌 정말 웃긴 녀석이야. 그동안 그냥 단순히 ‘기사놀이’에 심취해 있었던 거냐?
대체 누굴 구하려고? 그 녀석? 아니면 너 자신? 아니지! 넌 아무 것도 구하지 못했구나. 하하하. 배꼽이 다 빠지겠다. 자살놀이에 이어 기사놀이? 재밌냐? 그게?”
그 옆에서 잠시 머뭇대던 애플티가 끼어들어 애플진의 팔을 잡으며 말을 잇는다.
“진. 그럼 못써. 림도 많이 지쳤다고. 하지만 미안해. 림. 명령이라서.”
“그 말은 ‘이데의 명령’이라는 말입니까? 애플티?”
나는 조금 전의 내 죽음으로 내가 모두 어둠으로 악으로 광기로 분노로 뒤바뀌어 모든 ‘선’을 버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오랜 습관은 아직 여전히 남아서 나를 속박하고 있었다.
과거의 오랜 잔재가 남아 애플티에게 높임말로 대응했다. 림은 선녀들 중 유독 그녀에게만 존중의 뜻을 표했다. 물론 그녀 또한 로봇처럼 프로그램 된 가짜 감정에 불과하겠지만, 그녀는 애플티는 그만큼 평소에 림에게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상냥하고 배려 깊게 자신을 대해주는 편이었었고 그것에서 작은 위로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금 더 살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던 따스한 순간들도 있었으니까. 그런 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애플티의 그런 모습들에서 ‘가에’의 현재모습(림과 동갑, 22세)-림이 평소 상상해왔던 그녀의 미래 가상 성장 모습-을 얼핏 엿보고 만 탓인지도 모른다. 연령은 애플티가 조금 더 많겠지만(추정 20대 중반~후반) 다정한 면이 그 상냥한 분위기가 꽤 닮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 거짓이다. 그것만은 정확히 인식하는 예전과는 다른 ‘림’이었다.
이데의 명령, 이 모든 상황이 전부? 그럼 단순히 ‘침입자’ 하나를 처리한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동안 귀찮게 굴던 ‘나’를 드디어 손대겠다는 심산인가? 이제야 날 포기해주는 건가? 그 무겁고도 끔찍한 손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래. 내가 자살 시도하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으니까. 이제 깔끔하게 죽이겠단 건가? 라스가 되는 것조차 안 되는 ‘나’니까. 더는 ‘라스’가 되어 자신과 한판 붙을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도 없애버린 ‘나’니까. 더는 이용가치가 없고, 이제야 ‘버리는 패’가 되었나. 나는.
근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혹시 내가 ‘라스 후계자’라서, 그만큼 죽이는 데 까다롭다는 건가? 과격한 무력행사로 죽기 직전까지 몰아 붙여도 끈질긴 내 본능이 내 몸을 알아서 되살리는, 라스 후계자만의 이 저주받은 능력을 없앨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면, 이제야 쓸 수 있게 된 건가? 그것을? 이젠 ‘제자’니 그런 것도 다 귀찮고 재미없게 됐으니까, 제일 ‘쉬운 방법’이되 그간 하길 꺼렸던 그 ‘방법’으로 몸소 피를 묻혀가며 죽여주신다는 건가? 나를? 진짜?
라스 후계자인 나의 강한 본능으로 인해 내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기도 전에, 내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키고 서둘러 몸이 저절로 머릴 찾아 움직이기도 전에, 내 머리만을 신속히 회수해 먼 거리로 공간이동 시킨 후 분쇄 및 폭파하겠다는 건가?
*
그때, 난 정말로 죽는 줄만 알았다!
그것은 꽤 예전 일로, 5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정확히 말해 여기 오고 나서 약 2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내 나이 17살로 사춘기가 극에 달해 예민함을 달고 있을 때였고 몹시도 마음속이 유리알 같아서 상처 받기도 쉬운 나이였다. 그리고 이데는 25세로 한창 ‘스승’은 혈기왕성(血氣旺盛)할 때였다.
그 무렵의 이데는 한창 자극적인 상황들을 연출해 내 신체에 대한 반응 활성도를 급격히 높이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던 때였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이웃 라스 후계자들보다 훨씬 높은 실력으로 거듭나게 한다-라고 외치던 자기 혼자 그렇게 믿고 있던 미친 놈 ‘이데’가 있었다.
내가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그 자질을 어떤 방식으로 유용하게 발전시킬 것인가? 등등에 대한 우선적인 판단 따윈 없었다.
단지 자신이 처음으로 생애 최초로 키우는 ‘제자’였으니까 자신의 방식으로 취향으로 나름의 적당한 실전이 섞여 나는 그의 후계자로서 만들어지고 있는 거였다.
내가 이데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다소 폭력적인 게 아니라 완전히 광적인 난폭함이 잔뜩 담긴 성질의 교육이 거부할 수 없는 ‘무력’이란 게 강제적으로 내 안에서 키워지고 있었다.
이데는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만, 스스로는 그걸 잘 모르고 있었다.
그때 이데는 내게 애정을 듬뿍 주고 있다고 스스로만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적절한 강도의 조절 따윈 예초에 모르는 거였다.
가령 어떤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동생을 갖게 되었을 때 그 동생이란 존재가 자신의 새로운 장난감으로 가벼이 취급되어 놀아나듯 나도 그랬던 거 같았다. 그땐 완전히 그의 장난감이나 실험대상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지울 수 있다면 지워내고 싶은 기억이었다. 이런 것은!
그때 시각은, 아직 해도 안 뜬 새까만 새벽녘 3시쯤 되었나? 그 잠에 찌들고 방심하고 태평하고 평온하기 그지없는 휴식의 시간에 이데는 내 방으로 소리 소문도 없이 들이닥쳤고, 곤히 잠자고 있던 나를 습격했다.
부-아왕!
언제 누군가 여길 도착했는지에 대한 감각은 전혀 알 수 없었고, 단지 거대한 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잠자는 내 귓가에도 쩌렁쩌렁 울렸고 그것에 반응했다고 느낀 순간, 나는 이미 내 몸통에서 내 목이 짓눌리듯 과격히 잘려나가고 피가 사방에 온통 시뻘겋게 내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는 몸과 갑작스레 분리된 그 힘찬 반동으로 놀라 두 눈을 뜨자마자 두 눈동자를 어지러이 데굴데굴 정신없이 굴리는 동시에 바닥에서 딸랑 혼자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엄청난 고통이 사정없이 밀려든다! 지독히도 아팠다. 대체 몇 천 번을 허공에 대고 아프다고 외쳐야하나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통증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난 이대로 영영 죽는 줄만 알았다.
“뭐야. 림. 이것도 못 피하면 어떡해? 몸이 너무 둔한 거 아니야?”
이데의 무심하게 펼쳐지는 음성이 내 귓가로 또렷이 들려온다.
나는 그 심각한 고통 속에서도 뭔가 말을 꺼내고자 했으나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욕설도 아니고 붉은 피만 한밥그릇(?) 쏟아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두 눈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 그저 퀭하니 어둠만을 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끄륵. 끄윽.
그것과 함께 왠지 가래 끓는 듯한 묘한 음성이 목과 입의 바람구멍 사이에서 미묘하게 울린다. 그리고 내가 어제 입었던 잠옷을 그대로 입은 어떤 몸뚱이가 목 위의 ‘무언가’가 전혀 없는 체로 내 눈 앞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이건 뭐야···. 뭐냐고! 지금 이런 상황은 대체··· 뭐야?
바로 보였다. 내 목이 잘려나간 부위가 너무도 기괴했다.
평생 해부학 수업은 들은 적도 없고 근처에도 간적이 없었다. 잔인한 스릴러물 영화에도 노출된 적이 없던 내가 생애 최초로 본 잘려나간 내 몸의 일부로 보이는, 바로 내 잘려나간 목의 단면으로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생으로 보여지는 새하얀 뼈와 살덩이와 붉은 핏덩이라니-!
뭐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호러영화였고, 주인공은 나였고, 어쨌든 무섭고 어쩌고 보단 헛웃음이 돌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웃기고 짜증났다. 끔찍했다.
이런 미친! 이런! 젠장! 이런 미친! 미친! 미친! 제기랄!
머릿속으로 벌써 얼마나 많은 욕설과 친구하고 이웃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간 내가 해본 적 없을 그 비명도 내 머릿속 한 가운데서 제멋대로 소프라노 가수처럼 한없이 높고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절대로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그런 소리 없는 경악이 아우성이 말이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악! 으아아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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