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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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데-킨모드 20%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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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넬. 너 또 검술연습 땡땡이 치고.”
그 다음엔 ‘놀고 있는 거냐?’겠지만, 굳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던 황제.
“응. 미안.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좀 봐줘.”
이제 막 정복전쟁을 끝내고 왔으면 얼른 몸이나 씻을 것이지 자기 걱정을 하는 것인가 싶어서 그냥 웃고만 있었던 자신이 ‘황제’에게 반말이나 툭툭 던질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황제 나이 50세에 자신은 겨우 30대 막 접어들었을 뿐이었지만 우린 어쩌다보니 친구가 된 거였다. 그와의 첫 만남이 도서관이라는 장소란 게 참 어이없을 정도였지만, 뭐 그렇게 됐다.
지금 황제는 누워있는 내 옆에 앉아 내가 늘 끼고 다니던 두툼한 책들을 그 소중한 책들을 근심 섞인 손길로 만지작거려보다가, 그는 대뜸 내 머리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는,
“망가진다고. 머릴 그렇게 써대다간.”
그 다음 말은 역시 ‘좀 쉬라고- 특별히 가벼운 메뉴로 짠 검술연습까지 시켜놨더니. 그걸 땡땡이 쳐?’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옛 추억이 떠올라서인지 ‘나르’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던 거였다.
그 원인은 좀처럼 알 수 없지만, 그 ‘기억’이 솟아나자 그 당시의 ‘감정’까지도 선명히 떠올랐고 그런 것들이 지금 자신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 있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그땐 참 행복했었지. 내가 ‘하넬’이었을 때. 그 이름···. 이젠 더는 못 불러주겠지? 그 황제 놈 죽어버려서···.’
아~ 바보 같은 놈. 내가 네 마누라 조심하라고 할 때 진작 알아먹었어야지. 어떻게 황제가 다른 나라 놈들도 아닌 자기 부인한테 암살당하는 거냐? 정복전쟁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걸 다 정리해뒀더군. 그 여자(디미르안 테일러)는.
그래. 정말 머리도 실력도 좋은 여자였지만 역시나 실천력이 극강인 여자였어.
그러고 보면 나도 운이 좋아. 네가 독살 당했다-는 걸 내가 눈치 챈걸 알고서도 그녀는 날 살려줬다고? 아. 그 이유? 그거 참 가관이었어. 넌 아마 모르겠지? 이미 그땐 죽고 없어서?
그게 말야···. 하필이면 그 여자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야. 꽤 예전부터.
실은 그거 나도 알고 있긴 했어. 꽤 예전에. 그래도 알아도 모른 척 했었다고. 그게 단지 너와의 굳은 의리라던가 네 부인이라는 이유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저 여자한테 발목 잡히면 별로겠다고 생각해서였어.
근데 내가 모른 척 하고 있던 게 왠지 그녀에겐 ‘밀당’처럼 느껴져서 나한테 마음이 더 크게 기울었대. 그러다보니까 나하고 친하게 지내는 네 놈 꼴이 갑자기 보기 싫어졌다나?
특히 저 멀리 연무장 근처 나무그늘로 향할 때는 둘이서 뭐하나 싶어서 정말 짜증났다고 하더라고. 그러다가 어느 날 나무그늘 아래서 내 머릴 가볍게 툭툭 치고 있던 너를 본 어떤 하녀가 그걸 그녀에게 죄다 꼰질러 버리는 바람에.
널 죽여 버리기로 결심을 굳혔대.
어이없지? 이런 거? 나도 그래. 너랑 내가 뭔 썸띵(something)이라고 벌였다면 모를까. 후훗.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여튼 그래서 ‘질투’에 눈이 뒤집힌 무리들이 무섭단 거지.
처음엔 정복전쟁 후에 있을 황제의 순례 길에 폭탄을 가진 강도 무리에게 마차 습격이라도 일으켜서 널 적당히 다치게 해서 먼 곳에 요양 보내 버리려고 했는데. 그 일로 계획이 갑자기 변경됐고 결국 네가 죽어버리게 된 셈이지.
그 여자 말이야. 네가 황제인데다 자기 남편이라도 그런 거 더는 상관없었대. 원래 나이도 자신보다 많았던 데다 보통 때도 세대차이도 크게 느꼈다니까.
솔직히 너 정말 싫어했대. 어떤 말을 해도 그냥 실실 웃어대는 것도 그렇고.
그냥 황제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이 좋기도 하고 금은보화도 만질 수 있기도 하고, 게다가 황제에게 두 번째 황후로 시집가면 수많은 하녀들을 발아래 둘 생각에 들떴을 뿐이라던가? 첫 번째 황후는 이미 죽었으니까 바로 1인자가 되면 근사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래서 네가 하자는 대로 그냥 좋은 척 얌전떨며 고분고분했다고 하던데? 그냥 너는 자기보다 어린 그녀가 웃어주면 자신을 정말 좋아하는 줄 착각해버리고 마는 그런 바보 남편이라면서. 그런 주제에 둘 사이에 자식 하나 없었고, 뭐 결론은 그냥 다 귀찮았대.
네가 살아있는 거 보는 것도 이제 지쳤다···던가?
솔직히 ‘지쳤다.’라는 그 의미는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잘 참았네.’라고 해줬어. 나는. 그녀에게.
이젠 같은 이불 덮는 사이가 되고 하니까. 그녀에게 독살당할 수도 있다 보니까. 왠지 나도 두려워졌던 모양이야. 한 여자한테 잘해주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니 나도 웃겼어.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래. 맞아. 거기구나. 음.
그녀가 너랑 결혼하고 약 1년 후쯤? 어쩌다보니 그때쯤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자주 나를 보다보니까 좋아졌단 건 아니고···,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그냥 호감이 들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주 식사자리를 마련했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면 그녀와 나는 나이차도 3~4살 쯤 밖에 안 났지. 그땐 정말 감쪽같이 내가 오빠인 줄 알았다고. 근데 그러던 그녀가 나중에 자신의 나이조차도 속였다는 말을 슬쩍 꺼냈을 땐 속으론 조금 충격이긴 했어도 겉으론 전혀 충격인 척 안 했어.
그것에 왜냐고 묻는다면, 난 너와 다르기 때문이랄까?
나랑 동갑이라도 3~4살쯤 어려 보인다는 소릴 들으면 좋아하거든. 보통. 여자들은.
어쨌거나, 넌 그런 거 몰랐겠지만. 뭐 어차피 넌 죽었으니까 몰라도 돼.
‘지금. 이 말···. 꽤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다 내가 잘나서 생긴 일인 걸 어떡하냐···.’
그 후로 뭔가 개운한 듯이 정말 상쾌하게 미소 짓고 있던 나르, 물론 친구가 황제였긴 했지만, 그런 옛날이야기에 그다지 미련은 없어 보였다.
그냥 그 바보 녀석이 암살당했다는 게 조금 애석했을 뿐이라고 할까? 여자 마음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 정도는, 나르의 마음속에서 소중한 친구 하나를 잃어서 꽤 슬펐던 기억이 기운 없이 떠돌고 있었다.
‘응. 네가 살아있을 때 그렇게 널 칭송하던 신하들이, 이젠 날 칭송해줬어.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잘 대해주던데?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황제를 만났다면서 기뻐하던데? 이제는 정말 평화로운 태평성대가 올 거라면서 정말 감격해하면서 신하들이 징그럽게 내 손등에 볼도 부비고 드럽게 뽀뽀도 하고.’
황제가 죽고 자신이 다른 후보들을 제쳐두고 황제자리에 앉혀진 뒤로도 줄곧 외로웠었다. 그 이유는 역시 그 ‘황후’란 여자가 너무도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서류를 건네다가 실수로 내 손과 어떤 대신의 손이 서로 부딪혔는데, 마침 그때 그 대신을 몰래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려던 황후의 어떤 계획을, 내가 미리 측근으로 몰래 심어둔 어떤 하녀에게서 들었을 땐, 정말 기가 찼었다.
나중엔 점점 내게로 다가오는 다수의 인간들을 질투하고 어느덧 습관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런 질투로 미쳐가던 황후를 차마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래. 그러니까 미련이란 게 없어. 난. 이미 복수 해줬으니까. 그래. 네 짐작대로야. 가장 날 사랑해주던 그녀를 내 손으로···. 변명이라면 해줄게. 네가 사랑했던 나라를 망치려던 여자였으니까 그랬어. 나도 백성들은 사랑하니까. 그리고 몰랐어.
당신이 진짜 내 아버지였다···고? 아. 놀랐지. 당신 얼굴이랑 내 얼굴 전혀 안 닮았거든. 뒷조사하던 녀석들도 다들 놀랐다고. 엄청. 그 이유라면 당당히 말해줄 수 있어. 우리 어머니가 천사레벨이었다더군. 성격은 그저 그랬는데, 인간은 가질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더군.
응. 맞아. 나 엄마 얼굴을 본 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아. 하하. 또 나 혼자 자화자찬인가. 큭큭. 보다시피 난 잘 지내. 이데라는 이 장난감은 말야. 참 애가··· 무뎌. 그래서 재밌어.’
그렇게 잠시 나르는 애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아. 미안. 몰입하다보니까. 근데- 그게 뭐가 어때서?”
“······.”
아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나르’의 기색을 살피던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에 세심히 나를 살펴보던 아로는 어느 샌가 내 한쪽 팔을 잡고 살짝 흔들며 말을 잇고 있었고,
“뭐야. 그런 걸로 화난 거야? 말이 없네? 하지만 그거 좋지 않아? 얼마나 가치가 있든 간에, 국보, 유물, 명품 그런 거 다 ‘물건’으로 불린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도 제대로 된 ‘물건’이 돼봐.”
내가 아무리 ‘나르’의 기색을 살폈어도 그렇지, 또 아로에게 한쪽 팔을 내주고 말다니, 왠지 이러고 있는 자신의 반응이 평소보다 뭔가 약간 정도 느리다고 할까?
그런 약간의 의구심을 간직한 채 난 서둘러 내 팔을 아로에게서 도로 빼내 와선 ‘하지 마!’라고 눈빛으로 투덜거렸다.
지금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미안해하지도 않고 있는 아로는 바로 자기 할 말에 집중하고서,
“자. 이제부터 나하고 손만 잡으면 널 정말 좋은 ‘물건’으로 만들어줄게. 아.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돈 이야기라면 됐어. 난 이래봬도 돈 많은 부잣집 도련님이거든. 당최 돈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난.”
이데의 그 말에 피식 하고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 건 나르였고,
-‘아. 그래. 이데 너 그렇게 돈이 많아? 그렇담, 얼른 나부터 알록달록 아이스크림 산에 풀어줘 봐. 맘껏 나뒹굴면서 먹어보게.’
‘···말이 그렇단 거지. 나르. 칫.’
이데가 ‘돈 이야긴 됐다.’라고 했음에도 단번에 막혀 버려야할 말을 ‘아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는 아직도 미리 준비해둔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듯이.
“흐음. 그래? 그래도 이런 델 알짱거린다면··· 정작 손에 넣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거겠지? 가령. 어리고 예쁜 여자, 그것도 노래와 춤과 미소가 특기인 얼굴 몸매 예술인 여자아이돌이라든가? 그걸 손에 넣길 원한다면 너도 어서 나를 갖고 싶어해야할걸? 어때? 좋지 이런 거? 이거라면 홀랑 넘어 갔으려나? 너도?”
평소라면 이데 역시도 ‘정말 그런 게 가능해?’라고 아로에게 매달리며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그것은 거짓된 비현실적인 제안, 그럼에도 현실 속에 아주 극소수만이 누릴법한 그런 환상처럼 어쩌면 존재할 지도 모를 그런 제안이 이데를 향해 새초롬하게 유혹어린 손짓을 보내오고 있었던 거다.
진짜 이거야말로 엄청난 제안이로다~ 싶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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