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잠시 그에게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줘.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
“음?”
그 순간, 단풍은 이제야 화화의 마더시스템에서 해방된 듯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양손을 멍하니 뻗고 있던 자신의 두 손을 가슴께로 고이 모으며, 눈앞의 광경을 점점 또렷이 인식하기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 눈가리개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눈이 점점 당혹으로 얼룩지고 있었음을 림도 분명히 느끼고도 남았을 정도로, 그녀는 꽤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앗! 어떡해!”
얼른 림에게로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가던 단풍, 그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림? 피 나와요! 으왓! 아프겠다!”
헌데, 자신이 뭘 했는지는 모르고 있던 그녀였다.
그렇게 울상을 지을 것만 같은 그녀의 입매는 좀처럼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는 방법이 없나? 나는 왜 이렇게나 나약한 거지?
림의 심장이 미칠 듯이 박동하며 불길함을 예견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화화의 통제를 받는 ‘단풍’의 모습, 하지만 림 그가 했던 생각을 화화 역시도 일찌감치 하고 있었다니, 예상도 못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 일이 엄청난 충격으로 와 닿던 그였다.
갑작스레 끊긴 에너지 전달 호스, 림과 백토의 연결고리도 끊어져버린 셈이었다. 이로써 백토와의 모든 관계도 다 단절되어버린 듯 여겨졌다.
그런 생각이 한 차례 몰아치니 한때 방어 및 치유 본능을 억눌러가며 에너지를 전달했던 것도 부질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그리 서서히 무너져간 마음 사이로 다시금 본능의 스위치가 저절로 켜진다.
곧 흙바닥에 누워있는 그의 온몸에 반투명의 은은한 파란 빛 반구형 막이 겨우 둘러쳐지고 그 안전해진 내부에서는 자그마한 새하얀 빛 알갱이들이 그의 몸 주변에 나타나 치유활동을 간간히 벌이고 있었다.
순간, 림의 두 눈이 크게 치떠진다.
그럼 백토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 그 누구도 녀석을 도와줄 수 없나?
이젠 ‘여의주의 무’조차 더는 백토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그런 생각들, 머지않아 백토가 겪게 될 미래의 암담함에 대한 충격에 휩싸여 림은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채 마음이 다급하고도 숨 막히게 침식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몸이 지쳤다고 한다. 더는 꿈쩍도 할 수도 없단다.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버리기도 했고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새하얀 빛 알갱이가 나부끼며 치유되고 있다곤 해도 당장 이 공간을 박차고 나가 백토에게로 갈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선녀를 이길 자신조차 없었던 주제에. 왜 발악했던 걸까.
부질없는 답답한 마음을 무거운 한숨을 껴안은 채 림은 이제 시선을 위로 띄워 저 높은 하늘에 떠 있는 화화를 바라본다.
그녀의 손 위에서 척척 완성되어가고 있는 빌딩, 곧 막바지인 모양이었다.
그 거대한 자태, 몹시도 무시무시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걸 보고 있자니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벌일 엄청난 사태를 생각하며, 불안해하며,
머지않아··· 백토는 죽어버리는 건가.
머릿속 스트레스가 뒤죽박죽으로 요동친다.
그 사이로, 그 녀석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자살시도에 기울었던 그 마음이 백토와 만나 아주 잠시 허튼 생각을 꿈꾸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백토는 웃고 있었다.
붓으로 휘갈긴 누군가의 글씨를 그림을 보면서 매료된 듯 좋아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망원경을 달라고 하더니 그걸 통해 등불을 구경하던 태평한 녀석의 아무런 걱정도 없이 흐뭇해하는 모습이라니, 조금은 녀석이 부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자살시도를 하고나서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아 늘 실패로 돌아간 자신을 위로하며 홀로 듣던 그 궁중음악소리를 이번엔 녀석과 함께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라는 것은 의외로 쓸데없는 감각을 발생시키는 듯했다. 영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자신이 부셔버린 방문이 저절로 복구되어가는 것에 방이 한없이 넓어져 가고 있는 것들에 너무도 신기해하며 놀라고, 거기다 인간 상식에선 이미 죽어버렸을 베토벤을 본 탓에 왠지 넋이 나간 듯 멍청하게 변해버리던 바보 같던 그 모습을 한 녀석의 얼굴이라니, 그걸 보며 속으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내 얼굴을 성형이네 어쩌네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던 어처구니없던 그 모습이라니, 물론 성형으로 만든 건 아니지만 ‘라스’가 되기 위한 훈련 속에서 어찌하다보니 내가 이룩하고자 했던 그 조화로움이란 요소가 한층 성숙되었던 거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내 새 얼굴과 새 몸이지만 역시 그 녀석은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저 녀석처럼 아무런 근심도 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걸 꿈꾸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안 될 게 분명하다는 말 말고, 조금은 내가 바라는 것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에 걸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렇게 그 한 순간은 희망을 바라며 행복했었는지도 모른다.
백토가 죽고, 또 하루하루를 그 정답이 없는 고뇌와 절망 속을 헤매는 그런 답답한 일상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거겠지? 그렇게 거북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또 지긋지긋한 일상이 되풀이 되려나? 여전히 나는 홀로 이곳에서···! 대체 언제까지?
이곳, 라스의 섬, 통상 ‘플루토(Pluto)의 창(窓:창문)’이라 불린다만 다른 말로 ‘지구의 중심’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지구의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이 ‘라스’를 모르고 있듯, 이곳도 당연히 알 리가 없는 거다.
그만큼 이곳은 비밀스러운 곳이며 아무나 외부에선 절대로 침입할 수도 없는 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쩔 때는 이곳 주변이 마치 극 지대라도 되는 듯 차가운 냉기가 흐를 듯한 파란 사파이어처럼 얼어붙어 있었고, 어쩔 때는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화산지대 또는 오아시스 하나 없는 모래뿐인 사막처럼 건조하기 이를 때 없었고, 어쩔 때는 기암절벽(奇巖絶壁)들로 그리고 길이 없는 첩첩산중(疊疊山中)의 깊은 계곡으로 또한 축축하고 눅눅한 열대 밀림지대의 독충과 독성식물 등 식인동물들이 판치는 곳, 어쩔 때는 바다 깊숙한 곳 어딘가로 통하며 세상의 ‘인간’들을 철저히 배척하면서도 분명히 여기 존재하고 있었던 거였다.
마치 이곳 ‘플루토의 창’은 그 범상치 않은 ‘자연광경’을 포함하고 있어 세계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아무나 찾을 수 없는 그 어떤 곳에 해당했다.
그래서 림은 이곳을 파괴하는 상상을 해왔다.
그것을 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더해졌고, 자기만족에라도 빠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파괴하는 일은 이곳을 나가는 일조차 굉장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차라리 내가 죽어서 ‘세상’에 나가는 일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해왔던 거였다.
!
···죽는다는 게 두렵지 않을 리가 없잖아!
순간, 어느 날 고민 끝에 자살을 선택하고 자신이 죽는다는 그 두려움까지도 버리면서 라스의 과제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과 이제 더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누군가도 없이 주변은 이미 적뿐이라 나약하기에 그저 죽음밖에 남지 않았던 ‘백토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진다.
그 생각과 함께 림의 두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그를 향한 연민(憐憫) 따위가 아니라 동조(同調)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치유의 효력을 보였던 모양인지, 림의 오른쪽 손이 겨우 짜낸 힘으로 위로 들어 올려졌고 그 손가락이 이제 느릿하게 허공을 손짓해나간다.
그것은 마치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듯한 허망한 손짓과 닮아 있었다.
그때, 그의 입이 열리고 조그마한 그의 바람이 허공에 작게 속삭이듯 쏟아졌다.
“도와줘. 누가-. 저 녀석 좀. 도와줘.”
그것은 마치 울먹이는 듯한 말투였다.
허나 눈물은 없었다. 눈물은, 없을 것이다. ‘운다’는 행위야 말로 백토를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뿐일 테니까 말이다.
휘~~~익!
그것과 동시에, 저 높은 허공, 하늘 위에선 화화 선녀가 30층 대형 빌딩을 가뿐한 듯이 양 손으로 척 들어 올린 채, 백토가 있을 무너져 내린 지붕(아래, 대청마루)을 향해 정확히 그 과녁을 노려보며 조금 가볍게 밀어버린다는 느낌으로 아래를 향해 그것을 내던졌다.
스-와악!
마치 배구공으로 스매시(smash)를 때리는 듯한, 그냥 떨어져도 충분히 가속되어 그 아래 있을 생명체의 죽음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확실할 것인데도 엄청난 파워까지 더해져 가속된 상태로 날아가는 대형 빌딩의 자태라니, 저것은 절대로 피하지 못한다.
그런 느낌이 확 들 정도로 흐트러짐 없는 정밀한 조준이었다.
그대로 떨어지다간 땅속까지도 꿰뚫어버릴 기세랄까? 그런 심각함마저도 감도는 육중한 파워가 깃든 화화 선녀의 힘이었다.
콰콰카카칵!
공기가 찢어질 듯 거칠게 요동치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그대로 ‘백토’라는 그 목표물을 향해 확인사살을 겸하여 허공을 급격하게 내리 찍혀가는 빌딩 한 채!
*
근데, 그때의 그 시간은 몹시도 느릿하게 흐르는 것만 같았고, 쿵쾅쿵쾅 심장을 들썩 대며 나아가는 빌딩 한 채가 ‘백토’가 있을 것이라 판단되는 무너져 내린 지붕(아래, 대청마루)의 부근에 닿기 직전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각!
그곳엔 ‘여의주의 무’로 림이 보내오던 에너지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던 ‘백토’가 있었다만, 그의 모습은 그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시시각각의 공포에 너무도 떨었던 것인지 미쳐버리기 직전의 모습으로 불안해보였다.
마치 그 어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듯 안색이 몹시 창백해져 있는 듯 보였다.
백토의 한껏 웅크려 작게 만든 몸과 그 앞에 모아 쥔 주먹을 치아로 아무렇게나 물어뜯었다가 다시금 힘없이 놓고는 부들부들 떨다가 또 다시 그 주먹에 치아를 갖다 대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세게 물어뜯은 것은 아니었으나 자주 반복되다보니 손등이 조금씩 찢어져 핏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치아에도 붉은 빛이 묻혀 얼룩져 있었다.
무너져 내린 지붕과 그 집의 잔해들이 어둑한 그늘을 만들어서 그 부근이 어둡게 느껴진 것도 있었지만, 여의주 안도 왠지 모를 까만 안개로 가득 들어차서는 그것이 백토의 온몸을 절반이나 넘게 뒤덮고 있었다.
이제, 화화가 내던진 빌딩 한 채가 막 그곳을 침입자인 백토를 완전히 죽이기 위해 닥쳐드는 카운트다운(count-down)이 얼마 남지 않은 ‘직전’의 시간으로 바짝 다가들고 있었다.
그 시각은 림이 막연히 ‘도움’을 구하는 요청을 한 직후쯤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10초. 9초. 8초···.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그때, 홀연히 그곳(림의 집안=백토의 옆)에 나타난 것은, 꽤 넓은 공간이 살포시 일그러진 그곳에 사그락대며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투명하고 새하얀 버드나무 잎이 잔뜩 달린 나무줄기가 와락 나타났고 그것을 통과하며 정체를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동양계 용의 머리였고 그 거대한 입이었다.
쩌~억.
갑작스레 나타난 용, 그것의 입이 단숨에 활짝 열린 순간 금세 백토가 든 여의주를 한 입에 꿀꺽 먹힌다는 느낌으로, 그 여의주-백토가 서 있어도 충분한 공간-를 한 입에 덥석 물고 처음 등장했던 모습처럼 되감기를 했다.
용의 머리가 재빨리 몸통이 있을 그 안쪽 공간으로 쏙 들어가고, 투명하고 새하얀 버드나무 잎이 잔뜩 달린 나무줄기 커튼이 바람에 사라락 흔들리는 듯하며 용의 모습을 완전히 감춘 다음, 한때 일그러졌던 넓은 공간의 형태를 다시 평범하게 밋밋하게 만들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용의 목에 매달려 있는 하늘 풍경(맑은 하늘에 구름이 둥실 떠 있는)이 담긴 하늘색 스카프를 묶고 있다는 점이랄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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