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부와 꽃 한 송이.*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그림: 화화 (소녀)
=
물론 또 다른 케이스라면 몇 개가 더 있었다.
한 녀석에겐 먹을 걸 안 주고 굶겨봤다던가, 또는 적당한 폭력으로 길들여놨다던가, 또는 어딘가 감옥과 비슷한 데다 가둬놓고 이곳에 대한 사항을 적은 메모와 함께 적당한 간식을 건네면서 한 며칠간 자유를 박탈한다던가 그랬고, 마지막으로 어떤 녀석에겐 그냥 그의 몸을 잘 묶고 그의 입도 테이프로 잘 막고 잘 앉혀놓고는 상세하게 지금 그 녀석의 처지를 조목조목 알려줬다고 했다.
이데는 그 마지막 케이스를 약간 참고한데다 약간의 진정제와 수면제 응용을 곁들여 해봤던 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적당히 겁먹을 협박까지 한 셈이었다.
-“믿어주세요! 이데씨! 저 여기 짱 박혀 있을게요! 진짜예요! 밖에 나가거나 해서 절대로 귀찮게 안 할게요!”
림의 그 말은 확실히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역시 어느 정도 상황이 좋아진다면 또 도망갈 궁리를 한다는 게 눈에 빤히 보인다고나 할까.
기선제압을 나서면 나설수록 자신이 손해(왜 남자애를 건드려야 하는 건데? 왜 내가? 내 정체성에 엿 먹일 짓을 스스로 해야 하지?)가 되고 있다고나 할지, 이런 상황이 전혀 안 익숙해서는 이데는 꽤 곤란했던 거였다.
너하고 있으면 왜 이렇게 설명해야할 게 많은 건지.
진짜.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첫 제자로 데려온 녀석이 저런 모양새라니, 다른 녀석들도 늘 저런 식으로 겪고 있다-라는 것부터, 이데로선 그게 뭔가 제대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은 할 만큼 했는데, 왜 순순히 ‘사부’로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는 것인지 참으로 이상한 거였다.
보통 이 동네에선 ‘신이 되어 볼래?’하고 묻는 게 ‘라스’가 된 자가 항상 후계자가 될 녀석에게 하는 통상적인 말이건만! 그리고 저 녀석은 이미 나(=라스)의 그 ‘질문’에 림(=후계자)은 합당한 ‘답’을 했었다.
그때! 분명히! 난 다 듣고 있었다! 그 녀석의 그 말을!
-"나야. 당연히. 강한 ‘신’이 되겠지. 만약에 정말로 이 세상에 요술램프란 게 있어서 나보고 신이 되어도 괜찮다고 한다면, 이런 ‘나’라도 문제없다고 해준다면 내가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중략···)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내가 되는 그 신은, 돈이나 권력 같은 거 필요 없어도 상관없을지도 몰라.
내가 만들어낸 그 신이 아빠가 생각하던 거 보다 훨씬 더 굉장히 멋질 거야. 분명히. 난 좋은 신이 되고 말겠지. 누구든지 모두 다 같은 편이 된다는 건, 그런 게 가능할까? 나···라면? 그게 가능해질까? 아···. 어쩌면.”
씨이익.
그렇게 내 ‘제자’가 된다는 것에 너무도 기뻐서 미소까지 지어놓고는!
그 다음, 림 스스로 밝히는 정확한 자신의 이름(=재해님)까지 다 말해준 데다가,
-“내 이름은··· ‘재해님’이다. 이제 알겠지.”
-“응. 와아. 좋은 이름이네. 그거라면 확실히 웃을 수 없을~까~나? 그럼 재해님. 이제 ‘신’이 되어 볼래?”
그런 후엔, 다시 ‘신이 되어 볼래?’라는 ‘질문’을 재차 한 다음에, 우리의 계약 성립에 대한 뜻 깊은 의미로 내 ‘뺏지’를 그 녀석의 이마에 찍는 것까지 했는데도, 왜 우리 둘 사이에 껄쩍지근한 ‘오해’란 게 생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인 이데였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다른 녀석들이 그 말을 겉으로 중얼거리듯 나도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릴 줄은 몰랐단 말이다.
그냥 림이 순순히 내게 ‘사부’라고 해준다면, ‘너라면 문제없어. 라스가 될 수 있어.’라고 쉽게 넘어가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 다른 녀석들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거였다. 나는.
“믿어주세요! 이데씨! 저 여기 짱 박혀 있을게요! 진짜예요! 밖에 나가거나 해서 절대로 귀찮게 안 할게요!”
지금, 이데는 림이 저리도 간절히 말해왔건만, 역시 한 번 더 협박의 단어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네 몸에 칩 박아놨어. 도망가면 좌표가 뜨겠지. 물론 무해한 거야. 폭탄장치는 안 달았어. 림. 그럼 난 간다.”
그렇게 이데는 도망가 버렸다. 현관문은 이데로 인해 세차게 벌컥 열렸다가 바로 닫히고, 문이 잠기는 전자음이 삐리릭 거리며 철컥 닫히고, 이내 그 공간은 림 혼자만의 차지가 되었다.
림은 순간, 안 당했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몸에 칩이 박혔다는 말에 다시 찜찜해졌다. 소나 개에게나 박는 게 ‘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런 신세인가 싶어서 서글퍼 진 것이었다.
게다가 왠지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버리는 듯했다.
“후으. ‘폭탄장치’는 안 단 건가···.”
굉장히 끔찍한 말을 하고 있었다. 저 이데란 사람은!
*
다시 ‘시간’은 림의 나이 10세 무렵으로 돌아갔다.
이틀 전, 초고층 빌딩에서 일어난 사건의 유력한 범인으로, 유명 연예인 톱가수란 여자가 뉴스에 나왔고, 그녀는 뉴스에서 ‘예언’이라 하며 수수께끼의 단어들을 온 세상에 퍼뜨렸다.
-‘로. 포. 대. 카. 속. 다. 약. 또. 스. 뚜. 라.’ -
이것을 이데와 한 패였던, 페이와 마린과 화화가 어느 정도 풀어서,
-(라). 뚜. (스). 또. (약). 다. (속). 카. (대). 포. (로).-
그것이 ‘라스, 약속대로’라는 ‘의미’로 대강 파악했지만, 그것이 ‘완전’한 형태는 아닌 터라, 다들 그 해결에 ‘화화’가 전격적으로 나서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일축하고 나섰던 거였다.
물론 그것은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기분상의 이유였다.
그들은 지금 가야할 ‘장소’가 좀 더 숙연하고 조용한 곳이었으니까-라고 화화를 그리 생각했었다.
*
지금, 가로등과 벤치가 곳곳에 놓여있는 어느 병원의 아담한 정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들 중, 한 꼬맹이, 다름 아닌 10세 이데가 손을 번쩍 들고는,
“나, 잠시 실례!”
라고 말하고는 병원 건물이 있는 방향 쪽을 향해 다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미리 빌려놓은 그 병실 200호실에 도착했다.
거기엔 6개의 침대에 5명의 노인 환자가 관절이 안 좋아 이곳에 입원해서 한때는 끙끙 앓고 누워 있었지만 지금은 다들 TV 방송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중에 단 하나의 침대만은 그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게다가 거긴 일찌감치 두툼한 커튼이 침대를 빙 둘러싸고 펼쳐져 있었고, 지금 막 들러온 이데가 커튼을 슬쩍 들어 올린 다음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던 거다.
그러기를 5분 후, 잠시 고요했다가 은은한 빛이 어떤 그림자를 선명히 그리는데 그 모습이 우연히도 커튼의 장막 위에 비쳐 들었고, 그 모습은 어떤 작은 것이 점점 큰 것으로 변해가는 형태로 보였던 거다.
그 직후, 돌연 그 침대의 ‘커튼’이 활짝 빠르게 걷혔다.
펄럭.
마침 그때는 TV에서 꽤나 시청률이 높은 인기 드라마 연속극의 방영중이라 아무도 그 커튼이 쳐진 침대에서 누가 들어갔다가 누가 나오든지 그런 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때, 그 드라마 속 주인공 여자가 막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게 명대사인 것인지 다들 다음 대사가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거였다.
“당, 당신! 어쩜 그렇게. 나를 감쪽같이 속였던 거죠? 네? 대체 언제부터 ‘변신’의 귀재였던 거죠?”
역시나 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유독 TV와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오직 한 백발의 노인만이, 자신과는 거리가 먼 그 ‘침대’에서 벌어졌던 모습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서 지금 입까지 쩌억 크게 벌린 채로, 이미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가버린 이데의 뒷모습을 끝까지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 후로, 겨우 힘을 짜내어 몇 마디 했지만, 때마침 TV속 인기 연속극에서 갑작스레 많은 등장인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내는 그런 대화소리에 밀려서, 그 ‘말’을 들은 자는 이곳에 본인 외엔 없는 것으로···.
“들어간 건 분명히 어린애였는데···! 나온 건!”
*
힘차게 달려가고 있던 이데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고, 그것을 확인 한 후 장소를 다시 옮기던 그였다. 머지않아 그들은 다시 만났고,
“여어. 이데.”
하며 페이가 반겨주고 있는 그는, 어느새 말끔한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물론 더 이상 10세 꼬맹이의 모습이 아니라, 18세의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당당히 걸어갔다. 앞을 향해서.
그 누구하나 튀지 않고 무난함이 모토로, 아끼던 헤드셋을 종이가방에 넣어버린 바가지 머리의 페이 18세도, 깔끔하게 머리를 올린 한때 포니테일의 마린 16세도, 단정히 긴 머리를 늘어뜨린 화화 15세도, 이데 18세, 넷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온통 무채색 계열로 그나마 격식을 차린 정장 옷을 입고, 페이가 방금 이곳에서 산 국화와 백합으로 포장한 여러 개의 꽃다발을 다른 이들에게 건네고 있었다.
“난 ‘한 송이’면 돼.”
라는 이데는 이것저것 산 것들 중에, 새하얀 국화꽃이 한 송이만 투명비닐로 포장된 꽃다발을 선택했고, 마린도 손을 뻗어 5~6송이가 모여 있는 국화꽃다발을 채어간다. 그 다음에 화화는 백합 꽃다발을, 마지막으로 남은 백합 꽃 한 송이를 페이가 자신의 손으로 거둬갔다.
고결한 느낌이 가득한 그 꽃들은 맑은 유리처럼 투명한 비닐에 갇히고 검은 리본에 허리가 묶여 곧 돌아가야 할 제 위치로 갈 예정이었다.
지금, 그들의 목적지는 바로 향냄새가 가득한 어느 ‘장례식장’이었다.
이틀 전, 초고층 빌딩에서 벌어진 그 사건으로 죽은 사망자들은 근처 병원으로 뿔뿔이 흩어져 장례를 치르고 있었는데, 그나마 이곳이 한산한 곳이었지만, 늘 장례식장의 풍경이 으레 그렇듯 어딘가 잔잔한 어둠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애통함, 비통함, 억울함, 참담함, 절망, 고독, 참담, 통곡, 혼란, 외로움, 슬픔, 가슴 아픔, 한숨, 허탈, 고뇌, 처절, 혼잡, 번뇌, 충격, 희생, 당혹, 눈물 등등의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들이 모두 오롯이 범벅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다가온 비보 한 통, 누군가 틀어놓은 TV에서 중환자실에 있던 최 모 씨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35명 사망에 1명 부상이 아니라, 36명 사망인가.”
누군가의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장례식장이란 공간에 있다 보니, 돌연 이런저런 마음의 부딪힘이 일어나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다보니까, 다른 것에 에너지를 쏟게 되었던 화화였다.
드디어 그걸 풀어내고 말았다. 이곳에 파묻힌 여러 가지 가슴 먹먹한 그 감정에서 도망치려다보니 자연히 ‘그 수수께끼’를 자신의 머릿속으로 끌고 와버리고 만 거였다.
아까 풀었던 ‘결론’으로 알아낸 것은 ‘라스. 약속대로.’였고, 이제 그 외의 나머지 단어들을 쫙 늘어뜨려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뚜. 또. 다. 카. 포.-
예전에 음악 수업 시간에 배운 용어들이 저절로 떠올라 또 풀어내보면, ‘뚜또’와 ‘다카포’는 둘 다 이탈리아어였다.
앞의 ‘뚜또’는 ‘tutto’니까, 모든 것(=all)을 의미했고, 뒤의 ‘다 카포’는 ‘da capo’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의미했다.
그대로 열거해보면, 최종적으로 완전한 의미는,
-라스. 약속대로. 모든 것.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이제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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