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마이크, 도망가면 안 돼.*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그림: 마린.
=
“저 좀 나갈게요. 야. 그 팻말 좀 치우죠? 길이 안 보이는데.”
처음엔 이토록 얌전하게 시작했던 이데, 허나 말만 그럴 뿐, 이미 눈앞의 교복입고 앉아있던 여자 엉덩이를 툭툭 발로 차대며 그랬다는 게 문제! 이게 바로 ‘시비’였던 거다!
그 중에 얌전하고 내성적이나 가수를 좋아했던 두 명의 여고생은 그저 눈치만 보고는 가만히 있었고, 그녀들과 같이 왔던 한 여고생만이 앞뒤 재는 거 없이 당찬 용기를 내어 이데를 향해 곧바로 나서서는,
“까악. 너 뭐야! 변태놈! 저리가! 이거 우리 오빠 팻말이란 말이야! 네가 뭔데 치우라 마라야? 날 밟고 가. 차라리 날···”
허나, 그런 이데거나 말거나 뭔가 소란이 시작됐고, 아주 잠깐의 인내 타임을 가지며 ‘시간아 어서 가렴’이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만 역시!
“좋아. 밟자. 한 번 고이 즈려 밟혀봐! ‘경험자’가 갑이지!”
자신이 한 것치고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느릿하게 발이 팻말을 향해 나아가고, 눈앞의 여고생들은 기겁해서 더욱 더 시끄러운 하이 톤으로 돼지가 달려올 듯이 하늘 높이 외쳐대며,
“까아아악! 안 돼에에에!!”
갑작스레 카메라맨의 카메라가 이쪽을 향하는 듯해서, 이데는 이틈을 노리며 재빨리 다른 녀석들을 하나 둘 셋 넷 줄줄이 사탕들을 우다다닷 밀쳐내고 가수대기실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내고 힘껏 달려 나갔다.
역시 조용조용히 한 걸음씩 내딛기 보다는 이렇게 단숨에 돌파해 나가는 편이 더 통쾌했던 그였다. 뭐 모든 것이 계획대로란 것은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랬던 거였지만. 어쨌든 성공이란 게 결과의 전부니까.
이데가 떠나버린 이곳에서는 얼마 전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짧은 스포츠형 머리의 리포터가 인터뷰를 요청했고, 곧 시야에 잡힌 어떤 여고생은 굉장히 기쁜 표정으로 그에 응했다. 그 덕에 리포터의 마이크는 그 여고생 차지가 되어 버렸고,
“SSS 오빠. 나 알지? 맨날 오빠네 대기실에 쳐들어가던 애! 내가 준 그 TV는 잘 돌아가고 있지? 언제든 말해. 뭐가 필요한지 내 핸폰 번호로···, 근데 요즘 오빠 핸폰에 웬 여자이름 등록됐던데? 그 여자들 뭐야? 아. 미안. 협박 아니야. 또 핸폰 번호 바꾸려는 거 아니지? 그런데 그래도 소용없단 거 지금 말해줄게. 난 어떻게든 알아내는 방법이 있거든. 데헷.”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이크를 잃고 만 리포터의 권한은 점점 사라진 채, 단지 ‘마이크’를 쫓고 있었다. 워낙에 여기 있는 중학생부터 고교생 여러분들이 서로 말하겠다고 아우성을 쳐대는 통에, 마이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마구 옮겨 다니고 있었다.
“이번엔 나란 말이야! 이 년아. 넌 절루 찌그러져 있어! 내 거라고!”
“시끄러! 내가 먼저야! 너야말로 순번을 지키라고! 세상의 여드름을 다 가진 환자처럼 생겨가지고! 못생긴 게 어디서 난린데!”
“넌 이티 외계인이랑 갑오징어가 친구하자는데? 너야말로 그 얼굴 뭐냐? 오늘도 몇 번 밟히고 왔냐? 트럭에?”
흡사 바통 터치 릴레이 경주의 선수가 된 듯했다. 허나 그 바통은 자신에게 전해질 여유가 없던 모양으로 또 붐비는 인파를 뚫고 또 열심히 뚫고서 고독하게 움직이고야 마는 리포터였다. 역시나 바통을 주지 않아 슬퍼진 짐승이 되어버린 리포터!
“TTT씨, 내가 준 그 토끼 인형 꼭 껴안고 자는 거야? 혹시 어디다 버린 건 아니지? 방금 전에 위치 추적해봤는데 안 뜨던데? 만약에 버린 거면 각오해. 제발 누군가에게 잠시 맡겼다고 말하는 게 좋을걸. TTT씨네 집 현관 비밀번호 알고 있다~! 그럼 나중에 확인하러 집에 직접 갈게. 바이바이.”
“NNN 누나. 오늘도 섹시한 컨셉으로 마구 춤춰주세요. 오늘도 꿀벅지랑 멋진 라인 보여줘요! 예스! 예스! 기다릴게요. 누나 각선미 최고!”
“FFF 그룹 오빠들도 오늘 힘내주세요. 군무 춤 예술! 간지 철철! 아 나 다 녹아 없어질 거 같아! 오빠들 모두 내 거얏! 아무도 찜꽁 금지라고! 내가 침 발랐다고! 끝나고 뒤에서 내가 쫓아가도 너무 흥분해서 속도 내지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내 스포츠카는 못 따라잡을 테니까요? 네?”
“WWW 오라버니. 오늘 화끈하게 나이스 속살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 재킷 안엔 절대로 뭐 입지 말라고요. 알죠? 그거? 오늘도 카메라 좋은 걸로 준비했으니까. 확대해서 집에 잘 모셔둘 거라고요. 네? 부탁해요!!”
“KKK 언니. 매일 밤 언니 전신 베개 껴안고 자요. 오늘 달달한 그 발라드 곡으로 우리 플라토닉 사랑해요! 언니. 좋아해. 난 언니 거! 언니는 내거! 알고 있죠? 나 꿈에서 언니랑 키스하는 꿈을 매일 꿔요.”
기타 등등, 대체로 자기어필에 가수칭찬에 가수에게 오늘 뭘 하면 좋을지 그런 견해를 털어놓는 것들이 천지였는데, 아마도 이건 약간의 편집이 필요한 듯했다.
이제 카메라맨을 통해 그 ‘마이크’를 되찾게 된 리포터 남은 이제 다른 광경에 눈을 돌렸다.
이곳엔 아주 정상적인 가족도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거였다. 그걸 이제야 찾은 거였다!
“역시 콘서트하면 가족과 함께. 네. 다들 정말 즐거워합니다. 평소엔 말도 잘 안 붙이던 자식 놈들이 얼마나 좋다고 꺅꺅거리는지. 네. 행복합니다.”
라던 어느 중년의 사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의 훈훈한 미소가 담긴 얼굴에 잡힌다. 그 옆에서 그 중년 남의 새파랗게 질린 아들이,
“아. 진짜. 아빠는 뭐라는 거야? 여긴 내가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 한 명도 안 나온다고 몇 번을 말해? 기억력 바보 아냐? 벌써 기억력 그 모양이면 날 어떻게 먹여 살릴 건데?”
그리고 바로 옆에서 이번엔 범생이 딸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면서,
“아빠도 참. 내일 나 쪽지 시험이라니까. 여기까지 와서 태블릿으로 공부해야겠어? 정말 분위기 파악도 못 한다니까. 저런 가수들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사랑받고 싶어서 몸으로 때우는 저런 애들 난 정말 이해 못하겠어. 시끄러운 애들 들끓는 데서 이게 무슨 꼴이람.”
그러자, 이번엔 부인이 마이크를 빼앗아 들고는,
“정말. 이걸로 가계지출이 얼마나 될지 생각은 하고 카드로 결제한 거예요? 차라리 그 돈으로 내 백(bag)이랑 원피스나 사줄 것이지. 오늘 내 생일이라구요. 몰랐던 거죠? 여보?”
“아-. 당연히. 그거 알고 있었지. 이번 기회에 이런 우아한 문화생활도 익숙해져 보라고. 응? 당신.”
“그럼, 여보! 어쩜 내 ‘선물’은 따로 준비했다는 소리예요?”
“응? 아. 오늘은 그냥 눈요기로 대신 하면 안 될까. 하하하. 당신이 이런 거 정말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일만 하느라. 그럼 여보. 콘서트 끝나면 당신이 좋아하던 그 꽃다발 사줄게. 전에 달맞이꽃을 가장 좋아한댔지?”
“아뇨.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건,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도라지꽃이라고요! 그 년은 누군데!!? 뭐냐고 당신!?”
뭐, 그 훈훈하던 가족이 이런 이면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고, 아마도 이것도 적당히 편집해서 내보내야지 싶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편집이 될지 편집의 마술사라도 불러야 할 테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판에 박힌 지루한 인터뷰에 지칠 무렵, 그 리포터 셋 중 나머지 인물인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 리포터는 한 차례 홀로 자판기에서 내린 그럭저럭 맛을 내고 있는 커피 한잔의 휴식을 가지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마침 저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건 바로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쑥떡거리는 소리였다.
“응. 그래. 그렇다니까! 내 아들도 그 이벤트에 뽑혔지 뭐야? 어제도 하루 종일 거기서 대절해주는 단체 버스 타고 가서 연습했다고 하더라고. 오늘은 그걸 할 거래. 정말 장관일 거라고 하면서 그게 뭔지는 안 열려주는 거 있지?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는, 그런 ‘비밀’이라고 쉬쉬 숨기면서. 그러면 더 궁금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 안 그래?”
“그렇지. 궁금하지! 아암! 이 빌딩에서 뭔가 또 하려는 걸까? 어떤 쇼라든가. 기껏해야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데 옆에 서서 선물 전달을 받거나 아니면 노래라도 같이 따라 부르게 참여 시킨다던가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유명 가수랑 악수나 포옹 내지는, 노래 CD랑 사진 팜플렛(pamphlet)이나 콘서트 티켓 쯤 받겠지. 설마 말도 안 되는 차력쇼 같은 거라도 하려고. 후훗.”
“그럼 격 떨어지지. 이렇게나 비싸고 고급스런 빌딩에서? 차력쇼? 역시 농담이 심하네. 그냥 늘 그렇듯이 가수랑 선물교환이나 그런 간단한 거겠지? 오늘 하려는 그건. 아. 근데 이번 콘서트 티켓은 너무 비싸서, 그 녀석 그거 벌려고 알바 엄청 뛰었다던데.
그래도 보고 싶다는 건 봐야지. 맞아! 내 정신 좀 봐. 아들이 쪽지를 주고 가면서 거기 적힌 그 ‘시간’엔 꼭 건물 밖에 있으라는 거야. 이 빌딩 전체윤곽이 잘 보일만한 곳이라면 더욱 더 좋다나?”
“그럼, 그 ‘시간’에 뭔가 하긴 하는 가본대? 그럼 청소는 나중에 와서 또 하면 되니까, 준비해서 우리도 가볼까. 슬슬? 그 시간되기 전까지 대충 커피숍에 있지머.”
“그래. 나도 조금만 더 하면 다 돼. 옷 갈아입고 가보자고.”
마침 어디선가 작은 이벤트를 한다는 소릴 듣고서 그 리포터는 그 이야기의 근원을 찾고 또 찾아서 그 실마리를 겨우 얻어내 이제 막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리포터를 유심히 지켜보는 눈 하나, 그것은 바로 화화 15세로 그녀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은 채 카키색의 모자에 하얀 마스크를 쓴 채였다.
가끔씩 기침을 하는 척 콜록콜록 거리곤 있었지만, 연기력은 꽤 서툰 편이었다.
이 초고층 빌딩 옥상의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공간에서, 제일 능숙하게 사람들 틈에서 잘만 돌아다닌 것이 평소 동물애호가였던 페이였고, 원래 사나운 눈빛을 다소 죽여야 했던 게 싸움광인 이데와 책중독녀 마린, 제일 외모로서 튀었던 게 화화인지라 그녀는 굳이 마스크까지 하고 있었던 거였다.
동그란 안경 쓴 그 리포터는, 미니캠코더 하나만 손에 든 카메라맨과 단 둘이서 몰래 행동하기 시작했고, 곧 옥상 바로 아래층으로 비상구 계단을 타고 조심스레 걸어 내려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보지 않는 척 하면서도 다 보고 있던 화하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주시하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곧 그들을 뒤따라 발걸음을 살금살금 옮겼다.
그러며 다른 동료들(페이, 이데, 마린)에게 문자를 보낸다.
-화화: 출입금지 창고 발견. 현 위치는 옥상 마이너스 1층.
머지않아,
-마린: 엘리베이터 탑승 후 주차장과 도로 부근 지상에서 탐색할 예정.
-이데: 가수 대기실로 이동 중. 화화씨는 계속 주시 및 보고 바람.
-페이: 여기 너무 붐벼서 이동불능. 빌딩 옥상 무대 앞쪽.
지금 리포터와 카메라맨의 눈앞엔 이제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푯말이 적혀진 거대한 문이 있었고, 그걸 보고서도 굳이 그 문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스윽 밀고 들어가던 특종에 목말라하며 방송의 야심으로 가득 들어찬 자들이었다.
문을 조용히 열자, 군청색과 흰색 배색의 작업복을 입은 5인의 사람들이 서둘러 가로 세로 1미터씩 대는 대형 박스에 든 뭔가를 정리하고 집어넣고 있는 듯 보였다.
슬금슬금 다가가는 척 하다가 이내 발소리를 죽이며 힘껏 달려가며 카메라의 줌인기능으로 바꾼 뒤 박스 내부를 집중 공략하려는 카메라맨과 그런 그보다 더 앞질러 빠르게 목표물을 향해 달려 나가는 리포터 1인이었다.
물론 그 낌새는 이곳 사람들에게 당연히 들켰고, 이곳 담당자 1인은 당장 험악한 오랑우탄의 얼굴로 소리치며!
“저놈들 막아!!”
정리하는 직원 4인과 물품을 체크하며 감독하는 담당자 1인, 그들은 그들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치며 발악하는 2인의 무리와 한동안 기나긴~ 눈에 잘 보이건만 잘 잡히지 않는 그런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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