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나는 왠지 석연찮다고!*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인간이 한 종류가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랑 남자 그런 성별로 나누고 있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신분제니 종교나 자본력 정도에 따른 인간의 자산 가치 쪽 분류도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소릴 하려는 걸까? 조금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여간 신이 어쩌고 선과 악이 어쩌고 하다가 결국엔 인간의 종류를 나눠보자 어쩌자 하니 터무니없어 보이긴 했지만.
“아. 알았어. 일단 들어볼게. 해봐.”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려던 이데를 다시 자리에 눌러 앉히며 대화를 재촉하던 림이었다.
“뭐? ···‘해봐?’ 너 그거 뭐야. 일단은 아무리 바보 같은 소리라도 한번 들어는 본~다. 그런 거야? 속으로 호박씨 엄청 까는 거 아냐? 나 정말 하기 싫다아아.”
그 말을 끝으로 힘없이 탁자 위로 넙죽 엎어져 누워버리는 이데, 그는 다름 아닌 내 스승인 주제에 이 어린애 투정 부리듯 구는 모습이 좀 기가 찰 노릇이라고 할까. 하긴 그 정도로 이데가 눈치가 빠르단 말이었지만.
“안 놀려. 이데. 정말 안 놀린다니까? 진짜야!”
그러고는 잠시 후 그는 슬금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러며 느릿하니 두 눈을 깜빡거리며 눈동자를 뒤룩 굴려 나를 바라보던 이데다.
“정말? 진심?”
“응! 진짜. 그러니까 말해.”
“흐음. 아닌 거 같은데. 왠지 존경심이 부족한 거 같아. 네 태도가 딱 불량해.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잖아! 이건 완전히 스승에 대한 실례라고! 그렇다고 봐. 난.”
양쪽 팔짱을 척 껴가던 그의 말에 림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약간 달고 있던 미소마저도 지워버리며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이건 조금 지쳐서 그래. 다섯 시간 동안 꼬박 여기서 기다려서 그렇다고.”
내 말에 이데의 두 눈은 놀랄 정도로 크게 치떠져가는 것이!
“아···.”
그제야 알아차린 건가? 정말 이데는 무심했었군. 그런 생각이 들던 림이었지만, 앞서 이데도 정신없이 그 이론들을 익히고 외우느라 다른 건 잊었을 거란 단순한 생각이 들면서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석연찮은 듯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말이야. 림. 있잖아. 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 완전히 잊었던 건 아니야.”
이데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웃으려했던 모양이지만 그게 잘 안되었고 다만 살짝 인상을 찌푸린 것으로 마무리 한다. 아마도 림에게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림을 위한 이론정리였으니까 하고 합리화하고 있었던지 그 인상은 곧 밝아져갔다.
“알았어. 수고했어.”
라고 심심하게 말해줄 뿐이던 림이었고, 이런저런 태도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던지 이데는 곧 입을 열어 이야기를 쏟아낸다.
“하하.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렇지. ‘라스’들이 바라보는 그 ‘세상’속의 인간을 크게 딱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지.”
“세 종류로?”
“응. 태양의 인간, 달의 인간, 석양의 인간. 이렇게 셋!”
이야기가 점점 묘하게 돌아가는 듯 궁금해져서는, 어느새 림은 탁자 위로 손가락을 초조한 듯 까닥까닥 대며 두들기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점점 더 늘어나는 이 기분을 참지 못하고 다다다 말을 잇는다.
“그게 뭔데? 태양하고 달하고 석양?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나눈다는 거야? 무슨 기준으로?”
“뭐긴, ‘라스’들의 기준이지. 라스가 된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그래? ‘라스’가 되어야만 알 수 있다고? 그럼 그 뭐냐- 그 인간의 자율성은 여기서 뭘 말하는 거야? 선과 악은 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는 건데? 선과 악이란 것도 인간들이 정한 거라며? 그리고 신(神)은? 신의 역할은? 그리고 라스는 대체 뭘 하는 자들이야? 인간들을 나눈 다음에 그 다음엔 어쩌겠다고? 응? 이데?”
그 앞에서 그만! 이라는 듯, 이데는 어느새 벌떡 일어나 내 얼굴 앞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듯 자기 손바닥을 척 들어보였다.
“자-아. 거기까지! 우선 신(神)은 내 알 바 아니고, 어쨌든 그 다음은 네가 ‘라스’가 된 다음이야.”
림은 왠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얼른 의자에서 일어서서 앞서 이 공간을 빠져나가려는 이데의 뒤를 밟는다. 녀석의 팔 한쪽을 바로 잡아챈다.
“뭐야? 이걸로 끝이야? 좀 더 말해줘. 나는 뭐야? 그럼 난 그 셋 중에 뭐야?”
고개를 돌리며 림에게로 얼굴을 들이미는 이데, 그는 약을 올리듯 한쪽 입가를 슬쩍 틀어 올린다. 그러며 소곤소곤 속삭인다.
“림. 알고 싶어?”
그것에 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기를,
“응. 알려줘.”
슬금 잡힌 팔을 빼내며 팔짱을 낀 채, 오만한 눈빛으로 가득 채워 림을 내려다보던 이데,
“···알고 싶으면 너도 어서 ‘라스’가 되면 돼.”
그렇게 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낱낱이 훑어보며 즐거워하고 있던 ‘어이쿠 벌써 잠 잘 시간이네.’라고 지껄이던 이데의 모습과 순간 화딱질이 나 돌아버릴 것만 같은 내 모습도 함께 파라랏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이데처럼 ‘라스’라 불리는 자들은 신도 인간도 아닌 그 사이에 낀 어중간한 존재였다. 나 역시도 ‘라스’에도 도달하지 못한, 인간과 라스 사이에 낀 어중간한 존재이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백토에게 말했듯 ‘인간이 아닌 셈’이다.
째깍. 째깍.
다시 시간은 과거를 벗어나 제 위치로 돌아오고, 림도 어느새 현재에 돌아와 화화를 보고 있었다.
‘라스’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이데에게 만들어진 존재인 ‘선녀’들, 화화는 이데에게 많은 것들을 전수받고 있었는지 어땠는지 자연스런 표정이며 자연스런 몸가짐이며 대부분이 진짜 같았지만 역시 수많은 자료들로 축적되어 만들어진 ‘가짜’였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 토대로 이뤄진다는 인간처럼, 많은 면에서 능숙했지만 때때로 진심이 닿질 않는다는 기분을 그녀에게서 받게 되는 횟수가 늘면서부터였을까? 그게 단지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부터였을까?
그 언젠가부터 그녀가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석연찮은 기분만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이데가 느꼈을 법한 그 쓸쓸함을 림도 똑같이 느꼈던 거였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행복’이란 단어를 운운하며 마치 인간인 냥 말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는 듯 표정마저도 저리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일까? 이래저래 생각하니, 림에겐 그것이 또 묘한 여운으로 다가와 서글퍼졌다.
그 말(“···행복했다고?”)을 했을 때 지었던 이런 내 표정조차도 이미 오래전에 읽혔을 테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는지 어땠는지 이렇다 할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평소대로 행동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 선녀들이 ‘이데’ 아래에 있어서 말이다. 비록 지금은 이데가 어디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궁중악사들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여 다시 림을 바라보던 화화는 입을 열었다. 정말 잘 만든 음색, 옥구슬이 굴러갈 듯 아름다운 것이 흘러나와 내 귓가를 행복하게도 우울하게도 만드는 듯했다.
“네. 행복했지요. 그때마다 늘 저들도 함께 했지요. 또 다시 이데님이 돌아오신다면 그 분이 원하시는 목표물과 원하시는 좋은 가락 속에서 원하시는 즐거움을 전투를 멋지게 펼쳐본다면 정말 좋을 테지요.”
이런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머뭇댔었지만, 역시 그녀를 강하게 추궁하듯 노려보고 말던 림이었다. 그 눈빛에는 앞서 그녀에게 전했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냉정한 비릿함이 섞여들어 있었다.
“그거 거짓말이지?”
상대방의 시선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살짝 고개만을 갸웃 거리며 묻는 화화, 정말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의미인 걸까?
“네? 무슨 의미죠? 림?”
그녀의 눈가리개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을 잇기 시작하는 림,
“화화 너한테는 연락하고 있을 거 아니야. 날 감시하라고.”
“네? ···없었습니다만, 이데님이 그러시던가요?”
역시 로봇 같은 이런 부류들과는 특히 그녀들의 ‘전투모드’상태일 때는 더욱 그 건조함에 빛을 발하는 듯한 저 말투가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툭 던지는 그녀의 뒷말에 난 역시 좌절한다. 저런 상태의 선녀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대체!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야. 아무 것도.”
그렇게 림의 말들을 힘없이 허공에 퍼져 나갔다.
“아···. 림에게도 없군요. 아무런 연락도. 둘 다 똑같군요. 그렇죠?”
누군가가 내 가슴에 비수를 확 꽂고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저런 말을 저리도 잔잔한 미소까지 달고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굳이 이데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해보고 싶었다.
“······.”
하지만 나는 그 전에 역시나 배려 없는, 인간미 없는, 화화 선녀의 말에 상처를 입었고 할 말도 잃고 말았다.
“근데, 림. 저 음악 잠시 멈춰줄래요? 왠지 듣고 싶지가 않네요. 저 음악을 듣고 있자니 계속 기분이 나빠져서요.”
“어째서?”
순간 내 눈빛이 날카로움으로 빛난다. 뭔가 그것엔 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싶어서 그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저- 저기. 이데님이 계시거든요.”
그러며 왠지 언짢은 듯 불편한 기색을 띄우며 웃고 있는 화화 선녀, 이번 것은 정말 잘 꾸며진 미소로, 대체 그 이유가 뭘까? 이데가 저 궁중악사들 속에 끼어 있다고 해서 그것과 저 음악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저 음악이 굳이 지금 이 공간에 필요한 가 고민하던 차에 나름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선녀가 먼저 대놓고 말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저것을 잠시 멈추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멈춰도 상관없으리라.
휘이잉. 휘잉.
바람을 모으듯 주변의 공기를 양손으로 가볍게 쓸어 담는 듯이 손짓을 보이던 림은, 곧 자신의 손 안에 감싸여진 그 조그마한 영역에서 검은 호랑나비가 홀연히 등장해 은은한 빛에 둘러싸인 채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 너머 매화꽃잎이 흩날리는 궁중악사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자 그것에 반응하듯 호랑나비는 그쪽을 바라보며 팔랑 팔랑 날갯짓을 했고, 따스한 빛을 내뿜는 것과 동시에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감쪽같이 감춰버린다.
!
머지않아 그 호랑나비가 본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궁중악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곳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데’가 연주하고 있던 대금 끝부분에서 은은한 빛을 뿌리며 느릿한 날갯짓을 여유롭게 펄럭이고 있었다.
화화의 말대로 거기에 ‘이데’가 있었다. 평소 림이 봐오던 그의 모습(20대 초반에 은회색에 짧은 머리칼)과는 다르게 어깨 부근까지 머리칼을 땋아 내렸는데 남색과 하늘색 비단 댕기로 묶어 단 채로 자리에 앉아서 얌전하게 대금을 불고 있었다.
예전에 이데가 림에게 말하길, 그는 과거엔 궁중음악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악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어쩌다보니 자신도 그들 무리에 끼여서 악기를 하나 둘 접했다고 했었다.
그러다 문득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자연스레 여러 곡들에 조사하다보니 작곡가들까지 찾게 되었고, 찾아낸 인물들의 여러 사진 중에서 ‘저 부리부리한 눈매가 맘에 들었다.’라면서 재미삼아 ‘베토벤’을 데려와서 그가 가진 온갖 병들을 싹 치료해준 다음 그 대가로 같이 각종 ‘음악 영상’을 기록했다고 했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던 내 말에, 다른 ‘라스’(찾고 싶은 것을 찾아내는 항해사 라스의 나침반, 찾아낸 영혼과 협상을 할 수 있는 해결사 라스의 서약서, 영혼을 운송하는 장인 라스의 가방 등등)한테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는 말로 일축해버렸다.
배경이미지. 태양.달.석양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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