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눈앞에 떡 하니 미지의 데이터가!*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이제 백토는 곧 두 눈 앞에 망원경을 덧대고 밤하늘 위에 떠 있는 형형색색의 등불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냥 맨눈보단 렌즈를 통해 바라본 풍경들이 훨씬 뚜렷한 것이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저 높은 하늘엔 등불이 떠 있다면, 지상엔, 그러니까 마당엔 처음 백토가 달려올 당시의 잔디 같은 자잘한 풀밭 반에 흙바닥 반이 깔린 게 아니라, 지금은 연둣빛 초록빛 잔디 카펫을 바탕으로 한 하얗고 노랗고 분홍빛으로 물든 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다정한 기운이 도는 꽃밭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림의 자살시도 범죄 현장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올 당시엔 거대한 나무 대문에서 대청마루까지(세로 폭) 대략 1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마당이었건만 지금 보기엔 훨씬 넓어져서 그 세로 폭이 대략 200미터에 육박할 지경이었고 가로 폭은 대략 300미터는 되어 보인다.
실로 엄청나게 구라친 듯한 대~단한 뻥튀기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들려오고 있는 저 ‘궁중음악’, 그것의 실체도 그 드넓은 마당 한쪽에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유독 그곳만 특이하게 봄날의 포근한 한때처럼 새하얀 꽃봉오리와 이미 꽃이 활짝 핀 매화나무가 적절히 군집해 있었고, 살랑이며 흔들리는 바람결에 우아하게 나직하게 공중을 비행하는 매화 꽃잎들이 새하얗고 연분홍빛으로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는 낭만적인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살랑살랑.
물론 나는 그쪽 방향으로도 두 눈 앞에 망원경을 척 갖다 대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 궁중음악의 실체를, 그 멋진 음악을 연주했던 자들의 실체를 더 잘 살펴볼 수 있게 된 거였다.
“뭐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데리고 온 거야? 림. 너 진짜··· 대단하다.”
“뭐~ 이 정도야.”
보지 않아도 림이 어깨를 으쓱해 하고 있다는 게 그의 목소리에서 은근히 느껴졌다. 괜히 감탄했나 싶었다.
잠시 망원경에서 시선을 땠다가 림을 바라본다. 나는 앞서한 생각과는 달리 역시나 놀란 나머지 두 눈마저 절로 크게 떠졌고 한숨마저 터트리고 만다.
“허어! 진짜. 네가 한 거였어? 이런!”
“야. 너 알고 물었던 거 아니었냐? 하아. 바보가 낚시를 다 하네. 재주도 좋아?”
림의 건방진 저 말투에 속이 울컥했지만, 지금은 좋은 구경거리 앞이니 잠자코 있기로 했다. 다시 망원경에 두 눈을 살포시 갖다 대며,
“나 바보 아니거든. 우와···. 저 사람들 티비(TV)에서 봤던 거랑 옷이 똑같아!”
“그렇게 좋냐?”
“······.”
나는 슬그머니 림의 공세를 한쪽으로 밀어 놓아둔 채 말없이 원래 몰입하던 장면에 또 다시 몰입해간다. 곧 망원경의 렌즈를 약간 손보며 더욱 크고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한다.
그들 궁중악사의 무대는 독특하게도 절벽 하나를 통째로 잘라낸 듯 통짜 천연 자연석인 튼튼한 바위로 되어있었는데 앞쪽 1/5 정도는 평평했고 뒤쪽 나머지 4/5 정도는 외국 오케스트라 공연처럼 둥근 곡선을 몇 겹 쌓아올린 계단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뒤쪽 무대인 4/5 정도 되는 둥근 계단식 공간에 배치된 대략 60명의 궁중악사들은 하나 같이 모두 금테가 들어간 검은 관모에 질 좋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타악기(편종, 편경, 방향, 운라, 장구, 북, 징, 어, 박, 축, 부, 꽹과리)파트와 관악기(피리, 당적, 단소, 퉁소, 대금, 생황, 태평소, 지, 소, 나발, 나각, 훈)파트와 현악기(가야금, 거문고, 아쟁, 양금, 월금, 해금, 비파, 공후, 금, 슬)파트로 나뉘어져 방석이나 의자에 앉거나 또는 자리에 서서 각자 악기를 고이 들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잔잔하게 연주를 하다가 문득 스며드는 음악의 흥겨움에 취한 듯 간간히 피어오르는 미소를 짓거나 하면서 계속 연주를 이어나가곤 했다.
그 궁중악사들의 외모는 의외로 아시아계 황인인 한국인이 전부가 아니라, 흑인 백인 황인이 온 세상 지구촌 사람들이 골고루 적당히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우왓! 외국 사람들이··· 있어! 뭐지? 림! 자랑스러운 궁중악사 한국인 모임은 어디가고 저 사람들이 곳곳에서 궁중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거야? ‘대타’···인가? 잠깐 몇몇 한국인 분들이 화장실이라도 가신 거겠지? 이거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래? 내 꿈 이거 왜 이런 거야?”
“나한테 묻지 마. 이제 네가 꿈이 어쩌고 하는 것도 슬슬 질리니까.”
“엇! 근데 저 사람은? 설마. 아니겠지? 하하. 아닐 거야. 내가 뭘 잘못 본 거겠지? 응? 림! 내가 잘못··· 봤다고 잘못··· 본거라고 좀 말해줘!”
난 슬그머니 한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조금 울먹댈 듯이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는 듯이. 어찌 보면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놀랄 수밖에 없다고 난 굳게 생각한다.
“···왜 이래? 백토?”
림 입장에선 이런 백토가 그냥 꼴값을 떠는 것쯤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데서 정신붕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할까? 슬그머니 그런 기분이었다.
순간 저 소란스런 백토의 입을 막아둘까 말까 그렇게도 고민해본다지만, 조금 소란스러운 거야 뭐 별로 상관없긴 했다.
*
앞쪽 무대인 1/5 정도 평평한 공간에는 그 궁중악사들의 보스급인 자, 단 1명이 마치 지휘자처럼 홀로 서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베토벤을 쏙 빼닮은 백인으로 운명을 울부짖을 듯한 부리부리한 눈매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왼손엔 지휘봉을 들고 붉은 광택으로 반질거리는 벨벳 제복(정장)을 입은 데다 고전파 음악 시대를 연상할법할 새하얀 머리 가발(이마를 훤히 드러낸 얼굴과 머리 사이의 깔끔한 라인, 양쪽 귀 옆에 풍성하고 둥글게 말아 올린 일층과 이층 웨이브, 뒷머리는 적당히 땋아 내려 가느다란 리본으로 묶은 꽁지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희고 긴 양말에 잘 닦여진 무광의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지휘자는 길고 가느다란 지휘봉을 들고 자유롭거나 우아하거나 과장적이거나 등등 미묘한 기술을 잘 배합해 섞어 움직여대는 손짓에 부드러이 이끌려 가는 궁중악사들의 성실하게 연주하는 손길이 한없이 섬세하고 기민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 들리고 있는 것은 단지 ‘음악소리’뿐이건만 마치 그 어떤 누군가의 투명하게 빛나는 음색으로 부르고 있는 노랫소리마저도 같이 들려오고 있는 듯했다.
-햇살이 따스하네.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네. 일하러 가기 좋은 날씨라네. 논과 밭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이 사랑스럽다네. 부슬부슬 비가 듬뿍 와서 땅이 촉촉해졌네그려. 해와 비와 땅의 기운을 받고 쑥쑥 자라나네. 어서어서 커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게나.
축복이 온 천지에 꿀과 우유처럼 넘쳐나네. 우리는 슬픔과 배고픔을 잊어버렸다네. 온 세상은 풍요로 가득하다네. 가득 찬 배를 두들기며 오늘도 노래하네. 빛나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단잠이나 청해보세. 온 세상은 기쁨으로 가득하다네. 오늘도 노래하세. 큰 소리로 외쳐보세.
마치 곱고 부드러운 미성을 간직한 작은 몸집의 어린 요정들이 도란도란 모여 그들 등 쪽에 고이 자리 잡은 새하얀 날개를 가뿐하게 퍼덕거리며 장난스럽거나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경쾌하게 밝게 웃어대며 노래라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당장이라도 박수갈채와 탄성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물론 백토도 함성을 내지르고 싶긴 했지만 배도 고프고, 아직 노래가 끝이 난 것 같지 않아서 박수치기를 이리저리 망설이고 있었다.
하여간 음악이나 노래하는 중간에 끼어들기하면 예의상 안 될 거 같았으니까 말이다.
*
림의 집 드넓은 마당 좌측 편 어느 부근쯤에서, 지휘자와 궁중악사들은 마음과 뜻을 모아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농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하며 한때 백토가 느꼈던 그 기쁨과 풍요로움의 감정을 부드럽게 쏟아내고 있었다.
“설마··· 맞나? 맞는 건가? 진짜라고?”
지금 이런저런 추측을 거치며 나 혼자 놀라고 혼자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림은 더는 신경을 쏟지 않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뭔가를 알아보고, 그걸 굳이 묻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슷한 사람이라도 본 거겠지 할 수도 있지만, 음악시간에 베토벤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음악선생을 고등학교 시절 담임으로 둔 적이 있었던 터라 그 초상화는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닮은 거겠지? 설마 저 사람 진짜겠어? 설마. 그럴 리가.
한참을 마음속에서 돋아나는 의심과 진흙탕처럼 질척대는 고민 속에서 후련해지고 싶어서 그냥 림에게 떠들어버리고 마는 백토다.
“베, 베토벤 아저씨가 왜 여길!? 림! 저거! 대체 뭐야?”
“응? 그게 뭐 어때서?”
터져 나오는 림의 밋밋한 말투에서 굉장히 당혹감을 느꼈다.
“정말 베토벤!?”
다시 물어봐도, 림의 표정은 거짓이 아닌 걸로 보인다.
“뭐, 그 사람말론 그렇다던데?”
지금 와서 림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냐?’부터 시작해서 굳이 묻고 싶지는 않고, 죽은 사람이 굳이 왜 여길, 아니 그건 아니고, 내 무의식중의 꿈속에 어찌어찌 생존해 계셨던 겁니까? 하고 물었어야 할까? 굳이 당신은 제 꿈속에 모시고 싶지 않은 어려운 분 중 하나입니다만? 굳이 왜 여기서 궁중음악에 빠지신 겁니까! 대관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헉! 왜? 내 꿈에 베토벤?”
여전히 그 어떤 뚜렷한 근거 없이 우김 일색이던 내 말에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림이었다.
밤하늘에선 화려한 등불행렬이 대지에선 근사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순간, 그냥 이 타이밍에 문을 열어젖힌 것이 아닌가 싶은 림의 절묘한 수였고 그것에 충분히 백토는 놀라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인간은 바라고 또 바라는 존재라고 했던가?
이 시점에서 림이 ‘자- 봤지? 이게 네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지? 네 머리 수준으론 절대로 만들어내지 못할 영상이라고 맞지?’라고 말해도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아직 묵묵부답이었다.
어느 순간 내가 그런 게 상관없어졌듯 림도 이리저리 그런 걸 따지고 하는 건 이제 귀찮아졌다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분명히 이 시점에 입이 근질근질할 법도 한데 잠자코 있는 것이 또 무언가가 ‘대단한 이벤트’가 있는 모양일까?
그동안은 베토벤 아저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몇 번이고 재확인하듯 망원경을 들고 궁중악사들 속 지휘자인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젠 나도 ‘그럼 뭐 어때서~ 세상엔 이런 일도 있는 거야.’하는 허탈한 심정을 짓다가 망원경을 두 눈에서 때어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거나 림에게 준 건 아니라, 혹시 모를 또 다른 상황을 기대하며 그 망원경에 걸려있는 긴 목걸이용 끈을 내 분신처럼 내 목에 척하니 걸어 놓았다.
*
이제 열린 문의 문지방을 넘고 나간 나와 림은 대청마루로 찬찬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무엇인가를 보고 나는 그만 발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다. 이미 내 몸도 내 시선도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 순간 저 높은 하늘 위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던 형형색색의 등불 장식들이 누군가를 맞이하듯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수많은 등불들이 빽빽하지만 어느 정도 공간을 유지하며 점점이 모여 있다가 그 누군가가 다가올 자리를 알아서 비켜주며 양 사방으로 등불끼리 약간씩 부딪히듯 흔들흔들 거린다.
그러며 색색깔 빛들이 모인 하늘이 갑작스레 그 중앙에서 뻥 뚫려버리고 그것을 대신해 새까만 강물이 그 속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듯 안에서 밖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그 어떤 공간을 그 누군가를 위해 서서히 넓혀나가고 있었다.
두근두근!
그와 동시에 내 심장은 이리도 쿵쾅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난 마루의 절반도 채 나가지 못했지만, 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루의 끝에 거의 다 도착해가고 있던 중이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 같은 일이다!
눈앞에 나타난 ‘그들’을 본 순간 난 딱 그런 기분에 더욱 사로잡혀버리고 만다.
앞에 림이 행했던 일들도 모두 그런 높디높은 불가능의 레벨에 가까웠지만 이건 해도 해도 심한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미 내 두뇌가 눈앞에 펼쳐진 미지의 데이터를 바라보며 그 귀중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과도한 열을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아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경이라는 멍청한 소리까지 내뱉으며 내게 거짓 정보를 주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딜레마에 휩싸였던 거다. 지금 난 몹시도 흥분해 있었다. 이런 일은 절대로 벌어질 리가 없을 텐데.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렇다. 이곳에 왜··· ‘선녀’님들이 계신건지 모르겠다.
화화 선녀 보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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