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돈황으로 가는 여로에서(2)
“일단 시일이 아직 달포 이상 남아 있는 만큼 서두르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더욱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정식으로 초청받은 이상 우리도 제대로 예물을 준비하고 사절단을 꾸려서 날짜에 맞게 당도하는 것이 합당해요.”
“나는 그런 격식 따위에 얽매이는 게 딱 질색이다.”
“모든 격식이 전부 허례허식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격식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최소한의 도리일 테니까요.
과도하게 체면을 차리는 것은 문제이지만 체면을 너무 업신여기면 야만으로 전락하고 말 거예요. 그건 곧 곤륜파의 위신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테고요.”
위수린이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조목조목 반박하자 담혁건은 뒷목을 긁적였다.
“해서 뭘 어쩌란 말이냐?”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적당한 예물을 준비한 다음, 정식으로 수행원단을 갖추어서…….”
담혁건은 성가시다는 듯 두 손을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판단에 위수린은 생긋 웃으며 담혁건의 면전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그의 처소를 다시 찾은 그녀는 미소 대신 고소를 머금어야만 했다.
담혁건이 다음처럼 짤막한 기록이 담긴 서찰만을 남긴 채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밀정으로서 먼저 난황대막으로 잠입하여 만상방과 단목군악의 진정한 역량에 대해 살펴보겠다.
하니 예물을 준비하든 사절단을 꾸리든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그리고 벽력검은 여기 남겨두고 갈 테니 잘 간수하도록 하고.>
***
달랑 약소한 서찰만을 남긴 채 거처를 떠나온 담혁건은 만상방의 근거지인 돈황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여로에 있던 주천으로 들어섰다. 지난 이틀 동안 풍찬노숙을 해온 만큼 오늘만큼은 제대로 된 숙식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서방신지와 중원을 잇는 교역의 요충지인 까닭에 번화한 주천의 경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도심의 저잣거리를 누비는 사이, 어느새 정오가 되자 담혁건은 인근에 자리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내 주문한 음식을 점소이가 그의 식탁으로 올려놓고 있을 무렵이었다.
객잔의 입구로부터 동일한 도포 차림에 도관을 쓴 사내들 네 명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그리 멀지 않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복장을 보니 공동의 제자들인 모양이군. 풍기는 기도로 봐서는 일대제자쯤 되겠고.
그나저나, 단목군악의 생일은 아직 멀었는데 대체 저들은 무슨 연유로 이런 데서 얼쩡대는 거지?
공동파는 만상방과는 잘 지낸다고 했으니, 나처럼 저쪽의 동향을 살피러 온 척후도 아닐 테고…….’
그랬다. 담혁건의 예상대로 그들은 공동파의 일대제자로서 각각의 도호가 배분에 따라 청진(靑進), 청명(靑明), 청허(靑?), 청운(靑雲)이었다.
공동문주의 분부에 따라 만상방주의 팔순 연회를 돕고자 먼저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담혁건으로서는 호기심이 동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청력을 돋우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그들은 별다를 게 없는 잡담을 나누었다.
이에 슬슬 관심을 끄려는 찰나, 그의 귀가 쫑긋 세워질 만한 화제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나저나, 대사형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광망산에 재건된 곤륜파가 진짜배기라고 보시는지요?”
“글쎄다. 어차피 문도들이라곤 해도 별 볼 일 없는 광망파와 와호방이 병합되어 무늬만 바뀐 형국일 뿐이니 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상황이 아니더냐?”
“그래도 그 이후로는 제법 그럴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단순히 오합지졸로만 볼 수는 없을 듯싶습니다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좀 더 상황을 두고봐야 할 것 같구나.
다만, 만일 그자가 행여 곤륜파라는 위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고 있는 거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게다.
곤륜의 이름으로 사기를 친다는 건 곧 정파무림 자체를 모독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겠지요. 당금의 강호에서 곤륜이라는 단어는 모든 정파인들에게는 의협의 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입니다.
한데 담혁건이라는 인물이 정말 곤륜괴협의 전인이라면 앞으로의 상황은 어찌 흘러갈 거라고 보십니까?
그리되면 그가 세운 분파를 곤륜파의 후신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리 간단치만은 않을 듯싶구나.
설령 그가 정녕 곤륜괴협의 직전제자라고 해도 그렇게 급조된 문파가 곤륜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건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멸문으로 인해 실전된 곤륜파의 독문무공만 고스란히 이어진다면 꼭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요?”
“곤륜파가 아직도 건재하다면 과연 의협의 표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무림의 기라성 같은 명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토록 칭송할 수가 있겠느냐?
어차피 사라져버린 터라 더 이상 이권을 두고 경쟁할 여지가 없으니 그렇게 선심을 쓰듯 전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전설이 의미가 있으려면 지금처럼 사라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곤륜파를 그렇게 칭송하면서도 곤륜파의 부활은 바라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으나 평소에 곤륜파와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무림분파라면 필히 그럴 테지.
그러니 그들은 설령 담혁건이라는 자가 정말 곤륜괴협의 후인이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견제하려고 들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풍문으로는 그자의 무위가 실로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 경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고 하더군요.
들리는 바론 실제 나이는 마흔둘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십 대 중반의 용모를 지니고 있다면 필시 환골탈태까지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무위가 출중한 자라면 어지간한 견제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지요.”
담혁건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많아 봤자 서른이요, 보통은 이십 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청년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에 고심 끝에 그는 공식적인 나이를 마흔둘로 확정 짓고 그에 어울리는 언행을 습성화하는 중이었다.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이 십 년 이상 젊어 보이는 것은 강호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마흔둘이면 큰 무리 없이 납득시킬 만한 나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나이를 낮춰 잡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공만 고강하다고 다는 아니다. 더욱이 그자는 단순하고 경박하여 자신의 무공만 믿고 설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자일수록 모략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아직까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면서도 공신력 있는 인맥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니 무공만 믿고 경거망동하다가 함정에 걸려들면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혀버리는 것도 한순간이지.”
“과연 그렇겠군요. 상황이 일단 그렇게까지 몰려버리면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마외도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테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리되면 곤륜이 아니라 혈곤륜 내지는 흑곤륜이라고 불리겠지.”
대제자인 청진과 나머지 세 사제들 사이의 질의문답과도 같은 대화는 주문한 음식이 당도할 때까지 이어졌다.
일단 식사를 시작하자 그들은 다시 가벼운 주제의 잡담만을 두런두런 나눌 따름이었다.
더 이상 들을 만한 내용이 없다고 판단한 담혁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사실 대화를 엿듣는 도중에도 그는 발끈한 나머지 정체를 밝히고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일단 참고 듣는 가운데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들의 말 중에서 딱히 틀린 구석은 하나도 없음을 그 역시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예전의 곤륜파는 이미 멸문당했고, 나 또한 더 이상 벽력존자가 아니라 청년의 모습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마당이다.
그러니 과거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버리고 지금 당장 처해 있는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예전처럼 무위만 믿고 날뛰다가 함정에 걸려 인생을 망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마음을 제대로 다잡은 담혁건은 한층 차분해진 신색으로 주천의 저잣거리를 거닐었다.
***
주천에 당도한 단목연지는 식사부터 끝마친 다음 잔뜩 들뜬 표정으로 본격적인 유람에 나섰다.
난황대막 안에만 갇혀 있던 그녀로서는 이 정도로 번화한 도시를 경험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예쁜 장신구들을 판매하는 가판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멈추어 섰다.
남장을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여인으로서의 본능이 그렇게 이끌었던 것이다.
“공자! 혹여 정인에게 줄 선물을 찾으시는 거요?”
관리의 편의상 연재가 종료된 글의 댓글 기능은 닫아 둡니다. 문의사항이나 남기실 멘트가 있으면 쪽지로 보내 주세요.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