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벽력존자의 귀환(2)
놀라움도 잠시, 그는 박장대소했다.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한참을 유쾌하게 웃어대던 그는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서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 테지. 제마동에서의 그 개고생이 결코 헛된 건 아니었구나.”
면도를 더욱 깔끔하게 마무리한 그는 걸치고 있던 도포마저 훌쩍 벗어 던졌다.
땡볕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신체 역시 영락없는 이십 대 청년의 것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균형 잡힌 거구에 짜임새 있는 근육까지 더해진 그의 몸은 철옹성을 연상시킬 정도로 다부졌다.
“캬하! 내 몸이지만 참으로 옹골지기가 이를 데 없구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벽력존자는 도포를 빨기 시작했다.
속곳은 진작 사그라져버렸으나 도포만큼은 천잠사가 섞인 재질이라 아직까지도 해어진 구석 하나 없었다.
무려 육십 년 동안의 케케묵은 땟물이 빠지자 구정물로 인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곡물이 흐려졌다.
곧이어 곳곳에서 물고기들이 벌러덩 뒤집어진 채로 떠올랐다. 그 광경에 벽력존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치대자 원래부터 흑색인 줄 알았던 도포는 본래의 하늘색을 되찾았다.
“맞아, 이건 원래 청포였지.”
세탁을 마치고 바위 위에 청포를 펼쳐 놓은 그는 곧장 자신의 몸을 계곡물에 담갔다.
제마동에 있을 때도 가끔씩 옹달샘의 물로 간단하게 씻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근 채 목욕을 즐기는 것은 무려 육십 년 만이었다.
환골탈태를 겪으면서 몸에 있던 묵은 때도 덩달아 벗겨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탈출하기까지는 달포가 더 걸렸던 만큼 깔끔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씻기 시작하여 이식경가량 지나자 그의 몸은 청결을 되찾았다. 주변을 진동시키던 악취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물 밖으로 나와 땡볕에 대충 말라가던 청포를 다시 걸친 벽력존자의 풍모는 반 시진 전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젊어진 것을 넘어서 이제는 헌앙하고 준수한 모습의 미청년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정작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문득 곤륜파에서의 일을 알아보려고 수소문할 때 사람들에게 더러운 거지 취급을 받았던 치욕이 떠올랐다.
부아가 치밀었으나 무공도 모르는 민간인들이라 그냥 보내주었었다.
그 이후 그는 오늘까지 줄곧 인적이 없는 곳으로만 돌아다녔다. 그게 몹시도 억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장 목욕부터 하는 건데 말이지.”
금세 반로환동을 겪은 사실이 새삼 떠오르자 잔뜩 구겨졌던 인상은 다시금 활짝 펴졌다.
“까짓것, 젊음을 되찾은 마당에 모욕 좀 당한 게 뭐 대수랴?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만끽하는 일만 남았는데.”
벽력존자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뒷머리를 훤칠하게 올려 묶었다.
한 쌍의 벽력도와 벽력검까지 다시 양 허리에 꿰찬 그는 속세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
당금의 무림에서 벽력존자라는 도호는 기사멸조의 죄를 저지른 패륜아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곤륜파의 멸문 소식을 접할 때 그 사실까지 함께 확인한 이상, 차마 그 도호를 다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설령 가능할지라도 의구심을 품는 상대를 향해 일일이 ‘나, 반로환동 했소!’라고 구차하게 설득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도호를 찾아야겠는데…….”
언뜻 떠오르는 것은 곤륜으로의 입문 당시 부여받았던 도호인 ‘금안’이었다.
“아니, 아니다. 기껏 재건한 곤륜파를 다시 산속에 틀어박혀서 도나 닦는 구닥다리로 만들 수는 없지.”
굳이 감금이 아니더라도 폐관수련이건 수도(修道)이건 은둔이건 어디 틀어박힌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졌다.
‘그래, 무림의 여느 문파들처럼 속가로 만드는 거다. 기왕 속가로 만들 거라면 무당처럼 어정쩡하게 말고 아예 화산처럼 화끈하게 속가로 가는 게 좋겠군. 그렇다면 도호가 아닌 성명을 써야 할 텐데…….’
그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이미 백 년도 더 지난 일이니 곤륜으로의 입문 전에 사용하던 본명을 써도 상관없겠지.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고. 그래, 이제부터 나는 담혁건(潭奕健)이다.’
한 가지 더 정리해야 할 사안이 있었다. 반로환동을 밝히지 않는다면 사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리 청년의 모습이 되었더라도 이 나이에 누군가에게 존대를 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군. 그렇다면…….’
나이와는 상관없이 누가 사부냐에 따라서 강호에서의 배분이 완전히 달라진다.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금운존자였다.
사실 금운(金雲)은 원래 ‘금안’이었던 담혁건과 같은 항렬로서 막내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벽력존자를 가장 잘 따랐던 그는 ‘그 사건’ 직후 곤륜파를 떠나서 환속했다.
그때부터 그는 공전절후의 협객행을 펼치기 시작했고, 세상은 그를 곤륜괴협이라고 불렀다.
곤륜파의 멸문 이후 금운존자도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담혁건은 곤륜파의 멸문에 대해 알아보다가 곤륜괴협에 얽힌 비화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살갑게 지냈거니와 자기 때문에 사문까지 뛰쳐나왔다는 사실에 콧잔등이 시큰거렸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그래, 이제부터 나는 곤륜괴협 금운존자의 유일한 직전제자인 담혁건이다!”
자신의 새로운 신원에 대해 확정 지었을 무렵, 그는 감숙성 중부의 한 고을인 화정(?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일순간 넋이 나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냄새의 진원지는 ‘풍운객잔’이라는 현판을 내건 이층짜리 전각이었다.
외견상으로 보이는 규모는 제법 거창했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두 명의 점소이는 담혁건을 더욱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열서넛쯤 되었을까? 담혁건은 한목소리로 환영하는 어린 점소이 둘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희 둘이 매우 닮았구나?”
“네, 저흰 쌍둥이니까요.”
두 점소이는 이번에도 함께 대답했다.
“전 소소(昭笑)예요. 얘 누나랍니다.”
“전 소호(昭呼)예요. 얘 오빠랍니다.”
이어지는 말도 장단은 같았으나 내용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러더니 똑같이 생긴 둘은 담혁건의 앞에서 호칭 문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니들 또 그러니? 그것도 손님 앞에서? 이제는 정말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제법 근엄한 꾸지람과 함께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본인은 예쁘장한 용모의 젊은 여인이었다.
“미안해요, 객주님!”
사과의 말까지 합창하는 쌍둥이 남매를 잠시 쏘아보던 여인의 시선은 담혁건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의 근엄함은 온데간데없이 화사하게 미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해요. 쟤들이 워낙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그래 주실 거죠?”
애교 어린 목소리로 살포시 눈웃음까지 치는 모습이 사뭇 귀엽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담혁건에게 여인의 생김새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무려 육십 년 만에 맡아보는 정상적인 음식의 냄새, 그것만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지금 바로 식사가 가능한가?”
적예원(赤叡鴛)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쌍둥이 점소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담혁건의 인상이 굳어졌다.
“아니,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주방에서 저렇게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거늘, 어째서 안 된다는 건가?”
“실은 얼마 전에 마지막 숙수까지 일을 관둬서 할 수 없이 제가 주방을 맡게 되었거든요. 경험이 없는 관계로 지금 한창 연습 중이긴 한데, 아직도 많이 모자라서…….”
“해서 못 팔겠다는 건가?”
“못 팔겠다는 게 아니라… 딱 까놓고 말하면 그다지 맛이 없어서 말이죠.”
동감한다는 듯 쌍둥이 점소이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적예원이 새침하게 째려보자 얼른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장노(張老)의 요리 실력이 저보단 훨씬 나으니 뭐든지 주문하시면 금방 새로 만들어드릴 거예요.”
“한시라도 더 기다릴 마음이 없으니 잔말 말고 얼른 가져오게. 먹고 안 죽으면 그걸로 된 거지.”
“정말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니 얼른 가져오라니까. 만들어놓은 건 모두 말일세.”
“후회하지 않으실 거죠?”
“어허, 무슨 말이 그리 많누? 냉큼 가져오게.”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적예원이 눈짓하자 두 점소이는 얼른 담혁건을 빈자리로 안내했다.
그사이, 적예원은 자리로 이동하는 담혁건의 옆모습을 슬쩍 흘겨보았다.
은발을 연상시키는 잿빛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리는 가운데 그 끄트머리가 사방으로 살포시 들려 있었다.
특히 우수 어린 깊은 눈매와 따사로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자아내는 동공이 인상적이었다.
완전히 푸른색은 아니었지만 흑단 가운데 은은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동공이었다.
‘뭔가 참 신비로운 분위기의 사람이야. 한데 저 차림새로 봐선 어디서 은거하며 도라도 닦은 걸까? 혹시 보기보다 의외로 나이가 많은 은거기인이라도 되는 걸까?’
초면임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하대하는 걸로 봐서는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했다.
“뭐, 아무렴 어때? 모처럼의 손님인데 잘해줘야지.”
그렇게 적예원은 혼잣말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
도무지 사람이 먹을 것이 안 된다고 확신하던 객주의 음식을 저리도 맛있게 먹어주다니…….
소소와 소호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음식을 만든 적예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주방에서 이미 시식을 하여 그 맛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식탁에 음식을 올려놓을 때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작 담혁건은 세 사람의 예상을 깨고 연방 흐뭇한 감탄사를 발하며 폭풍처럼 음식을 흡입했다.
어느새 음식을 모두 먹어치운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호오! 내 이런 맛있는 음식은 육십 년 만에 처음이로군.”
담혁건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슬쩍 가세한 장노까지 네 사람의 귀에는 그 말이 극찬으로 들렸다.
특히 적예원은 혹시 상대가 지금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지 의심되었으나 이어지는 말로 인해 금세 해소되었다.
“혹시 좀 더 없는가? 남아 있는 게 있다면 서슴지 말고 깡그리 가져오게.”
“실은 지금까지 드신 것의 삼분의 일쯤 더 있기는 해요.”
담혁건은 크게 반색했다.
“호오! 그거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로군. 뭣하고 있나? 바로 가져오지 않고. 얼른!”
얼떨결에 떠밀려서 주방으로 돌아온 적예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 번 시식에 나섰다.
“헉! 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이건 정말 아닌데…….”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꾸역꾸역 옮긴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적예원은 담혁건에게 음식을 내밀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정말 괜찮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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