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의 바다-사진, 왜곡하신 이유가 뭐예요?
정인은 머뭇거렸다. 원래는 신문에 실린 사진, 태휘에게 보낸 사진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인데,
지후 사는 형편을 보니 그런 얘기를 하기가 민망해진 까닭이었다.
<정인> “저······.”
<지후> “말해. 짐작은 했어. IMF가 왔다고 갑자기 나 사는 형편이 궁금해질 리도 없고. 괜찮아.”
<정인> “그럼 말을 할게요. 작년 12월 3일 Q 신문 기사 봤어요. IMF 구제금융 받던 날 그 신문에 실린 서울역 앞 노인 사진.”
<지후> “봤어?”
<정인> “그 사진 선배가 찍었다고 돼 있던데, 맞아요?”
<지후> “그렇지. 내가 찍었어.”
<정인> “그 사진, 그런 거 아니란 거 아시면서 그렇게 내보내셨어요? 게다가 12월 3일 사진도 아니잖아요.”
<지후> “그 얘기 하려고 온 거야?”
<정인> “궁금했어요. 같이 사진 배우고 더구나 기자까지 하시는 분이 왜 그런 왜곡을, ······
아, 죄송해요. 아무튼 그런 걸 하셨을까.”
<지후> “방금 왜곡이라고 했니? 뭐가 왜곡인데?
IMF 구제금융으로 나라가 절망에 빠졌고 그 절망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그림인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다.
조심해라. 너 말 허투루 하면 큰일 난다.”
<정인> “그러면, 정말 그래도 되는 거면 화재로 전소한 자기 집 앞에서 울고 있는
어디 소말리아 사람을 찍으시지 그러셨어요?
그 절망이 그 할아버지의 절망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요?”
<지후> “소말리아랑 IMF가 무슨 상관이야?
IMF를 당한 한국 사람이 소말리아 사람한테 관심이나 있겠어?”
<정인> “그래서 소말리아 사람은 안 되는 거라면
마찬가지로 그래서 IMF 구제금융 소식 이전 사진을 그 기사에 실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12월 3일 이전 사진은 더욱이나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사진 속 할아버지의 절망은 연출된 거라구요.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서. 그걸 아시면서.”
<지후> “그만 따져라. 너랑 얼굴 붉히고 싶지 않다.
그 노인은 나한테는 쌔고 쌘 서울역 노숙자들 중 한 명일 뿐이야.
그 노인이 아니라도 그 옆에서 구걸하던 거지를 찍을 수도 있었어.
12월 3일에도 그런 거지들은 많았을 테고.
그 노인 사진 내보냈다고 달라질 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리고 기자의 자질이나 양심 같은 걸 따지려거든 어디 언론학회 같은 데 가서 얘기해.
난 기자이기 이전에 생활인이야.
밥을 먹어야 살고 그 밥은 사진으로 찍어내야 해.
내가 캐비넷에 넣어 둔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이 밥 지으라고 쌀을 주겠다는데
그걸 썩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니니?
농사꾼이 창고에 넣어둔 볍씨로 5월에 모내기를 하는 거랑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 둬.”
<정인> “차라리 옆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찍으시지 그러셨어요.
차라리 그 많았을 12월 3일 거지들을 찍으시지 그러셨냐구요. 그러면 최소한······.
그리고 케비넷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X 매트에 보낸 사진도 캐비넷에서 꺼낸 건가요?
지금 모내기하시는 거냐구요.”
<지후> “그 사진을 네가 어떻게 알지?”
<정인> “도 사장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에요.”
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인> “궁금했어요. 그 사진으로 선배가 원하시는 것이 뭔지.
그렇잖아요. 그 노인 사진처럼 그냥 신문사에 기사 내면 됐을 일이에요.
그런데 굳이 X 매트 도 사장님한테 사진을 보내셨단 말이죠.”
<지후> “도 사장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갑자기 기사를 내버리면 X 매트에 너무 타격이 클 테니까 미리 언질이라도 해 드린 거라고?”
<정인> “그건 말이 안 돼요.
갑자기 나가나 아는 상태에서 나가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다고 사진에 대한 해명을 들으려고 하신 것도 아닐 거고 들으신 것도 아닐 테구요.
해명을 들었다고 그걸 실어 줄 것도 아니면서요.
어차피 그 기사, 그 사진은 X 매트 도 사장님을 염두에 두고 내는 게 아니잖아요?
독자들이 받을 충격은 이러나저러나 똑같을 뿐인데요.
그러니 제 생각으로는 뭔가 거래를 하자, 이런 뜻으로밖에 안 읽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진 나가기 전에 도 사장님께서 아셔야 했던 거구요.
아니라면 정말 죄송하지만.
더군다나 그 사진을 공개해서 얻는 공익이 전혀 없잖아요?
X 매트가 도둑질을 했나요? 뇌물을 받았나요? 그도 아니면 IMF를 불러왔나요?
사람들 분노만 들끓게 한다는 것,
그리고 X 매트를 파산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
X 매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
이건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선배와 같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말고는?”
<지후> “정인아.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정인> “누구에게나 어두운 욕망은 있을 수 있다고 봐요.
IMF로 돈 버는 사람들은 IMF를 반길 수도 있죠.
지금 선배는 그 욕망의 색깔이 어둡다고 사회적 린치를 가하시겠다는 거잖아요?”
<지후> “아니야! 그 사진, 당장 내일 기사로 내면 아니라는 것을 보일 수 있겠구나? 최소한 너한테는?”
<정인>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드려요.
그거 내서 무슨, ······ 아, 기자한테는 특종, 단독이 참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Q 신문 소속이 아니신데 그게 중요할까 싶기는 하네요.”
<지후> “너도 정치질 하는구나? 기자한테 청탁하는 스킬이 제법인데?”
<정인> “그렇게 보고 싶으시면 그렇게 보세요. 하지만 제가 선배한테 드릴 건 없네요.”
<지후> “좋다. 널 봐서 이번은 캐비넷 안에 넣어두기로 하자.
하지만 영원히 캐비넷 안에서 잠자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정인> “고마워요 선배.”
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지후가 캐비닛 안에 넣어 두겠다고는 했지만,
그녀는 IMF도 지나가고 사진이 시의성이 떨어지면 캐비닛 안에서 깨어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 6 -
이튿날 저녁, 정인은 태휘와 만나서 저녁을 같이했다.
사진이 캐비닛 속에서 잠자게 됐다는 얘기를 하루속히 전해 주고 싶었지만,
그런 얘기를 전화로 하면 뭔가 맥이 빠지는 소식이 되고 말 거란 생각이었다.
마치 김빠진 콜라에서 톡 쏘는 맛을 찾는 것처럼.
그래서 굳이 전화로 해도 될 것을 굳이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묵혀 두었다.
더군다나 이 정도 소식이면 못해도 태휘에게 저녁 한 끼는 근사하게 얻어먹어도 되지 않겠나 싶은 것이었다.
<정인> “어제 지후 선배가 ‘신문사 캐비넷’에 대해 얘길 하더라구.
사진을 찍어뒀다가 필요할 때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쓰나 봐.”
<태휘> “그게 사실이야?
그러면 그걸 일보(註1)(日報)라고 할 수 있나?
써야 할 때를 간 보다가 내보내는 ‘간보’지. 자식, 생긴 것부터 간사하게 생겼더라니.”
<정인> “너무 그러지 마. 그 선배도 IMF로 타격이 커.
오빠도 알겠지만 밥줄 앞에서 사람이 염치가 없어지는 거야. 비겁해지기도 하고.
그냥 그랬던 사람이라고 생각해 줘.”
<태휘> “밥줄 앞에 염치없어질 놈이 무슨 염치로 기자를 해?
그리고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내 앞에서 염치가 없어지는 건데?
그래, 나한테 보낸 사진은 뭐래?”
<정인> “그냥 내보내면 X 매트에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서 미리 언질을 준 거라고 하더라고.”
<태휘> “그건 나한테 와서 직접 했던 말이고.
그거 말고 그렇게 해서 허지후가 바랐던 게 있을 거잖아. 그 얘긴 안 해?”
<정인> “뚜렷한 얘긴 안 하던데.”
<태휘> “그럴 줄 알았어. 말 못 하는 게지.
딴은 양심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이걸 양심이 살아 있다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원.”
<정인> “대신 신문에 내지는 않는댔어.”
<태휘> “그래놓고 내면 안 되지. 아무튼, 결국은 네가 해주었구나?”
<정인>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대단한 거나 한 것 같잖아. 그런 건 아니고 그저······.”
<태휘> “캐비넷 속으로 들어가겠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네 덕에 X 매트가 산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정인> “됐네요. 그런 거 할래 말고, X 매트나 잘 키워.”
<태휘> “그것도 네 덕이지.”
태휘는 윤정과의 추암해변 여행을 떠올렸다.
그때 보석을 해 달라던 윤정, 그는 그 보석을 정인에게 해 주고픈 마음이 생겼다.
<태휘> “이번주 일요일날 시간 비워줄 수 있어? 오빠랑 어딜 좀 가자.
너한테 해주고 싶은 게 있어.”
<정인> “뭔데?”
<태휘> “받기도 전에 김 빼지는 말자.”
정인은 처음엔 별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저 지후를 만난 일로 사례를 한다면 오늘 이 저녁 자리만으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태휘가 개인적 고마움에 대한 선물을 해 준다 하니,
또 시간까지 비워 놓으라 하니 괜히 설렜다.
얼굴이 발개지고 마음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태휘와 헤어진 뒤 정인은 아빠가 입원해 계신 R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채동섭’이라고 이름이 적힌 병실 문을 빠끔 열고 들어가자
동섭은 딸이 들어오는 소리인 줄을 알고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동섭> “오늘은 어디서 오냐? 태휘 만나고 오냐?”
동섭이 물었다.
<정인> “응. 어제 지후 선배랑 있었던 얘기 들려주니까 한결 마음 놓여 하더라고.”
정인이 대답했다.
<동섭> “또?”
<정인> “저녁 같이 먹었어. 일단 X 매트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니까 얼굴이 펴지던데.”
<동섭> “회사(L 식품)는?”
<정인> “회사 생각은 당분간 하지 마. 아빠 건강이나 챙겨. 건강해져서 회사도 다시 살리고.”
그는 딸의 대답에서 어려운 회사를 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줄 짐작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 주석
註1. ‘한성순보’는 열흘 순(旬) 자를 써서 열흘마다 발행하는 신문이었고, 월보(月報)는 월마다, 주보(週報)는 일주일마다 발행한다. ‘일보’는 날마다 발행하는 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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