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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순덕님의 서재입니다.

드럼 더 드림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순득이
작품등록일 :
2022.05.19 16:42
최근연재일 :
2024.04.18 16:27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144
추천수 :
17
글자수 :
227,543

작성
22.05.19 17:31
조회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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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1쪽

1997년 추웠던 그날.

DUMMY

1997년이 시작되는 차가운 겨울. 나는 인생에서 첫 패배를 맛보았다.


19살. 나에게 인생은 꽉 막힌 방이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가만히 앉아 공부하고, 주는 밥을 먹던 그 시절. 어느 날은 현실에 순응하고, 또 어떤 날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라는 어지러운 마음에 혼란을 느끼던 때였다. 잠이 부족해 쉬는 시간이면 고꾸라지듯 책상에서 잠들던 그때의 내 꿈은 별거 없었다.


‘97학번 대학생’


수능이 끝난 날, 반 에서 친했던 몇몇 모범생 친구들과 보지 말아야할 비디오를 빌려 부모님이 비운 집에 앉아 숨죽여 보다 지루해 잠들어 버린 하루처럼 설렘과 긴장감은 금방 사라지고, 현실의 냉혹함이 찾아왔다.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았는데 친구들은 하나 둘 합격의 영광을 안고 인 서울의 행복감을 만끽했고, 나는 처절히 혼자 남았다.


"아~~~ 없어."


"아~~~~~~~~."


“여기가 마지막 대학인데 어떡하지?”


유나는 다시 한 번 대자보를 들여다봤다. 독심술을 쓰듯 아무리 노려보아도 ‘진유나’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험번호까지 꼼꼼히 다시 살펴봤지만 역시나 어디에도 없었다.


뻣뻣이 서있는 다리가 땅바닥에 달라붙어 유나의 몸은 그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의 뇌도 녹아내린 듯 정신이 멍해졌다. 유나를 깨우기라도 하듯 손에 들린 삐삐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의 팔처럼 낯설게 들린 삐삐 화면에는 ‘8282’, ‘825’ 번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보나마나 ‘엄마’다. 흘낏 번호를 확인하고 호주머니에 다시 밀어 넣었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가파른 비탈길을 이거 하나 보자고 올라왔는데, 내려가는 길이 무거웠다. 터벅터벅 초라한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합격자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날아와 파편 박히듯 상처를 주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기다란 굴 같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은 마치 지하 세계로 안내하는 듯 했다. 차가운 기계 버튼을 눌러 노란색 지하철 티켓을 뽑아 들고, 또 멈췄다. 집으로 가야할지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려야할 지 결단이 서질 않았다.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와 천원 지폐 다섯 장이 나왔다. 어디론가 떠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그냥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는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눈치 없는 엄마는 나한테 확인 사살할 게 뻔하고, 얄미운 유진이는 놀릴게 뻔하고...........무엇보다 그 지긋지긋한 수험생활을 1년 더 해야 한다니......... '


힘없이 방문을 열자 유나와 한 몸같이 지내던 오래된 책상과 의자가 반겨주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너랑 헤어지기 싫었는데, 계속 같이 하자! 재수, 삼수........’


“나쁜 것.”


마치 시험에 떨어진 것이 다 책상 때문인 것 같아 힘껏 발로 걷어차 버렸다. 아픔은 오롯이 유나의 몫이었다.


‘어차피 이리된 거 책상에 그냥 머리를 확 박고 기절해 버릴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았다. 책상에 양 손을 내려놓고 정수리를 맞춰서 힘껏 머리를 내리다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그래, 나는 그런 용기도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이라도 짜내려던 유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힘에 밀린 의자가 뒤로 밀려나 뒤집어졌다.


‘아! 배고프다.’


이러는 자신이 싫었지만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찬거리와 양념들... 하나같이 유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만 가득했다. 그 흔한 우유하나 없는 냉장고는 지금 유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대학에 다 떨어질 수가 있지? 하나라도 붙여줄만한데, 세상이 날 버렸어."


그렇게 쥐어짜도 안 나오던 눈물이 그제야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서러움에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음을 쏟아내고 나니 더 배가 고파졌다.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고 난 유나의 얼굴은 비장했다. 지갑을 열어 얼마 없는 현금을 다시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나가서 햄버거 하나 사고, 콜라 한 잔 마시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돈은 5000원. 됐어! 충분해!”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고 두꺼운 패딩 점퍼를 걸쳐 입은 후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의 차가운 바람이 유나의 얼굴을 때렸다. 뱃속이 비어 더 추운 것 같았다.


터벅터벅 걸어 근처 햄버거 가게로 갔다. 손에 힘이 없어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무거 운 문을 밀고 들어가 불고기 버거 세트를 시켰다.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니 마음이 조금 진정 되었다. 감자튀김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나니 속이 편안해졌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배가 불러 그런지 좀 전보다 덜 추워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이제 어떡하지?”


니체도 산책을 하며 사색을 즐겼다는데, 계속 걷다 보면 뭔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걷고, 걷고, 걸어도 유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니체가 아니니까.’


이렇게 계속 걸으면 그나마 불렀던 배가 꺼질 것 같아 주변을 살폈다. 지금 가진 돈으로 음료수 정도는 살 수 있지만 쓸데없이 마시는 것으로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유나는 씹을 수 있어야 먹는 거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오른쪽 지하로 큰 서점이 보였다. 서점, 나쁘지 않다. 일단은 사람이 많이 없는 곳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지하로 내려오니 서점 특유의 향기가 났다. 책 냄새도 좋고, 주변을 보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도 좋았다. 스스로의 판단을 칭찬하며 잡지책 코너로 바로 갔다. 사은품들로 유혹하는 잡지책을 눈으로 훑으며 쭉 가다 환하게으며 유나에게 하트를 보내는 귀여운 남자를 보고 멈췄다.


"오, 잘생겼다."


누가 봐도 연예인인데 묘하게 가슴을 떨리게 하는 외모였다. 유나는 왜 자기가 서점에서 이러고 있는지를 잊고 멍 하니 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신의 학교를 홍보하고 있는 광고물 같은 거였다. 아래에 선명하게 박힌 붉은 글씨 ‘이지 예술 대학교’가 가슴에 콕 하니 박혔다.


“이지가 어디지?”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뭐가 중요한 가 표지서 환하게 웃고 있는 유나의 이상형이 예쁘게 손짓하고 있는데........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유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다.


“그래,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멋진 놈하고 한 번 살아보자!”


.

.

.

.


"뭐? 이지 예술대학교?"


엄마가 기가 막힌 얼굴로 팸플릿을 받아들었다. 유나는 팸플릿으로 맞으면 얼마나 아플지를 미리 계산해 보았다. 둥글게 말아 머리를 맞으면 가장 아픔이 덜 할 것이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펼친 상태에서 얼굴이나 팔을 맞았을 때는 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몸을 가능한 웅크리고 정수리가 보이게 고개를 숙였다. ‘설마 아래로 숙여서 내리 꽂지는 않겠지’ 란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가며 모서리의 아픈 부분이 정수리에 팍팍 꽂혔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 였다. 머리 가운데에서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유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결심했어! 내 인생이고, 지금부터는 내가 책임질 거야!!”


"유나야, 시험에 떨어져서 힘든 건 알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엄마가 긴 숨을 내쉬고는 평생 들어 보지 못한 차분한 말투로 한 자 한 자 꼭 꼭 누르며 말했다.


"유나야, 여행이라도 다녀와서 마음 다시 잡고 내년에는 사범대 말고, 교대로 시험보자.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


평소에 별 말 없는 아빠까지 가세했다. 34평 평범한 아파트, 평범한 거실의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갈색 가죽 소파 아래에 둘러 앉아 가족회의 아니 가족이 합세해서 달래기에 나섰다.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챙겨온 일관성 없는 모양의 머그컵들을 바라보며, 유나는 고집 센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속의 티백이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아닌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나야. ~ "


따뜻한 차로 입을 축인 엄마는 억지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더 무섭게 온화한 목소리로 유나를 불렀다.


"몰라. 안들려."


"아니, 전문대라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공부만 하던 애가 왜 갑자기 예술대학을 간다고 그래?"


"재수는 죽어도 안 할 거야."


엄마는 점점 붉어지는 얼굴을 손부채로 식히고 있었다.


'엄마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느껴진다. '


'어떻게 여기서 더 버텨야 하나, 방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 애가 다 늙어서 사춘기가 왔나?“


'갱년기 엄마가 폭발하면 답이 없는데........'


"엄마, 거기 실기 본대. 어차피 떨어질 거니까 맘대로 하라고 해. 지가 무슨 방연과를 간다고."


역시나 유진이는 내 동생이다. 어떻게 저리 맞는 말을 가슴에 못이 박히게 하는지. 엄마의 얼굴에 다시 살색 빛이 돈다.


"여기, 실기 봐?"


팸플릿을 엄마에게서 받아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보여줬다.


"안 읽어봤어? 여기 봐봐. 성적 30프로에 실기만 70프로야.“


유진이는 엄마 옆에 딱 붙어 앉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주며 말했다.


“말이 돼? 대한 예술 대학교도 실기 60프로야. 우리나라에 방연과 있는 데가 딱 3개 있는데, 뭐 거기 지원하는 애들은 다 놀고 왔대? 걔네들 공부보다 실기 연습만 엄청 한 얘들이야. 그리고, 엄마, 솔직히 이런데 오는 애들 다 얼마나 예쁜지 알아? 객관적으로 봐봐. 엄마 같으면 뽑아주겠어?"


"그렇지?"


엄마가 머그컵의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엄마의 언성이 높아질라 긴장했던 아빠도 소파 한 가운데에 편안하게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었다.


“그냥 바람 좀 쏘이고 와서 학원 알아보면 되지. 요즘 뭐 재수가 흠도 아니고, 더 좋은데 가면 돼.”


아빠의 무덤덤한 말에, 다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모습에 유나는 발끈했다.


"뭐야, 지금 다들 나 무시하는 거야? 알고 보면 내가 연기 천재일지 누가 알아?"


엄마는 내 말에 슬쩍 웃기까지 한다.


' 완전 무시하는 거지.'


유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고 봐!”


“공부를 좀 그리 하지.”


방으로 들어가는 유나의 뒤통수를 엄마는 또 후려쳤다. 눈앞이 흐려지며 다시 서러움이 몰려 왔다.


“두고 봐! 내가 꼭 합격하고 만다.”




이지 예술 대학교. 처음 들어보지?


작가의말

지금 너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더라도 해 보는 거다. 무엇을 하든, 하지않든 시간은 흘러가고 너는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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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학기의 시작 22.11.17 18 0 9쪽
41 이. 사. 장 22.11.10 18 0 10쪽
40 차원의 문 22.11.03 17 0 9쪽
39 진실 22.10.27 16 0 9쪽
38 사라졌다! 22.10.24 16 0 10쪽
37 붉은 문 22.10.06 20 0 9쪽
36 삼각관계? 22.09.29 1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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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살과의 전쟁 22.09.22 16 0 10쪽
33 우린 너무 달라요. 22.09.19 18 0 10쪽
32 어리석은 선택 22.09.15 22 0 10쪽
31 요즘사람 나중사람 22.09.08 20 0 11쪽
30 끊어낸다는 것 22.09.01 21 0 9쪽
29 머니 22.08.29 20 0 10쪽
28 이사장과의 우연한 만남 22.08.25 24 0 10쪽
27 태준과 영웅 22.08.22 24 0 11쪽
26 농가 22.08.18 24 0 10쪽
25 이상한 절 22.07.25 26 0 11쪽
24 프로 민폐녀 22.07.21 20 0 11쪽
23 불편한 동거 22.07.18 27 0 10쪽
22 MT 2 22.07.14 21 0 10쪽
21 MT 22.07.11 2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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