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장과의 우연한 만남
“찜찜해! 찜찜해!”
연신 같은 말을 해대는 유나가 답답한지 진희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 좀.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어?”
이때다 싶어 유나가 진희에게 딱 붙었다.
“너도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진희는 정말 모르는 듯 했다.
“아니. 영웅선배랑 태준 오빠.”
“아! 난 또”
진희는 알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상하잖아. 뭔가 막 비밀이 있는 것 같고. 거기 기도원도 이상하고.”
진희는 팔짱을 끼고 유나를 지긋이 봤다.
“세상에는 말이야. 모르는 게 더 편한 것도 많아. 괜히 호기심으로 파다가 더 골치 아파 진다고.”
유나는 포기가 되지 않았다.
“아! 진짜 궁금한데.”
“저기 네 짝궁 아니니?”
진희가 유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 뭐?”
방송국의 커다란 창밖으로 영식이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꼴이 딱 봐도 유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쟤는 왜 저러고 있대? 학교 안에서는 전화하면 되는데. 하여간에.”
어벙벙한 모습으로 두리번대는 영식이가 오늘은 왠지 달라보였다.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유나는 슬쩍 뒤로 다가가 무릎을 쿡 하고 찌르자 여지없이 영식이 폭 하고 앞으로 넘어졌다.
“아이씨”
“뭐? 아이씨? 너 지금 나한테 욕한거야?”
무릎을 털며 일어나는 영식을 쏘아보며 유나가 얄밉게 말했다.
“왜?”
영식이 유나에게 물었다.
“내가 할 말이지 그건. 왜 왔는데?”
“뭘?”
“너가.”
“그러니깐 내가 뭘 왜 와?”
“어?”
“아, 왔다. 나 먼저 갈게.”
영식은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긴 생머리의 여리여리한 여학생에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달려갔다.
‘뭐지 이 기분? 나 실연당한건가? 기분이 너무 안 좋은데.’
“촌스럽게 하얀 원피스가 뭐야?”
언제 나왔는지 진희가 위로라고 유나에게 말했다.
“뭐지? 지금? 나 실연당한거야?”
유나가 보글보글 양갈래로 묶은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만지며 물었다.
“그러게. 너도 저렇게 긴 생머리하고 그러면 좀 나아보일 것도 같은데.”
“뭐야? 내가 지금 미모에서 밀린다는 거야?”
유나가 발끈하자 진희가 손사래를 치며 더 불똥 튀기 전에 방송국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영식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니 오늘 밤 소주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곱슬곱슬 양갈래 머리를 만지다가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진희에게 소리쳤다.
“진희야! 미용실 안 갈래?”
유나는 머리가 너무 많이 상해 잘라내다보니 똑단발이 되었지만 거울을 보며 만족했다. 앞머리를 눈썹위로 일자로 잘랐더니 왠지 눈은 더 크고 얼굴이 조막만 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걸 네가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말은 예쁘게 하지 못해도 다 챙겨주는 츤데레 진희가 툴툴댔다.
“그치 않아? 성형도 안했는데 성형한 것처럼 드라마틱한 변화. 나 막 눈도 커지고 얼굴도 안깍았는데 작아지고 완전 만족!”
“오버 하지마!”
진희가 뼈를 때렸다. 우울한 기분이 싫어 괜히 더 오버하며 얘기하는데 딱 집어 말해주니 정말 진희다웠다.
“여기까지 따라와 줬으니 내가 밥 살게.”
“그래.”
쿨하게 진희가 가방을 들고 먼저 나갔다. 유나는 밉지 않은 시선으로 진희를 따라가며 물었다.
“소주에 곱창 어때?”
“나 너랑 술 안 마셔.”
“아! 참! 그치!”
유나는 자신이 술을 끊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럼 먹을 게 없는데.”
“사이다에 삼겹살 먹자!”
진희는 아는 데가 있는 듯 앞장서서 걸었다.
“저거 영웅 선배랑 태준 선배 아냐?”
진희의 팔을 잡은 유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둘이 저렇게 친했나?”
태준과 영웅은 길가에서 담배를 피며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늘 영웅을 멀리하던 태준의 모습과는 달리 살짝살짝 미소도 보이는 것이 영웅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어렴풋한 짐작이 들었다.
“맞다! 나 봐봐!”
유나가 진희를 흔들며 머리를 매만졌다.
“뭘 또 봐!”
“나 알아보겠어?”
“엉?”
“나 진유나인 거 알아보겠냐고?”
“뭐, 얼굴 보면 알겠지?”
“모르겠지?”
“뭐래?”
유나는 머리를 다시 매만진 후 선배들 옆으로 다가섰다. 진희가 손을 뻗었지만 유나의 행동이 워낙에 빨라 잡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혼잣말처럼 말한 후 진희는 유나의 뒤를 마지못해 따랐다.
“유나 머리 스타일 바꿨구나.”
슬쩍만 다가갔을 뿐인데 영웅선배가 밝게 인사했다.
“네? 네.”
실망스러운 유나의 목소리 뒤로 진희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때 진성선배 집에서 같이 본 친구구나.”
유나보다 훨씬 뛰어난 미모를 지녔음에도 진희는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 장점아닌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얘도 방연관데.”
유나가 슬쩍 말하자 진희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냥 조용히 하라고.”
유나의 말은 못 들었는지 영웅과 태준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눈치 없이 유나가 계속 어슬렁거리자 보다 못한 태준이 한마디 했다.
“집에 안가?”
“어? 가야지.”
유나는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어필했지만 태준은 별 말이 없었다. 진희가 유나를 끌어당겼다.
“가자! 배고파!”
“어.”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유나가 대답하는데 돌아서려던 찰나 까만 승용차가 영웅과 태준 앞에서 섰다. 태준이 곁눈으로 유나에게 가라고 표시했지만 유나는 반항심인지 일부러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한숨을 쉬며 진희는 한쪽으로 비켜났고, 어찌하다보니 영웅과 태준 사이에 유나가 서 있었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고, 입학식에서 봤던 작고 하얀 얼굴의 이사장님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내렸다.
“안녕.”
오늘은 정장이 아닌 편안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편안한 면바지에 가벼운 면 티는 속의 근육을 자랑하든 찰싹 몸에 붙어 있었다. 얼굴은 여자처럼 곱지만 건장한 몸이라 매력 있었다.
‘아 또 딴 생각!’
유나는 자신의 치명적인 단점인 잘생긴 남자 앞에만 서면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을 욕하며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다.
“여기 예쁜 학생은 누구?”
이사장은 유나를 향해 윙크를 날리며 영웅에게 물었다.
“저희 과 유나라고. 귀엽죠?”
“아, 안녕하세요.”
유나가 90도로 공손히 인사했다. 태준이 지금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이사장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익히 알고 있는 사이인 듯 이사장은 편안하게 태준을 대했다.
“영웅이 사정얘기 들었지? 수술하고 얼마간만 네가 좀 애써주라.”
이사장은 태준의 팔을 가볍게 툭툭 쳤다.
“잠시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말을 하다 태준이 유나를 돌아봤다.
“자리를 좀 옮길까요?”
상황 판단이 늦은 유나가 눈을 꿈뻑이자 이사장은 유나를 돌아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예쁜 학생은 다음에 또 만나요.”
다시 보니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며 이사장이 유나에게 인사했다. 다행히 조심스러운 성격인지 얼굴에 미소만 지을 뿐 스킨십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 긴장감은 조금 풀렸다. 승용차 문을 열던 이사장이 유나를 다시 돌아봤다.
“그런데 학생 이름이 유나라고 했지?”
“네? 네.”
“음...... 그래”
알수 없는 말을 하며 차에 탄 이사장을 보며 유나는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태준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유나를 돌아봤다.
“눈치 좀 있어라. 끼고 빠질 데는 구분해야지. 아무데나 설치고 지랄이야.”
거친 표현을 하는 태준에게 대꾸할 수가 없었다. 정말 뭔가 잘못한 기분이었다. 그냥 갔어야 했는데, 오지랖인지 성격이 문제였다.
“유나야. 다음에 또 만나자! 태준이 이 자식은 영 표현이 그러네. 숙녀에게.”
눈을 찡긋하며 영웅이 돌아서는데 유나가 불렀다.
“그런데 선배 어디 아파요?”
“어?”
당황한 목소리로 영웅이 말했다.
“좀 전에 이사장님이 수술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신경 좀 끄라니까.”
태준이 발끈하며 영웅을 잡아끌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영웅이 별일 아니란 듯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로 팔로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이렇게 보면 영웅 선배 정말 착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많은 사람인데, 이사장의 꾐에 넘어간 착하고 맹한 사람인가? 유나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아무래도 영웅 선배는 너무 착한 것 같아.”
“백치미지.”
진희가 옆으로 와 수정해줬다.
“안갔어?”
진희를 잊고 있던 유나가 놀라서 물었다.
“삼겹살 사준다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진희답게 시크하게 말했다.
“영웅선배 수술한다고 했지?”
유나가 물었다.
“음. 무슨 수술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뭐 말을 안했으니 알 수가 없지.”
“뭐야. 진짜 다 들은 거야? 저어기서?”
진희가 있던 한참 떨어진 장소를 가리키며 유나가 물었다.
“응. 내가 좀 예민해.”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진희가 말하자 유나가 감탄했다.
“완전 소머즈네.”
어깨를 으쓱하는 진희는 뭔가 있어보였다. 언젠가는 저 능력을 꼭 써먹고 말테다 라는 이상한 마음도 생겼다.
“뭐 먹을까?”
유나가 해맑게 말하자 결국 침착한 진희가 화를 냈다.
“삼겹살! 삼겹살에 사이다! 몇 번을 말해 진짜.”
앞장서서 씩씩대며 걸어가는 진희를 유나가 쫓았다.
“알았어. 내가 대박 많이 사줄게.”
이지 예술 대학교. 처음 들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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