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석 ? 조 (2)
“편하게 말씀하시죠.”
- 그··· 일전에 말씀하셨던 캐스팅 관련 사안 말입니다. -
어째 첫마디가 제법 감미롭고 재미있고 흥미롭군.
한 번 감상해볼까?
“네.”
-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셔도, 아니······. 저희가 대표님과 조금 더 이것저것 논의를 하고 싶어서요. -
논의라, 이건 더 구미가 당긴다.
“논의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 이번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원하는 배우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추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희도 어느 쪽이 더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 배역들이 있는데, 그런 배역에 대해서도 대표님과 함께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캐스팅 협상 과정에서도 도움을 구하고 싶고요. -
나의 질문에, 민홍국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답을 쏟아냈다.
본래 내 요구사항은 배우를 추천할 권한을 달라거나, 오디션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것 정도가 다였다.
굳이 따지자면 저쪽에 결정권이 있고, 나는 살짝 의견을 내는 수준.
하지만 지금 이 제안은······.
“그럼 사실상 캐스팅 권한 일부를 넘겨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다. 그냥 캐스팅 권한 반 정도 떼어준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 네, 하지만 그 편이 저희에게도 훨씬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솔직히 이건 좀 놀랐다.
캐스팅은 사실상 프리 프로덕션 (촬영에 들어가기 전 제작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과정)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특히 드라마는 캐스팅이 반 이상이다.
누가 나오느냐가 곧 사전 홍보, 1화 시청률, 화제성은 물론이고 작품의 퀄리티까지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도가 높으니 투자자와 제작자, 캐스팅 디렉터와 감독 뿐만 아니라 이미 캐스팅된 배우들까지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거고.
‘흐음······.’
민홍국의 제안을 들은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캐스팅 리스트로 향했다.
말했다시피, 이 캐스팅 리스트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서희은 문제 뿐 아니라 다른 쪽으로도.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상대가 이런 제안을 해준다면 조금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확실히 이건 거절할 이유가 없지.’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그렇게 하죠. 서희은 배우님은 제가 기획안이랑 대본 보내고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괜찮을까요?”
- 네? 대표님이 직접이요? -
다리를 놔주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나서서 캐스팅까지 해보겠다는 말에, 민홍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서희은의 캐스팅은 내가 직접 나서야할 이유가 있다.
아니, 처음부터 저쪽이 오케이를 하면 직접 움직일 생각이었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어쨌든 제 추천으로 시작된 일이니,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준비한 멘트를 던지자, 민홍국이 얼떨떨하면서도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 그렇게까지 도와주시면···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
“그럼 제가 먼저 약속 잡고 장소랑 시간 보내드리겠습니다.”
* * *
“김 비서님은 한 부장님에게 지금 진행 상황 전달해 주십시오. 당분간은 대외비니까 외부에 유출 안되게 주의 주시고요. JW쪽 계열사 인맥 동원해서 계열 배우들 스케줄 전부 확인하고, 캐스팅 가능한 배우들 추려서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민홍국과의 통화를 마친 후, 나는 곧바로 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야 이 시기에 대충 누가 무슨 작품에 들어가는지 알고 있지만, 그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면 뭔가 이상하지 않겠나.
게다가 황 피디와 민홍국 쪽이 먼저 결단을 내렸으니, 나도 이 정도 액션은 취해주는 게 맞다.
‘캐스팅 협상 과정에서도 도움을 받고 싶다’, ‘이 편이 우리에게도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에는 분명 그런 뜻이 깔려있는 걸 테니까.
아마 예솔에 더해 서희은까지 찾아낸 내 안목에 JW쪽 인맥이 더해진다면 캐스팅 권한을 떼어주는 게 절대 손해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겠지.
확실히 저쪽도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게 느껴지는 판단이다.
“네,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캐스팅 리스트에 있는 배우들, 혹시 사생활에 문제없는지도 한 번 체크해 달라고도 전해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한 조건을 끼워넣은 나는 곧장 서희은에게 연락을 취했다.
“네, 선생님. 신강인입니다.”
* * *
“매번 대표님이 오시게 하는 거 같아서 좀 죄송하네요.”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을 한 서희은이 나를 맞이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참 마스크가 좋다.
예쁘거나 아름답다, 귀엽다,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배우의 얼굴은 예쁘고 잘 생긴 게 다가 아니니까.
그보다는 ‘개성’과 ‘느낌’이다.
기억에 남을만큼 충분히 개성이 있으면서, 최대한 다양한 느낌을 담을 수 있는 얼굴.
서희은이 딱 그렇다.
첫 만남 때는 꽤 강단있고 고집이 세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특징에 뛰어난 연기력이 더해지면, 작품에 따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용건이 있어서 오는 건데요.”
간단한 인사치레를 마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대본을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예솔이가 출연했던 로맨스는 그린 제작한 황봉성 피디의 차기작 기획안이랑 대본입니다.”
캐스팅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서희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걸 주시려고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네.”
“대표님이? 직접?”
“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는 나와 대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본을 집어들었다.
“지금 읽어봐도 되나요?”
“네, 그러시라고 가져온 건데요.”
이어서 서희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 장 한 장 대본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옆에서 기다렸다.
중간 중간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때로는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도 하는 걸 감상하면서.
내 경험상, 저건 이미 대본에 몰입을 시작했다는 증거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서희은은 말없이 대본을 덮었다.
그리고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뭐랄까······. 참 특이하시네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누가 탑스타도 아니고 A급 중견 배우도 아니고, 저같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배우한테 줄 대본을 직접 가지고 와요?”
나름대로 엔터판에서 잔뼈가 굵은 티가 묻어나는 지적이다.
이 바닥은 인지도가 갑을 만드니까.
탑 작가에게는 배우들이 줄을 서고, 반대로 탑배우에게는 작가들이 대본을 가져다 바친다.
더 일반적인 코스로는 회사를 통해 대본이 들어가고, 배우가 흥미를 보이면 그제야 미팅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서희은의 인지도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렇게 회사 대표가 직접 찾아와 대본을 바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그거야 지금 얘기고.
장차 에미상 후보에 오를 배우에게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도 에이전트 시절의 내가 이런 배우를 발견했다면 똑같이 했겠지만.
“절박해서요.”
재벌 3세 엔터 대표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오자, 서희은의 표정이 정말이지 볼만하게 변했다.
뭐라고 해야하나, 너무 의외라서 웃음이 터질 것 같은데 웃으면 안되는 상황이라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
“절··· 박이요?”
“네, 전 이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들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남을 명작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직접 제작에도 참여했고요. 그리고 이 작품이 그렇게 되려면, 서희은 배우님이 반드시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서희은의 입가에 황당함과 약간의 민망함, 그리고 약간의 기쁨이 담긴 미소가 번졌다.
모든 배우는 인정받길 원한다.
서희은처럼 실력도 있고 경력도 긴편인데 인지도가 부족하다면 더더욱.
그런데 내가 이렇게 자신을 인정해주니,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
나는 대답 대신 곧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라는 눈으로.
“하아······. 대표님 진짜 희한하신 분이네.”
이어서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예솔이한테 새 작품 들어간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선생님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고.”
······.
이거 아직 대외비인데.
힐링- 요정······. 이러기냐.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래서······. 서 배우님 생각은요?”
“들어가야죠. 우리 예쁜 제자도 같이 하고 싶다고 하고, 대표님이 이렇게 대본 들고 쫓아오기까지 하셨는데.”
그녀가 캐스팅을 수락한 순간, 나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 순간이 가장 즐겁다.
원하던 퍼즐 조각들이 모여 완성될 아름다운 그림을 상상하는 이 순간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이 즐겁다.
이 맛에 내가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이 일을 못 그만뒀었지.
“어머, 정말 좋아하시네?”
그런 내 감정이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서희은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님, 이 나이 먹도록 인지도 이것밖에 안되는 배우한테 뭘 그렇게 기대가 크세요.”
하지만 그녀의 눈은 말과는 달리 확신과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반드시 해내겠다, 보여주겠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이건 정말 기대해도 되겠는데······?’
바로 그때, 뒤늦게 도착한 민홍국 캐스팅 디렉터가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간에 차가 막혀서······. 그, EN 스토리의 캐스팅 디렉터인 민홍국이라고 합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온몸에서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캐스팅은 끝났으니까, 계약 사항 조율만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말씀드린대로입니다.”
얼떨떨한 눈으로 나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민홍국을 향해, 서희은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서희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대박 작품과 숨겨진 명배우가,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 * *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희은과의 미팅이 끝난 후, 민홍국은 나에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닙니다, 제 추천인데 이 정도는 하는 게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답했다.
애초에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것까지가 서희은 캐스팅이라는 그림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묘하다.
성공하기 전에는 온갖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드는 탑스타를 동경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 위치에 오르면 환멸을 느낄 때가 있다.
생각해 봐라, 전에는 대놓고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대본을 들고 쫓아오고, 한 번만 도와달라고 애걸하고······. 때로는 사과를, 때로는 아첨의 말을 늘어놓는다.
아니, 그냥 주위에 그런 사람이 들끓게 된다.
그리고 다른 분야라면 몇 년에 걸쳐 일어나야 할 이런 변화가, 연예계에서는 짧으면 불과 몇 달 사이에 일어난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인간불신을 넘어 인간혐오에 빠지기 딱 좋은 환경이지.’
아마 서희은이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가 된 이후에도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뛰었던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기에 오늘 일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아직 이렇다 할 인지도가 없는 자신을 캐스팅 하기 위해 직접 달려온 유일한 대표가, 아마도 나일 테니까.
그리고 이건······. 아메리칸- 에이전트, 해준-리의 영업비밀이기도 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 말이다.
자, 라떼 얘기는 여기까지.
이제 다시 일을 할 시간이다.
“디렉터님, 혹시 서브 남주 쪽은 캐스팅 정해진 거 있습니까?”
공식적으로 캐스팅 권한까지 받았으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보자고.
- 작가의말
어느새 25화네요.
제목 변경은 이번에도 큰 성과가 없었던 것 같지만...
굴하지 않고 열심히 쓰면서 더 좋은 제목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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