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냥 대표는 아니지
설마 이런 조건을 내걸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다.
‘이걸 어쩐다······.’
하지만 나는 이미 힐링 요정에게 가수 활동과 배우 활동을 병행해도 좋다고 약속한 상태.
여기서 말을 바꾸면 내 아티스트에게 신뢰를 잃게 된다.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쪽이 더 심각한 문제지.
- 네? 연기 선생이 그거 한마디 했다고 우리 회사 아티스트 활동 방향을 바꾼다고요?
- 대표님, 그건 좀······.
예솔도 예솔이지만, 이건 사원들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무슨 놈의 대표가 밖에서 몇 마디 들었다고 아티스트의 활동 방향을 휙휙 바꾼단 말인가.
그런 인간이랑은 같이 일 못한다.
내가 그 사람들 입장이라도 똑같은 생각일 거다.
서희은이 머지 않은 시일 내에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될 거라는 걸 모른다면 말이다.
‘······.’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그냥 서희은을 포기할까? 그건 너무 아깝다.
아니면 예솔의 가수 활동을?
아니, 이 틀 안에서 생각하지 말자.
상대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할 바에는 가만히 슬로우 라이프나 즐겨야지.
여기서는 서희은의 생각을 바꿀 방법을 찾는 게 정답이다.
그럼 예솔과의 약속도 지키고, 내가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으니까.
‘일이 생각처럼 안 풀리는데 기댈 구석이 있으면 바로 그만두는 게 싫다고 했지.’
뉘앙스로 보건데 이건 경험담이 분명하다.
이상한 건, 그 말을 하면서 줄곧 예솔이 아니라 날 봤다는 점. 약속도 나에게 받아내려고 했고.
그 순간, 나는 정답을 깨달았다.
‘진짜로 싫은 건······. 그 결정을 내린 주체가 당사자가 아니라 회사였다는 거군.’
틀림없다.
그게 이 사람이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진짜 이유다.
뒤집어 말하면, 그 결정을 내린 주체가 회사가 아니면 된다는 소리.
오케이, 상황 파악 종료.
액션 들어갑니다.
“서 배우님 입장도 이해는 갑니다. 다만 저도 이미 예솔씨와 약속을 한 게 있어서요.”
“약속이요?”
떠보기 위해 떡밥을 던지자, 서희은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역시, 여기서 바로 ‘No’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 내 생각이 정답이란 뜻이다.
그럼 다음 스텝.
“네, 예솔 씨 본인이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어해서요.”
이 대목에서 살짝 뜸을 들이자, 예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둘 다 하고 싶은데······.”
“그래요?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난 둘 다 발 걸치고 있다가 도망치는 거 싫어한다고.”
그러자 희은의 시선이 나에게서 예솔의 얼굴 위로 옮겨갔다.
얼핏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입가에는 보일락 말락하게 희미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
그 미소를 발견한 순간, 나는 확신을 갖고 입을 닫았다.
무조건 앞에 나서서 설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빠져야 할 타이밍에 빠질 줄 모르면 될 일도 안 된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아니라 예솔이 말을 하는 편이 훨씬 더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높다.
“저 둘 다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입을 다무니 예솔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을텐데? 연기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절대 아니에요!”
“흠······.”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희은이 의도한 긴장감이다.
그러나 예솔은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
거참, 생긴 건 귀여운데 하는 짓을 보면 깡다구가 상당히 좋단 말이지.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대표님도 이미 합의 해주셨고, 회사 분들도 저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계시고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어서 예솔이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쿡, 허락이 아니라 합의?”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아이돌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어휘에, 서희은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대표님. 허락이었어요, 합의였어요?”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나는 한술 더 떠 그건 합의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는 뉘앙스로 말을 흘렸다.
“글쎄요, 합의··· 라기보다는 그냥 예솔 씨가 그렇게 못을 박았고, 제가 그러겠다고 약속을 드렸죠?”
“에? 네? 그런 거예요?”
“네.”
예솔의 커다란 눈이 갈피를 못잡고 흔들렸다.
그게 왜 그렇게 되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은은 문자 그대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 시원한 웃음에, 나는 일이 원하던 방향으로 풀렸음을 확신했다.
“응? 왜, 왜 웃으세요?”
반면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예솔은 나와 희은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렇게 한참이나 깔깔대고 웃어대던 희은은 눈물을 닦아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대표님, 재벌 아니에요?”
“맞습니다, 재벌.”
“무슨 재벌이 스무 살 짜리 여자애한테 끌려다녀요?”
“끌려 다닌다보다 아티스트의 의지를 존중해준다고 표현하는 게 좀 더 품격이 있지 않을까요?”
“정말 특이하시네.”
“그런가요? 어차피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켜봐야 좋은 결과 안 나오는 거 아닙니까? 반대도 마찬가지고.”
이어지는 나의 말에, 희은은 생각지도 못한 답이라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대표님에 대해서 편견이 좀 있었나 보네요. 재벌에 엔터 대표라길래 일단 돈 되는 건 다 찔러보고, 아티스트의 커리어나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거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렸거든요.”
“그 두 개가 따로 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해서 좋네요. 돈보다 아티스트 마음이 우선이라고 했으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텐데.”
그렇게 가벼운 농을 던진 서희은은 딴사람처럼 풀어진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봤다.
“좋아요, 뭐. 왜 이렇게까지 저한테 수업을 받고 싶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보죠. 대신 일단 레슨 시작하면 절대 대충은 없어요.”
“감사합니다!”
“고마울 것도 없고요. 난 원래 열심히 안하면 바로 레슨 그만두니까, 그건 꼭 알아두고요.”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습니다!”
어우, 열정 봐라. 눈에서 불꽃 나오겠네.
그래도 보기는 좋다.
* * *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사제 결연을 맺은 후, 예솔은 줄곧 들고 다니던 제 몸뚱이만한 보부상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뭘 찾는지는 몰라도, 가방이 너무 큰 거 아닌가.
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예솔은 선물용 초콜릿 상자 하나를 꺼내 수줍게 내밀었다.
“이거······. 선생님 드리려고 사왔어요.”
저런 건 언제 사왔대.
그리고 타이밍도 뭔가 이상하다.
보통 저런 건 만나자마자 주는 거 아닌가.
“왜 처음에 안주고?”
서희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뇌물이잖아요.”
“뭐?”
정말 발상이 독특하다.
근데 또 듣고보면 틀린 말은 아니고.
“지금 주면 뇌물 아니고?”
“이제 선생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선물이죠.”
“얘 봐라?”
결국 희은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그 선물을 받아들었다. 뭐랄까, 조금 맹랑하지만 그게 얄미운 게 아니라 귀엽다는 반응이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저런 행동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딱히 잔머리를 굴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본능적으로 뭐가 예쁨받는 행동인지 아는 애 같다.
여하튼, 이후 대화의 화제는 돈 얘기로 넘어갔다.
“아뇨, 똑같이 주시면 돼요.”
희은은 레슨비를 더 쳐주겠다는 걸 굳이 거절했다.
돈을 더 받으면 그만큼 더 신경을 써줘야 할 것 같은데, 그 ‘조금 더’가 얼마나 더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돈 받고 더 신경 써주면 그것도 웃기고, 돈만 더 받고 돈값 못하면 그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똑같이 받으면 더 신경을 써줘도 그냥 제가 마음이 가서 그런 거니까 괜찮거든요.”
이유를 들어보니, 또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이 사람의 교육관도 알 것 같고.
‘멋지네.’
사실 캐스팅이나 인맥을 고려한 선택이었는데, 그게 아니었어도 이보다 좋은 선생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예솔씨, 머리가 좋네요?”
회사로 돌아가는 길, 나는 웃으며 예솔에게 말을 걸었다.
“네? 뭐가요?”
“아닙니다.”
음, 역시 머리 굴려서 하는 게 아니구나.
그래서 더 안심이다.
계산이 빨라서 이러는 거면 어디선가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그냥 사람이 이런 거면 실수를 할 일도 없으니까.
“어휴, 그런데 생각보다 똑 부러지시네요. 전 설마 거기서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때, 줄곧 입을 닫고 있던 김 비서가 허허 웃으며 예솔을 칭찬했다.
“헤헤, 아니에요. 대표님이랑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그런 거죠.”
예솔은 특유의 소탈한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그 말을 받아넘겼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곧바로 다음 ‘업무’로 넘어갔다.
“아, 예솔씨 혹시 라이브 방송 예정 있습니까?”
“네, 내일 저녁에 스케줄이 좀 비어서.”
“잘 됐네요. 팬버스 말고, 캠스타로 진행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네.”
라이브 방송은 이제 아이돌에게 있어 그냥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뭐, 이것도 일은 일이니 피곤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로 자기가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기억하는 예솔은 후자였다.
배우 활동을 시작하고 더 이상 팬들과 소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임에도 심심하면 캠스타나 팬버스 라방을 켜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다 사라지곤 했으니까.
오죽하면 팬들이 ‘팬 관리를 빙자한 본인의 수다 욕구 충족’이라는 농담까지 했겠나.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이것도 일은 일이다.
어느 정도는 회사와 합의를 거치고, 라방을 통해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슬쩍슬쩍 홍보를 하기도 하고, 뭐 그런다는 소리다.
“그럼 이번 라이브 방송에서 요즘 연기 배운다는 소리를 슬쩍 흘려주세요. 너무 자세히는 말고.”
“어······.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아뇨,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실력이야 보면 알지만, 준비를 열심히 했다는 느낌을 주려면 시작하자마자 말하는 게 좋죠.”
“저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실력이야 보면 안다는 말이 기분이 좋았는지, 예솔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믿을만 하니까 믿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떡밥을 던진 나는 느긋하게 핸드폰을 켜 내 캠스타그램의 팔로워 수를 확인했다.
‘38이라.’
라방이 끝나고 얼마나 오를지 한 번 볼까?
* * *
다음 날 밤.
예솔의 수다 대방출 시간이 시작됐다.
“음음, 아직 모르겠어요. 일단 지금은 열심히 배우는 중! 근데 너무 재밌어요.”
어떤 아이돌 그룹이든 계약 기간이 끝나갈 시기가 오면 팬들은 불안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계속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을까?
음악을 못하면 어떻게 하지? 배우로는 안 되나?
괜히 준비도 없이 배우 활동 시작했다가 욕을 먹으면 어떻게 하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회사의 지원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극도의 불안함과 분노를 느낀다.
그러니까 팬들을 안심시켜주라고 이런 말을 하라고 했겠지?
뭐, 예솔의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인생 2회차의 대표님은, 그녀보다 몇 수는 더 앞서 있었다.
“아, 대표님이요?”
“완전 젠틀하세요.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배우 이야기도 대표님이 먼저 꺼내셨는데······. 선생님도 직접 찾아주시고, 저랑 같이 가주시기까지 했거든요?”
└ 대표가 그렇게까지?
└ 그래도 신경써준다니 다행이야ㅠㅠ
└ 그러게, 준비도 제대로 안하고 무턱대고 시키는 곳도 많은데.
└ 절대 응원해!
그때, 채팅창에 생각지도 못한 한줄이 올라왔다.
└ 가수 활동도 병행할 예정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배우 활동도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누구?
└ 젠틀하고 키 큰 대표입니다. 잘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 ㄹㅇ?
└ 진짜 대표님이라고?
갑작스러운 재벌 3세의 등장에, 채팅창이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송구스럽지만 내일 다시 한 번 제목을 변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제목은 < 스타도 키워본 놈이 잘 키운다 >입니다.
작가가 제목 x자라 죄송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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