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석 ? 조 (1)
* * *
대본을 손에 들고 캐스팅 리스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미국에서 에이전트로 일하던 시절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헤이, 준! 또······.」
Oh, Fxxx!
갑자기 트라우마가······. 이 기억이 아니잖아!
‘후우······.’
잠깐 심호흡 좀 하고,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할리우드 에이전트라는 건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개념이니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제작자’와 ‘스타’를 연결해 주는 일종의 계약 중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중개인’이라는 단어다.
그리고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는 사람은 본디 양쪽 모두를 만족시켜야 인정받는 법.
소개팅 주선만 잘못해도 인간관계가 상당히 꼬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나 난이도가 높은 직종이라는 게 얼추 감이 올 거다.
거기에 몇 개월 이상 괜찮은 배역을 따내지 못하면 자동으로 배우 쪽과의 계약이 종료되니, 여러모로 꽤나 하드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아시안 에이전트 해준-리는 그 험한 업계에서 어떻게 (잘) 살아남았느냐?
뻔하지. 양쪽을 다 만족시켰으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비결은 간단하다.
- 좋은 작품을,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에게.
끝.
원래 원칙은 간단한 법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냐고?
공부 잘하려면 국영수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건강해지려면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식단도 조절하고 꾸준히 운동도 하고!
이걸 몰라서 못하나? 알면서도 못하지.
똑같은 거다.
‘캐스팅 디렉터가 아주 보는 눈이 없지는 않네.’
여하튼, 그것이 캐스팅 후보 리스트를 확인한 나의 첫 번째 소감이었다.
실제로 캐스팅에 성공한 배우들이야 다 알고 있으니 넘어가더라도, 후보군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훌륭하다.
다만, 이 리스트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는······.
‘서희은은 원래 캐스팅 후보에 없었던 건가?’
예솔의 연기 선생인 희은이 이 시점에는 캐스팅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난 당연히 서희은이 1순위라고 생각했거든.
그만큼 그녀가 맡은 ‘정희’역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으니까.
방영 후 미국 방송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에미상 후보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초일류 에이전트 출신인 내가 보기에도 그녀 이상으로 이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흠, 일이 거꾸로 가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내가 서희은을 연기 선생으로 정한 건 그녀가 예솔의 캐스팅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예솔은 예정보다 빨리 캐스팅이 확정되고 서희은은 후보에도 없으니, 참 일이 희한하게 굴러간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어쩌면 타이밍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것이 강태성의 투자에 ‘로맨스는 그린’의 때 이른 흥행이라는 변수로 생긴 일은 아닐까 하고 결론을 내렸다.
본래 시간대에서는 ‘로맨스는 그린’이 훨씬 더 늦게 화제가 됐고, 덕분에 사이코 X 드라마의 투자자를 구하는데 애를 먹었으니까.
(이렇게 보면 내가 일을 너무 잘한 게 원인인가 싶다)
그리고 제작 타이밍은 본래 캐스팅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 중 하나다.
원하는 배우가 이미 촬영 중인 작품이 있다면 물리적으로 캐스팅이 불가능하고, 더 유명하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휴식기라면 그쪽이 먼저 물망에 오르기도 하고.
여하튼, 지금 서희은 대신 ‘정희’역의 캐스팅 물망에 오른 건······.
‘김윤숙이라······.’
주인공이나 조연의 어머니 역을 주로 맡는 중견 배우였다.
인지도 면에서는 확실히 서희은보다 몇 배는 위다.
‘엄마’하면 떠오르는 대표 배우 중 하나인만큼 연기력도 절대 부족하지 않고.
하지만······.
‘안 맞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희은보다 좋은 캐스팅은 아니다.
“김 비서님?”
“네.”
이에 나는 황 피디와 캐스팅 디렉터의 옆구리를 한 번 찔러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겸사겸사 힐링-요정의 연기력도 좀 구경시켜주고.
배우의 연기력은 대본이나 비중에도 은근히 영향을 주니까 말이지.
이런 게 일석이조 아니겠나.
“예솔씨 연기 연습 영상, 얼마나 촬영했습니까?”
“편집본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원본 말씀이십니까?”
“원본으로.”
“세 시간 분량 넘을 겁니다.”
“원본 좀 제 메일로 좀 보내주십시오.”
“넵,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 *
“가증스러운 년.”
“뭐?”
“가증스러운 년.”
화면 속 두 여자가 핏발 선 눈으로 서로를 노려본다.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예솔의 입꼬리가 뒤틀리고,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커다란 두 눈에는 진한 증오와 분노가 넘실거렸다.
“엄마? 네가 날 엄마로 대한 적이 있기는 해?”
질문을 던지는 희은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냉기가 묻어났다.
입가에는 싸늘한 조소가 걸려있다.
하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슬픔이 어려있다.
“······.”
그 눈동자를 마주한 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끝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
“우, 우와아······.”
영상을 확인하던 김 비서의 입에서 채 억누르지 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진짜 즉흥 연기라고요?”
뭐, 확실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역할에 대한 대략적인 설정과 씬 정도만 정해두고 즉흥 연기를 펼치는 건, 일반인들에게는 제법 신기한 볼거리일 테니까.
심지어 이런 장면을 - 현장과 연습실을 막론하고 - 꽤나 많이 구경한 내가 보기에도 살벌할 정도로 몰입도가 높고, 표현력도 훌륭하다.
그러니 아마추어인 김 비서의 눈에 이 영상이 어떻게 보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역시, 인지도가 문제가 아니야.’
다시 한 번 확신을 얻은 나는 곧바로 이 장면의 시작 부분에 타임 스탬프를 남겼다.
- 딸칵.
그리고는 빠르게 영상을 넘겨 이번에는 예솔과 희은이 서로 꽁냥거리는 연기를 하는 장면에 타임 스탬프를 남겼다.
‘이만하면 알아보겠지?’
못 알아보면 눈알에 문제가 있는 거고.
그럼 나 진짜 실망한다.
* * *
“피디님.”
사이코 X 드라마의 캐스팅 디렉터인 홍국은 강인이 보내준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황 피디를 찾았다.
“신강인 대표가 영상을 하나 보내줬는데, 한 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무슨 영상인데요?”
“그냥 확인하고 피드백만 달라면서 예솔씨 연기 연습 영상을 보냈습니다.”
홍국의 보고를 받은 황 피디는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아무리 연기 경력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이미 캐스팅이 확정된 배우의 연습 영상을 보낸다?
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감?
아니면 생각보다 못하니 이 정도는 감수해달라는 뜻일까? 그럼 비중이 줄어들지도 모르는데?
어느 쪽이든,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다.
‘하여간 여러모로 일을 특이하게 한다니까.’
그리고 영상을 확인하는 순간······.
“······!”
산적 피디의 눈썹이 거칠게 요동쳤다.
“가증스러운 년.”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상대를 노려보는 예솔의 눈빛은, 이게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순간적으로 ‘딸에게 그런 말을 한다’가 아니라 ‘엄마가 그런 말을 한다’고 표현한 것도 훌륭하다.
얼핏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후자가 훨씬 더 상대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잘 표현할 수 있으니까.
즉흥 연기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대사가 튀어나오는 건, 그만큼 센스가 있고 완벽하게 캐릭터에 몰입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그를 정말로 놀라게 한 건, 예솔이 아니었다.
뛰어난 배우는 눈과 표정이 다른 말을 한다.
분노한 표정을 하면서도 눈에는 슬픔을 담을 줄 알고,
얼굴은 무표정을 유지하면서도 목소리에는 감정을 실을 줄 알며,
때로는 뒷모습만으로도 연기를 한다.
딱 지금의 희은처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국의 질문에, 황 피디는 아무런 대답없이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는 빠르게 강인이 찍어둔 타임 스탬프를 따라 두 사람의 연기를 감상했다.
‘연기도 연기지만······.’
비주얼이 완벽하다.
딱 자신이 그리던 개성이 있으면서도 선이 진한 외모다.
무엇보다 신선하다.
김윤숙 배우 역시 연기는 훌륭하지만, 그간 엄마 역을 너무 많이 맡은 탓에 신선함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미 ‘따뜻한 엄마’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외모도 전체적으로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이고.
‘이거였나?’
그 순간, 황 피디는 이 영상을 보낸 이유가 자신이 처음에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신사적으로 일하네.’
이 정도로 역할에 딱 맞는다면 그냥 바로 꽂아도 오케이를 했을 텐데.
심지어 김윤숙보다는 출연료도 쌀 테니, 제작비도 절감할 수 있고.
이걸 거절하는 놈이 있다면 눈이나 머리 둘 중 하나에는 문제가 있는 거다.
그 와중에도 피디와 캐스팅 디렉터의 권한을 최대한 배려해주니, 정말이지 같이 일하는 맛이 나는 사람이다.
“이분이 서희은 배우님이었던가요?”
“네.”
황 피디의 질문을 받은 홍국은 기다렸다는 듯 희은의 필모그래피를 건네줬다.
“피디님도 저랑 같은 생각이시죠?”
그리고는, 이미 결정난 사안을 확인하듯 황 피디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정희 역은 서희은으로 가죠.”
* * *
몇 시간 후, 사이코 X 드라마의 캐스팅 디렉터인 민홍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신강인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사이코 드라마 캐스팅 디렉터 민홍국입니다. -
조금 들뜬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알아차렸다.
- 보내주신 영상, 잘 확인했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 그······. 서희은 배우님을 저희한테 추천하시려고 보낸 거 맞으시죠? -
말투만 봐도 알겠다.
보자마자 딱 감이 왔겠지.
하지만 여기서 바로 예스를 하는 건 너무 건방져 보일 수 있으니······. 동방예의지국 스타일로 가보자.
“캐스팅 과정에도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피디님이나 디렉터 님 생각이 어떨지 몰라서, 일단 영상을 보내봤습니다.”
- 어휴, 정말 감사합니다. -
아니나 다를까, 동방예의지국 스타일의 대답이 돌아왔다.
예의가 이렇게 중요하다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피디님과 디렉터 님이 그리는 그림이 저랑 다르다면 전문가 분들 눈을 따라가는 게 맞죠.”
이어지는 나의 말에, 민홍국은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 아이, 무슨 그런 말씀을. 보는 눈 엄청 좋으신데요. 보는 순간 딱 감이 오더라고요. 이분이다, 정희는 서희은씨 아니면 안되겠다. -
뭘 또 그렇게까지.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다음 말도 대충 알 것 같다.
- 그런데······. 혹시 이 서희은 배우님이 대표님하고도 안면이 조금 있을까요? -
거 봐라. 이렇게 가지.
이 바닥은 인맥 타고 들어가는 게 1퍼센트라도 캐스팅 성공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게 또 무슨 마음인지 내가 정확히 알지.
“네, 제가 직접 선생님 일을 부탁드려서 어느 정도는 안면이 있습니다.”
- 그럼 조금 번거롭지만 혹시······. -
“제가 추천 드렸는데 다리는 못 놔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죠. 선생님께 연락 드려서 자리 한 번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던진 돌이 완벽하게 노리던 새 두 마리의 뚝배기를 깼다고 확신했을 무렵.
- 대표님, 많이 바쁘시지 않다면 제가 하나만 더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
생각지도 못하게 세 번째 새의 뚝배기가 터져버렸다.
- 작가의말
유입 문제로 또다시 제목을 변경하게 됐습니다...
변경될 제목은 < 재벌집 만렙 매니저 > 입니다.
표지는 혼란이 있을 독자님들의 이정표로 놔뒀다가
하루나 이틀뒤에 변경하거나 그대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P.S. 선작을 해두시면 조금 더 편하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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