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요정 키우기 (2)
“으음······. 아니에요, 우선 한 번만 더 해봐도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예솔은 진지한 목소리로 리테이크를 요쳥했다.
마치 이게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진짜 촬영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와 표정이었다.
“우찬 선배가? 나한테?”
그리고는 화장기 하나없는 맨얼굴로 똑같은 장면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은 대사.
그리고······. 비슷한 동작.
‘자, 잠깐만······.’
‘전에 거랑 차이가 없지 않나?’
대표의 디렉팅을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그 행동에,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강인의 눈치를 살폈다.
- 너 뭐 돼?
- 네가 연기를 알아?
- 네가 하라면, 내가 해야 되냐?
- 응, 안해~
일반적인 사회적 맥락에서······. 이건 충분히 그렇게 읽힐 수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왜, 왜 갑자기.’
‘아니, 왜 그러는 건데······!’
조금 전에는 분명 불만이 없는 것처럼 대답해놓고, 왜 여기서 곤조를 부린단 말인가!
순간 직원들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평소 예솔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불만이 있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여기서!
안하던 짓을 하냐고!
‘왜 갑자기 대표님이랑 기 싸움을 하는데!’
‘미치겠네 진짜······. 분위기 좋았잖아!’
설마 여태까지 회사에는 얼굴도 안 비추던 사람이 갑자기 이래라 저래라 하니 없던 성깔이 생기기라도 한 건 아닐까?
온갖 추측과 걱정으로 머리가 뽀개질 것 같았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 * *
“어?”
“응?”
“뭐야, 조금 전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요?”
이런 걸 천재라고 하는 건가?
그게 녹화된 영상을 확인한 직원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 예솔은 분명히 이전과 거의 같은 제스쳐와 말투로, 똑같은 대사를 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거의’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게요. 막상 카메라로 보니까 앞에 찍은 거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네. 그냥 좀 깬다 정도?”
“원작이랑 다르면서도 자연스럽고 좋은데요?
“어떻게 이렇게 바로 고치지?”
특히 ‘? 메이트’를 재미있게 봤던 직원들은 예솔의 연기에 연달아 호평을 내놓았다.
말투와 제스쳐는 말의 ‘내용’ 이상으로 중요하다.
이건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똑같이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해도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면··· ‘조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로 해석된다.
하지만 짝다리를 짚고 어딘지 모를 곳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늘인다면··· ‘어, 엿먹어’ 혹은 ‘뭐래 병신이’라는 뜻이 된다.
더 나아가 고개를 살짝 내린 후에 눈을 치켜뜨며 말하면 ‘너, 두고 보자’가 될 테고.
말할 것도 없이, 이 미묘한 차이를 얼마나 잘 캐치하고 표현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게 연기자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예솔은 그 디테일들을 미묘하게 바꾸는 것만으로 디렉팅을 완벽하게 반영한 연기를 해내고 있었다.
“훌륭하네요.”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직원들은 그제야 한시름 내려놓고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굴도 아이돌 느낌이 거의 없는데요?”
“메이크업 조금만 더 수정하면 그냥 배우처럼 보이겠네.”
이어서 화제가 예솔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또 다른 면이 많이 보이네.”
“1, 2년 지나서 젖살도 빠지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확실히 이 정도면 외모 때문에 배역 제한될 걱정은 없겠어요.”
그때, 가만히 영상을 지켜보던 대표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솔씨, 왜 이런 식으로 했습니까?”
그 짤막한 한마디에, 직원들은 다시 목뒤에 한기가 드는 것을 느꼈다.
“아, 거기서 제가 준비한 걸 다 빼고 하면 원작이랑 너무 똑같아질 것 같아서요. 그럼 그냥 흉내를 잘 내는 거지 연기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예솔은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대표의 말에 답을 내놓았다.
상대가 이런 걸로 화를 낼 거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 * *
‘아아······. 미칠 거 같다.’
지금 내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것 외에는 딱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제대로 된 연기 수업도 안 받은 애가, 헐리우드 고인물의 디렉팅을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하다니.
좋은 아티스트 키우는 걸 삶의 낙이요 목표로 삼았던 내가, 이만한 크기의 원석을 보고 안 미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게다가 태도도 좋다.
예술가는 시키는대로만 해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으니까.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배우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자기 것을 만들어 나가야 소위 ‘유니크’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생긴다.
반대로 너무 고집이 세도 곤란하다.
그런 배우는 주위와 계속 마찰을 일으키고, 현장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들다가 작품을 말아먹는다.
즉, 가장 좋은 건 자기만의 생각이나 색깔이 있되, 주위의 피드백을 들을 줄 아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딱 지금의 예솔처럼 말이다.
“최고의 대답이네요. 좋습니다.”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그녀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자 힐링- 요정은 생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히히,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이내 그 나이 또래의 아이답게 재잘대며 제 속마음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근데 대표님, 디렉팅 엄청 정확했어요! 막 감독님이나 연기 선생님 같았어요! 아아, 화장은 처음부터 안하고 왔어야 하는데······. 카메라 테스트라고 하니까 그래도 기본은 해야하지 않나 싶어서, 진짜 죄송해요! 그것 때문에 괜히 시간만 더 잡아먹고.······.”
음······. 아직 어려서 그런가?
몰입이 풀리니까 꽤나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는군.
아니, 생각해보니 얘는 8년 후에도 이렇지.
“아닙니다, 맨얼굴로 와서 화장하는 것보다는 시간도 덜 걸리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답하며 속으로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이 내가 화장하고 안하고에 따라 카메라에 어떻게 담길지를 몰랐겠나.
‘할리우드 짬밥이 몇 년인데.’
그걸 빤히 알면서도 왜 처음부터 화장을 지우고 오라고 하지 않았냐고?
직원들한테 보여줘야 하니까.
자신들이 못 본 걸 나는 보고, 자신들이 생각 못한 걸 나는 생각한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하니까.
말하자면 ‘보는 눈이 있는 대표’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연출이란 소리다.
“저, 그런데······.”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예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배우로 전향하는 건가요?”
기대와 아쉬움, 걱정이 뒤섞인 묘한 눈빛.
“왜요? 싫습니까?”
“아뇨, 좋아요! 재미도 있고, 뭔가 두근두근하고, 멋있기도 하고······!”
“그럼 뭐가 문젭니까?”
그때, 문득 8년 후이면서 동시에 몇 달 전인 시간대에 보았던 그녀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사실 가수나 아이돌 활동에 대해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열정이 강할테니, 이대로 배우만 하라고 하면 아쉬움도 그만큼 크겠지.
“······. 두 개 다 할 수는 없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힐링 요정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하고 싶어요도 아니고, 할 수는 없을까요 라니.
적어도 천조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못 들어본 대답이다.
밀리한테 그 작품은 너랑 안 어울린다고 했을 때는 술병이 날아왔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이 아이는 얼마나 천사인가.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좋습니다, 양쪽 다 검토해보죠.”
좋다, 배우로 성공할 미래를 알고 있다고 배우만 하라는 법은 없지.
그건 내 아티스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미래를 안다는 행운에 의지해 결과를 내는 것 뿐이니까.
게다가 배우로 전향한 뒤에 나온 OST들로 보나 아이돌 활동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보나 가수로도 꽤 훌륭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저, 정말요?”
이어지는 나의 답에, 예솔의 커다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눈은 또 왜 이렇게 맑은지, 눈동자가 아니라 거울을 보는 느낌이다.
“왜요? 제가 그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 맑디 맑은 눈동자에 비춘 나는,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아뇨, 아뇨! 절대 아니에요!”
* * *
예솔의 테스트가 끝나고, 사장님은 언제나 그렇듯 대표실로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샤인 엔터의 직원들은 모든 K-직장인들이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행사인 (뒷)담화의 장을 열었다.
“대표님 진짜로 일할 생각 있으신가 본데?”
“아니, 그런데 원래 보는 눈이 저렇게 좋으셨나?”
“모르죠. 그 동안은 워낙에 일을 안하셨으니까.”
어째 다소 불충, 불순한 이야기가 섞여있는 것 같지만, 그게 정상이다.
본래 (뒷)담화의 장은 업무는 물론이고 인간관계와 회사의 비전을 비롯해 온갖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늘어놓는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어떤 집단이든 이런 토론의 장이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는 법.
절대 윗사람(대표님)의 험담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거나, 퇴사나 이직각을 본다거나, 어디에 줄을 서야 하나 등을 판단하기 위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나저나 예솔씨도 진짜 대단하던데요.”
“그러게, 연기는 안 배웠다던데······. 거짓말 아니야?”
“그런 걸 거짓말해서 뭐하게?”
“그렇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주목을 받게 되었으니······.
“예솔씨 배우로 잘되면 설주씨 덕분 아니야?”
그렇다.
노리고 휘둘렀든 눈을 감고 휘둘렀든, 일단 담장만 넘어가면 다 홈런이 아닌가?
그리고 홈런을 친 사람은 우아하게 빠따도 좀 던지고, 세레머니도 하고, 그럴 권리가 생기는 게 국룰이다.
하지만 설주는 섣불리 빠던을 시전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 뿐이죠. 사실 부장님이랑 다른 분들이 밀어줘서 된 거 잖아요. 전 그냥 말만 꺼낸 게 다고······.”
이는 그녀가 선비의 나라에서 나고 자라며 배운 겸양의 미덕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생은 짧고 직장생활은 길다는 삶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기에 나온 처세술에 가까웠다.
뽀록으로 홈런 한 번 쳤다고 4번 타자인 척 우쭐거리면 곧바로 지옥길이 열리는 법이니까.
“에이, 겸손하기는.”
“이 바닥은 운도 실력이야.”
“그런데 대표님은 예솔씨가 재능이 있다는 거 미리 알아보고 말을 꺼내신 걸까요?”
이에 설주는 자연스럽게 대표님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회피기동을 시전했다.
본디 이런 (뒷)담화의 장에서는 없는 놈 얘기가 제일 재미있는 법!
그 없는 놈이 높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 애초에 그 이 자리에 없는 높으신 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런 자리의 암묵적인 룰 아닌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예솔씨 얼굴도 거의 본 적 없는데. 그냥 이래저래 파보다가 얻어 걸린 거 아니야?”
“아닌 거 같은데. 우리 기획안 깔 때, 은근히 이쪽으로 드리블하시는 것 같지 않았어?”
그리고 말 돌리기의 효과는 굉장했다!
화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대표님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그런 것보다, 캐스팅이 문제지.”
그때, 이 자리에 있는 장삼이사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내공이라는 걸 가진 한 부장이 입을 열었다.
“가수야 우리가 앨범 발매일 정해서 일 진행하면 그만이니까, 회사에서 투자할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활동은 할 수 있잖아.”
과연 의욕이 없어도 부장은 부장.
그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배우는 캐스팅이 안되면 활동을 못한다고. 그럼 매출도 0원이고.”
제법 그럴싸한 부장의 지적에, 아직 내공도 경험도 부족한 후배들은 그의 말에 쫑긋 귀를 세웠다.
“뭐, 뮤즈온 잘나갔으니까 SNS 광고나 이런 건 한동안 들어오겠지만······. 그렇게 공백기 길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잊혀지는 거지.”
“에이, 그래도 JW 계열인데 어떻게 일이 하나도 없겠어요? 계열사에서 만드는 영화나 드라마쪽에서는 시나리오라도 조금 받아보고······.”
이어지는 초짜의 무사안일한 질문에, 한 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답을 내놓았다.
“글쎄? 굳이 따지면 그 회사들도 다 우리 경쟁자 아닌가? 회사가 쪼개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상 JW 엔터 영업 1팀, 영업 2팀, 뭐 이런건데.”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직원들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예솔씨 재능있는 거야 뭐, 눈 있으면 다 인정하겠지. 운이든 감이든 대표님이 그걸 끌어낸 것도 맞고.”
이어서 한 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홀짝였다.
“근데 배우로 아무 커리어도 없는 예솔씨를 데리고 단기간에 어떻게 매출을 만드실지는······. 난 좀 걱정스럽네.”
내가 알기로는 우리 회사에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한 부장은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뭐, 그거야 대표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같은 월급쟁이가 참견할 바는 아니니까.
자신은 회사의 방침에 따라 이곳으로 왔듯, 또 회사의 방침에 따라 신생 엔터사로 이직하면 그만이다.
바로 그때였다.
“부장님?”
대표의 오른팔이 부장을 호출했다.
“대표님이 예솔씨 배우활동 관련된 건으로 이야기하실 게 있다고 하십니다.”
- 작가의말
공지사항에 기재했듯,
아마 내일부로 제목이 변경될 것 같습니다.변경될 제목은 < 환생한 천조국 탑매니저가 능력을 안숨김 > 입니다.선작을 해두시면 조금 더 편하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그럼 내일은 조금 더 일찍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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