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미연이의 남자 3
7.
한 피디의 세단 안.
덜컹!
세단이 낙석 하나를 타고 넘자 뒷좌석에 진동이 심하게 전해졌다.
김 지배인은 다시 의식이 돌아왔다.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모습이 잡혔다.
피디···.
그래, 미연이와 결혼한 그 피디.
성이 한 씨였던가?
한 피디는 어딘가로 계속 전화를 하는 듯했다.
전면 유리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응시한 채로 그는 계속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뗐다를 반복했다.
“전화가 왜 이렇게 안 터지지?”
통화가 여의찮은 것 같았다.
김 지배인은 끙, 소리와 함께 앞을 향해 모로 누우며 생각했다.
묘한 인연이다.
미연이와의 인연도 그렇다고 여겼는데, 그녀의 남편을 또 이렇게 만나다니.
미연이와의 인연은 안타까움이었다면, 저 사람과의 그것은 또 무엇이라 해야 할까.
계속 운전과 핸드폰에 신경을 쓰던 한 피디가 백미러로 김 지배인을 보았다.
“어! 정신이 드세요?”
김 지배인은 똑같이 백미러 안 한 피디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편히 누워 계세요. 어차피 여기 벗어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한 피디는 김 지배인의 몸 상태보다도 악천후로 막힌 도로 사정이 더 걱정인 표정이었다.
“전화라도 터지면 119라도 불러 드릴 텐데··· 여긴 무슨··· 도로도 나 있는 데가 통신이 이래? 내 핸드폰이 이상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한 피디를 보며 김 지배인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내 핸드폰으로 한번 해보세요, 라고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
아차, 아니지!
하는 생각에 불쑥 몸이 굳어버린다.
김 지배인, 그는 어딘가로 멀리 달아나고 있던 처지였다.
그것도 큰돈을 지닌 채.
물론 지금은 그 돈이 다 사라져 버린 상황이지만.
그러고 보니, 핸드폰도 자신의 돈을 뺏어간 놈의 수중에 있지 않던가.
김 지배인은 비어있는 바지 주머니를 만지작댔다.
눈앞에서 다시 유정의 얼굴이 어른대며 살아났다.
벼랑 끝에서 자신을 밀쳐냈던 바로 그 신비한 힘의 남자, 유정!
마지막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사물을 대하는 것 같은 태연하고도 무미건조한 눈빛.
네가 죽든 말든 난 상관 안 해!
그는 그렇게, 절규하며 떨어지는 김 지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세단의 천장을 보고 바로 누운 김 지배인의 생각이 깊어졌다.
조심하자.
피디 저놈! 내 얼굴을 기억 못 하지만, 언제 불쑥 알아볼지 모른다.
일단 시내까지 벗어나면 그땐···.
병원보다도 몸을 숨길 곳을 먼저 찾아야 한다.
한 피디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산에서 미끄러지신 건가요?”
대답이 없자 한 피디는 그런 줄 알고 계속 묻는다.
“큰일 날뻔했어요. 아니, 왜 이런 날 등산을 다 하신데···.”
한 손으로 라디오를 켜 보는데 신호가 잡히지 않는지 소음만 요란했다.
“하긴··· 제 아내도··· 징그럽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한데요···.”
아내!
그 말에 깜짝 놀란 김 지배인은 다시 앞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갈비뼈와 옆구리 쪽의 통증이 날카롭게 살아났다.
조금 전까지 감각이 없던 다리와 팔에서도 찌릿한 고통이 밀려왔다.
“뭐··· 조만간 쫑날 사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 사람··· 처음 만날 때부터···.”
주절주절 귀찮게 늘어놓는 이야기보다도 곧 헤어질 사이란 말은 김 지배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왜?
무슨 일로···.
갈라선다는 걸까?
그렇게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빼앗아 간 미연이가 아니던가?
그랬으면 행복하게 잘 살 일이지, 대체 왜?
궁금증은 김 지배인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하하··· 뭐라더라··· 대학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말하는 게 아무리 봐도 남자 때문인 거 같더라고요.”
김 지배인의 목젖이 꿀렁이며 목이 메어왔다.
8.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느낌···!”
한 피디는 썩은 표정을 한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로 위로 계곡물이 넘어오는 걸 요리조리 잘 피하며 저속 주행하던 세단은 마침내 제 속력을 되찾았다.
“올랐던 산이며, 코스, 또 먹었던 음식, 그날의 날씨··· 뭐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데, 자꾸 옆에 누군가 같이 있었던 거 같은 느낌 있잖아요.”
김 지배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느새 김 지배인은 추억 속에서 미연이와 함께 걷고 있었다.
함께 올랐던 산이며, 함께 먹었던 음식, 화창한 날씨를 배경으로 찍었던 사진들···.
하지만 행복한 감상은 한 피디의 무자비한 말에 갈가리 찢기고 만다.
“형씨! 결혼 안 했으면 하지 마쇼··· 남자는 여자 잘 못 만나면 고생해요.”
이 자식이···!
행복하게 살라고 미연이 곁을 떠나준 거였는데···.
김 지배인은 화가 치밀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흐으읍···.”
입술이 떨어지면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놀란 한 피디가 다시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아이고! 괜찮아요? 조금만 참아요. 이제 길이 드러나서 금방 나가는 데를 찾을 거예요.”
한 피디가 운전대를 야무지게 잡더니 고개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김 지배인은 질끈 눈을 감자마자 미연이를 떠나보내던 때가 떠올랐다.
헤어져 달라 부탁하던 미연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의 팔짱을 낀 채 걷던 모습.
신혼여행에서 찍었던 사진으로 도배가 된 그녀의 SNS 창들.
그리고 마지막엔···.
행복하게 잘 살아, 라는 메시지를 적어놓고 미처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던 자신의 모습까지.
귀밑까지 흘러내린 눈물에 이어 흐느낌이 막 터져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요란한 굉음과 함께 급정거를 했다.
김 지배인의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리면서 앞좌석에 머리를 부딪혔다.
“뭐야, 저거!”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머리를 부여잡은 김 지배인은 힘껏 상체를 들어보았다.
한 피디는 운전석 창문 밖으로 고개를 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멍한 상태가 한동안 이어지다 그의 외침이 천천히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신 뭐야? 죽고 싶어? 도로 한복판을 그렇게 막고 서있으면 어떡해?”
한 피디가 소리치는 방향으로 김 지배인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어···! 저···!”
놀란 김 지배인은 갑자기 몸을 벌벌 떨면서 사색이 되었다.
도로를 막고 서 있는 건 바로,
유정!
유정이었다.
그는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한 피디와 김 지배인이 탄 세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빵!
빠아앙!
한 피디가 경적을 울려보지만, 유정은 길을 피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오라고! 이 미친 새끼야···.”
급기야 한 피디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김 지배인은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한 피디를 불렀다.
“어··· 저··· 잠까···.”
하지만 말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어서 여기서 달아나야 한다.
저 사람을 피해야 한다.
저 자는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바로 김 지배인,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유정이 꿈쩍도 하지 않자 화가 난 한 피디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 그에게 다가간다.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 마치 링에 오르는 종합격투기 선수 같았다.
“야! 내 말이 안 들려?”
뒷좌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 지배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정의 한 손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김 지배인이 안 돼! 라고 외치기도 전이었다.
한 피디의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떠 올랐다.
“어··· 어··· 이거 뭐야? 왜 이래 이거··· 으아아아앜!”
유정이 손을 돌리자 한 피디의 몸이 풍차처럼 빙글빙글 회전했다.
김 지배인의 입에서도 마침내 괴성이 터졌다.
유정은 차 안에 김 지배인을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9.
달아난 놈이 낯선 놈과 함께 있었다.
낯선 놈!
유정은 낯선 놈 하나가 더 끼어드는 게 탐탁지 않았다.
이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놈도 대뜸 자기 몫을 요구하면서 협박까지 할 게 뻔했다.
그래, 그냥 죽여버리자!
보아하니 달아난 저놈하고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러니 저렇게 놈을 구해서 함께 달아나는 거겠지.
그나저나 저놈은 대체 어찌 살아난 거고, 또 저 낯선 놈은 추락지점을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유정은 쓸데없는 생각을 바로 털어내 버린다.
얼른 핸드폰 암호를 알아내야 했다.
저 낯선 놈에게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주면 달아난 놈은 겁에 질려 술술 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눈앞에서 누가 죽어 나가는 걸 보면 허튼짓할 생각을 못 하는 법이니까.
빙글빙글 돌리던 손을 멈추자 공중제비를 하던 한 피디의 몸도 멈췄다.
유정은 손아귀에 바짝 힘을 주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목을 부여잡은 한 피디가 울부짖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의 한 피디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유정은 그 상태로 천천히 김 지배인에게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자 한 피디의 몸은 얼레에 묶인 연처럼 따라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온몸이 물먹은 이불처럼 축 늘어져 버린다.
세단 앞에 멈춰 선 유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김 지배인을 노려보았다.
“네 명이 질긴 것이냐, 아니면 너도 나처럼 영기를 부릴 줄 아는 것이냐?”
유정은 절반은 의문으로, 또 절반은 호기심으로 묻고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김 지배인은 그저 공포에 질린 채 눈만 깜빡댈 뿐이었다.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어찌 살아난 건지 묻는 거다.”
재차 물었지만, 얼이 빠져있는 김 지배인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할 듯싶었다.
추상같은 얼굴로 노려보던 유정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김 지배인의 것이었다.
“이 안에 나머지 돈의 위치를 기록한 메모가 있는 거로 안다. 네놈이 얘기하는 걸 다 들었으니 거짓말로 날 속일 생각은 마라.”
유정은 핸드폰 화면을 김 재배인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움찔 놀란 김 지배인은 이를 덜덜댔다.
“암호를 풀어라!”
핸드폰 대기화면이 밝아지면서 패턴인식 창이 떴다.
김 지배인은 성치 않은 손을 들어 올리더니 화면에 손가락을 댔다.
패턴을 입력하고 화면이 열리면, 바로 그 순간 목숨이 날아갈 것이다.
이젠 필요가 없으니···.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개미처럼 일만 하며 살았던 청년 시절.
월급만으로는 전세 하나 유지하는 것도 빠듯했던 서울 생활.
성실함과 열정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의 자괴감.
그런 나에게 하늘에서 내린 행운이 찾아왔었는데···.
비록 박스 둘은 날아갔지만, 아직 하나는 내 수중에 있는데···.
십억!
그래, 나는 그 돈이 필요하다.
반드시···.
그게 사라지면 앞으로 잘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돈을 빼앗겨선 안 된다!
절박한 코너에 몰리자 김 지배인의 공포가 서서히 악으로 바뀌어갔다.
유정을 바라보는 눈에서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깡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갑자기 화면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뗀 김 지배인.
유정이 혹할 만한 회심의 승부수를 던진다.
“저··· 내가 말 안 한 게 있어요.”
유정의 미간 사이가 꿈틀거렸다.
이놈이 뭔 수작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김 지배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차분히 말한다.
“원래 돈이 든 박스가 세 개였어요. 박스마다 자물쇠가 달려있는데, 열쇠는 나머지 두 박스를 가져간 놈들한테 있어요. 그게 없으면 박스를 찾아도 소용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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