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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남 님의 서재입니다.

신세계로부터 : 씨앗전쟁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도리푸
작품등록일 :
2022.01.17 14:35
최근연재일 :
2022.05.13 05:56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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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2,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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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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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20 자격(2)

DUMMY

시장에서 다시 울진회장 김성주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김해리는 분명 조금 들떠있었다. 유현이 떠나고 난 뒤, 걱정이 잔뜩 드리웠던 김해리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고 있었다.


김성주의 저택 앞마당에 쌓여있는 엄청난 양의 식량들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이건 뭐야 또..?”


황당한 얼굴을 한 윤필은 엄청나게 요란벅적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산책은 잘 하고 오셨습니까 사자님들?”


김성주는 허리를 반쯤 숙인 상태로 얘기했다. 그의 허리는 그 이상의 각도는 잊어버린 듯 펴질 줄 몰랐다.


그는 쌓여있는 식량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듯, 허리를 조금 더 숙이며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사자님들이 아침에 하셨던 얘기에, 제가 신중히 고민을 보태어서.. 제 창고의 식량들을 지역민들에게 조건 없이 나누기로 결정했습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제가 참 부족했습니다. 사자님들 덕분에 이렇게 한 뼘 더 성장한 것이죠. 예.”


자진납세. 이 눈치 빠른 남자는 그렇게 판단을 내린 듯했다. 세 사람이 창고에서 했던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건지, 아니면 정말 눈치가 백단이라 미리 예측하고 먼저 매를 맞으려고 하는 건지. 뭐가 됐든 정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자였다.


팔짱을 낀 채 식량들을 유심히 살피던 김해리는 김성주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예예! 신궁 님 말씀하십시오.”

“나머지는 창고에 그대로 있어?”

“예?”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던 김성주의 구레나룻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자 구레나룻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그의 턱을 타고 흘렀다.


“뭘 못 알아들은 척하고 있어? 딱 봐도 창고에 있던 양의 삼분의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아.. 그.. 전부 다 가져오겠습니다!”

“이십 분의 일.”

“예.. 그것만 남기고 전부 나누겠습니다. 예.”


김해리는 그의 대답을 전부 듣지도 않고,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김해리 지독하네?”

“지독한 건 저놈이죠.”


그렇게 숙소로 향하는 이들의 귀에 남자 꼬마 아이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호상은 의외로 조용한 저택의 분위기에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울진회장 김성주는 어젯밤 찾아온 손님들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지, 피아노를 갖고 싶다는 아이의 생떼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가게를 뒤엎을 기세로 악기상으로 달려갔을 양반이었다.


‘지금은 다행이지만.. 저들이 사라지면 곧..’


정호상은 안타까운 눈으로 계단을 오르는 세 사람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오늘 시장에서의 일은 정호상의 마음속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피 흘리며 자신에게 호소하던 그 장인의 모습과 목소리가 아직도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주륵.


눈가가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커다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 왜 이러지..’


“어머. 정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김 회장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이 선생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는 정호상을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뇨.. 저.. 괜찮습니다.”


이 선생은 방금 시장에서의 일을 전해 들었기에, 측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까, 바깥에 외출이라도 좀 하셔요.”


정호상은 계속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예.. 그럼 저..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네. 제가 잘 말해 놓을게요.”


정호상은 축 처진 어깨로 이 선생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힘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식량들을 차량에 싣는다고 소란스러운 마당을 지나, 정호상은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어이 정 선생! 어디 가? 태워줄까?”


붙임성 좋은 잡일꾼 백 씨가 힘 없이 걷고 있는 정호상을 발견하고는 운전석에서 말을 붙였다. 정호상은 그를 향해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바닥을 보며 걸었다. 백 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차를 몰아 그를 지나쳐갔다.


한참을 걷고 또 걸은 그의 발걸음은 시장 앞 광장에서 멈췄다.


“뭐야? 여기 올 거였으면 아까 태워준다고 할 때 타지 정 선생!”


광장에 열심히 식량들을 쌓아놓고 있던 백 씨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아.. 괜찮았어요.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정 씨. 뭐 맛있는 거라도 사 먹고! 동전은 넉넉한가?”


백 씨가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자, 정호상은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광장을 지나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호상은 자신이 왜 이곳에 다시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정호상은 악기상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빨리 걷기 시작했다. 악기상 앞은 어느새 깨진 유리들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거무튀튀한 핏자국들이 보기 싫게 남겨져 있었다.


가게 안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잠시 입구에 서서 안쪽을 서성거리던 정호상은 깨진 유리를 넘어 가게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때, 그를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호상.. 님?”


악기상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2층에서 내려오다가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는 그를 보고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피아노.. 가져가시려고요?”

“아..”


짤랑.


“이 열쇠가 가게 바깥에 연결된 창고 열쇠예요. 그 창고에 피아노가 있으니까 가져가세요.”


아이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정호상의 눈앞으로 들이밀며 얘기했다.


“아.. 그게..”


정호상은 난감한 얼굴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왜요? 가지러 오신 것 맞잖아요? 따라오세요 그럼.”


아이는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한 분홍빛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가게 밖 창고로 향했다. 정호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아이의 뒤를 쫓아 나갔다.


철컹.


창고의 문이 열리고, 어두운 내부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갔다. 창고의 온도와 습도는 피아노를 위해 잘 관리된 듯 쾌적했고, 그 가운데서 피아노는 아름다운 자태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뵈젠도르퍼..”


정호상이 홀린 듯이 걸어가 피아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 브랜드는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할 때, 가장 선호하던 브랜드였다.


“이제 다시는 우리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그 피아노보다 좋은 피아노는 다시없을 테니까.”


아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하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창고 문 앞에서 피아노 앞에 앉는 정호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호상은 시장으로 걸어올 때보다 더욱 차분한 표정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 뚜껑을 열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오르자, 명품 피아노 특유의 여리여리한 음이 창고 안을 울렸다.


정호상은 감았던 눈을 뜨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아이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피아노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소리도 작게 뱉으며 정호상의 연주에 집중했다. 그의 손가락, 피아노가 떨리며 나는 음 하나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눈과 귀를 열었다.


어느새 연주 소리를 듣고 모여든 지역민들이 점차 동그랗게 창고 입구를 감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음을 울리는 연주를 듣고 있자니, 모두들 그렁그렁하게 눈시울을 붉히고 서있었다. 아이의 서러움, 그리고 연주를 하는 정호상의 마음이 전해져 지역민들의 마음을 같이 울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도,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때, 광장 방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란을 일으키며 군중들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울진회의 무사들이었다.


“뭐야? 저리 안 꺼져?”


막내 무사가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는 지역민들을 칼로 위협하며 억지로 길을 열자, 무사들의 눈에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는 창고가 들어왔다.


“저게 그 피아노인가? 오호! 정호상 저 친구가 한 건 했군.”


무사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군중들을 뒤로 물리며 창고를 감싸려 했다. 그때, 군중들 가운데서 큰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나쁜 새끼들!”

“그냥 둬라 이 개호로 잡놈의 새끼들아!”

“그 아이 좀 그만 괴롭혀라! 가진 것들이 더 하네 진짜!”


무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치고 있는 군중들을 노려봤다. 군중들은 그럼에도 쫄지 않고, 무사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야! 됐으니까 피아노 꺼내와.”

“예!”


무사들은 입구 옆에 서 있던 아이를 밀치고서, 우르르 창고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를 멈추지 않고 있던 정호상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호상이! 이제 됐으니까 비켜봐.”

“싫습니다.”

“뭐?”

“이 피아노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

“뭐라는 거야? 돌았어? 도련님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 귀찮게 하지 말고 일어나!”


무사는 정호상의 어깨를 잡고 번쩍 들어 뒤로 옮겼다. 그러자 정호상이 다시 달려들어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어? 진짜 미쳤어?”

“야! 손가락 안 다치게 조심해라!”

“손가락 말고는 좀 때려도 괜찮습니까?”

“그래 인마.”

“넵.”


퍽!


“어억..”


무사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주먹으로 정호상의 가슴팍을 강하게 때렸다.


“하.. 진짜 겨우 피아노 좀 띵띵거릴 줄 안다고 인생 편하게 사는 새끼가 어딜 진짜..”


정호상은 고통으로 숨을 켁켁 거리면서도 피아노를 옮기려는 무사들을 막아섰다. 무사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정호상의 몸뚱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외부에 티가 나지 않도록 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섬세하기까지 했다.


“끄.. 끄윽.. 컥!”


그때, 창고로 들어오는 햇살이 무언가에 막혀, 창고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신나게 정호상을 패고 있던 무사들은 산통이 깨지자, 험악한 얼굴로 입구 방향을 바라봤다.


창고 입구에는 지역민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리 안 꺼져?”

“너희가 꺼져!”

“하? 그거로 한 번 쳐보게? 어디 한 번 쳐봐. 내가 뒤지는지 너희들이 뒤지는지 한 번 보자.”


무사가 눈깔을 희번덕이며, 지역민들에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쳐 보라니까? 제멋대로 하는 이 동네 새끼들. 한 번 손 봐주고 싶었는데 잘 됐어. 자신 있으면 한 번 쳐 보라고!”


퍽!

쿠당탕!!


뼈가 우지끈하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무사는 창고 한 편으로 처박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절해 버렸다. 갑작스레 날아온 발길질에 모두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로 집중되었다.


“어..? 쳐보라고 해서 쳤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는 케이디였다. 케이디의 등장에 당황한 남자들은 입술을 뻥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버렸다.


케이디는 천천히 정호상을 향해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으악!”


정호상은 여기저기 두들겨 맞아 통증이 올라오던 곳들에 갑작스럽게 고통이 더해지는 것을 느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너무도 편안한 느낌과 함께 고통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어..?”

“이제 괜찮죠?”


케이디가 정호상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


“잘했어요. 나는 조금 감동했어.”

“예..?”


케이디는 정호상에게 찡긋 윙크를 날리더니 가만히 굳어있는 무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제 나와. 너희들도.”

“예.. 예예!”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수장도 쩔쩔매는 자를 감히 거역할 자신이 없었던 무사들은 케이디의 뒤를 따라 다시 시장 앞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김해리와 윤필이 팔짱을 낀 채 서서, 돌아오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다시 트럭 위로 실어.”


케이디는 광장에 한가득 쌓여있는 식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무슨..?”

“거부했어. 여기 사람들이. 이딴 거 필요없대.”


무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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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Ep.19 인간의 영역(2) 22.04.20 49 2 14쪽
88 Ep.19 인간의 영역(1) 22.04.19 56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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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Ep.18 태백산의 마녀(4) 22.04.16 53 2 13쪽
85 Ep.18 태백산의 마녀(3) 22.04.15 59 2 12쪽
84 Ep.18 태백산의 마녀(2) 22.04.14 73 3 13쪽
83 Ep.18 태백산의 마녀(1) 22.04.13 65 3 11쪽
82 Ep.17 무안혈맹(4) 22.04.12 65 3 11쪽
81 Ep.17 무안혈맹(3) 22.04.11 62 3 12쪽
80 Ep.17 무안혈맹(2) 22.04.09 64 2 11쪽
79 Ep.17 무안혈맹(1) 22.04.08 76 3 12쪽
78 Ep.16 전운(7) 22.04.07 68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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