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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157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10.29 23:55
조회
42
추천
1
글자
12쪽

52화

DUMMY

“아가씨, 저······. 오늘 연수원에서 일이 있어서 일찍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는 마리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래. 잘 다녀와.”

“네! 저녁에 봬요. 다녀올게요!”


정신없이 나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차를 홀짝였다.


나는 여유롭게 신문을 보는 중이었다. 재판 사건 때 동아리에 항의를 넣은 이후부터 기숙사로 신문을 매일 보내주고 있었다.


보상은 필요 없고 빚으로 달아두겠다고 했더니, 동아리 측에서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다.


‘물론, 이런다고 빚을 탕감해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신문은 잘 보고 있다.


신문 동아리에서는 온갖 뜬소문까지 실어놔서 오히려 제국의 상황을 살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제목을 쭉 보다가 관심이 가는 기사가 있으면 자세히 읽었다.


다행히 아직 특별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금방 신문을 다 읽고서 한쪽으로 치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오늘 오전 수업이 없어서 여유로운 것은 좋았다만. 모처럼 레오나드와 잡은 식사 약속이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미리 장소와 약속 시각을 딱 정해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당시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게 실책이었다.


그런고로 강의실에서 일찍 만난 뒤에 식사하고 다시 강의실로 가야 하게 생겼다.


레오나드가 일찍부터 기다려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렇다고 약속 당사자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로렌시아에게 내일은 못 가겠다고 못 박아둔 게 걸렸다.


뒤집어 말하자면 다음 날은 꼭 갈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입이 방정이었다. 괜히 신경 쓸 바에야 그냥 성의라도 보이는 게 낫다.


약속보다 이르긴 하지만.


‘온실 정원에 들리는 시늉은 해야지. 어쩌겠어.’


결정을 끝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온실 정원에서 고고하게 앉아있는 로렌시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무슨 지박령이야 뭐야. 게임 NPC야 뭐야


로렌시아는 벌써 한편에 자리를 잡고서 고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시늉만 할 속셈이었는데······.


인기척을 느낀 로렌시아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어머······.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네. 어쩌다 보니. 벌써 계실 줄은 몰랐네요.”

“후후. 그러신가요? 편하게 앉으세요.”


오늘은 이리나 대신 연수원 복장을 한 메이드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금발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메이드는 묵묵히 차를 준비했다.


자리에 앉자, 로렌시아는 책을 덮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온실 정원은 제가 참 좋아하는 장소랍니다.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자주 이곳에 머무르곤 한답니다.”


그다지 이유가 궁금하진 않았지만, 설명을 해주니 가만히 들었다.


문득 메이드를 보니 생각나서 물었다.


“오늘은 이리나가 보이지 않네요.”

“아마 그녀는 오전 강의가 있을 거예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는 메이드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뭐. 그것도 그런데. 메이드가 곁에 있길래요. 오늘 저희 메이드는 연수원에 일이 있다고 일찍 나갔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요.”


마리가 딱히 거짓말을 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통행증도 내가 가지고 있는걸.’


하지만 똑같은 연수원 복장의 메이드가 버젓이 있으니 슬그머니 호기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로렌시아는 입가를 가리며 감탄사를 뱉었다.


“어머······. 에이미 양. 오늘 연수원에 무슨 일이 있나요?”


에이미라고 불린 메이드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딱딱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티타니아 영애께서는 1학년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연수원에서 특히 신입 메이드들은 여러 연례행사가 많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싶군요.”

“그런가요. 고마워요. 에이미 양.”


나중에 마리가 돌아오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에이미가 차를 내려놓았다. 찻잔에서 그윽한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났다. 노란 꽃이 예쁘게 담겨있었다. 향긋한 꽃차였다.


“매그놀리아 차입니다. 집중력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럼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에이미가 눈치 빠르게 물러섰다.


온실 정원에 오롯이 로렌시아와 둘이 남았다.


사방으로 꽃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꽃차까지 마시니 계절이 봄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오늘은 제국 정세에 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그보다는 황실에 대해서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차를 홀짝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제국의 황녀가 말해주는 황실 이야기라니.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다.


“제국 황실은 본디 후사를 많이 본답니다. 하지만 이번 대에는 후사가 많지 않아요. 티타니아 양은 황실이 후사를 많이 보는 이유에 대해 알고 계시는가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글쎄요. 그래야 명석한 후계자를 얻을 수 있어서 그런 걸까요?”

“사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제가 티타니아 양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황손을 체스 말로 쓰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거지요.”

“······네?”


순간 제대로 들었나 싶어서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제국은 참 국토가 넓어서 중앙에서 이를 다 감시할 순 없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결혼이랍니다. 대귀족과의 결합은 세가 커질까 두렵고, 그래서 각지에 적당한 혼처로 보내지요.”

“······.”

“이를테면, 감시자 내지는 정보원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렌시아가 하고자 하는 말이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아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대체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로렌시아는 눈매를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는 티타니아 양을 높이 사고 있답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네?”


로렌시아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괜스레 찻잔 받침을 툭툭 건드렸다.


“선과 악이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지요. 저게는 로렌시아의 정의가 있고, 티타니아 양에게는 티타니아 양의 정의가 존재하는 건데 말이에요. 저는 영애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마음에 들었답니다.”


참. 말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녀의 말은 난해한 구석이 있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선과 악의 구별이 없는 회색분자라고 질책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말 그대로의 의미 같기는 했다만.


그녀는 난처하다는 듯 뺨을 누르며 말했다.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까요······. 음. 그러네요. 온실 정원에서 만난 건 이번이 세 번째지요?”

“그렇죠······?”


로렌시아는 올곧게 나를 응시했다.


“첫 만남 때, 티타니아 양께서는 제게 정치는 머리가 아파서 질색이라고 말씀하셨고, 두 번째 만남 때는······.”


그녀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요. 티타니아 양은 제대로 상황을 이해하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동부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제게 그 말은 영애만의 목적이 있다는 소리로 들렸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정의가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인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왜 마음에 들었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오히려. 자신의 정의가 없는 사람이 흔하지 않을걸?


“뭐······. 대다수가 그렇지 않나요? 오히려 딱 선악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적을 것 같은걸요.”


로렌시아는 미소를 띄며 부연했다.


“음, 선악이 아니라 ‘옳다. 그르다.’라고 말씀을 드리면 이해하기 쉬울까요? 동부의 후계자가 보통 동부의 일을 나 몰라라 하진 않을 테니까요. 대부분은 가문을 위해 힘쓰는 걸 올바르다고 생각한답니다.”


불현듯 잘못된 신념을 가진 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소리가 생각났다.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위험한 소리 아냐?’


혁명을 노리는 반동분자 같은 게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이지?


남들은 예스라고 말할 때 노라고 말하며 신념을 외치는 게 마음에 들었다는 거 아냐.


물론 나야, 멸망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일 뿐이지만. 어떻게 해야 후계자가 본인 일을 내팽개치는 걸 보고 높이 산다는 건지.


뭐, 로렌시아의 입장에서야 본인 뜻에 어울려주겠다는 거니 나쁠 거야 없겠지만.


나로서는 쉽사리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저는 티타니아 양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싶답니다.”


어째. 로렌시아의 수제자가 되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 정도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솔직히 사양하고 싶다.


그렇다고 정면에 대고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야 잘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말했다시피. 정치에는 그다지 뜻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요. 머리가 아프다는 것도 진심이고요. 깊게 파고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요.”


말해놓고 보니 너무 대놓고 말한 것 같았다.


다행히 로렌시아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밝게 웃었다.


“티타니아 양. 제가 자선 경매에서 오르골을 내놓았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


본론이 먼저 나오는 두괄식을 선호하는 내게는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황후 폐하께서 오르골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으셔요. 특히 포르테 장인의 아티팩트 오르골을 무척 좋아하시죠.”

“아······네.”

“그리고 마침 ‘No. 3 크리스탈 볼레로’는 수집품에 없다고 하시네요.”


잠깐만. 뭔가 익숙한 이름이다.


‘그거 로렌시아가 경매에서 준 오르골 아니야?’


어렵지 않게 떠올려내고서 당혹스러움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걸 대체 왜······?”


본인이 황후에게 가져다주고 점수를 따면 될 일을 굳이 경매에 내놓았다고?


로렌시아는 내 반응을 기꺼워하며 말했다.


“제가 가져다드리면 분명 기뻐야 하시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더 의미 있게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좋은 기회잖아요.”


그녀는 티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서 손바닥을 펼쳐서 얼굴을 올려놓았다. 흔히 말하는 꽃받침 자세였다.


로렌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현재 제국에는 총 5명의 황손이 있답니다. 황후 태생의 자식이 둘이지요.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저라는 건 알고 계실까요?”


그렇게 예쁜 척해도 말이지······.


아니. 확실히 예쁘긴 했다. 하지만 같은 여자인 내가 미인계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기왕이면, 황후 폐하께 제 사람을 밀어 넣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나는 로렌시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황녀님 사람이 아닌데요.”


그녀는 개의치 않으며 치근덕거렸다.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심히 부담스럽다.


“그래도, 우리 동맹 아닌가요?”


천연덕스럽게 말해서 깜빡 넘어갈 뻔했다.


서부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했지. 내가 언제 로렌시아를 지지한다고 그랬나 모르겠다.


“글쎄요······. 황녀님과 동맹을 맺은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정말. 매정하신 말씀이네요.”


로렌시아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처연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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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50화 22.10.27 3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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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3화 22.10.20 38 1 12쪽
42 42화 22.10.19 44 1 12쪽
41 41화 22.10.18 38 1 13쪽
40 40화 22.10.17 39 1 12쪽
39 39화 22.10.16 41 1 13쪽
38 38화 22.10.15 41 1 12쪽
37 37화 22.10.14 42 1 12쪽
36 36화 22.10.13 43 1 11쪽
35 35화 22.10.12 39 1 12쪽
34 34화 22.10.11 40 1 11쪽
33 33화 22.10.10 46 1 12쪽
32 32화 22.10.09 51 2 12쪽
31 31화 22.10.08 45 2 12쪽
30 30화 22.10.07 45 2 12쪽
29 29화 22.10.06 49 2 11쪽
28 28화 22.10.05 50 2 12쪽
27 27화 22.10.04 49 2 12쪽
26 26화 22.10.03 55 2 12쪽
25 25화 22.10.02 49 1 11쪽
24 24화 22.10.01 49 1 12쪽
23 23화 22.09.30 4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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