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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147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10.04 23:55
조회
48
추천
2
글자
12쪽

27화

DUMMY

로렌스는 니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후원자님. 여기 말고 안에서 긴밀하게 대화를 하는 게 어떠신지요.”

“네. 그게 좋겠네요.”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른다.


오래된 나무 계단은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괜스레 계단에 달린 난간을 붙잡고서 오르자 안쪽이 드러난다.


푸른 광택이 도는 벽지. 바닥에 깔린 단단한 마감재. 새로 손을 본 듯 말끔한 인상이었다.


복도를 장식하는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며 걷자 트여있는 공간에 다다랐다.


탁자와 등받이가 없는 스톨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로렌스의 발걸음도 거기로 향한다.


“의자가 편하진 않지만. 편하게 앉으세요.”


로렌스의 말장난에 흐린 눈빛을 보내며 의자에 착석했다.


그는 양피지가 둘둘 말린 함에서 한 장을 꺼내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 원통에 꽂혀있던 너저분한 깃털 펜과 잉크를 챙긴다.


“일단은 자기소개가 먼저겠네요. 저는 천재 마공학자 로렌스라고 합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하는 로렌스를 보며 감탄했다.


저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기 쉽지 않은데. 그걸 로렌스가 해냈다.


“아······. 네.”


성의 없이 대꾸했더니 억울해한다.


“지금 안 믿는 것 같은데 거짓말 아니에요. 천재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 답답하네요. 정말.”


아무리 본인이 천재래도 그걸 본인이 말하면 재수 없다.


“그것참.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또 자신감 하면 로렌스죠! 후원자님께서 보는 눈이 정확하시네요.”


칭찬으로 받는 로렌스의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


저걸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로렌스는 좋지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웃음으로 무마한다.


“하핫. 그럼 어디 후원자님 소개도 들어볼까요?”


나는 지금 바로 로렌스에게 정체를 알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글쎄요. 솔직히 전 아직 당신을 신용하지 못하겠어요.”


바로 밝히면 없어 보이잖아.


아마 로렌스도 어렵게 얻은 신뢰를 더 보람 있어 할 거다.


“그런 것치고는 여기까지 용케 따라오셨네요.”


날카로운 지적이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넘겼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실력에 자신 있거든요.”


로렌스는 이글거리는 강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궁금하지만 참아드리죠. 전 후원자님의 신뢰를 얻을 자신이 있거든요. 생각보다 금방 일 겁니다.”


무언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저걸 열의라고 하던가. 탐구심이라고 하던가.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불타오르는 로렌스를 보니 뿌듯하다는 건 확실했다.


“자. 그럼 자세한 조건들을 이야기해봅시다. 먼저 후원자님께서 제게 바라는 조건들을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는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고심에 잠겼다.


로렌스는 대장장이 포지션이지만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특기는 룬 마법으로 로렌스의 로망을 닮은 초대형 마법진을 사용한다.


덕분에 속도가 느리고 장시간 사용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형태가 굉장히 자유로워서 종종 돌파구 역을 맡는다.


아티팩트 제작만 맡기기엔 그 능력을 썩히기 아깝고, 거론하자니 의심을 산다.


나는 마음을 정리했다.


“실은 제가 구하고 있는 건 믿을 수 있는 동료지만. 지금 당장은 서로 신뢰가 없잖아요?”


나는 뜸을 들이며 잠자코 듣고 있는 로렌스를 보았다.


“그러니까 하는 제안이에요. 첫째, 제가 요구하는 아티팩트 제작을 맡아줄 것. 둘째, 뜻이 맞는다면 동료로 협조해줄 것. 나중에 발뺌하면 안 되니 맹약도 해주셔야겠어요.”


로렌스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양피지 위에 글자를 갈겨 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라 신기하게 보는데 글자가 개발새발이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악필이다.


그는 금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빠진 것 같네요.”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내가 로렌스에게 무엇을 줄 건지 말해주지 않았으니.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계약금으로 5억 골드를 줄게요. 추가 지원금은 제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하죠. 세세한 부분은 그때마다 합의해서 결정하는 거로 어떤가요.”


로렌스의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는지 눈이 휘둥그레진다.


“맞춤 아티팩트를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금액을 전액 지원해주는 건 물론이고 수고비도 두둑하게 드릴 거에요.”

“앞으로 제 장래희망은 후원자님의 발닦개입니다.”


조건이 로렌스의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이왕 로렌스를 영입할거 뽑아 먹을 것도 잘 챙기기로 했다.


“다만 당신에게 그렇게 투자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시험을 내줄까 하는데 어떤가요.”

“좋습니다. 후원자님께 제 실력을 어필해드리죠!”


로렌스는 이미 내가 마음을 정했다는 사실을 모르니 적극적이었다.


“음, 뭐가 좋으려나.”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팔짱을 끼고서 허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마침 제가 아공간 아티팩트가 필요하네요. 그걸로 하죠.”

“그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제가 지금 일이 너무 밀려있어서······.”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나는 로렌스를 조금 더 자극해보기로 했다.


“빨리 만드는 것도 능력 아닌가요. 벌써 아쉬운 소리를 하시다니 실망이네요. 실력에 자신 있는 거 아니었나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빈정거리자 로렌스는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은 듯 주먹을 부들부들 떤다.


“아뇨. 그깟 거 금방 만들어 보이죠. 딱 일주일만 주세요.”


원하는 대답이 튀어나오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다. 제작 공정을 모르긴 하지만 로렌스 성격상 짧은 기간을 잡았을 게 분명하다.


아마 저것보다 빨리 만들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좋아요. 그럼 구매한 아티팩트들도 그때 같이 받도록 할게요.”

“후원자님의 발닦개가 장래 희망인데 그렇게 번거롭게 해드릴 순 없죠. 잠시만요.”


로렌스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더니 한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한참 뒤에 로렌스는 원작에서 본 적 없는 하얀색 크로스백을 가지고 돌아왔다.


특별한 장식은 없는데 이쁘다.


“예전에 제가 쓰려고 만들어뒀던 아공간인데 특별히 이것도 드릴게요. 웬만해서는 공짜로 안 드리는데 후원자님이니까 드리는 겁니다.”


아티팩트를 챙겨오느라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나는 로렌스가 준 가방을 어깨에 걸쳐봤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다.


필요할 때 바로 꺼내는 용도로 쓰면 편할 것 같다.


심히 마음에 들지만, 칭찬은 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로렌스의 콧대가 높아지는 건 사양이다.


“호의는 고맙게 받겠어요. 그럼. 삼일 뒤에 다시 올게요.”

“기대하고 계세요.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로렌스가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고 걸음을 옮겼다. 마중을 나가줄 생각인지 로렌스가 같이 따라 나온다.


복도를 걷는데 시침이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섬세하게 만들어진 시계탑이 보인다.


마침 9시 정각.


탑 꼭대기에서 푸른 빛이 위로 쏘아져 올라가더니 선물상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영상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물음표가 그려진 상자는 요동치는 움직임을 끝으로 펑하고 열린다.


묘하게 생긴 뻐꾸기 캐릭터가 근엄하게 날개를 펼치며 부리를 뻐끔거린다.


【저녁 9시다.】


어째 아까 노인의 목소리랑 닮았다.


뻐꾸기가 다시 날개를 접는 모습을 끝으로 영상이 꺼진다.


로렌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심심풀이로 만든 시계에요. 이번에는 꽝이네요.”


저런 걸 재능 낭비라고 하는 걸까. 상당히 신기한 기술이었다.


“깜짝 상자에서 총 36가지 캐릭터가 나오는데, 저 못생긴 뻐꾸기는 괴팍한 영감을 본떠 만든 거예요. 꽝 중에서도 최악이죠.”


확실히 닮긴 했다. 근데 로렌스가 허락을 받고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멋대로 가져다 쓴 걸로도 모자라 꽝이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


“10시에는 특별히 레어가 나올 확률이 높아집니다. 확률 업 상자랄까요?”

“······그거 그냥 예쁜 캐릭터만 넣어두면 되는 거 아닌가요?”


로렌스가 입을 떡 벌리더니 측은하다는 눈빛을 보낸다. 가엾고 딱한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


“후원자님.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대체 그게 뭐라고 갑자기 인생사까지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

“안 되겠네요. 후원자님. 제가 오토마톤과 랜덤 뽑기의 재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로렌스를 보고 단박에 거절했다.


“아뇨. 사양하죠.”


로렌스와 취향을 닮고 싶은 마음은 손톱의 때만큼도 없다. 로렌스가 붙잡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 * *


받아놓은 주문서를 위에 올려뒀더니 그새 확인했나 보군.


“미친놈. 무슨 주문을 이따위로 받아!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처리해라. 난 모른다.”


아버지는 미간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를 지른다.


6개월이라는 기한이 달린 대량 주문을 받았다고 화가 난 것 같다.


공방에도 좋은 일인데 버럭 성질이다.


빠듯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걱정되진 않는다.


내가 누군가.


바로 천재 마공학자 로렌스다.


‘나한테 맡기면 이 정도는 금방이지!’


아버지는 참 향상심이 없다. 영감도 다를 게 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도 돈방석에 못 앉은 거다. 솔직히 공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다 내 덕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와는 다를 거다.


‘결국 받아놓으면 마지못해서 작업을 도와주겠지.’


근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고 영감이고 며칠째 손을 놓고 있다.


다 생각해서 받아 둔 건데 이렇게 되어버리니 나만 며칠째 쪽잠이었다.


“로렌스!!”


주말 아침부터 나와서 작업을 하다가 잠깐 눈을 붙였는데 우렁찬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사실 자던 중이었지만.


“아씨! 아버지. 저 지금 세밀한 작업 중이었다고요. 식겁했네. 진짜.”


툴툴거리며 나와보니 손님이 와있었다.


찡그렸던 표정을 재빨리 가다듬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손님의 체구를 보아하니 여자거나 나이가 어린 손님으로 보였다.


나는 여자 손님한테 잘 통하는 비장의 미소를 선보였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고 들려온 목소리는 여자였다.


보통 여자 손님에게 미소를 보여주면 감탄하거나 부끄러워하는데 이 손님은 무덤덤한 태도였다.


“아공간 아티팩트를 구매하려고 하는데요. ······”


이성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부류의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해보며 태세를 전환했다.


우스꽝스럽게 접대하자 그게 취향에 맞았는지 손님은 홀린 듯이 아티팩트를 구매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것 대량으로. 망설이지 않고 사는 거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계산해보니 약 2900만 골드.


“3647만 3800골드 되겠습니다.”


손님이 깎아달라고 하면 그때 제대로 가격을 알려줄 계획이었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금화 상자를 턱 꺼내둔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흥정도 안 하고 바로 살 수 있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흥정하지 않는 고객님이라니 이건 거물이다!’


나는 오늘에서야 임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님. 혹시 후원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황금 로드길이 아른거린다.


아니 벌써 눈앞에 황금빛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돈이 모자라서 이제껏 구매하지 못했던 재료들이 하나둘씩 떠오르자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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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4화 22.10.11 40 1 11쪽
33 33화 22.10.10 45 1 12쪽
32 32화 22.10.09 51 2 12쪽
31 31화 22.10.08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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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화 22.10.05 5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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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22.10.03 55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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