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154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10.18 23:55
조회
37
추천
1
글자
13쪽

41화

DUMMY

틀어 올린 주황색 잔머리가 이마로 흘러내렸다.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뒤늦게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뱉는다.


맹약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은 역시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소 허술해 보이긴 했으나.


정체가 밝혀지지 않으면 맹약 내용 자체는 크게 의미 없으니 어느 정도 납득은 갔다.


‘그쪽도 설마 운 좋게 맞아떨어져서 정체를 들킬 거라곤 예상 못 했겠지.’


부인은 다소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만일 성공한다면 빚도 갚아주고, 가문을 밀어줘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어요.”


더 이야기해보라며 고개를 까닥이자, 부인은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는 보잘것없는 남작 가문이겠지만······. 마르코에게 온전하게 가문을 물려주고 싶어요. 저희 가문은······.”


감정에 벅차오른 듯 그녀가 눈물을 보이며 울먹이듯 말했다.


“빚더미에 올라 10년이 넘도록 다른 귀족들과 교류를 쌓지 못했어요. 가문 앞으로 오는 초대장조차 없는데 어찌 다시 사교계에 진출하겠어요?”


그러더니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닌가.


대체 저 소리를 듣고 무슨 반응을 해주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신파극을 관람한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전개로 감동을 억지로 짜내려고 하니 신물이 올라온다.


솔직히 말해 역하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반응이 싸늘하다는 걸 느꼈는지 부인의 눈물이 쏙 들어간다.


“저희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평판이 좋지 않은 가문과 교류하려는 가문은 없잖아요. 하지만 보증을 서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제대로 밀어만 준다면······!”


변명으로 시작하더니 끝에 가서는 희열에 차 안광을 빛낸다.


소름이 끼칠 만큼 광기에 찬 눈빛이었다.


마르코에게 들이대고 있던 검을 회수하자 여자의 낯빛이 밝아진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대단히 오해하는 모양이야.”


부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당신들에게 유감이 없어. 동정심을 유발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단 소리야. 뭔 뜻인지 이해해?”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당연한 소리를 짚어주는 건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니까 황당하다.


애초에 마리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걸 알았으면 내 앞에서 이렇게 굴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들의 비참함이 아니라 마리를 위해 도와줄 가치가 있는지를 보여줬어야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단정적으로 못을 박았다.


“마리가 아니었으면 내가 나설 이유도 없었다는 거야. 당신들 사정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당혹스러웠던 건지 여자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중년 남자도 아차 한 듯 표정을 굳힌다.


“얼굴이 닮은 건 인정할게. 근데 그게 진짜 마리의 친부모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남자는 입이 마르는 듯 아랫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말했다.


“그, 그건 확실합니다! 서부인을 동부에까지 가서 버리는 사람이 흔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때 마리가 5살이었을 겁니다.”

“여보! 5살이 아니라 4살이에요! 걔는 갓난아이 때부터 목에 특이한 점이 있었어요. 그것도 이미 확인했고요! 제 딸이 분명해요.”

“그랬나? 분명 5살이었던 것 같은데······.”


티격태격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들의 말처럼 동부에 버려지는 서부인은 흔하지 않다.


거기다가 닮은 얼굴에 특이한 조건까지 더해지면 거의 확실하겠지.


그런데. 그들에게서 일말의 후회도. 수치심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통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눈치다.


뒤늦게 마리를 위하는 척해도 꼴 보기 싫은 건 매한가지였겠지만 한술 더 뜨니 말문이 막힌다.


내게는 마리를 버렸던 당시 마르코도 있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문득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마르코는 대체 몇 살이지?”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부인은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13살이에요.”

“아, 마르코와 2살 터울이니 4살 때가 맞습니다.”


그래놓고 마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단 말이지.


‘뭐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야?’


굳이 들춰서 지적을 해봤자, 마르코는 아파서 그럴 수밖에 없었느니 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을 게 뻔해 보였다.


잊고 잘 살아오다가 쓸모가 보이니 그때야 감성팔이를 하면서 접근한 거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몰지각한 인간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에 열이 오른다.


더는 말 섞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위협적으로 느껴진 듯 움찔거리며 입을 닫는다.


“이렇게 하자.”


무어냐는 듯 올려다보는 그들을 못마땅하게 보며 팔짱을 꼈다.


“일단. 나와 마나 맹약을 해줘야겠어.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후작에게 알리고 싶진 않거든.”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오늘 내가 아니라 마리를 만난 거야. 마리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래서 7일 뒤 서문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어.”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볼 요량이었다.


아티팩트를 훔치려고 한 정황이 있으니 재판을 열어서 문제로 삼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다.


‘중요한 물건들을 빼고 아티팩트를 줘서 반대로 후작을 감시하는 끄나풀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아티팩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든 물건들이 중요한 거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끌리는 계획은 아니었다.


어차피 베스 후작은 2회차 때 레오나드에게 살해당하는 인물인 데다가 영향력도 딱히 없어서 그냥 암살을 계획해도 상관없다.


다만 후작이 아직 해줘야 하는 역할이 있어서 지금은 때가 아닐 뿐.


궁금증 해소 말고 또 다른 메리트가 있을지. 없을지.


고민을 더 해봐야 할 듯싶다.


중년 남자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더는 왈가왈부할 기력이 없었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후작한테 보고는 해야 할 거 아냐.”


설명을 마치고 맹약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포박을 풀어주고, 주머니에서 작은 회색 돌멩이를 하나 꺼냈다.


돌멩이처럼 생긴 이 아티팩트는 바로 공작이 준 귀환석이었다.


손에 쥐고 사용하자 아티팩트가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 방안을 실없이 둘러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마리는 초조하게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힉!”


양쪽 어깨가 올라가며 흠칫 놀란다. 마리는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 드러났다.


혼자 놀라서 상체를 휙 물리더니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 아가씨! 깜짝 놀랐어요.”


진정한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언제 돌아오셨지? 계속 여기에 서 있었는데······.”


나는 굳이 마리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파로 가서 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마 위로 손등을 올리자, 서늘한 손등 위로 뜨끈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머리를 식히고 있는데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셨어요?”


고개를 다시 들어 마리를 보자 우물쭈물하며 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고 운을 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마리. 너 귀족이었다며?”


민망한 듯 볼을 물들이며 마리가 수줍게 웃었다.


“앗, 그 이야기도 들으셨나요? 저도 몰랐는데 그렇대요······.”

“그럼 마리도 같이 아카데미에 다니려나.”


교복을 입고 같이 강의를 듣는 모습을 상상해보는데, 마리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전 계속 아가씨 곁에 있을 거예요.”

“······그래?”

“남작 가문은 필수 입학이 아니래요. 그래서 평민들과 똑같이 시험을 쳐야 해서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낫다고 그런대요.”


별생각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제국은 남작 작위를 잘 뿌리는 편이었고 거기다 매년 아카데미에서 수석들에게 세습 남작 작위도 내어주다 보니 남작 작위를 가진 자들의 수가 많다.


마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저는 글자도 잘 모르는걸요. ······제 나이도 모르는데 아카데미에 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마 합격도 못 할 거예요.”

“마르코랑 두 살 터울이라던데? 글자야 배우면 되는 거잖아. 한 번 고민해봐.”


마리는 잘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으음······.”


고민하는 마리를 보며 잠시간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널 버린 게 4살 때였다고 하더라. 네가 노예로 팔릴까 봐 어쩔 수가 없었다며. 근데 마르코 왜 데리고 있었던 거야?”


멈칫하더니 표정이 가라앉는다.


“······그 애는 몸이 안 좋아서 그랬을 거예요.”

“넌 원망스럽지도 않아?”

“······.”


마리는 입술을 늘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도, 저라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런 마음이 없겠어요. 저를 버렸는걸요.”


눈시울을 붉히더니 끝내 눈물을 보이고는 재빨리 소매로 닦아냈다.


“······하지만 혼자는 싫어요”


마리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남들처럼, 남들처럼 가족을 가지고 싶었어요.”


마리는 숨이 벅찬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저는요. 늘 아가씨가 정말로 부러웠어요. 아가씨처럼 다정한 부모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제가 노력하면······.”


마리는 답답한 듯 가슴께를 두드렸다. 괴로운 얼굴을 하더니 이마를 감쌌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 바보 같죠? 알아요. 저도······.”


어떻게 위로를 해주면 좋을 지 모르겠어서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마리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요. 저 어릴 때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그때 충격이 커서 그랬을까요. 그런데요. 이상하게요. 저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셨던······할아버지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머뭇거리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했어요. 할아버지가 왜 안 계시냐고요.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을까 봐 무서웠던 걸까요······. 저도 왜 제가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마리는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무언가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글쎄······. 그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지 않을까?”


마리는 답답한 듯 깊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랫입술을 내밀며 손바닥으로 한쪽 뺨을 눌렀다.


“아니면, 제 기억이 잘못된 걸까요······.”


나도 고민에 잠겨 소파 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니까 마리. 너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거야?”


마리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몰라요······.”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트리는 마리를 보고 말했다.


“일단 알아보자. 솔직히 나는 너희 부모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식을 버려놓고 죄책감 한 번을 느끼지 않더라.”


반박할 말이 없는 지 음울한 얼굴로 입을 닫는다.


그런 마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들을 돕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마리는 잠시간 생각에 빠져들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실은 저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가족이니까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밉고······. 저도 그런데 아가씨께서도 그럴 것 같아요.”


마리는 옅은 미소를 보이더니 갑작스럽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아가씨. 정말로 감사해요! 저 아가씨께 말씀드리길 잘한 것 같아요.”


뭐가 그렇게 고마운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직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는데?”


의아해하며 묻자 마리가 뺨을 감싸며 베시시 웃었다.


“······아가씨께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잖아요. 답답하게 그랬는데 화도 안 내시고 차분하게 들어주셨잖아요.”


그건 나한테 너무 기대치가 낮은 거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데, 마리는 기쁜 듯 웃었다.


“사실 저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처음이에요. 진짜 이상한데 왠지 속이 후련해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2 52화 22.10.29 42 1 12쪽
51 51화 22.10.28 36 0 13쪽
50 50화 22.10.27 32 0 12쪽
49 49화 22.10.26 34 0 12쪽
48 48화 22.10.25 29 0 12쪽
47 47화 22.10.24 41 0 12쪽
46 46화 22.10.23 36 1 12쪽
45 45화 22.10.22 38 1 12쪽
44 44화 22.10.21 37 1 12쪽
43 43화 22.10.20 38 1 12쪽
42 42화 22.10.19 43 1 12쪽
» 41화 22.10.18 38 1 13쪽
40 40화 22.10.17 39 1 12쪽
39 39화 22.10.16 41 1 13쪽
38 38화 22.10.15 41 1 12쪽
37 37화 22.10.14 42 1 12쪽
36 36화 22.10.13 43 1 11쪽
35 35화 22.10.12 39 1 12쪽
34 34화 22.10.11 40 1 11쪽
33 33화 22.10.10 45 1 12쪽
32 32화 22.10.09 51 2 12쪽
31 31화 22.10.08 45 2 12쪽
30 30화 22.10.07 45 2 12쪽
29 29화 22.10.06 49 2 11쪽
28 28화 22.10.05 50 2 12쪽
27 27화 22.10.04 49 2 12쪽
26 26화 22.10.03 55 2 12쪽
25 25화 22.10.02 49 1 11쪽
24 24화 22.10.01 49 1 12쪽
23 23화 22.09.30 49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