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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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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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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2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10.2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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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43화

DUMMY

단호하게 양손을 내미는 게, 마치 성난 황소를 달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워. 워.”


저 진정하라는 손짓이 되려 울컥할 것 같다.


부아가 치밀려는 찰나.


로렌스는 난처한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이거. 이거. 눈치가 빠르시네요.”


로렌스는 양팔로 자신을 감싸 안고 사연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정없는 무덤 없다고. 괜한 소리였다.


아카데미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방법이나 빨리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수 없이 로렌스에게 관심을 내비쳤다.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로렌스는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나무패를 꺼냈다.


하얀 점이 찍혀있다는 걸 제외하고 통행증과 다른 점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위급한 일이 있으면 평일에도 외출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해주거든요. 이건 카피본입니다.”

“자세히 봐도 되나요?”


로렌스는 별 의심 없이 흔쾌히 나무패를 건네주었다.


“사실 직원용 패를 빌리는 방법도 있는데 수고비가 들어가니 좀 아깝지 않습니까?”


공감해달라는 듯 로렌스가 눈을 처량하게 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통행증을 쓰는 건데 자주 쓰기엔 눈치가 보이지 뭡니까? 맨날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상하잖습니까.”


나는 변명하는 로렌스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나무패를 은근슬쩍 아공간 팔찌에 챙겨 넣었다.


“?”


짠하고 나무패가 사라지자 로렌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피곤에 쩔어서 판단력이 떨어진 듯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는데, 그 표정이 웃겨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로렌스가 벙찐 표정으로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설마 지금 제 통행증을 아공간에다가 넣은 건가요?”


나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네. 잘 들어 가지네요.”


로렌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원자님?”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능청스럽게 뼈가 있는 소리를 했다.


“근데 당신 착수금은 어쨌어요? 설마 아공간 만드는 데 다 쓰진 않았을 테고.”

“······.”


로렌스는 허를 찔린 듯 합죽이가 되었다. 로렌스가 한 번 들어간 금화를 도로 뱉을 리가 없지. 당연히 켕기는 게 있을 줄 알았다.


그는 이마를 쓸더니 뻔뻔하게 웃었다.


“하하. 생각해보니 후원자님께 기념품으로 하나 드리면 되겠네요!”


손바닥 뒤집듯이 태세 전환을 하는 걸 보니 말귀를 잘 알아듣는 눈치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운이 좋은걸.’


물론 마리의 통행증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수단이 많아지는 걸 저어할 이유는 없다.


“······근데 아카데미 통행증은 어디에다가 쓰실 생각이신가요?”


누가 봐도 아카데미 통행증을 원하는 티를 냈으니 로렌스가 묻는 것도 당연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로렌스는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심각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막 아카데미 테러하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니면 몰래 잠입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정정해주지 않으면 온갖 엄한 생각을 할 것 같다.


정체를 숨긴 것도 사실 반쯤 장난스러운 의도였고 로렌스에게 계속 숨길 이유도 없었다. 이쯤 해서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사실 저도 아카데미 학생이거든요.”


로렌스는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대체 아카데미는 왜 평일에는 외출 금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유가 뭔지. 참. 통행증이 필요한 건 다들 똑같네요.”


정말이지 동감이었다.


어차피 암묵적으로 다들 편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로렌스는 턱을 감싸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의 학생이라······. 그럼 혹시······?”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푸른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설마······?”

“혹시, 설마, 뭐요?”


로렌스는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티······로 시작하는······.”


무슨 볼드모트야 뭐야. 말할 수 없는 이름이야 뭐야.


뜸을 왜 이렇게 들이냐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맞아요.”


로렌스가 입을 벌리더니 손바닥으로 급하게 막았다.


“······!”


나는 툴툴거리며 못마땅한 티를 냈다.


“그 반응은 대체 뭔가요?”


로렌스는 손바닥을 치우며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금방 자본주의에 찌든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게 너무 유명하신 분이라······. 그런 분이 제 후원자님이 되어주시다니! 정말이지 전 행운아네요.”


모르긴 모르겠다만 로렌스도 신문을 읽은 게 아닐까 싶었다.


썩 반응이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네. 그럼 맹약 조건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도록 하죠.”

“잠시만요.”


로렌스는 허둥지둥 일어나 돌돌 말린 양피지를 챙겨와 펼쳤다. 깃털펜에 잉크를 콕 찍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5억 골드를 계약금으로 로렌스에게 준다. 로렌스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준수해야 한다. 첫째. 티타니아 르웰이 요구하는 아티팩트를 우선하여 만들어 준다. 그에 따라 보상금을 논의해서 받는다. 둘째. 뜻이 맞는다면 동료로 협조한다. 여기서 뜻이 맞는다는 기준은 합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며 협조의 범위는······.”


로렌스는 빠르게 글자를 써 내려갔다. 초록색 잉크로 쓰인 글자는 여전히 읽기 어려웠지만 쓰는 속도는 경이로웠다.


“······더 추가할 내용이 있을까요?”

“음······.”


로렌스는 차분히 양피지에 쓰인 조건을 읽었다.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럼 맹약을 하죠.”


나는 로렌스에게 마나를 밀어넣었다. 노엘만큼은 아니었으나 마나가 뭉텅이로 빠졌다.


맹세가 끝나고 로렌스가 약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후원자님!”


그와 손을 맞잡고 나는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멸망이 코앞인데 협조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마침 로렌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요.”


로렌스는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


“착수금은 이미······.”


혹시 착수금을 도로 뱉어내라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여튼 뼛속까지 수전노 아니랄까 봐. 티를 무지하게 낸다.


“당연히 보수도 넉넉하게 챙겨드리죠.”


로렌스는 방긋 웃으며 양손을 비볐다.


“역시 후원자님. 말이 통하시네요.”

“제가 필요한 건······.”


그에게 부탁한 건 다름 아닌 방호복이었다.


웬 방호복인가 하면.


전염병에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초반에 전염병은 타액과 체액을 통해 전염되어 감염이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변이가 일어나면서 비말로까지 전염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확산된다.


연구진이 혹시라도 감염을 당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제작을 부탁했다.


설명을 들은 로렌스가 말했다.


“그거 수중 잠수용 아티팩트랑 비슷하네요.”

“그런가요?”

“네. 결국은 안으로 외부의 물이 들어오지 않고, 공기가 감싸고 있는 형태니까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니 지난번에 잠수용 아티팩트를 샀던 것 같다.


분명 육각형 모양의 물건이었던 것 같은데.


“지난번에 대량으로 구매하셨죠? 그 아티팩트를 조금만 손보면 되겠네요.”

“그런가요.”


나는 아공간 목걸이에서 육각형 아티팩트를 한가득 꺼내놓았다. 로렌스는 멍하니 아티팩트를 바라보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이걸 다······?”

“네. 잘 부탁드려요.”


로렌스는 다크써클이 내려온 눈가를 어색하게 휘었다.


“혹시 언제까지 해드리면 됩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최대한 빨리요. 가능하면 일주일 내면 좋겠네요.”


로렌스는 실성한 듯 웃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덩달아 유쾌하게 웃었다.


* * *


그 시각.


티타니아와 부딪쳤던 남자. 앨론 황자는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의 갈색이 섞인 금발 머리는 잔뜩 헤집은 것처럼 흐트러져있었다.


앨론 황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랍 속에 곱게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튤립이 작게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그는 손수건을 애틋하게 내려다보다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그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건 아카데미 학기 초반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은 듯 비틀거렸고 나와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에게서는 청아한 은방울꽃 향기가 났고, 순식간에 아름다운 자태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쩜 그렇게 가녀리고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실례되는 소리를 무심코 해버렸을 정도였다.


그 뒤로 앨론 황자는 계속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기품.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몸짓. 그리고 명석한 두뇌까지.


심미안이 다소 독특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귀여웠다.


‘체크 무늬를 좋아한다니······.’


그때가 생각나서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당차게 헨리 교수에게 직언하던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었다지.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티타니아 르웰이었을 줄이야······.’


동부의 후계자가 은발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순간적으로 당연히 북부의 귀족일 거로 생각했다.


자신도 흔하지 않은 혼혈이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앨론 황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망나니라는 이미지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으므로 착각하지 않을 수가 없노라 변명했다.


대문짝으로 쓰게 실린 기사를 보고서야 그녀가 티타니아 르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수건을 주웠을 때부터 뭔가 이니셜이 낯익다고 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깨닫고 있었는데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난 뭘 바랐던 거지.”


그녀와 이야기도 한 번 제대로 나눈 적도 없었는데 혼자서 무슨 한심한 짓인지.


대체 동부의 후계자인 게 뭐가 어떻다고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단 말인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손수건을 곧바로 돌려주려고 했으나, 그럴 겨를이 없이 그녀는 금방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에 계속해서 말 걸려고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앨론의 눈썹이 살포시 찡그려졌다.


‘레오나드였나······.’


처음에 자신의 옆자리에 멋대로 앉을 때부터 무례한 귀족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마치 보란 듯이 그녀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지 않나.


생긴 건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격의 없이 계속 친한 척 그녀에게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조까지······.’


마나 생태학 수업에 조 명단을 확인하고 앨론 황자는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얼굴만 번지르르하면 뭐하나. 괜찮은 구석이 눈꼽만큼도 없다. 그 멍청한 얼굴 하며 아직도 사교회에 가입을 못 했다고 들었다.


고의로 엿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뒷자리에 앉아서 본의 아니게 들렸다.


‘얼마나 얼빠진 귀족이었으면······.’


그녀를 구워삶아서 대체 어쩔 수작인지. 분명 더러운 속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얼굴을 구기던 앨론은 문득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그리고 보니 그녀도 아직 사교회에 가입을 안했다고 했던가······.”


앨론 황자는 턱을 괴었다.


괜스레 책상을 쓸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같은 베르세르크 사교회에 들어와 주면 좋으련만.”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레오나드, 아니 그 놈팽이를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에게 사교회를 제안하면서 말을 걸어볼까?”


베르세르크 측에서도 접촉한다고 듣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다짜고짜 손수건만 전해주는 것보다 그편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황자가 접근하면 그녀가 놀랄 게 분명했다.


‘그녀를 놀라게 할 수는 없지.’


앨론 황자는 괜찮은 생각이라며 뿌듯해했다. 거기다가 그녀가 사교회에 들어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날을 고대하며 앨론 황자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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