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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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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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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10.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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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8화

DUMMY

오늘따라 햇빛이 너무 쨍했다. 이러다가 주근깨라도 생기면 어쩌지.


은근슬쩍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황녀님은 제국 지도를 펼쳐놓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이 되기 전에는 본래는 5개의 나라로 이뤄져 있었어요. 그때부터 르웰과 베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죠. 서부는 작물을 재배하기 적합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부는 그렇지 않았답니다.”


마치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설명을 듣는 상대는 티타니아 르웰이었다.


‘쟤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삐딱하게 그 아이를 쳐다봤다.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따뜻한 햇볕과 함께 노곤하게 들리는 황녀님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래서 동부는 상업을 쥐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서부가 상업에 손대지 못하도록 해야 했어요. 아주 긴 세월 동안······.”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청했다. 서부가 괜히 동부를 싫어하는 게 아니지. 이게 다 동부 때문이다.


“그때 동부는 어쩔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충분할 만큼 부를 축적했죠.”


동부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뒤이어지는 말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욕심만 그득그득해서는!’


이제 좀 서부를 내버려 둬줬으면 좋겠다.


황녀님은 말을 멈추시고는 그 아이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아이도 황녀님을 마주 봤다.


먼저 시선을 뗀 것은 황녀님이었다.


황녀님은 지도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몇 세기전, 서부에 대흉작이 있었어요. 그때 서부는 책임을 물어 후작 가문으로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다시 작위를 되찾으려 애썼지만, 제국은 너무도 평화로웠어요. 공을 세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거죠.”


황녀님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대흉작이 오롯이 서부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로살리아 회원들은 그에 동의하고 있답니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그 아이는 팔걸이를 툭툭 치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마치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황녀님은 그 아이의 반응을 기다리며 차분히 입을 닫았다.


문득 그 아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데······.”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상하게 긴장이 돼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아이는 얄미운 미소를 띠더니 말했다.


“그거 혹시 오크야?”

“뭐?”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눈을 깜빡였다. 오크, 오크라니 대체 그런 이야기를 언제 했었지? 갸우뚱하는데 그 아이가 검지를 들더니 머리핀을 가리켰다.


“머리핀 말이야.”

“······.”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말. 취향이 독특하네.”


나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야! 아니거든! 이거 귀여운 돼지라고!”


대체 이야기를 듣기는 한 거야? 대체 갑자기 거기서 머리핀 이야기는 왜 나오는데! 아니 그리고 어떻게 이게 오크야! 누가 봐도 귀여운 돼지잖아!


열이 뻗쳐서 소리를 꽥 질렀다.


“아악!”


그러자 그 아이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옆에서 황녀님도 웃고 있었다.


‘아, 진짜. 어이없어.’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왜 이렇게 수치스러운지 모르겠다.


그 아이는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야. 너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길래 분위기 좀 풀어볼 겸?”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거 너무 뜬금없지 않아? 하여튼 망나니라서 그런가. 나랑은 어딘가 사고방식이 다른 것 같다.


“뭐.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나는 불신을 담아 그 아이를 노려봤다. 그러자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게 어찌나 얄미운지.


나는 앞머리를 향해 입김을 후 불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황녀님은 웃음기를 띤 채로 말했다.


“티타니아 양은 이해가 빠르시네요.”

“딱히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그거야. 황녀님이 쉽게 설명을 해주긴 했지. 근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영 못 미더우니. 쉽게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 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었죠.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요. 그건 아직도 유효한 이야기고. 뭘 어쩌든지 상관이 없다는 뜻이라고요. 솔직히 동부가 충분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동부에 특별한 특산품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고, 심지어 토지도 넓은 편은 아니죠.”

“으음······.”


상황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닌가 봐. 나는 의외의 모습에 입술을 모으며 그 아이를 바라봤다.


“거기서 상업을 놓아버리면 동부가 자생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싶거든요?”


황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동부는 충분히 쌓아둔 자산이 있으니 무엇이든 해볼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이미 제국에 상단들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요? 아예 상업에서 물러나라는 이야기는 아닌걸요.”


그 아이는 바람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근데. 뭐. 아무래도 좋다는 소린데요.”


황녀님은 멈칫하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게 무슨······.”

“동부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는 동부의 르웰 가문의 후계자잖아? 나는 멍하니 그 아이를 바라봤다.


“심지어는. 서부를 위해 얼마든지 협력해줄 수도 있다는 소리죠. 못 믿겠다면 맹약을 해줄 수도 있어요.”

“······.”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에 황녀님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물론 그냥 도와주겠다는 소리는 아니고요. 나도 받을 건 받아야죠?”


황녀님은 생각이 많아지신 듯 이마를 짚으셨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대체 티타니아 양은 무엇을 바라시는 건가요?”


그 아이는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글쎄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머리가 아팠다. 자세히 말해주길 기다렸으나 입을 꾹 다문다.


온실 정원에 정적이 감돌았다.


“선배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었나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황녀님은 심각하게 얼굴이 굳혔다. 평소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조건을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제 제안은 간단해요. 저는 서부가 공작 가문으로 복권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아이는 갑작스럽게 나를 가리켰다.


“난 궁금한 게 있거든. 그걸 네가 알려줬으면 하는데. 어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조건이지?”


생각지도 못한 조건에 침을 꼴깍 삼켰다. 황녀님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그거야. 당연히 비밀이지. 그래서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서, 그게 불안해서 찝찝했다. 대체 무슨 정보를 얻어서, 어쩔 속셈인지 알 수 없으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아도 대답해줄 수 없는 것도 있어.”


그러자 그 아이는 고민도 않고 여유로운 태도로 수락했다.


“좋아. 대답하기 곤란한 일이면 침묵을 용인해줄게. 대신 나도 난처한 상황일 때는 도와줄 수 없어.”

“으음······. 난처하다는 기준이 뭔데? 갑자기 다 난처하다고 하면 의미가 없잖아.”

“나도 빠져나갈 구멍은 필요하니까. 대뜸 필요하니까 죽어달라고 하면 곤란하잖아? 아까 했던 말들은 진심이야. 양심껏 도와줄게.”

“······.”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맹약은 함부러 하는 게 아니라고 그랬는데······. 정말로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동부가 가장 큰 방해긴 했잖아. 그런데 그 후계자가 지지해준다면······.’


황녀님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자, 황녀님은 받아들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황녀님은 거기에 자신이 걸려있지 않으니까 쉽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어쩐지 엉엉 울고 싶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확실한 길을 알려줬으면 좋을 텐데. 갑자기 내 여동생이 너무 그리웠다.


‘아나스타샤라면 내게 좋은 조언을 해줬을 텐데.’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아이는 어쩐지 음침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무심코 그 손을 붙잡으려다가, 어느새 손바닥이 축축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들키기가 싫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무슨 악수야. 됐거든.”


나를 가만히 보더니 그 아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 참 아쉽네.”


진짜, 쟤는 알 수가 없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나는 이리나와 맹약을 끝내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럼. 오늘은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할까?”


이리나는 성의 없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든지.”


이리나의 붉은 머리에 달린 살굿빛 머리핀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취향이 독특하다니까······.’


그녀는 귀여운 돼지라고 우겼는데, 누가봐도 오크를 닮지 않았나. 색만 초록색이었으면 딱 그럴듯했다.


농담삼아 한말이긴 했지만 반쯤 진심이었다.


나는 일단 이리나에게 베스 후작에 대해 캐볼 작정이었다. 솔직히 크게 의미를 두고 조건을 제시한 건 아니었다.


‘아무 조건도 없으면 그쪽도 의심할 거 아냐?’


궁금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괜찮은 생각이 들었던 게 주요했다. 제국은 크게 5개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가. 동부, 서부, 중앙, 북부, 남부.


그리고 그들이 규합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서부와 동부였다. 오랜 시간동안 깊어진 골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둘째치고. 동부와 서부의 골을 좁혀놓으면 어느 정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나는 로렌시아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네. 티타니아 양. 다음에 봬요.”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아참, 선배님. 정치를 가르쳐주겠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유효한 거겠죠?”


저택에서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조금씩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실전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참에 로렌시아에게 배워두면 쓸데가 있겠지.


로렌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말했다.


“그럼요. 티타니아 양.”

“매일은 무리겠지만. 시간 나는 데로 들릴게요. 자세한 이야기도 그때 다시 하고요.”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 그리고 내일은 할 일이 있어서 못 올 것 같아요.”


내일은 오전 수업만 들은 날이었는데, 오후에 검술 수업 멤버들과 일정을 잡아둔 게 있었다.


로렌시아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입을 가렸다.


“어머······.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글쎄요. 저는 제 개인 사정에 관심을 깊게 가지시는 건 부담스러워서요.”

“후후. 티타니아 양은 비밀이 많으시네요.”


로렌시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걸까. 솔직히 친분이 깊지 않은 상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쪽은 이야기해줄 수 없는 사정도 있고 말이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 네.”


이리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나는 몬스터학개론 수업이나 들으러 가봐야겠다. 첫 주에는 교수가 수업을 일찍 끝내줘서 아직 제대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교수는 괜찮아 보였는데 수업은 어떠려나.


“그럼 이만.”


나는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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