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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140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10.2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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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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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47화

DUMMY

* * *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 어젯밤 잠을 설쳐서 눈 밑이 초췌했다. 괜스레 미소를 지어 보기도 하고, 양 볼을 꾹 누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봐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네.’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힘없이 액세서리 함을 열었다. 네모난 칸으로 나뉜 함 안에 토끼핀, 리본이 달린 핀, 작은 보석이 달린 핀까지 다양한 머리핀이 보인다.


기분 전환을 위해 새로운 핀을 사고 싶지만 아쉽게도 용돈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학기 동안 쓰라고 받은 용돈이었는데······.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던 은발 소녀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입학 초에 있었던 자선 경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냥 살짝 약만 올려줄 생각이었는데.’


설마 거기서 입찰 포기를 할 줄은 몰랐다. 그때껏 입찰한 건 다 구매해놓고, 기다렸다는 듯이 딱 내빼다니!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고작 손수건 하나 때문에 한 학기 용돈을 다 써버리다니.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간곡히 부탁드렸지만, 된통 혼만 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머리핀을 사는 게 소소한 낙이었는데. 그것도 이젠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아직 화가 나셔서 그래. 나중에 못 이긴 척 보내주실 거야.’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에휴.”


나는 우울한 기분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머리카락이 뺨을 따갑게 때렸다. 정신이 바짝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다시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릿결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이걸로 할까?”


액세서리 함에서 마침 아직 착용한 적 없는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귀여운 돼지 모양 핀이다. 거울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오늘도 하루도 힘내자!”


* * *


나는 온실 정원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더미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금발 머리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황녀님, 이게 다 뭐에요?”


책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던 그녀는 웃으며 책을 살포시 덮었다. 무릎에 책을 올려두며 황녀님이 말했다.


“이리나. 오늘은 이르네요.”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나서······.”


나도 모르게 황녀님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황녀님!”


이 책들은 다 뭐냐니까요?


그런 눈빛을 담아 흘겨보자, 황녀님은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후후······.”


황녀님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책등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제국의 지역’부터 시작해서 ‘귀족 계보’까지 온갖 정치에 관련된 책들이 보였다. 나는 황녀님께서 책을 준비하신 이유를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걸 다 그 애 때문에 준비하신 건가요?”


그녀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책표지를 쓸었다.


“······이리나는 참 귀엽단 말이죠.”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또,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시는 거죠?


불만을 담아 황녀님을 보지만, 그녀는 그저 눈매를 휘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리나. 제국은 마치 커다란 책과 같아요.”


황녀님은 정말 말을 어렵게 하신다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이요?”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뒀던 책을 짠하고 들어 보였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책의 모서리를 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하늘 높이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거랍니다.”


황녀님은 책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만약, 기둥이 하나라도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 상상해보시겠어요?”


자연스럽게 한쪽이 아래로 쏠려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떠올랐다.


하지만 내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황녀님은 제국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거겠지만······.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일까? 동부가 고작 후계자 하나 때문에 망하지도 않을 텐데!


나는 여전히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요······. 그래도······.”


황녀님은 위엄있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리나. 저는 제국의 황녀랍니다. 균형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어요.”

“그래도 황녀님께서 직접 그 아일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거랍니다.”


확고한 황녀님의 태도를 보자 한숨을 절로 나왔다. 어쩜 황녀님은 왜 이렇게 사람이 좋은 건지,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녀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그게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요! 다른 귀족들이 그러던걸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 같다고 그러던걸요?”


황녀님은 작게 입을 벌리며 놀라는 흉내를 냈다.


“어머, 그보다 좋은 소식은 없을 거예요.”

“진심이세요?”


결국, 나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황녀님은 은은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물론이랍니다.”

“그게 대체 무슨 좋은 소식이에요.”

“이리나. 만일 그렇다면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사실은 정치를 잘 아는 귀족이라고 가정해보자고요.”


나는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황녀님을 노려볼 수는 없으니 괜히 테이블을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네.”

“그럼 저희는 어떠한 손해도 없잖아요.”

“왜······손해가 없어요. 황녀님 시간은요?”

“그렇지 않아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황녀님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네?”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로 넌지시 말했다.


“저희는 그녀의 시간을 얻은 셈이 되겠죠? 처음 저의 목적이 그랬잖아요. 르웰 가문의 후계자인 그녀를 우리의 편으로 만들고 싶다고요.”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보를 모르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정보’를 주면 도움이 되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상대에게는 의미가 없다.


황녀님의 주장처럼 그 아이를 설득할 시간은 얻은 거라고 친다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정말로 모른다고 한다면요?”

“······.”

“어떻게 방향을 잡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녀를 가르칠 수도 있으며 또한 그녀의 호감을 얻어내기도 쉬워지겠죠.”


나는 가만히 눈동자를 떼구루루 굴렸다.


“······으음. 그러면요. 만약에 말인데요. 황녀님께 교육을 받아서, 저희와 적대한다는 최악 상황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최악은 바로 균형이 무너지는 것. 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음 세대가 이루면 그만인걸요?”

“······.”


역시 황녀님은 나와 다르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가문에 도움이 돼야만 했고, 아버지께 인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황녀님은 제국의 균형을 맞추는 일에 서부가 끼어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다르다는 걸 느낄 때마다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동부가 무너져 버리면 그 혼란을 바로 잡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황녀님께서 무어라 덧붙였지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듯이 그녀가 잠시간 말을 멈췄다.


“······리스크 없이 진행되는 일은 거의 없답니다. 이리나. 당신은 그때마다 손을 멈추실 건가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녀님은 양팔을 곱게 포개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안전한 길만 택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얼마나 있을까요. 체스도 그렇잖아요? 상대를 내 의도대로 움직이고 싶다면,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야겠죠?”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황녀님께서는 똑똑하시니까, 분명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아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내게 물었었다. 대체 말이 바뀐 이유가 무어냐고.


그래서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다.


동부의 사람이어서도 아니었고, 자선 경매 때 네가 사려던 물건마다 낙찰해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난 그녀가 르웰 가문의 후계자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게 혐오스러웠다.


그것도 손쉽게 후계자 자리를 얻어놓고!


어쩌면 그 아이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질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아일 보면 무심코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나스타샤 베스.


‘내 가여운 여동생.’


돌연변이로 태어난 그 아이는. 노파처럼 하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그 아이는 참 허약했다.


바깥에서 햇볕을 조금만 쬐어도 아나스타샤는 시력을 빠르게 빼앗겼다.


하지만 신은 공평하게도 아나스타샤에게 건강을 가져간 대신 비상한 두뇌를 주었다.


나는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무엇도 아나스타샤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여동생을 더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머리 색이라 그런걸까······.’


왜 그 아이가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리나,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나는 뒤늦게 황녀님의 말씀을 듣고서 되물었다.


“네?”


황녀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책을 가리켰다.


“일단 이것저것 챙겨오긴 했는데, 보다시피 너무 많네요. 정리하는 걸 도와주실래요?”

“아, 네, 알겠어요.”


그 아이를 위해 책 정리를 돕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녀님의 성가시게 해드릴 수는 없지.


그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물었다.


“근데 황녀님. 어제 일을 설명해주기로 했으니 오늘은 별로 책이 필요 없지 않을까요?”

“후후, 그것도 그러네요. 제가 너무 들떴나 봐요.”

“아이참······.”


결국, 대부분 책을 읽은 편에 쌓아놓고서야 일이 끝났다.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황녀님이 느긋하게 말했다.


“기다리면서 차라도 한잔할까요?”


설마. 지금 그거 저보고 해달라는 건가요. 저 지금 방금 앉은 것 같은데요?


나는 불만을 담아 그녀를 흘겨봤다.


“황녀님?”


내 반응이 재미있었던 것인지, 그녀가 즐겁게 웃었다. 나도 황녀님께 전염된 것처럼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문득 그녀가 뒤편을 눈짓했다.


“아, 저기 오네요.”


은발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소녀가 보였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찰랑거린다. 눈빛을 읽을 수 없는 두꺼운 안경과 단정한 옷차림.


몸에 밴 예법이 어쩐지 시선이 간다.


그 아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개를 성의 없이 까닥였다.


평소 같았으면 차를 준비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을 테지만, 오늘따라 피곤해서 일어나가기 귀찮았다.


황녀님은 반갑게 웃으며 그 아이를 반겨주었다. 비어있는 자리를 손짓했다.


“잘 오셨어요. 티타니아 양.”


그 아이는 날 힐끔 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황녀님이 말했다.


“차를 내어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어려울 것 같네요.”

“뭐. 딱히 상관없어요.”


지난번에는 차 맛이 괜찮다고 하더니,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울컥해서 그 아이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창가 바로 옆자리라 햇빛이 바로 얼굴에 닿는다.


‘흥. 어차피 해줄 생각도 없었거든?’


나는 팔짱을 끼고서 의자에 기댔다.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음······.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글쎄요.”

“티타니아 양. 서부와 동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알고 계시는지요?”

“네. 뭐.”


말투도 퉁명스럽고 음침하게 생겼는데, 목소리는 안 어울리게 곱네······.


‘아니지. 내가 칭찬을 해줄까보냐!’


목소리도 딱 자기랑 딱 똑같네. 똑같아.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찡그리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면서 설명을 듣는 게 이해하기가 좋겠죠?”

“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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