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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전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최근연재일 :
2024.06.2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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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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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남매의 분노

.




DUMMY

‘아! 아버님, 어머님...’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방위하는 다섯 개 방위부대중 하나인 일영 산하 중앙군의 외곽 경비를 담당하던 성문교위 마인극이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 저녁노을을 보다 고향 생각이 떠올라 구슬픈 마음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


대륙의 언저리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강토를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한나라에 의해 도륙을 당하신 부모님들의 인자하신 얼굴이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자 슬픔이 밀려온 것이다.


천하에 무서운 것 없는 고수가 되었으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니 흑흑대며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회상이 짙어지자 팔뚝 혈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요동쳤다. 한나라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아픈 상처로 남은 그날의 저녁과 무척이나 닮은 저녁 풍경이었다. 천산에서 바라본 그날의 스산한 기억이 물결치며 일렁거렸다. 마음이 아팠다.


‘안된다! 이런 나약함은 ... 고향을 수복하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 한다. 반드시!`

폐허가 된 고향을 찾기 위해 결의한 자신과 여동생, 천산에서 함께 무공을 수련한 옛 친구들이 떠오르자 그는 아픔을 애써 밀어내며 새삼스런 결기를 다졌다. 악다문 그의 입술에서 굳은 맹세라도 하듯 격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푸더덕! 휘익 ~”

옛 기억에 젖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던 마인극의 앞에 무서운 속도로 날아온 혈응이 불쑥 떨어져내렸다. 평소와 달리 다급하게 날아온 혈응을 본 마인극은 발에 묶인 붉은 천조각을 발견하곤 놀란 마음을 누르고 급히 풀어 헤쳤다.


천 조각은 여동생 마이진과 연락하는 약속이었다. 천의 색깔로써 보낼 때의 상태를 주고받았는데 붉은색은 위험 표시였다. 지금껏 한 번도 수신한 적이 없는 신호였다. 게다가 붉은 천에는 연검의 칼끝으로 급하게 갈겨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급 -

글씨를 본 마인극은 갑자기 치를 떨기 시작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무거운 돌덩이에 눌려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황망한 불안이 온몸을 감쌌다. 마음이 급했으나 책임져야 할 산하 병사가 오십이었기에 일단 막사로 향했다.


“추부장! 지금 여동생에게 변고가 생긴듯하니 절차를 밟아 대신 지휘를 하도록 ....그리고 혹여나 강호의 일일수 있으니 추부장도 대기하도록, 필요시 동행해야 할지도,”

“존 명!”

부장 추자하는 주군으로 모시는 마인극이 급하게 서두르며 여러 가지를 주문하자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추 부장은 즉시 오른팔을 가슴 쪽에 구부려 군례를 취한 후 급하게 교위의 막사를 빠져나갔다.


부장의 직위에 머물러 있지만 추자하는 한 때 강호에서 매서운 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고수였다. 구릿빛 각진 얼굴에 눈썹이 진한데다 안광이 세어 강한 인상의 사내였다. 어린 시절, 혼란한 시대를 틈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폭력조직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누나와 힘들게 살다가 천운으로 은인을 만나 힘들게 무술을 배워 고수의 반열에 오른 그였기에 불의에 대해서는 추호의 용서도 하지 않은 그였다.


우연히 들른 마을에서 식사하던 중 패도문의 졸개들이 난전의 상인들을 괴롭히자 대판 큰 싸움을 벌여 통쾌하게 이겨 정의를 구현했으나 그의 인생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뻗쳐있던 패도문의 잔당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것이다.


그런 난리가 계속되자 어느 지역에서도 정착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와 인연을 맺은 주변 이웃들이 이유없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기 때문이었다. 종국에는 함정에 빠져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우연히 이를 목격한 마인극을 만나 살 수 있었다. 마인극은 강호를 두루 섭렵한 추자하가 눈으로 직접 목도한 가장 강한 사내였다. 마인극의 무공은 다양한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과 별개로 압도적인 체력에서 오는 무한한 힘에 기반을 두었기에 그 어떤 고수와 겨루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추자하는 매사 엄격하면서 공정한 마인극의 태도에 감동하여 강호인의 굴레를 벗고 마인극 수하의 장수가 되기를 자청했다. 제안을 받은 마인극은 처음엔 이를 거절했다. 추자하가 강호의 선배이기도 한데다 여섯 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자하가 마인극을 존경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자 본인이 관할하던 부대의 수석부장으로 임명하여 함께 일하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추부장은 주군의 근심이 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그것을 위해 일조하고 싶은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사건에 동참하여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군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각오가 섰다. 추자하의 움켜쥔 굵은 주먹에서 울룩불룩 굵은 핏줄이 아우성하듯 실룩거렸다.


“혈을! 마이진에게 가겠다. 즉시 앞장서라!”

평복으로 갈아입은 마인극이 말하자 바쁘게 날갯짓하며 파닥거리던 혈응이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날아 올랐다. 마인극도 즉시 몸을 날렸는데 높이 날아 멀리 뛴 후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그 모양은 마치 하얗게 피어나는 연기 하나가 솟구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듯했는데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최고경지의 경공술인 답보설흔이었다. 눈 위에서조차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신선의 걸음걸이였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그 힘든 천산에서도 살아온 우리들 아니냐 ... 제발!’

마인극의 눈가에 간절함이 묻은 눈물 한 자락이 나올 듯 말듯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혈응에게 더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보다 나를 듯 뛰어가는 인간이 서로를 채근하며 바쁘게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미령과 함께 있던 색목녀 마이진은 그의 동생이었고 그들은 모두 아라방과 함께 천산에서 무공을 연마한 고향의 혈육이자 친구였다. 걸음마다 뼈에 사무치는 전의가 새어 나오는 마인극의 꾹꾹 눌러 밟은 발길에는 진한 혈육의 정이 짙게 쌓이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즈음, 미령을 납치한 괴한들을 물리친 마이진은 궉세사 잔당이 도망친 방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납치된 지 족히 한 시진 이상은 흘렀기에 뒤쫓기에 애를 먹고 있었다.

`놈들의 경공술은 예상 밖이야. 지금쯤이면 발자국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니 ... 하긴, 천잠사 같은 귀물을 사용할 정도니 높은 경공술을 지닌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나저나 어떻게 찾지, 마음만 급해지니...하~아!’

한숨을 쉬는 마이진의 눈가에 저잣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파에 묻히면 행방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한 마이진은 옆에 놓인 바윗돌 위에 앉아 방법을 모색했다. 연통을 넣었으니 오빠 마인극이 곧 도착할 것이다.강호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오빠와 함께 방안을 모색한다면 의외의 해결방안이 나올수 있을 것이다.

“어! 이런 ...”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방울이 흘러내리자 마이진이 얼굴을 들면서 손바닥으로 땀을 훔쳤다.

“엇! 혈응이 ...”

손가락 사이로 멀리 혈응이 하강하며 날아오는 게 보였다. 다음 순간 멀리 보이던 오빠 마인극이 어느새 그녀의 옆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무 일 없었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이진의 옷이 군데군데 찢긴 데다 자욱하게 얼룩진 수많은 혈흔들로 보아 큰 싸움이 있었음을 알았다.

“어떤 놈들이냐? 내 그놈들의 사지를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줄 것이다.”

격앙한 마인극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포효했다. 마인극의 머리카락이 곧추섰는데 이는 그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할 때 나오는 흥분상태였다.


“오빠, 내 말을 잘 들어요. 내 유일한 친구이자 동생인 미령이가 납치되었어요. 정말 보통이 아닌 놈들이었어요. 천잠사로 만든 그물을 처음 경험했어요. 보아하니 인원이 많았는데 다행히 일부가 먼저 돌아간 후라서 겨우 물리치기는 했어요. 문제는, 아까 납치당한 미령이가 어디로 납치되었는지를 아직까지 모르니 그게 미칠 지경이예요. 험한 일을 당하기 전에 빨리 구해야 해요.”

말을하는 마이진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우수에 젖었다. 소미령은 조선에 정착하려는 마이진이 토착 여인네들로 부터 외모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을 당했지만 비슷한 처지의 그녀만은 아무런 편견없이 친언니처럼 잘 따랐기에 따뜻한 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런 세월을 함께한 그녀들이었기에 자매처럼 정이 들었고 가끔씩 바깥 나들이를 할 때면 꼭 붙어 다니며 우애를 나누던 사이였다.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인해 마이진은 자신들을 덮친 궉세사 일당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빨리 미령이를 찾지 못한다면 미령이의 부모님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부모님들이 내일 남방에서 오는 큰 무역상과의 교역에서 통역을 위해 며칠을 비운다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었는데, ”

마이진은 흐르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두 사람이 나들이를 나와 한 사람만 남은 암울한 상황에서 자칫 납치된 장소를 몰라서 추적을 포기한다면 고향 사람들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남매의 다짐이 허망하게 부스러는 것과 같은 아픔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그것은 두고두고 삶을 옥죄이는 올가미가 될 게 분명했다.


“혹시, 그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느냐?”

한참을 생각하던 마인극이 물었다. 이 상황에서 차분하게 대처해야 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강호에서 활동하던 시절 사건이 생겼을 때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고 해결하는 것은 사건 속에 있는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였음을 경험으로 터득한 터였다.


“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네가 싸웠던 곳으로 가 보자. 찾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현장에는 필시 증거가 있을 테니 말이다.”

마인극이 마이진에게 천천히 말했다. 마음만 바빴지 아무런 방안만 강구하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던 마이진이 그 얘기를 듣고는 재빨리 일어나 나를 듯이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싸웠던 장소는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흩뿌려진 부서진 나무들과 돌들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고 처참한 몰골의 시신들도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근데, 이놈의 왼쪽 가슴 쪽에 무슨 표식이 있는 것 같은데...”

마인극이 연검에 베여 죽은 무사의 시신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찢어진 옷 속에서 누가봐도 특정한 신분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표식을 발견하고서 말했다.

“아니, 이놈도 똑같은 표식이 있네.”

급하게 확인한 다른 시신들에서도 계속하여 같은 표식이 발견되자 마인극은 확신하며 외쳤다. 모두 같은 위치에 같은 문양으로 새긴 표식이었다.


글자 같기도 하고 그림 문양 같기도 한 그 표식은 글자 “파(叵)”를 닮은 모양이었다. “이놈들은 파락호나 시정잡배 수준의 불한당들이 모인 집단은 결코 아니다. 틀림없이 조직적이고 잘 훈련된 무사들의 집단이야. 어쩌면 의외로 큰 조직일 수도,... 그러나, 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내 반드시 이놈들을 찾아 확실히 박살을 내 주지. 암!”

일일이 같은 표식을 확인한 마인극이 마이진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래요, 오빠는 누구보다 강하니 저와 함께 쳐부수면 될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나중이 아니고 지금이예요. 그놈들에게 납치된 미령이의 소재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최대한 빨리 납치된 곳을 찾아야 해요. 흑흑,”

슬픔이 배인 음성으로 마이진이 흐느꼈다.


“가만! ... 최근에 여러 지역에서 부녀자를 납치하여 겁간한 후 죽여서 유기하는 사건들이 수시로 일어난다더니, 혹시 ...”

상황을 정리하던 마인극이 마이진의 흐느낌을 듣자 며칠 전에 추부장에게 들은 소문을 상기했다. 며칠 전 인근에서 그 사건으로 추정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칫 미령낭자가? ... 이런, 이런!”

화가 난 마인극의 가슴에서 불이 일었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마이진의 유일한 말벗인 미령낭자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빨리 실행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엄습했다.


“아! 참, 오빠. 아까 그놈들을 지휘하던 놈이 자신을 광마혈검이라고 했어요. 혹시 들어본 별호인가요?”

마이진이 불현듯 생각난 궉세사의 별호를 마인극에게 물었다. 무공의 고수였으나 강호에서 생활하지 않은 마이진이 무림계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 그래? 그놈이 그랬단 말이지 ... 광마혈검을 찾으면 범인을 찾는다 그말이지?”

소미령이 납치된 장소를 알 수 있는 단서가 포착되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지은 마인극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속으로 포효를 내질렀다.


‘광마혈검이라... 내 오늘 직접 네 별호에 걸맞는 지를 직접 확인하마. 오늘이 너의 제삿날이 될것이야! 이~노-옴!’

빠지직거리며 이를 간 마인극은 촉박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 마이진의 심정을 알기에 그녀를 향해 급하게 소리쳤다.

“너는 저잣거리로 나가 미령의 소재에 대해 수배해 보거라. 나는 즉시 광마혈검을 찾아 미령낭자를 구하고 그놈들에게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을 백배 천배로 물을 것이니,”

말을 마친 마인극은 벼락처럼 몸을 솟구치며 자신의 군영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누구냐! ... 으윽! ”

화려하기로는 조선 제일이라는 명성의 고급 기루 옥정루, 그곳에서도 가장 웅장한 곳은 꼭대기 층인 오 층이었다. 그곳의 열려있던 창문으로 소리 없이 날아든 두 명의 인영이 창문 옆의 무사 네 명을 가볍게 제압하고 침투했다. 그들은 삽시간에 무장한 무사들을 제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문주인 독고파의 강호행을 호위하는 발탁된 고수들이었던 무사들이라 침투 징후를 감지하고 달려든 그들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되는 숫자만 늘어날 뿐 침투한 자들에게 별로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 층의 객실이 점점 경비무사들의 시신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침투한 이 인은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고 그랬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 칼끝에는 애초부터 자비란 없었다.


피곤하여 일찍 잠을 청했던 궉세사가 수하들의 비명을 듣고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그의 눈에 포개져 널브러진 수하들의 시신들이 보였다. 눈앞이 깜깜했으나 그나마 아직은 방비하는 수하들의 숫자가 많아 포위해서 공격하는 중이었다. 안심할 수 없었지만 곧 위기가 닥칠 것임은 직감으로도 느낄 정도였다.


‘하아! 정말 힘든 날이구나. 낮에 본 벽안의 계집으로도 벅찬 하루였는데 지금 눈앞의 두 놈은 오히려 훨씬 더 강해 보이니, 휴~우 ... 더군다나 문주님은 지금 그 곤륜계집과 침전에 함께 게시는데 ... 아이고! ... 맙소사!’

궉세사는 짧은 순간 문주인 독고파에게 적이 쳐들어온 상황을 알릴지 말지를 갈등했다. 오 층이 워낙 넓은데다 혹여나 정사에 몰두한다면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었다. 힘든 결정의 순간이었다.


깊은 한숨이 나왔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사를 건 아찔한 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이곳의 상황을 결정할 위치는 자신임을 안 궉세사가 앞으로 나가며 목청을 높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감히! ... 패도문의 위세를 듣고도 이 소란을 피우는 거라면 너희들은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궉세사가 등장해 말하자 싸움이 일시 중단되었다. 삽시간에 소강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궉세사! 나를 기억하고 있겠지?”

수하들을 공격하던 무사가 그를 향해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마인극의 수석부장 추자하였다. 구릿빛 피부에 각진 얼굴, 진한 송충이 눈썹을 가지 무사였다.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내가 머물던 마을의 부녀자와 소년들을 붙잡아 노비로 팔았다들었다. 너를 만나면 반드시 그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여기서만나게 되는구나! 더구나, 오늘 우리 주군의 혈육에게 말로도 다할 수 없는 죄를 범했더구나, 겸사겸사 네놈의 죄를 묻고 벌할 좋은 기회일 터, 사정없이 처단해 주마!”

추부장이 득달같이 앞으로 나서며 궉세사를 향해 내달릴 자세를 갖추었다.


“추부장! 지금 한시가 급한데 그 무슨 욕식기육 타령이나 하고 있는가!”

옆에 있던 건장하고 강인한 인상의 무사가 포효하듯 말했다. 마인극이었다.

“아! ... 죄송합니다. 주군의 뜻을 여쭙지 않고 처신한 듯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광마혈검, 저놈을 보고 갑자기 흥분했나 봅니다. 주군!”


추부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급히 대답하자 마인극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서 무서운 광채가 일렁거렸다. 곧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광마혈검이란 놈이 네놈이냐? 보아하니 별호에 걸맞지 않게 수하들이나 몰고 다니며 말썽이나 피우는 화적같은 놈으로 보이는데 ... 내 여동생을 괴롭히고 미령 낭자도 납치한 게 네놈이렸다? 내 이 자리에서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하면 천추의 한이 될 터, 곧 죽여주마! 기대해도 좋다.”

마인극의 안광에서 궉세사를 태워죽일 듯한 불꽃이 이글거렸다.


“후 - 욱! ~”

크게 한번 호흡을 낸 후 마음을 정리한 마인극은 들고 있던 검을 던지곤 등 위에 맨 창 두 자루를 내려 양손에 나누었다. 쌍철극이었다. 긴 창날도 위협적이었지만 창날 밑부분의 도끼날도 무시무시했다. 쌍철극은 먹잇감을 노린 독사의 치명적인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잠시후, 양쪽 손으로 철극을 풍차처럼 돌리자 무거운 철극들이 가볍게 돌더니 서서히 그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내 돌아가던 철극에서 안개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고 갈래갈래 흩어지더니 경비 무사들에게로 날아가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스스로를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 생각하던 궉세사의 수하들은 손쓸 틈도 없이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고꾸라지는 수하들을 보던 궉세사의 표정은 악연실색으로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들이 어디 있다 한꺼번에 나타났단 말인가? 저 색목인 고수는 색목 여인의 오빠인 듯하고, 하! 오늘 정말 잘못 걸렸구나. 더구나, 한때 고강하기로 손에 꼽히던 추자하가 주군으로 받들 정도라면 정말 후덜덜한 절정의 고수일 터 ... 나는 조족지혈에 불과할지도 ... 오늘, 어쩌면 살아남기가 힘들 수 있겠구나, 아하! 세상에나...’

궉세사는 절망했고 때를 맞추어 살아있던 그의 수하들이 모두 죽자 순식간에 휑하니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궉세사뿐이었다.


“하 ~ 아!”

수하들의 시신을 넘으며 다가오는 마인극을 보자 한숨을 길게 쉰 궉세사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모르겠으나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문주님의 사자였을 뿐 개인적인 욕심으로 남들을 괴롭힌 적은 없습니다. 이점 헤아려 주십시오.”

살기 위해서는 이 자는 절대 상대하면 안 된다고 확신한 궉세사가 몸을 과하게 부들부들 떨었다.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그를 보자 마인극이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허~어! 원, 세상에나... 지금 그 추잡한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는지... 참나!”

그 상황을 지켜본 추자하도 혀를 끌끌 차며 가증스럽게 쳐다보았다. 눈치 하나는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인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저항을 포기한 궉세사의 어이없는 행동에 마인극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여동생을 괴롭힌 저놈을 죽여본들 화는 조금 풀릴 수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얻을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미령낭자를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니 일단 이놈을 이용해서 도움을 받자, 이놈을 처치하는 건 그 후 언제라도 늦지 않을 터이니,’

소미령을 찾기 위해 궉세사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자 마인극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좋다! 그렇다면 네놈이 납치한 소저가 어디 있는지를 말해라! 그러면 살려줄 것이다. ... 만약, 한 치라도 거짓이 있다면 그 즉시 네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 하늘에 대고 맹세하지!”

광폭한 모습의 마인극이 불호령을 내지르며 윽박지르자 궉세사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문주님과 이놈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지금 문주님의 침소에 있다고 말을 하면 필히 큰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렇다고 다른 장소로 안내하면 곧 들통날 테고, 이놈의 성질로 보아 무사하기란 힘들겠구나 ... 끄응! 정말 괴롭구나. 하~아!’

주변의 공기는 서늘했다. 수하들의 시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비린내는 말할 수 없이 날카로운 긴장을 던졌다. 궉세사의 이마에 진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어쨌거나 운명에 내 목숨을 맡길 수 밖엔, 휴! 촌각 촌각마다 내 목숨이 죽었다 살아났다 하는구나. 간밤에 꿈자리가 사납더니 이런 무시무시한 변고를 당하다니, 끄~응!’

이리저리 여러 갈래로 잔머리를 굴려도 사실대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잔꾀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궉세사는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스웠다. 대책없이 당하는 이 상황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사!사!사실은 ... 낭자를 문주님의 침소에 모셨습니다. 문주님의 침소는 뒤쪽에 보이는 저 낭하를 쭉 따라가시면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방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짐짓 진실성을 보이기 위해서인지 궉세사는 말까지 더듬어 가면서 천천히 읊조렸다. 달변가인 그가 말을 더듬는 모습은 새삼스러웠는데 예기치 못한 낯선 광경을 본 추자하가 진실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마인극에게 고개를 끄떡였다. 믿어도 된다는 확신의 표시였다.

“그 말이 사실이렸다? 좋다. 앞장서라!”

마인극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독고파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려던 궉세사가 죽을상을 한 채 마지못해 앞장섰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일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인해 실시간 눈치를 살피는 궉세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어찌 돌아갈지 ... 그저 운명에 맡기고 지켜볼 수 밖엔... 다른 길이 없네,’


“문주님!”

궉세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기척을 냈다. 그러나 침실 안에서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궉세사는 뒤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눈총을 던지는 두 사람의 성화 때문에 더 큰 목소리로 불렀으나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궉세사를 강하게 밀쳤다. 분위기가 급속하게 심상찮아졌다.

“저리 비켜라! 내, 직접 들어가서 놈의 면상을 똑똑히 볼것이니,”

계속 불러도 아무런 비끔이 없자 마인극이 침실 방문을 박차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마인극의 어깨가 꿈찔거렸다. 곧바로 침소가 나올 줄 알았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급 목재 탁자였다. 응접실로 쓰는 공간이었다. 뒤편에 또 다른 방문이 있었는데 그곳이 침소였다.


안쪽의 방문으로 걷던 마인극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양쪽 벽면에서 살기가 흘렀기 때문이다.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보아 무척 고강한 무사들이 은신해 있었다.

“과히 좋은 상대는 아니군! 비겁하게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니, 썩 얼굴을 내보여라!”

미간을 찌푸린 마인극이 소리쳤다. 뒤에 있던 추자하가 그 말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검으로 오른쪽 벽면을 사정없이 그으며 소리쳤다.

“벽에 숨어있지 말고 썩 나와라!”

벽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고급스러운 내장제로 치장된 좁은 방이 비밀스럽게 설비되어 있었다.


“우리를 찾는 것이냐?”

갑자기 마인극의 앞쪽으로 두 개의 인영이 스르르 튀어나왔다. 외관상 중년으로 보이는 그들의 인상은 보기에도 음산하기 그지없는 냉혈한들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냉전같은 눈빛과 살기 어린 음성으로 보아 쉽게 볼 수 없는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천하에 우리 혈마쌍성을 쥐새끼라고 막말하는 놈이 있다니, 허허... 네놈들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피라미들 몇 놈 처치했다고 우쭐되면 안될게야, 아직까지 우리와 대결해 이긴 놈이 없거든, 세상 어떤 고수였다 하더라도 말이지. 다들 웃으며 나타났다가 종국에는 우리 앞에서 살려달라 무릎을 꿇었지 ... 껄껄껄~”

지나친 자만감의 형마쌍성이 마인극을 하대했지만 정작 마인극은 그들의 말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선 추자하가 입술 한쪽 끝을 올리며 비웃었다. 그들의 반응이 의아했기 때문인데 분명 조금 전 거실에서 경비 무사들을 도륙하던 장면은 강호의 어떤 고수라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럼에도 입을 함부로 놀리며 하대하는 분명 그 싸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들이 싸늘한 신경전을 펼치자 정작 가장 놀란 것은 어이없게도 문밖의 궉세사였다. 독고파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도 전혀 예기치 못한 생경한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혈마쌍성의 존재를 지금 처음으로 안 것이다. 더구나 벽으로만 생각했던 문주의 응접실 좌우 양쪽 벽면에 그들의 방이 설비된 데다 각 방마다 천장과 연결된 나무계단이 설치된 것도 처음 보았다. 혈마쌍성이 외부로 출입할 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방편임이 분명한 광경이었다. 독고파의 침실이 다른 객실보다 두 배 이상 넓은 이유도 그때 비로소 알게된 궉세사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혈마쌍성의 호기로운 말투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마인극의 모습이었다. 강호에 회자되는 전설적인 살수들을 면 전에 두고서도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반응을 보이는 기개는 경이롭기까지한 모습이었다.


“솔직히, 겁먹으라고 하는 당신들의 말에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오. 겁나지도 않는데 거짓으로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소이다.”

마인극이 무서운 눈빛으로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은 촌각을 다투는데 앞에선 살수들이 침소로 쳐들어가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숨을 고른 마인극은 감정을 억제한 후 결단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독고파와 무슨 약조를 했는지,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소. 다만 나는 독고파에게 납치된 소저를 찾아야 하고 그 용무가 너무나 황급하오. 저 문을 쳐부수고 들어갈 것이니 이제 그만 물러나시오!”

등에서 쌍철극을 꺼집어낸 마인극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아니! 안되지, 그렇게는 못하지. 우리는 이곳을 지키기로 약조한 상황이거든. 그럼, 어디 저 안쪽에 들어갈 실력이 있는지 증명해 보이면 되겠군 그래,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네놈이 하는 걸 봐서, 후후후!”

혈마쌍성이 거대한 운두도를 빼들면서 호기로운 비웃음을 암수처럼 흘렸다. 참으로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마인극은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엔 예의를 지키는 것이 의미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싸울 준비를 했다. 경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앞을 가로막는 것은 응징해야 할 장애물에 불과했다.


“내 너희들의 케케묵은 위명은 들어보지도 못했거니와 지금 대치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우습다. 썩 비키지 않으면 네놈들의 호언장담과 달리 너희들이 나의 쌍철극에 무자비하게 난자당할 것이다. 내가 마지막 베푸는 성의다.”

마음이 바쁜 마인극이었기에 시간을 지체시키는 놈들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젊은 놈이 무슨 말이 ... 그리도 짧으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더니, 새파란 놈이 강호의 대선배에게 예절이 없구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은 칼질 외에는 백약이 무효라고 하더니 딱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혈마쌍성의 형인 혈마일성이 경악하며 울분을 못이기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 위명을 못들었다고?...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일세. 그래, 곧 저승으로 보내줄테니 황천길에서는 우리 이름을 꼭 새기도록 하거라. 이 애송이 놈아!”

아우인 혈마차성도 광분하며 소리쳤다.

싸우는 국면에 접어들자 조속히 상황을 종료하고 싶었던 마인극의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등 뒤에서도 강렬한 서기가 피어올랐다. 당장이라도 싸울 자세였다.


그때 마인극이 불현 듯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만?... 그런데 너희들의 말처럼 무공이 그리 고강하다면... 어찌하여 저 갑갑한 벽 뒤에 숨어서 주인을 지키기 위해 대기하는 충견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무리 바빠도 그 해답은 너희들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혈마쌍성에게 뻔한 거짓말 따위는 하지 말라는 득 질책하는 표정이었다. 입술 한쪽이 말려 올라간 것으로 보아 그들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혈마쌍성은 아직까지 자신들보다 강한 고수를 한 번도 상대해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들 보다 강한 고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들 앞에서 호기롭게 큰 소리 치는 젊은 무사 따위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겁 없는 애송이에 불과해 보였지만 일견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어서 천천히 대답했다.

“흐음! 어쨌든 답을 해줄 이유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해 주마, 저 방 안의 독고파 문주가 자신의 비밀호위 비용으로 일 년간 받을 금액이 패도문 수입의 일 할이라면 ... 이 상황이 이해가 되겠느냐?”

말을 마친 그들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후 큼지막한 운두도를 출수하기 위해 오른손을 검병으로 옮겼다.


일촉즉발의 위기일발 상황에서 지금껏 뒤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궉세사는 혈마쌍성의 대답을 듣자 더욱 혼란스러웠다. 문주의 신변을 지키는 별도의 비밀 위사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들이 받기로 한 액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패도문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새삼스레 초라해지는 장면이어서다. 맞은 편 저쪽 침실에서 매일 밤 뭉실뭉실한 열락의 세상을 맛보았을 문주에 대한 배신감이 전신을 감쌌다. 서러웠다. 왠지 낭떠러지 앞에 선 듯 아찔했다.


그 사이 응접실에서는 냉랭하면서도 싸늘한 긴장이 흘렀다. 절세 고수들 간의 치명적인 싸움이 시작되려는 중이었다. 그때 마인극의 손짓을 받은 추자하가 밖으로 나왔다. 폭풍전야였으나 방밖으로 나온 추자하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마인극의 절대적 무공도 믿고있었지만 혈마쌍성의 허명에 대해서도 익히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강호에서 인연을 맺은 무사들과의 인연을 지속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마인극이 납치범들의 문신 모양을 설명하자 곧바로 패도문의 소행임을 확인해준 것도 그였다. 동원할 수 있는 강호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납치된 소미령이 끌려간 장소를 특정한 것도 그였다. 그런 그였기에 혈마쌍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혈마쌍성이 대단한 고수인 것은 강호에도 회자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력이 소문이 나면서 확대 재생산되어 과장되게 포장된 것이 많았던 측면이 컸다. 과장된 소문의 내용은 다시 가공되고 증폭되면서 나이에 걸맞게 전설적고수라는 그럴싸한 칭호를 붙이며 최강 고수의 반열에 올린 것이었다. 거기에는 크게 소문난 위명을 이용하여 청부 비용을 크게 높이면서 구미에 맞는 사건만 의뢰받는 그들의 비밀스런 업무 양태도 한몫했다. 그런 세월에 익숙해지자 그들은 천하무적이라며 스스로를 과신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강호의 냉혹하고 매서운 눈들은 그들의 실력이 소문에 비해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독고파는 강호행을 하기전 궉세사의 실력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비밀리에 자신을 호위해줄 위사를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해 강호 제일의 고수를 탐문하다 보니 실력자로 소문이 무성했던 혈마쌍성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자칫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의 반란도 늘 염두에 둔 독고파였기에 오로지 돈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혈마쌍성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하자 지근거리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방비하는 호위를 약속했는데, 이를 아는 수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눈치빠르기론 최고였던 궉세사조차 짐작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애송이! 용기는 가상하다만 우리를 본 이상 살아 나갈 수 없으니 각오해라!”

혈마쌍성은 동시에 운두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검에서 내뿜어진 기류가 앞으로 뻗어나가며 마인극을 공격해왔다. 마인극도 철극을 들어 올려 기를 불어 넣자 양손에 들린 철극들에서 무시무시한 기류가 세차게 뻗어나가 운두도의 검기를 파쇄해 버렸다.


“추부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서지 말라.”

마인극이 추부장에게 지시했기에 옆에 있던 궉세사와 함께 어정쩡하게 응접실에서 두 편의 절대적 고수들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을 주시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내 생각엔 ... 네놈은 지금 속으로 울고싶을 것 같은데, 그렇지?”

추자하가 뜬금없이 물었다. 울듯 말듯 서러운 표정을 한 궉세사가 내심 이 상황으로 인해 갈등하는 양상을 보인 까닭이다. 당초 억지로 독고파의 침실로 끌려올 때까지만 해도 궉세사는 문주인 독고파를 대면하면 즉시 그의 곁으로 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싸울 속셈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혈마쌍성이 등장한 것이다. 궉세사와는 어떠한 인연이나 이해관계도 없었다. 수제자인 자신을 믿지 못해 별도의 비밀 위사를 둔 것은 철저하게 무시한다는 징표였다. 적어도 귀뜸정도는 해주었다면 이렇게나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혈마쌍성은 분명 벽 속에서 돌아가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을 테고, 모든 현장 실무는 궉세사가 하는 것을 알 것임에도 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일관했다. 궉세사를 바라보며 비아냥 섞인 실룩거림으로 첫 대면을 한 것은 분명 하대하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비루함 던지는 형국이었다. 자신을 믿지못하는 문주도 싫어졌지만 근거없이 하대하는 혈마쌍성과는 어떤 것도 함께하기 싫어진 궉세사였다.

`중립에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하고 결과에 따라 반응하자,`

궉세사는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매 순간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들이 연속해서 생기는 데다 그 결정들은 자칫 실시간으로 목숨과 교환해야 할 위기를 동반한 것이어서 그의 눈자위는 점점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협공일격!”

혈마차성의 입에서 긴장된 적막을 깨뜨리는 일갈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혈마일성의 운두도에서도 검기가 쏟아져 내렸다. 마인극의 쌍 철극은 두 군데에서 날아오는 칼날의 기류를 그대로 받으며 부딪혔다. 몇 번의 큰 마찰음이 터지는 전초전이었다. 두 개의 운두도는 지속적으로 마인극의 심장을 향해 날카롭게 조여들었고 이를 막는 마인극의 철극들도 불꽃을 일으키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수십 합의 경합이 흘러가며 오로지 상대에게 집중하여 싸우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고 날카로웠다. 몰아치는 공기의 흐름 속에서 검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했다.


“아악! ... 크흐윽! ...”

누군가의 미명과 함께 피비린내가 허공을 날았다. 혈마일성의 어깨 쪽에서 피가 뿜어졌다. 마인극의 철극이 그를 벤 것이었다. 에상못한 경우를 만난 혈마쌍성은 악연실색했다. 그들의 협공을 제대로 받아낼 고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참으로! ... 참으로 오랜만에 상처를 보는군, 이젠 정말 용서없다. 카아악!”

혈마일성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지자 혈마차성도 이를 갈면서 눈에 불을 켰다.


“이 애송이 놈! 요절을 내주마!”

혈마쌍성은 각자의 운두도를 비스듬히 치켜세웠다. 그들이 펼칠 수 있는 최상의 절식을 펼칠 심산이었다. 미령낭자를 빨리 구해야 했기에 초조했던 마인극 역시 사생결단을 낼 심산인 혈마쌍성의 행태를 보고 결판을 낼 요령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의 손에는 양손에 쥐고 있던 철극을 합체한 긴 철극이 들려있었다.

중간의 손잡이 부분을 양손으로 잡은 마인극은 자신의 눈까지 들어 올리자 철극에서 예광들이 켜켜이 쌓이며 달무리처럼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서리가 뭉실뭉실 맺히는 모습이었다. 뒤이어 예광 속으로 마인극의 모습이 사라지자 긴 철극만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되었다.


공격하려던 혈마쌍성도 격하게 기력을 끌어올리며 소름 끼칠 마기를 발출했다. 그들의 신형도 잠시 후 흐릿하게 흩어지더니 이내 허공중에 사라져버렸다. 추자하와 궉세사는 철극과 운두도만이 허공에서 대치하는 상황을 볼 뿐이었다.

“쐐애액!”

불식간에 두 자루 운두도가 날아 들어와 철극을 격렬하게 찔렀다. 긴 철극 한 자루와 운두도 두 자루는 광포한 소음과 함께 불꽃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부딪쳤다. 허공에서 일어난 불꽃은 적색이었다가 청색이었다가를 반복하며 도깨비불처럼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응접실에서 시작된 싸움은 그 영역을 넓히더니 벽장 속의 비밀공간으로 들어가 나무계단으로 단숨에 흐르더니 종국에는 천정을 부수고 허공으로 솟아올라 장마철의 굵은 빗줄기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들을 지붕 아래로 내뿜으며 치열하게 싸움을 전개했다.


엄청난 고수들의 대결이었다. 혈마쌍성의 실력은 소문보다 훨씬 고강한 것이었다. 추자하는 자칫 소문만 믿고 나섰다면 낭패를 볼 뻔했다며 한도의 한숨을 쉬었다. 궉세사쪽을 바라보니 그도 역시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궉세사에 대한 그들의 비하가 틀리지 않았음을 혈마쌍성은 눈앞에서 실력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차-앗!”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마인극의 격렬한 기합소리가 허공에서 퍼졌다. 연속하여 운두도를 때리는 긴 철극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당대 최고의 철기 명장이 삼 년 동안 정성을 쏟아 담금질한 만년한철 재질의 철극이 비조처럼 날아 운두도를 향해 격하게 부딪힌 것이다.

“채챙! ... 창!...”

그것은 종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혈마쌍성은 강하게 부딪혀온 철극의 무거운 압력에 큰 충격을 받고 운두도를 떨어뜨렸다. 다음 순간 그들이 운두도를 다시 잡으려 잠시 주춤하던 순간 마인극의 긴 철극이 그 바늘 끝보다 미세한 방심의 틈을 놓치지 않고 벼락처럼 수 차례 허공을 갈랐다.


“으~윽!”

“으아악!”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은 혈마쌍성은 허공에서 떨어져 벽장의 계단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떨어뜨리려던 운두도에 의지해 겨우 중심을 잡은 채 힘없이 서있었다. 피범벅으로 허리를 구부린 장승마냥 힘없이 앞을 바라보는 눈자위에는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다는 듯 동공이 크게 부풀려져 있었고 급속히 굳어가는 얼굴 표정에는 귀신을 만난 듯 놀란 모습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였다. 가쁜 숨을 내쉬는 그들의 목덜미부터 일직선으로 베인 여러 곳의 상처에서 순식간에 터지는 검붉은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길래?... 하!... 우리가 이리도 허망한 죽음을 맞을 줄이야,”

혈마일성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곤 고개를 꺾었다.

“천하 제일이었던 우리를 이긴 네놈의 이력도, 이름조차도 모른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이... 허허 ... 인생 참! 허망하구나. 으윽!”

혈마차성도 허연 눈자위를 드러내며 부르르 떨더니 그의 검과 함께 쓰러졌다.


“그대들이 위명에 걸맞은 실력을 가진 것은 내 인정하리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악연으로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시오. 나를 원망하지 말고, 이런 인연을 만든 세월도 한탄하지 말고, 그저 편히 잘 쉬시오.”

마인극이 실로 오랜만에 만난 강한 상대에 대해 예의를 표하며 포권했다. 그로서도 힘든 싸움이었던 것이다.


마인극의 발을 옭아매던 것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장애물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추부장이 달려와 독고파가 있는 방문을 냉혹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좌우로 길게 베어나갔다. 혹시 또 다른 장애물이 있을지 몰라서였다. 일도에 양단된 침실문은 순식간에 반쪽으로 부서졌고 더 이상의 장애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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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패도문주 독고 파의 엽기 행각 24.05.31 11 0 19쪽
24 별동대 24.05.29 12 0 24쪽
23 대업을 꿈꾸는 자들의 해후 24.05.24 12 0 21쪽
22 살수왕 조도일 24.05.13 16 0 21쪽
21 소문을 타고 날아온 엽기 사건 24.04.24 12 0 15쪽
20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24.03.04 26 0 21쪽
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5 0 16쪽
18 드러나는 적들 24.02.01 43 0 25쪽
17 맹인 검객 선우이치 24.01.21 47 0 50쪽
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4 0 45쪽
15 또 다시, 고수를 찾아서 23.12.22 52 0 15쪽
14 소도의 태동 23.12.14 5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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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70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70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9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73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9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80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83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91 0 10쪽
2 회상 23.11.02 115 0 33쪽
1 악몽 +1 23.10.13 303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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