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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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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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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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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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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드러나는 적들

.




DUMMY

부지런히 말을 몰아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탁 왕자 일행이 도달한 곳은 진한의 불사국이었다. 선우이치를 만나기 위해 지나쳤던 미오야마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천하제일권으로 알려진 사마철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사마철에 대해 알려진 이력은 별로 없었다. 듣기로 키가 큰데다 강인한 체력을 가진 매우 강직한 성격의 대륙 출신 무인이었다. 불혹을 갓 넘긴 중년인으로 깊은 산속에서 홀로 지낸다고도 했다.


“사마철 대협이 사는 곳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하군요, 혹시, 어느 산에서 기거한다는 기별이나 정보는 없으셨는지요?”

불사국의 입구를 조금 지나온 지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고민하던 진혁이 갈등하듯 머뭇거리더니 탁 왕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질문의 시기를 고민했던 것이다.


“의외로 정보가 미약하오 ... 관건은 사마 대협의 집이 있는 산을 찾는 것인데 그 산을 특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들었소. 가끔 비사벌 마을의 장날에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곤 늘 은둔생활을 하기에 그 집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오, 분명한 건 마을과 멀리 떨어진 산속에 산다는 것인데 하필 비사벌 마을이 주변에 크고 작은 산이 일곱 개나 연이어진 분지 마을이어서 어느 산속에 그 집이 있는지를 찾는게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오. 해서, 일단은 사마 대협의 집이 있는 산을 찾는게 무엇보다 급선무라 할것이오.”

탁 왕자가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왕자 역시 그 집을 찾기 위한 단서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를 고민하며 왔던 것이다.


“흐음, 산이라? ... 불사국은 산이 많은 데다 그 모양들도 엇비슷하여 외지인들이 종종 그 산이 그 산 같다는 혼동을 일으키며 곤란한 경우를 겪은 사례가 많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엔 찾아질 것입니다만 ... 더욱 고려해야 할 것은, 사마 대협이 사람들에 대해 무척 배타적이라 들었습니다. 그분이 처음 보게 될 우리를 어찌 대할지 사뭇 우려스러운 이유입니다.”

진혁이 탁 왕자의 대답에 더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덧붙이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하오이다. 일전에 듣기로 흠차대신의 간자가 그를 미행하다가 장풍에 맞아 팔이 부서진 일도 있었다 들었소. 미행하던 그를 알아본 사마 대협이 경고한다는 의미로 그리했다니 참으로 타인과의 교류는 완전히 끊어 버린 것 같아 더욱 힘든 만남이 될 듯하오,”

마음은 급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 못해 주춤거리는 모습에 난감함이 밀려온 탁 왕자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다 보니 사뭇 어지러웠던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 제 생각은, 두 분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사마 대협이 어쩌면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극단적으로 사람을 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깊기 때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진심인 사람들이 대개 그런 경향을 보인다 들었습니다. 또, 어찌 생각해보니 저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해서, 나중에 사마 대협을 만나면 제가 먼저 대화를 해봤으면 합니다. 왠지 저랑은 죽이 잘 맞을 것 같은 생각도 드는군요. 하하하,”

길태곤이 두 사람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가볍게 말을 꺼냈다.


“하하! 그 말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소이다. 근심 걱정은 여기 이곳에 묻어두고 우선 길을 떠납시다.”

탁 왕자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인 길태곤이 말을 받았다.

“사마 대협이 장날 가끔 온다는 마을에 가서 수소문하면 혹시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질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만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탁 왕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길 대협께서야 천하의 고수인데다 얼굴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니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게요. 다만, 나와 진 장군은 조선에서부터 익히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소이다. ... 그 말인 즉슨, 우리들이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얼굴을 내비치고 돌아 다닌다면, 자칫 어제 미오야마국의 여락루에서 겪었던 사건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란 말이외다....길 대협께서도 분명히 우리를 노리는 적의 실체가 있음을확인했듯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을 무시하고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 목숨을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시키는 최악의 결과가 올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오.”

탁 왕자의 말을 들은 길태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바였기에 이심전심의 동질감을 느끼는 따뜻한 웃음이었다.


“다행히 불사국은 삼한에서 가장 좁은 나라중 하나인데다 평지보다는 산이 많은 곳이오. 농사보다는 목축이 주를 이루다 보니 산기슭을 많이 개간하여 작물을 재배를 하는 것이 대세인 곳이외다. 상대적으로 좁은 평지에 주거와 저잣거리가 형성되어 사람들이 몰려 산다는 것에서 유추를 해보면 의외로 사마 대협의 집을 찾는 첫 방법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오.”

탁 왕자가 현실에 기반한 추론을 통해 사마철의 집을 찾는 방법을 제시했다.


“사마 대협이 농작물을 수확해서 팔고 있다고 들었으니 분명 마을 근처의 낮은 산기슭에 거주하며 생활할 것으로 판단하오. 다만, 주변에 인가가 없다고 했으니 그 깊이가 제법 있을 것으로 보이오. 거기에 장터로 가기 위해 가끔 오르내렸을 테니 사람이 지나다닌 발길의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오. 해서, 장터를 중심으로 인적이 있는 산길을 중심으로 찾아보도록 했으면 하오.”

탁 왕자의 추리는 여러 정보를 취합하여 도출한 결론이었기에 누가 봐도 신빙성있는 결론이었다.


“어디 객잔을 잡고 하루를 마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혁이 탁 왕자에게 묻는 듯 의견을 제시했다. 불사국의 입구에서 부터 여러 의견을 나누며 계속 진입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어제 미오야마국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로 인한 긴장이 풀리면서 기력이 가장 약한 진혁에게 갑작스레 여독이 쏟아져 밀려온 것이었다.


“저잣거리에 객잔을 잡았다간 어제 같은 심란한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좀 더 신중하게 마을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길태곤이 자칫 준비없이 마을로 들어 갔다가 낭패를 볼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어제 만난 반백발인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잠복한 곳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때문이었다.

“흠, ... 그 말도 일리가 있소, 어제 사건으로 미루어 적들은 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우며 우리를 찾을 것 같소이다. 그들이 정확하게 나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우리의 여정이 어느 정도 노출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오. 적들의 정보망도 우리 못지않게 촘촘하게 우리를 주시하는 것 같소이다. 다행히 그들의 존재를 알았으니 보다 더 은밀히 행동해야 할 필요가 필수적이란 생각이 드오. ... 하! ... 어느 것 하나 쉬운게 없소이다. 하!하!”

탁 왕자의 고민은 세세했고 깊은 느낌이었다. 나라를 위해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자의 고독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직 초저녁이니 저기 큰 나무의 그늘 밑에서 잠시 쉬면서 마을로 진입할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탁 왕자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나무는 멀리서도 한 눈에 깨 오래된 고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웅장했다. 키도 큰 데다 굵기도 가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뿌리가 땅 위까지 뻗어있었는데 사람이 앉으면 의자처럼 기능할 정도로 높고 길었다. 일행은 그 위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옆에는 투명하고 깨끗한 산물이 흐르는 개울이 흘렀다.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을 보니 새삼 마음이 평안해져 일행은 잠시나마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오랜만에 평화롭군요. 짧은 기간 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군요. 어쩌면 ...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말끝을 흐린 진혁이 나무 뿌리에서 일어난 후 시냇가로 내려가 두 손 가득 물을 받아 얼굴에 뿌리며 고양이 세수를 했다. 억지로 정신을 맑게 깨우려 하는 것이었다.

그 때였다.

길태곤이 갑자기 나무 뿌리에 앉은 상태에서 눕듯이 몸을 비틀어 뒤편으로 숨은 후 주위를 살폈다. 탁 왕자 역시 직감적으로 몸을 피하며 길태곤을 바라보았다. 길태곤이 미세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웬 놈들이냐? 모습을 보여라!”

길태곤이 크게 소리쳤다.

“탁 왕자 일행이냐?”

물어보는 질문을 무시하고 도리어 새로운 질문이 되돌아왔다. 서늘하고 칙칙한 음색으로 말한 화자의 주변으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렸다. 고도로 훈련된 움직임이었다. 족히 이십 명은 되어 보이는 기척이었다.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선 길태곤의 미간에 잔뜩 화가 피어났다.


“이놈들! 숨어서 모깃소리로 욍욍대는 한심한 꼴을 보니 참으로 비겁한 놈들이구나! ... 무서워서 그런다면 내가 먼저 나설 테니 네놈들도 어서 썩 튀어나와라! 고약한 네놈들의 면상이나 구경하게 빨리들 고개를 내밀거라!”

호통을 친 길태곤이 기력을 갈무리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강인한 표정이었다. 고목의 잎사귀 사이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석양의 빛이 스미면서 큰 체구의 길태곤이 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고목의 앞을 막아선 길태곤의 얼굴에 정의를 구현한다는 긍지가 넘쳐흘렀다.


“아니? 탁 왕자는 어디 가고 ...듣도 보도 못한 잡놈 하나가 튀어나왔네, 넌 누구냐?”

머리를 뒤로 묶은 무사 하나가 맞은편 나무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후 입술을 비틀면서 소리쳤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앞에 선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자 상대에 대한 분노가 치민 길태곤의 안광에서 세찬 분노의 감정이 서렸다.

무사는 왼쪽 귀 옆에서 입술의 밑쪽까지 쭉 그어져 깊게 패인 칼자국 흉터가 있는 자였다. 상처의 흔적으로 미루어 생사의 경계를 제법 넘나드는 싸움을 많이 경험했던 것은 역력했다.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네놈 같이 물어보는 놈들을 몇 만났느니라. 대체 왕자라는 인물은 어찌 생겼느냐? 나도 제법 한 인물 하는데... 내가 왕자 같아 보이지 않느냐?”

길태곤이 실실 비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일부러 상대의 부아를 돋우는 것이었다.


길태곤을 무시하던 흉터인이 흥분한 듯 갑자기 거만한 일갈을 터뜨린 것은 그때였다.

“쓸데없는 소린 이제 그만!”

크게 외친 그의 표정은 극도로 화가 난 상태였으므로 마치 성난 짐승의 모습이었다.

“목숨이 아까우면 이쯤에서 네놈이 가던 길이나 가거라. 네 용기가 가상하여 여기까지 봐줬지만 계속 깐죽거린다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야, 알겠느냐!”


“내 길이나 가라?... 아니! 아니! 내가 명한다. 네놈을 포함해 숨어 있는 다른 놈들은 지금이라도 가야 할 곳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썩 돌아가거라. 내, 특별히 네놈이 함부로 지껄인 말들은 안 들은 것으로 할 테니 말이다.”

흉터인의 역정을 들은 길태곤이 선심 쓰듯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외쳤다.


“이런, 어이없는 ..... ?”

흉터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 한편으론 젊은 무사의 무섭도록 도발적인 호기가 마음에 걸렸다. 제법 칼밥을 먹었다고 떠벌리는 무사라 하더라도 자신의 험악한 인상에는 뒤로 물러나며 꼬리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를 두려워 하기는 커녕 ,되려 선심 베풀 듯 꾸짖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서늘한 긴장이 목덜미를 타고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조선에서 온 대장군 갈태기다. 우리 폐하의 지시로 탁 왕자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 왕자의 얼굴은 조선에서부터 잘 알고 있는 터, 네놈은 결단코 아니니, 이쯤에서 몽니는 그만 부리고 썩 물러서라!”

강하게 급박하듯 호통을 친 갈태기였지만 막상 듣는 대상인 길태곤이 코웃음을 치며 피식 비웃으며 미동도 하지 않자 순간 갈등에 쌓였다. 강한 위협에도 씨알이 먹히지 않으니 대책을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자님도 이제 나오시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길태곤을 향하던 눈길을 거둔 갈태기가 왕자가 몸을 숨긴 고목의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극강 고수의 면모를 풍기는 길태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왕자를 직접 상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적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순간 판단한 것이었다.

“잠시 기다릴 테니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짐짓 여유를 만들면 자존심 강한 탁 왕자가 나설 줄 알았으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결단을 내린 듯 갈태기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곧 십여 명의 복면인이 소리 없이 갈태기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왕자님은 절대 나오지 마십시오. 마침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한데다 피곤이 몰려와 한바탕 몸을 풀었으면 했는데 잘 된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몸도 풀 겸 혼자서 이놈들을 처리하겠습니다.>

길태곤이 탁 왕자에게 급한 전음을 보냈다. 왕자의 성격으로 미루어 자존심이 강해 당연히 앞으로 나설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호의 고수와 장수가 대결하면 그 결과가 어떨지 궁금했었소이다. 마침 이를 관전할 좋은 기회인 듯 하오. 그대의 실력은 내 익히 확인했기에 편한 맘으로 지켜보겠소이다. 그러니 내가 끼어들 걱정은 꽁꽁 묶어두시고 전력을 다해 본때를 보여주시길 바라겠소. 하하하!”

길태곤의 무공을 무한 신뢰하는 탁 왕자의 믿음은 확신이었다. 삼한 제일검이 아니라 천하 제일검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대결을 편하게 관전할 생각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갈 장군님.”

길태곤의 옆으로 진혁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했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악연으로 만나게 되었군요. 그놈의 위만은 왕의 자리가 탐나서 그 자리를 빼앗았으면 된 것이지, 왜 또, 우리 왕자님을 잡아 오라는 망령된 짓거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갈태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난들 자세한 사연을 모르니 어쩌겠는가? 그저 군왕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건 녹을 먹는 군인의 도리이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일 뿐일세, 더구나 조선과 이곳 삼한이 원수의 나라가 되어 버렸으니 자네나 나나 이젠 옛 동지에서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고, ... 해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왕자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순순히 우리 뜻을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내 자네들을 베고 왕자님을 데려가겠네, 이해해 주게, 이것도 운명의 장난이려니 생각하게.”

갈태기가 작심한 듯 자신의 심정을 강한 어조로 담담하게 얘기했다.


“한때, 조선을 위해 충성을 다했던 갈 장군의 성정으로 보아 이번 일을 그냥 지나칠 리는 만무하고 ... 설사 이대로 끝난다고 해도 계속 추적할 것이 분명하니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도록 하십시다. 옛 동지의 정은 이 자리에서 칼날로써 베어 버리고 현재 상황에 충실하도록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하십시다.”

진혁 또한 굳센 각오를 다지며 갈태기와 강하게 대립했다.


“얘기중에 미안하지만 ... 나는 길태곤이라하오. 강호에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소만 많은 사람들로 부터 추포협객으로 불리고 있소이다.”

갈태기와 막말을 주고받았던 길태곤이었지만 진혁에게 예의를 갖추고 얘기하는 갈태기를 보니 마냥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적당히 격식을 차려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동을 무조건 나쁘다고 질타만 하기엔 세상은 너무 어지러웠다. 가끔씩 이렇게 격식을 갖춘 싸움도 한 번씩 해보고 싶긴 했었다.


‘추포협객이라 ... 삼한 제일검이라던 ... 하! 이런 ...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어, 하아! 이를 어찌할꼬...’

위만왕의 명을 받은 구리달의 지휘하에 <천경보전>을 탈취하는 방안의 하나로 진행된 `탁 왕자 납치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일찍부터 진한으로 건너와 활동한 갈태기 였기에 길태곤의 위명은 익히 들어서 아는 이름이었다.


타고난 싸움꾼에서 최고의 스승을 만나 절대 고수로 거듭난 그가 왕자를 호위하는 것이 확인된 이상 길태곤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최강의 적일 뿐이었다. 서로가 살아온 삶에서는 아무런 인연이나 은원이 없었지만 지금 현재의 처해진 상황은 서로를 칼끝에 놓고 겨냥해 죽여야 하는 적일 뿐이었다. 생사를 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주저할 것도 피할 것도 없이 전진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조선의 녹을 먹는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할테지, 하아!`

마음속으로 큰 한숨을 지은 갈태기가 허리에 찬 대도를 천천히 뽑았다.


뒤에 있던 복면인들도 그를 따라 결연히 검을 뽑았다. 검의 기운이 무섭게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들 모두는 고수의 반열에 접어든 정예 무사들이었다.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과 함께 삼한으로 내려온 갈태기가 강호에서 모집한 강호의 무인들을 적절히 뒤섞어 싸움의 효율을 극대화한 특공대들이었다.


그러나 서슬퍼런 그들의 결기 앞에서도 길태곤의 용맹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이슬 같은 물방울을 튕겨내면서 출수된 추포검의 위용은 날카로웠고 눈앞의 적들 앞에 호기롭게 쏘아지고 있었다. 튕겨져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 속에 저물어가는 석양의 은은한 색감이 비감하게 물들었다. 칼끝에 서서 목숨을 담보한 사내들의 무시무시한 운명과 대조되는 그 물방울은 그래서 아름다웠으나 슬프기도 했다.


무심한 돌덩어리들처럼 침묵을 지킨 그들의 검에서 바늘 끝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살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형성된 두 개의 축이 굳어질 때쯤, 갈태기의 눈짓을 받은 세 명의 복면인이 정적을 깨고 앞으로 나왔다. 길태곤은 진혁에게 뒤로 빠지라는 손짓을 하고는 불쑥 두 걸음 앞으로 튀어 나갔다.


“쳐라!”

갈태기가 처음부터 사력을 다하라고 독려하듯 악을 쓰며 명했다.

“파아악! 쓔우욱!”

오랫동안 함께 훈련한 듯 복면 삼인의 일사분란한 협공이 시작되었다.

먼저 움직인 복면인이 빠르게 달려들어 길태곤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길태곤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피했다가 다시금 본래의 자세를 잡았다. 첫 공격을 실패한 복면인은 달려가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헛손질만 한 채 맞은편에서 급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옷깃 하나 제대로 맞히지 못한 복면인은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 갑자기 그대로 쓰러졌다. 곧 그 자리에선 선혈이 흥건하게 번지며 지면을 적시기 시작했다.

누구도 길태곤이 추포검을 휘두르는 걸 보지 못했으나 단 일격에 절명한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가공할 위력적인 발검이었다.


“죽어라!”

두 번째 복면인이 비수가 꽂힌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도 곧 자신의 철퇴에 얼굴을 들이박고 넘어져 검붉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추포검은 일말의 자비도 없었고 길태곤은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그의 발검 속도는 소름이 돋기에 충분했다.


“어이, 거기! 서 있지만 말고 모두 다 한꺼번에 덤벼라!”

길태곤은 아직 공격을 개시하지 않은 복면인 일인을 무시한 채 갈태기 쪽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일거에 모두를 처단하겠다는 의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헉! ... 설마했지만 이렇게나 강하다니,”

상상 이상으로 강한 길태곤의 무공을 눈앞에서 목격한 갈태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적잖이 당황한 것이다. 길태곤은 절정 고수라고 소문난 것 이상의 극강 고수였다.


자신의 수하들은 대부분은 조선의 군대 내에서 강하기로 소문난 무장이었고 일부는 강호에서 알아주는 고수들이었다. 중대신 구리달의 지시로 특출한 실력자들을 엄선해 특별대우를 약속하고 영입한 무사들이었다. 삼한에서 활동할 교두보를 마련할 선발대로 일찍 건너온 갈태기는 그중에서도 강한 무공의 수하들을 데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실력자들이 눈앞에서 길태곤의 단 일격에 허망하게 쓰러지는 것을 본 갈태기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삼한 내 세 곳에 거점을 둔 조직들의 목표는 단 하나, 탁 왕자를 생포하는 것이었다. <천경보전>의 행방을 아는 준왕을 잡으러 마한으로 쳐들어 갈 경우 전쟁으로 비화 될 가능성이 무척 컸기 때문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과거 소국연맹이던 시절과 달리 현재의 삼한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국력이 커졌기 때문에 필경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내린 고육지책이었다. 군사를 일으키면 대륙의 흉노에게 자칫 뒷문을 열어주는 꼴이 되는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 있기에 위만은 삼한과의 전면전을 심히 우려했다. 위만의 그 불안을 아는 구리달이 그 문제도 해소하면서 급한 위만의 성격에 맞도록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 선택한 방법이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탁 왕자를 납치하기 위해서는 왕자의 외모와 주변 인물들에 대해 잘 아는 무인이 필요했는데 그 수요를 맞출 수 있는 부류가 준왕이 다스리던 시절, 왕검성에서 근무하던 장군들이었다. 그 장군들중 가장 빨리 선택된 무장중 한 명이 갈태기였다. 그런 그였기에 갑작스런 길태곤과의 대결 상황은 뜻밖이었다. 더구나 절정 고수가 스스로 탁 왕자를 경호한다고 자처하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분명 최근까지 들은 정보에 의하면 탁 왕자에 대한 경호는 허술했다. 동행도 거의 없다고 하니 충분히 만만하다고 확신한 상태였다. 그 자신감이 와장창 무너지자 새삼 보다 많은 수하들을 데려오지 못한 경솔을 탓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흐음! 제기랄 ... 모두들 죽을 힘을 다해 힘껏 쳐라!”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갈태기가 절망의 끝에서 끌어올리는 간절하고 깊은 고함을 내지르며 공격을 명했다.

“쐐애액!”

처음 앞으로 나간 두 명의 동료가 일 초식에 절명하는 것을 본 복면인과 뒤에서 그장면을 빠짐없이 본 십오 명의 복면인이 일시에 쇄도하며 길태곤을 공격했다.

사력을 다한 그들의 검에서 뿜어진 검기로 인해 차분하게 가라 앉았던 숲 주변으로 찢어진 나뭇가지 파편들이 흩날렸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큰 돌들도 이리저리 회전하며 길태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럼에도, 돌진하는 복면인들의 공세에 미동도 없던 길태곤은 잠시 온 몸의 정기를 모은 후 일거에 허공을 날아올라 추포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추포검에서 검강이 쏟아져 나와서 사방으로 확산되자 날아오는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잔해물의 희뿌연 가루가 뜸해지자 그때서야 시야가 차츰 회복되어 사방이 밝아졌다. 그때, 어수선한 틈을 비집고 아홉 개의 검이 길태곤의 목을 향해 독사처럼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이놈! 잡았다!”

복면인들은 길태곤이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좀 전까지 짙은 연기가 자욱했기에 그 연기가 걷힐 때까지 제법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길태곤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걸린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 만으로도 충분했다.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그들의 검을 모두 피한 길태곤이 어느새 반대편으로 날아올라 허공에서 몇 차례 추포검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협공을 위해 최소한의 사정거리에 모여 있었던 복면인들의 등 뒤로 추포검의 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의 핏빛 위로 뭇 복면인들이 고통에 겨워 부르짖는 단말마가 더해지자 숲은 온통 공포로 물들었다.


‘저들이 저리 허무하게 죽다니 ... 말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 아!’

갈태기는 망연자실했다. 진땀은 고사하고 떨리는 입술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신음을 뱉을 정도였다.

‘평생 여러 전쟁을 겪으면서도 지금같은 황망한 위기는 겪은 적이 없었지 ...해서, 운이 좋은 인생이라 여겼는데 ... 그런데, 오늘 마침내, 그 운이 다한 것 같구나, 하!’

많은 생각으로 어지러운 갈태기였다. 모두 길태곤의 갑작스런 출현에 따른 충격과 공포에 기인한 것들이었다.


“이야압!”

그래도 갈태기는 조선의 대장군이었다. 헛된 싸움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우렁찬 기합소리를 울리며 앞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그의 마지막 함성은 인생사 만감이 교차하는 통곡 같은 소리가 되었다. 스스로 예감한 슬픈 결론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듯 그의 몸은 숱한 피를 머금은 추포검의 날렵한 몸짓과 함께 이승과 저승으로 나뉜 운명의 궤도를 바꿔 타며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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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전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살수왕 조도일 24.05.13 1 0 21쪽
21 소문을 타고 날아온 엽기 사건 24.04.24 5 0 15쪽
20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24.03.04 19 0 21쪽
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2 0 16쪽
» 드러나는 적들 24.02.01 41 0 25쪽
17 맹인 검객 선우이치 24.01.21 44 0 50쪽
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0 0 45쪽
15 또 다시, 고수를 찾아서 23.12.22 50 0 15쪽
14 소도의 태동 23.12.14 52 0 12쪽
13 운명을 함께할 첫 궤를 걸다. 23.12.11 54 0 14쪽
12 인연을 엮는 여정의 시작 23.12.07 56 0 11쪽
11 고수 탐문 23.12.05 61 0 14쪽
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67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66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6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70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4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77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77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78 0 10쪽
2 회상 23.11.02 110 0 33쪽
1 악몽 +1 23.10.13 267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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