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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전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최근연재일 :
2024.06.27 17:38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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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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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수 :
252,931

작성
24.05.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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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대업을 꿈꾸는 자들의 해후

.




DUMMY

탁 왕자가 가게를 나왔을 땐 보라색 하늘빛이 캄캄한 어둠에 밀려가고 있었다. 노루꼬리만큼 짧아지는 늦가을의 해는 하루가 다르게 짧아졌다. 초저녁에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도 그새 굵어져 후두둑 성글게 떨어졌다.


“어떻게? ... 가신 일은 잘 알아보셨습니까?”

진혁이 탁 왕자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근처 소나무 밑에서 탁 왕자를 기다리던 진혁과 길태곤은 빗줄기가 굵어진 데다 바람까지 불어 쌀쌀해지자 교자 가게가 바로 보이는 주루의 이층에서 탁 왕자가 나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린 것이다.


“어땠을 것 같소?”

가벼운 미소를 지은 탁 왕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마,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었을 것 같습니다만... ”

길태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탁 왕자의 눈치를 살폈다.

“ ... 역시, 절정 고수는 뭔가 달라도 다른 게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소이다.”

그러자 얘기를 듣던 진혁의 눈이 커졌다. 반전된 결론에 새삼 놀란 것이었다.


그때였다.

“톡톡! ... 푸드덕! 푸더덕!”

비둘기 한 마리가 주루의 창가로 날아들었다.

“흠차대신의 전서구?”

탁 왕자가 주위를 확인한 후 재빨리 비둘기의 발목에 달린 비단 첩지를 황급히 풀어 헤쳤다. 다행히 주루의 이층에는 그들 외에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 갑작스런 폭우에 한기를 느낀 손님들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귀가를 서두른 탓이었다.


“지금껏 인편으로 연락이 오더니만 ... 급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구료, 흐음!”

탁 왕자의 말대로 그동안 몇 차례의 연락은 인편을 통해서였다. 때문에 지금 같은 경우는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크흠! 중요하거나 지극히 급하거나 ,,, 둘 중 하나겠군요,”

헛기침을 한 진혁이 일부러 몸을 뒤로 젖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라방이? ... ”

흠차대신의 정보망을 통해 아라방이 보내는 급한 연락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요?”

첩지를 읽은 탁 왕자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자 길태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오 ... 첩지 내용을 요약하면, 조 대협외에 이곳에서 또 한명의 절정 고수를 만나게 될 것인데 그의 동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의 어떠한 요구라도 능히 수용해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요청이외다... ”


“아니? 누군가 다른 고수에 대한 정보를 받으셨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전혀 ... 그런데 또 다른 고수라니, 이제 막 조 대협이 정체를 밝힌 지경인데 이곳에 정체를 숨긴 누군가가 또 있다? ... 하! 너무 힘들구려, 고수들의 은신술은 ...”

“더구나, 그가 지나친 요구를 해 올 것을 감당하라는 당부까지, 참으로 산 넘어 산인 것 같습니다.”

첩지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한 진혁이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또 다른 고수라? ...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흠! 그래도 일단 움직여 봅시다.”

허공을 주시하던 눈길을 거둔 탁 왕자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쨌거나 지금은 조 대협에게만 집중합시다. 어차피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테니,”

아라방의 예지력을 믿어서인지 탁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아니? 저곳에 웬 사람들이 서성거리는군요,”

주루를 나오며 옆눈으로 교자 가게를 쳐다본 진혁이 얼떨결에 중얼거렸다.

“사내 두 명은 고수입니다. 그것도 무척이나 고강해 보이는, 흐음!”

진혁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길태곤이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곧 고개를 돌리며 차분히 말했다. 비교적 먼 거리의 가계 저쪽에서 돌연 고개를 돌린 한 사내의 눈빛에서 탐색의 기류가 느껴지자 결코 무시하지 못할 상대임을 확연히 느낀 것이다.


교자 가게 앞쪽에 이르자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 조도일과 그 부인이 왕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순이 넘은 늙은이의 모습에서 사십 대의 중후한 강호인으로 변신한 조도일의 옆에는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서먹한 표정을 한 채 석상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조 대협 부부와 초면인 듯한 여인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사내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무심한 상태였다. 특히, 팔 척의 거구에다 근육질인 사내는 진중한 표정으로 왕자 일행을 살폈다. 색목인인 그의 전신에서 천하를 뒤엎을 듯한 기개가 순간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탁 왕자 일행에게서 적의를 느낄수 없었기 때문인 듯했다.


`어쩌면, 생전 처음 만나는 절정 고수일지도? ... 흠, 저 사내를 적으로 만난다면 끔찍할 것 같군, 마치 성난 아수라를 보는 것 같아, 하아! ... 저 사내가 아라방이 얘기한 또 다른 고수로군, 틀림없어!“

다가가며 색목인 사내의 차가운 기세를 느낀 탁 왕자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먼저 인사했다. 표나게 친근감을 보이는 탁 왕자의 이마에 진땀이 솟았다.


탁 왕자의 내심에는 아라방이 얘기한 또 다른 고수를 찾았다는 안도감도 밀려왔으나 그런 내색을 상대에게 먼저 섣불리 비칠 이유는 없었다. 고수 탐문 과정에서 터득한 처세의 결과였다. 많은 것이 불확실한 세태였기에 책임지는 위치에서 내리는 결단에는 많은 자제와 인내가 필요함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와는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기다림은 더욱 절실한 상황이었다.


”늘 적적했었는데, 오늘 귀한 손님들이 한꺼번에 오다 보니 행동이 느린 우리 부부로선 감당이 불감당이군요. 해서, 어차피 가게도 마쳤으니 얼른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자! 혹시 누가 볼지도 모르니 어서들 출발합시다!“

주위를 살피던 조도일이 먼저 걸음을 떼며 어색한 분위기의 손님들을 채근했다.


”소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주군을 따라온 것일 뿐,“

집으로 가는 길에 색목인을 보좌하는 것에 익숙한 듯 옆쪽의 사내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조도일에게 말했다. 각진 얼굴에 진한 눈썹의 그 역시 고수의 느낌이 물씬 나는 강인한 인상이었다.


”걱정 말거라! 내 대강 짐작은 하고 있으니 ... 자세한 건 저녁 먹으며 하자꾸나,“

그를 쳐다보며 상큼하게 눈썹을 치켜올린 조도일의 부인이 헤실거리며 말했다.

”처남! 용건은 천천히 들어도 되니 소저가 밤길에 곤란하지 않게 신경이나 쓰시게,“

맨 앞에서 길을 걷던 조도일이 뒤를 돌아보며 부연해서 대답했다.


”툭! 투둑! 툭! ...“

아닌게 아니라 잠시 소강 상태였던 빗줄기가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사내가 소저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색목인 고수가 표나지 않게 그녀의 발길을 돕고 있었다.

”추부장! 우리는 더 이상 신경쓰지 말게, 내 알아서 잘 챙길 것이니,“

슬쩍슬쩍 가볍게 걸음을 내딛으며 옆에서 동행하는 소저의 진로를 자연스레 유도하던 색목인이 사내를 향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주군,“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표시를 한 사내는 재빨리 발길을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자의 넓은 대로에 있는 가게들이 하나씩 영업을 종료하자 문에 걸린 홍등들이 눈에 띄게 거두어지면서 거리에는 어둠이 급속히 잠겨 들었다. 그들이 저잣거리에 이어진 두 갈래 길의 오른쪽 모퉁이로 돌자 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으로 개울이 흘렀는데 거세게 내린 빗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우윤산의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험한 곳이라 우리를 감시하는 눈길이 없을 것이니 천천히 걸어도 될 것이오. 마침, 비도 잦아들고 있으니 말이오.“

어둑어둑한데다 길 한쪽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대나무들로 인해 청신한 냄새가 퍼지는 희미한 산길의 초입에서 조도일이 뒤로 돌아보며 걸음을 멈추자 나머지 일행들도 잠시 멈추어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길에 시야를 맞추었다.


갈림길의 모퉁이에서 출발하여 반 시진 정도를 걷자 갖가지의 잡목들이 숲을 이룬 곳에 완만한 길이 나타났다. 이윽고 작은 언덕들이 오밀조밀 연속으로 솟아있는 제법 너른 공터에 이르렀다. 울퉁불퉁 험한 산행길의 끝에 만나는 구릉에 가까운 개활지였다. 그곳의 끝자락에 세월이 느껴지는 허름한 장원 한 채가 있었다. 등성이를 따라 길게 쌓아놓은 담벽 일부가 허물어진 것으로 보아 제법 세월을 많이 먹은 곳이었다.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누추한 곳까지 잘 오셨습니다. 특히, 험한 산길이 초행일 텐데도 부지런히 따라와 준 소저께 특별히 더 고생 많았다고 치사하고 싶네요. 허허, “

조도일이 색목인의 옆에 바짝 붙어 힘들게 따라온 소저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비바람이 치는 악천후에다 여자의 몸으로 갑작스레 먼 길을 동행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계속 신경이 쓰였던 터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소저는 조도일에게 괜찮다며 인사를 한 후 다시 시선을 색목인에게 돌렸다.


”적이 공격해 올 경우, 요소요소에 매복해서 공격하기 좋은 장소를 집 앞에 두시다니 ...역시나! ...대단하십니다.“

대문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지나온 길들을 반추했던 탁 왕자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흠! ... 거기에 더하여, 산길을 조작해 미로를 만들거나 함정을 파기도 좋아서 이곳은 가히 천혜의 자연 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만,“

이채로운 눈빛으로 장원을 바라보던 색목인도 탁 왕자의 의견에 동조하며 말했다.


일행의 휴식이 끝나자 조심스레 나무 대문을 연 조도일이 먼저 들어가자 나머지 일행들도 차례로 마당에 묻어놓은 큰 돌들을 디딤돌로 밟으며 뒤를 따랐다. 비가 와서 고인 마당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는 조도일의 의도를 아는 까닭이었다. 마당의 끝 쪽에는 키가 큰 소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안쪽으로 허름한 초가지붕의 네모난 목조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조도일 부부의 은밀한 거처였다. 옆쪽에 심어놓은 소나무 군락이 바람막이처럼 에워싸고 있어 바깥에선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구조였다.


집 앞으로 들어온 조도일은 다섯 번째 소나무의 앞쪽에 서더니 손을 앞으로 뻗어 담벽에 손을 대자 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벽이 아니라 문이었던 것이다. 벽으로 위장된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행들 앞으로 메마른 찬 바람이 와락 밀어닥쳤다.


건물 안은 어두웠고 깊은 정적에 잠겨있었다. 부엌과 몇 칸의 방에 재빨리 불을 붙여 실내를 환하게 밝히자 외양과 달리 고급스럽고 화려한 장식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곳에 정착하여 오래 머물 경우, 우리 부부의 정체가 탄로날 가능성이 높아 이렇듯 은밀하게 지내고 있는 점을 오시는 동안 이해하셨을 것으로 믿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곳의 보안은 당분간 문제가 없을 듯하니 모두들 계시는 동안에는 자신의 집처럼 편하게 묵으시기 바랍니다. 이곳이 여러분들의 휴식처가 되기를, 허허허 ... “

좀 전 부엌에서 화톳불을 피우고 돌아 나온 조동일이 편하게 웃으며 말했다. 손에 묻은 장작 찌꺼기를 천천히 터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 하도 요상한 말들이 많이 떠도는 세상이다 보니 요즘엔 어느 얘기가 진실인지 가끔 헷갈린다오. 왕자님께 <천경보전> 얘기를 듣고서야 지금껏 들었던 소문이 사실임을 깨달았으니 말이오,”

넓은 별실에 식사를 겸한 술상이 차려진 팔선교자에 둘러앉은 사내들 사이에서 조도일이 먼저 운을 뗐다. 얼떨결에 함께한 일행들이 상호 통성명을 한 이후였다. 색목인은 조선군의 장수 출신인 마인극이었다. 모종의 사건과 연계되어 정혼녀인 소미령의 안위를 위해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또 다른 사내 추자하는 조도일의 처남이자 조선에서의 군부 시절 마인극의 부장이었던 추자하였다. 마인극을 주군으로 섬겼기에 미련없이 함께 군부를 떠난 것이었다. 소미령은 조도일의 부인인 추백하와 함께 내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천경보전>이라? ... 저도 그 책 이름을 들어본 것 같습니다만,”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린 마인극이 진중한 표정으로 조도일의 얘기를 받았다. 옆에 앉은 주자하도 흠짓 고개를 끄덕이며 그 대답에 동조했다.

“얼마 전, 조선의 군부 내에서 극비로 소수정예의 <천경보전> 탈환 특수부대를 만든다며 표기장군 여도가 제게 참가 의사를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가 여부를 답하기도 전에 함께 온 미령낭자가 납치되는 해괴한 사건이 생겨 그 일을 해결하다 보니 더 이상 군부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 것이지요. 급하게, 이곳을 찾은 이유도 따지고 보면 <천경보전>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인극은 강인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이성적이었고 얘기의 맥을 제법 짚는 사내였다.


“마 대협이 이곳에 온 연유가 <천경보전> 때문이라? ... 어떨게 그런 일이,”

진혁이 고개를 좌우로 비스듬히 흔들며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흠!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요, 혹시, 조선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부녀자 납치 겁간 사건 소문을 들어 보셨는지요?”

추자하가 진혁의 말에 대답하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오면서 그 얘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소이다. 그 사건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는 얘기도 들었소이다.”

고개를 끄덕인 탁 왕자가 옆에 앉은 진혁과 길태곤을 바라본 후 대답했다.

“흠, 그 얘긴 저자의 큰 객잔에서 나도 진즉에 들은 바 있었지. 그땐, 그것이 백성들을 혹세무민하여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위만의 술책 정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럼 그게 사실이었던 겐가?”

조도일이 처남인 추자하를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당연히 그 소문은 사실입니다. 우리 주군의 정혼자인 저기 미령낭자도 자칫 피해를 볼 뻔 했으니 말입니다. 주군의 무예가 그놈의 경지를 넘어섰으니 망정이지 ... 정말, 큰일날 뻔 했었지요,”

추자하는 아직도 분한 듯 골난 표정을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놈이라? ...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탁 왕자가 갸웃 고개를 젖히며 물었다.

“혹시 독고파라는 이름 들어보신 적 있으습니까? 패도문이라는 조선 제일의 폭력적 검계의 수괴지요. 젊은 시절 오랫동안 중국 대륙에서 살수로 활동한 무사 출신이지요.그 놈이 위만보다 먼저 <천경보전>을 찾아 신선이 되겠다며 조선 전역을 유랑다니다가 음욕이 동하자 평범한 여염집의 아녀자들을 납치해서 겁간해 왔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주군의 정혼자까지 건드렸다가 사색이 되어 달아났지요.”


“그런 일이 있었소이까? 정혼자께서 큰 일을 치를뻔 하셨군요, 그나마, 별일이 없으셨다니 천만 다행이군요.”

탁 왕자가 마인극의 표정을 살피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결국 신선이 되고픈 독고파가 <천경보전>을 찾아다니며 보인 기행들로 인해 파생된 사건들이 연속되다 보니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필연적으로 조우하여 웃으며 지난 일들을 얘기하게 된 것 같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추자하가 웃으면서 말을 매듭지었다. 그러자 다들 호탕하게 웃었는데 유독 탁 왕자만이 탄식같은 한숨을 길게 흘리며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불안한 행색이었다.


“저는 부담없이 들으시라 편하게 웃으며 말씀드렸는데 혹시, 불편한 게 있었는지요?”

탁 왕자의 표정에서 갑자기 부담을 느낀 추자하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전혀 ... 그렇지 않습니다만, 위만이 특수 부대를 만든다는 얘기도 처음 듣지만, 폭력 검계의 수괴도 <천경보전>을 노린다고 하는데 막상 그들을 대적해야 하는 나는 이리도 대비가 늦은 듯하여 잠시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모쪼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며 이해를 구한 탁 왕자의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본 일행들의 표정에서도 덩달아 무거운 부담이 드리웠다.


“자! 자! 심각한 얘기는 잠시 접고 한잔씩 합시다.”

별실 여기 저기에서 타오르는 굵은 황촉불이 좌탁에 앉은 사람들의 불그레한 화색을 더욱 붉게 물들이자 조도일이 술병을 들어 일일이 술잔 가득 술을 채웠다. 산삼과 송이버섯을 넣어 빚은 일품 영로주였다.


“왕자님! 갈 길은 명백한데, 그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너무 늦었다? ... 그래서 그리 자책하시는 겁니까? ... 포기합니까? 아니지요! 왜? 판은 새로 짜면 되니까요,”

조도일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탁 왕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날카로운 눈매에서 절정고수의 기세가 절로 느껴졌다.

“국가의 흥망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면, 국지전에서는 힘과 꾀가 전부지요. 그게 힘의 논리에 따라 부침이 결정되는 강호의 섭리이니 말이오! 따라서, 왕자님께서는 준비가 늦었다고 후회하거나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뛰어난 무공만큼이나 넓은 기개를 바탕으로 암울한 상황을 기어이 극복하셨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하하하,”

추자하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자신의 무용담처럼 말을 이었다.

“삼십 년 전에 흑혈문에 배신당해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 누님의 지극한 보살핌 끝에 회복한 후에 문도의 팔 할은 독을 풀어 죽이고, 나머지를 언월도로 베어 결국은 멸문에 이르게 했던 그때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


그러자 조도일이 손사래를 치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도 기억은 선명하지만 ... 처남도 아다시피 오래전 일이라 노쇠해진 지금도 그렇게 용감하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일세 ... 다만 하나,”

조도일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고른 뒤 탁 왕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왕자님이 하고자 하는 이 싸움은 ... 내겐 아주 아주 익숙한 것이요.


그러자, 형형한 눈빛으로 조도일에 집중하던 탁 왕자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받았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해지는군요. 말씀처럼,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녕 큰 힘이 되는 조언이십니다.”

탁 왕자의 칭찬을 과찬이라며 손사래 친 조도일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 장군은 어디 출신이신지? 사람의 운명을 보는 것에 미숙한 내가 봐도 첫눈에 비범하고 뛰어난 것이 보입니다. 분명 나라를 구할만한 만인지상의 영웅상이오. 아까 가게에서 처음 보았을때 바로 초패왕 항우가 떠올랐으니 말이오,”

큰 기대를 담은 표정으로 조도일이 말하자 마인극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묵시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 같았다.


“소장, 신장유구국 출신입니다. 지금은 한나라에 병합되어 백성들이 피탄에 빠져 힘겹게 살고 있는 곳이지요. 소장의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조국을 한나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천산에서 함께 수련한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여러 나라에서 힘을 키우는 중이지요.”

모두들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이미 추자하로부터 조도일의 전설적인 활약을 전해 들었던 터라 그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마인극은 대업을 이루기 위한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얘기했다. 거기엔 함께 앉아 <천경보전>을 수호하겠다는 탁 왕자의 굳은 의지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바가 컸다.


“오랜 강호의 경험에 비추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적을 알아야 하오. 더 좋은 것은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오. 그런 조건이라면 지금까진 결코 우리가 불리한 형국은 아니오. 마 장군을 통해 위만의 수하들과 패도문이 <천경보전>을 노리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오. 그들이 탁 왕자님과 뜻을 같이하는 고수들에 대해 알까요? ... 결코 ,.. 결단코 ... 그들은 모를겝니다.”

조도일의 밝은 표정에서 기분 좋은 징후가 느껴졌다.


“위만의 휘하 장수들중 엄선된 별동대가 내려온다고 하니 도착한 후에도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런데, 패도문과 그 문주인 독고파의 정체, 세력 등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이니 오늘은 일단 마 장군이 그들과 어떻게 엮였는지 그 사연이나 한번 생생하게 들어봅시다.”

조도일이 마인극에게 패도문과 악연으로 얽히게 된 얘기를 풀어헤치라며 채근했다.


급박하게 지나간 패도문과의 악연을 생각하자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몰려온 마인극의 뇌리에 다시금 떠올리기 싫은 그날의 어지럽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서서히 그의 입을 통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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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5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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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4 0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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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수 탐문 23.12.05 64 0 14쪽
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70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70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9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73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9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80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82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90 0 10쪽
2 회상 23.11.02 115 0 33쪽
1 악몽 +1 23.10.13 303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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