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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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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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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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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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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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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회상

.




DUMMY

그랬다. 조선으로 돌아온 준왕은 그때부터 흉노와 맞서다 패배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면 꼭 악몽을 꾸었다. 대장군 석철의 목숨을 건 돌파가 없었다면 준왕 자신도 이방의 어느 들판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흉노에 패한 후에는 자주 강군을 만들겠다던 준왕의 초심이 당연히 흔들렸다. 군사 강국을 만들라고 당부하던 아버지 비왕의 유지에도 어긋나는 상황이었다.

`흉노가 대륙으로 향하는 눈길을 이곳 조선으로 돌린다면 진정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테니, 하루빨리 흉노를 막을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터... 하아! 이 조선의 안위와 백성들의 소중한 목숨을 지킬 방도를 어떻게 마련할꼬,`

준왕의 고민은 깊었으나 속절없는 세월은 그 애절한 맘을 외면한 채 아무런 해답도 주지않고 하염없이 흐를 뿐이었다.


`아! 그렇지, 그래 ... 그 방법도 있었지,`

고민을 거듭하며 지나온 역사를 되새기던 준왕에게 문득 방안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조선의 군사만으로는 흉노를 방비할 수 없으나 이민족의 유입을 받으면 그 힘은 배가 될 것이었다. 진제국의 패망 이후 또 다른 패권전쟁에 휘말린 대륙의 여러 제후국을 떠나 살기 위해 밀려 들어오는 유민들을 적극 받아들이면 능히 가능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종종 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부 유민들의 난동 문제는 자칫 유민포용 정책의 시행에 암초가 될지도 모를 문제였다. 자칫 신하들이 그 문제를 거론하며 유민들로 인해 조선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울 부담이 있었다.


기득권 계층을 형성한 고위 신료들중에는 유민의 유입이 많아질 경우 왕권이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며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 정책이 관철될 것이었다.

`흠, 자칫하면 이기심 가득한 그들의 반발에 정책이 표류할 수도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 ...`


“전하! 하교하신 유민포용 정책의 재고를 앙망하나이다.”

가장 연장자로 신료들의 중심축을 이루는 상대형 고집통이 어전회의에서 일성을 올렸다. 그때 사전에 교감한 듯 다른 신료들도 머리를 조아리며 허락을 구하는 읍소를 했다.

“변방으로 유입되는 유민들 역시 흉노족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다만, 흉노처럼 악의를 들어내지 않았을 뿐 그들 역시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형국입니다. 하여, 이민족을 무작정 믿고 받아들여 함께 공생하기에는 불안하므로 밀려오는 유민들을 엄격히 선별하여 출입을 통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유입이 허락된 유민들을 잘 관찰하여 우리 백성들과 온전히 동화되었다고 인정될 때, 그때 비로소 유민으로 받아야 문제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점 통촉하시어 전면 유입을 재고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부디 소인들의 충심에서 우러난 제안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윤허해 주시옵소서!”

고집통이 윤허를 구하는 선창을 하자 나머지 대소 신료들이 후창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왕의 제안에 즉각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왕의 권위가 그만큼 실추된 까닭이었다. 흉노에 패한 후 준왕의 지배력은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고 좀 전의 상황은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왕의 발언이 무게를 가지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함을 느끼게 만든 상황이었다. 빠른 수습이 필요했다.


“전하! 민족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야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은 역사가 웅변하고 있으니 유민포용 정책을 조속히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가라앉은 대전의 분위기 속에서 침울한 표정을 지은 준왕이 어지러움을 느끼던 그때였다. 결기서린 목소리가 팽팽한 대전의 공기를 비집고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이방의 인재들을 적절하게 등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진시황의 책사였던 이사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초나라 출신인 그의 의견을 반영했기에 시황이 통일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음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역사이지 않습니까?”

다른 신하들을 압도하는 눈빛의 그가 큰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이사의 상소문인 <간축객서>를 보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 높이를 이룰 수 있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큰 뜻을 품은 제왕은 어떤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말아야 그의 덕망을 만 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흠차대신 경욱이었다. 집안 대대로 왕실에 대한 충성이 지극한 명문가 출신의 관리로서, 전대 비왕 때부터 만들어진 흠차부의 수장이었다. 국내외의 정세 파악을 주된 임무로 하는 기관이었으나 왕실 시행 사업의 수행이나 왕실의 경호도 관여하는 중책으로 왕족이나 재상, 대형 다음가는 높은 관리였다.


경욱은 계속하여 여러 신하들을 휘어잡는 눈길을 보내며 굳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사의 그 말에 제 의견을 덧붙인다면, 유민으로 흡수될 사람들중 장수들이나 강호의 무인들을 특히 우대하여 받아 들인다면 선진 병장기의 도입은 물론이고 우리 군사들의 전력 상승에도 확실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신의 판단으로는 그런 이방의 우수한 기술을 흡수하는 것 만으로도 능히 군사력을 강화하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경욱의 주장을 듣고 무언가 각성한 표정을 지은 준왕이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고집통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내, 상대형께 하나 물어 봅시다?"

왕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자 고집통이 얼굴을 찌뿌렸다.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우려가 밀려온 때문이었다. 계획에 없던 흐름의 전개여서 불안했던 것이다. 준왕을 향해 급하게 머리를 숙인 그가 하교를 받을 준비가 되었음을 고했다.


"그래? ... 우리 조선으로 들어오는 유민들을 선별해서 받아 들이자? ... 그래, 좋소이다. 그러면, 선별 기준은 어찌 세울 것이며... 또, 선별과정에서 푸대접을 받거나 문제가 있어 추방을 당한다면 ... 그렇게 쫓겨난 그들이 우리 조선을 어찌 생각할 것 같소이까?”

준왕의 눈빛에는 어느새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들도 결국엔,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겠지 ... 그렇지 않소이까?”

질문을 던진 준왕이 고집통으로 부터 대답을 듣지 못하자 스스로 답을 하듯 말했다.

“결국엔 ... 조선을 적대시하게 되겠지, 그리 흘러갈 수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상대형 대감, 그리 생각하지 않소이까? ...해서!”

차분히 말하던 준왕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지자 대신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유민들을 엄격히 선별해서 받아들인다면 종국에는 우리 조선의 적을 어느 때보다 많이 양산하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 또한, 누가 알겠소? 쫓겨난 유민 중에서 조선에 앙심을 품은 인재가 우리를 노리는 흉노와 같은 적국에서 활약한다면 ... 우리 조선의 입지가 어려워지는 건 한순간이지 않겠소이까?"

준왕의 말투는 점점 격화되어 갔다.


"고집통 대감의 그 말은 스스로 환란에 빠지자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소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이까?”

비감한 어조로 말하는 준왕의 표정을 본 신하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기득권이나 챙기던 대신들에게 근시안적인 행태를 버리라는 왕의 경종이 격하게 울리는 지적이었다.


자칫, 왕의 후환을 부를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임했으나 예상치 못한 왕의 반격을 받은 신하들은 사전에 처리하고자 했던 결정 사항이 무산되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때 그때, 준왕의 결단에 쇄기를 박으려는 경욱의 주장이 터져나왔다.

“소신! 마지막으로 유민포용 정책의 즉각적인 시행을 앙망하나이다. 분명 주창하시는 그 정책대로라면 흉노를 비롯한 주변의 적국들에 대하여 이이제이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묘안으로 작동될 있을 것이옵니다.”


역사의 검증된 사례까지 예를 든 경욱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그 힘으로 권위를 키운 준왕이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던 신하들이 반박할 수 없도록 즉각적인 시행을 지시했다.유민들의 관리에 보다 많은 힘을 쓰겠다며 전면 시행을 단행한 유민포용 정책은 왕의 권위를 한층 높여 신하들을 옭아매는 효과적인 국력 강화책이 되엇던 것이다.


유민포용 정책의 주된 내용은 유민들이 변경에서 농사 지으며 살 수 있는 땅을 하사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 변경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사로 활동 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은 유민들에게 꽤 유용한 당근이었다. 살기 위해 흘러온 조선에서 기대하지 않던 환대와 함께 농토까지 무상으로 지급받았으니 그들이 기꺼이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유민을 포용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오랑캐들이 변경을 도발해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지만 예외없이 격퇴되었다는 구신이 수시로 왕실에 날아들었다. 확실한 낭보였다. 준왕은 이를 왕권을 다지는 초석으로 활용했다. 입지를 굳게 다진 준왕의 하명은 절대적이었고 신하들은 그 권위에 크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역시, 정답은 역사를 직시하는 것에 있었어, 그렇지 않소? 흠차대신,”

새로운 정책의 도입 효과를 톡톡히 느낀 준왕이 오랜만에 경욱과 차담하며 말을 꺼냈다. 흉노에 대한 두려움이 유민들의 힘으로 상쇄될 수 있음을 느낀 이후라 그의 말들에 힘이 넘치고 있었다.


“역사는 경험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희미하게 나마 정답을 제시하기 때문이지요. 다만 ...”

차분하게 대답하던 경욱이 뒷말을 흐렸다.

"왜? 무슨 일이 있소이까?"

의아한 표정을 지은 준왕이 대답을 재촉하며 묻자 경욱이 대답했다.


“최근, 강한 냉기를 뿌리던 외부세력들의 동향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던 변경 습격은 물론이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그들간의 영토 다툼도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사옵니다. 접경지역에서 매일 다툼으로 날을 지새우던 모습들이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사옵니다 ... 소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뜻밖의 얘기를 들은 준왕이 몸을 앞으로 당기며 경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변경을 강화하며 군사력을 복원중인 우리에게는 기분 좋은 현상일수는 있겠으나 혹여, 그것을 유민포용 정책의 과실이라고 단정하기엔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둘이 아닙니다.”

주변국들의 피상적인 화평에 젖어 안일하게 국정을 이끌던 준왕은 경욱의 갑작스런 문제제기에 날카로운 둔기로 한대 맞은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소신의 판단으로는 변경의 적국들 모두가 오랫동안 외부와 벌인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듯 합니다. 너무 밖으로만 눈을 돌리다 보니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이 보이지 않았으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뒤늦게 이를 수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뒤늦게라도 그런 방도를 취한 건 아마도 내부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는 것을 증명한 진나라의 역사를 답습하고 싶진 않아서 일 것입니다. 새삼, 백성들의 삶이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현재의 고요와 평화가 어느 순간 다시 외부로 진출하기 위해 우선 내부를 먼저 수습하는 과정에 있다고 판단하옵니다.”

경욱의 분석을 열중하여 듣던 준왕의 이마가 깊게 파였다.


“경은 그런 사정들 때문에 일시적인 평온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이오? 터지기 위해 존재하는 휴화산처럼 과도기라는 ,,, 그런 말인고?”

자조적인 표정을 지은 준왕이 가래를 내뱉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한 말을 툭 던지며 눈을 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외 정세를 태평스레 바라 보고만 있었다니 ... 실망스럽군, 하아!”


새삼 경욱에게 수시로 전해 들은 외부의 정보들에 귀를 크게 열지 않았던 것을 무척 후회하는 준왕이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할 적기였음에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않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컸던 준왕은 뒤늦게 귀한 시간들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었음을 후회했다.


“관성에 젖어 나른해진 나의 무능이 흘러가는 세월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음이야 ... ”

준왕은 자신의 나태를 탓하며 이를 악물었다.

“전하의 부국강병 소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오랜만의 태평 세월을 보다 더 느끼고 싶었던 기대도 충분히 공감하옵니다. 소신도 현재의 정세로만 판단하면 내내 평화로울 것 같고 한없이 평화롭게 이어질 것 같아 보입니다만,,, 이제부터라도 방비를 충실히 하신다면 천하의 어느 세력도 우리 조선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욱의 말에 힘을 얻은 준왕의 표정이비로소 환해졌다.


“이제부터라도 외부의 침략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준비하도록 할 터이니 더욱 더 열심히 활동해 주시오. 더불어 유민들과도 폭넓은 호혜 방안도 강구한다면 더욱 튼튼해 지리라 생각하오, 그리고 ... 지금처럼 이런 허심탄회한 자리도 자주 만들고 말이야!”

안도의 표정을 지은 준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유민들의 굳건한 방벽을 기반으로 변경이 안정되고 농사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져 여유를 느낄 즈음, 변경을 지나 완검성에 도착한 유래없이 많은 유민들이 준왕을 알현하길 원했다. 연나라 출신의 장군 위만이 통솔하는 유민들은 왕검성이 바라보이는 넓은 광야에 도달해 준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상투를 틀고 흰 옷을 입은 그들은 왕검성을 향해 오십 여 회에 걸쳐 머리를 조아리며 조선인으로 살 수 있기를 간청했다. 성 위에서 그들을 지켜 보던 준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해 하자 신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하의 장수들과 함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며 다짐하는 위만의 모습은 믿음직하기 그지 없었다.


“저리 많은 유민들이 우리 백성이 되고자 한다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소이다. 특히나, 저기 숱하게 도열한 휘하 장수들을 보니 군사력의 증강에도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준왕의 기분 좋은 반응에 반대할 신하들은 없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모두가 오롯한 조선의 힘이 될 것임은 의심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로 보였다.


“왕실의 관료가 되어 조선의 번영을 위해 힘써 주시길 바라오!”

조선인이 된 위만이 준왕을 알현하는 자리였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저는 함께 온 유민들과 같이 지내길 원하옵니다. 저 혼자 왕실에서 지낸다면 평생 함께 하겠다고 다짐한 제 약속을 지킬 수 없사옵니다. 이점,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위만은 유민들과의 약속을 내세워 준왕의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럼 ... 어느 곳에 정착해서 살고 싶은가?”

준왕은 계속하여 사양하는 위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제안을 했다.

“국경지대의 서쪽을 맡아 한나라가 침략하는 것을 방비하겠나이다. 지금의 한나라는 중국 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후 숱하게 치른 전쟁으로 생긴 내부 불만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사옵니다. 하여, 왕실에서는 백성들의 불만을 외부 세계로 돌릴 목적으로 침략할 나라를 물색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대륙의 상황을 잘 아는 제가 변경을 지킨다면 필시 전하께는 물론이거니와 조선 백성들의 안녕과 화평에 큰 힘이 될 수있을 것이옵니다.”

위만의 제안은 변경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준왕의 정책과도 일맥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나라의 사정에 정통했고 현지에 남겨둔 정보망을 통해서 날아오는 최신 소식은 누구보다 빨랐다. 경욱으로부터 사전에 그 점을 보고받은 준왕은 차선책의 보직을 택한 위만의 결정에 대해 미련없이 승낙했다.

“서쪽 변경은 크고 작은 분쟁이 잦아서 시끄러운 곳이었으나, 장군이 오랑캐들을 잘 방비하고 유민들을 잘 다스린다면 더 이상 걱정거리는 생기지 않을 터, 장군의 건투를 빌겠소이다.”

위만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준왕이 치하하자 위만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신 위만! 조선을 굳게 지키는 강인한 번병이 되겠사옵니다.”


위만의 결의를 기특하게 여긴 준왕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진 것에 대한 흡족함의 발로였다.

“위만장군에게 서쪽 변경의 백 리에 달하는 땅을 하사함과 동시에 박사 관직을 내려서 변경 전역을 통솔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준왕은 대단한 충성심을 보인 위만에게 넓은 땅과 높은 관직을 부여하며 치하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준왕의 믿음이 위만이 휘두른 배신의 칼날에 베여 쓰러진 것은,

준왕 17년 겨울, 서기전(BC) 194년,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박사 위만이 조선인으로 산 지 이 년 남짓 저물어 갈 때쯤, 그의 전령이 황급히 왕검성에 도달하여 긴급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한나라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서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속임이었다. 분명 위만이 군사들과 함께 출병하여 왕검성을 향한다면 왕검성에서 사전에 받은 첩보를 바탕으로 방비를 철저히 할 것은 분명했기에 꾀를 쓴 것이었다. 자신의 출병에 대한 빈틈없는 근거를 사전에 만들어야 그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다.


최대한 의심을 받지 않을 사전 포석을 깔아야 햇던 위만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한나라의 침략이라는 사건을 조작하기로 결정하고서 거짓 서신을 만들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속아 넘어가야 할 사건을 적은 거짓 서신은 그렇게 도달해 빈틈없고 비밀스럽게 진행된 왕위 찬탈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 소신이 확인한 정확한 첩보에 의하면, 한나라가 십만의 대군으로 군사를 일으킨 후 열 군데의 경로로 분산하여 조선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군사들을 최대한 빨리 조선에 도달시키기 위해 열 개의 부대로 분리하여 진군해 오기에 도착식가 예상보다 무척이나 빠를 것이라 하옵니다. 이후 그들은 왕검성 주변에 도열해 일시에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한나라 군사들이 하나의 대열로 쳐들어온다면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조선의 관문인 이곳에서 소신이 목숨을 바쳐 분쇄할 것이오나 열 군데의 길로 갈라져 들어온 후 일시에 왕검성을 공격한다고 하니 아무리 방비가 잘 된 왕검성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맞서 싸우기가 매우 힘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하여, 차라리 소신이 전하께서 계시는 왕검성으로 출병하여 함께 적들과 대적하는 것이 시의적절하다는 판단하에 출병하고자 하옵니다. 우선, 급한 대로 제 휘하 정예병 오천을 급히 선발하여 왕검성으로 가서 적들의 격퇴에 힘을 보태고자 하오니 전쟁의 종국적인 승리를 위한 소장의 충심을 갸륵히 여겨 부디 출병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박사 위만 배상 -


준왕은 애초 위만의 반란사태를 알지 못했다. 싸움이 왕검성의 외곽지역 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왕실이 있는 지점까지 유입되는데 한참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이를 인지한 준왕이 제대로 대처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뒤늦게 할 수 있는 대응이란 없었다. 그저 공허한 하늘에 한숨만 내뿜을 뿐이었다.


철제 무기로 작정하고 달려든 고수들로 편성된 위만의 오천 결사대는 철제에 비해 한없이 연약한 청동제 무기로 대항하는 조선군들을 압도해 나갔다. 준비되지 않은 조선군들은 착실히 준비한 위만군의 압도적인 무기에 대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된것이었다.


심각하게 기울어진 싸움의 장에서 준왕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삭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 한기가 흘렀고 살아온 지난 날의 수많은 기억들이 출렁이는 파도에 휘청이는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하! 이렇게 ... 이렇게... 꿈에도 예상못한 찬탈을 당하다니 ... 분하다, 하으 !... ”

준왕은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찬탈의 아픔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문득 살을 에는 한기가 온 몸을 휘김았다.

내부의 적에 대한 방비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대응은 미숙했고 순식간에 펼쳐진 아수라장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왕검성은 그렇게 이틀 밤낮 사이에 처절한 전투끝에 철저히 준비한 위만군에 의해 준비되지 않았던 조선군이 대량으로 희생된 역사를 기록하며 왕검성의 주인이 바뀌는 큰 사건을 증명하고 었었다.


“그동안의 모든 군사 정책이 오로지 외부를 향해 있었던 것이 이런 참혹한 결과를 낼 줄이야 ... 내부의 반란은 예기치 못한 것이어서 그만큼 감당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어 ... 대응 방안도 없이 그저 하늘의 운이나 바라며 저놈들과 맞섰으니 대패할 수 밖엔, 하아!”

오한을 느낀 준왕이 몸을 부르르 떨며 하늘에 원망의 눈초리를 던졌다. 붉게 상기된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다.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흠차대신 경욱이 급히 달려와 함께 대피할 것을 아뢰었다.

“챙! 챙! 챙! ... 휘이잉!”

밖에서는 여전히 서슬퍼런 칼날들이 부딫치며 포효했고 그 사이를 가르는 세찬 바람이 허공으로 퍼지며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 연신 쏟아져 흘렀다. 그 와중에 왕족들과 신하들이 경황없이 왔다 갔다하며 적들의 칼을 피하느라 우왕좌왕하며 몰려 다녔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교체되던 혼란기에 연나라를 통치하던 그의 주군 노관이 한나라의 살해 압박을 피해 흉노로 탈출했을 때 오직 위만 만이 그와 함께하지 않았던 점에 주목했어야 했는데... 제후도 아닌 일개 장군이 그토록 많은 유민을 이끌고 와 함께 살기를 간청할 때 그의 의도를 보다 세밀히 의심하고 관찰했어야 했는데 ... 위만의 본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소인의 불찰을 꾸짖어 주십시오,”

경욱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위만의 사람됨과 의도를 미처 알아보지 못해 진언을 올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흐느꼈다.


위만이 짧은 기간 안에 높은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기저에는 함께 온 유민들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위만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정서를 자극하여 유민들과 동질감을 높였는데 모든 유민들에게 공정한 농토를 배분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시행했다. 세금의 부과도 작황 결과에 따라 적절히 안배했는데 어느 해 흉년이 들었을 때는 아예 세금을 면제하기도 했다. 대륙을 떠돌 때는 꿈에서나 누릴 호사였다.


그렇게 위만은 어느새 유민들의 왕이 되었다. 유민들에게 준왕은 그저 먼 곳에 있는 이방의 왕처럼 까마득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는 왕이었다. 유민들에게는 먼 곳의 준왕보다는 눈앞에서 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위만이 조선의 왕이었다. 위만은 휘하 병사로 들어오는 유민들과 그 가족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보장을 해주었고 그에 비례한 유민들의 충성을 얻어내었다.


유민들에 대한 영달을 보장한 위만의 미끼는 어느새 유민들에겐 욕망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을 경욱이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조금만 일찍 알아내었다면 ... 반역을 꾀한 죄로 먼저 처벌할수 있었을 텐데, 하아! 이 원통함을 어찌 풀어야 할지 ...아! 하늘 이시여!`

경욱의 자책은 소리가 없었으나 마음속에서는 천둥번개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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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 그대가 잘못한 점은 하나도 없다오. 책임질 건 저 배은망덕한 놈을 충신이라 추켜세우며 경들에게 화친을 강요한 짐뿐이외다. 그대같은 충신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

준왕은 경욱을 바라보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반란을 일으킨 그를 너무 믿었던 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새삼 지난 세월 위만을 포용한 그 선택에 대해 이렇게 한스러운 후회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님, 속히 피하셔야 하옵니다.”

왕실 호위대를 이끌고 위만군과 싸우던 탁왕자가 급하게 뛰어들며 말했다. 치열했던 싸움을 웅변이라도 하듯 칼날에 헝클어진 왕자의 옷가지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따라와 스쳐 지났다.


“위만! 네 이...노...옴!”

준왕이 이를 갈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위만에 대한 분노가 감당할 수 없게 일어난 준왕이 악다구니하듯 하늘에 저주를 퍼부으며 울부짖었다. 울음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처절한 몸부림 이었다. 준왕의 자책이 뒤섞인 울음을 듣던 탁왕자의 가슴에 파도같은 분노가 밀려들었다.


“와아! 와! 와!”

왕검성 안의 요지들을 차곡차곡 장악한 위만군이 마침내 마지막 남은 왕의 침전까지 쳐들어 오고 있었다. 싸움이 일어난 지 꼬박 하루가 지난 새벽녘이었다.


수도였던 왕검성의 주인이자 오랜 기간 조선인의 왕이었던 기준은 새벽의 어둑한 암흑을 이용해 황급히 야반도주를 하며 피난길에 올랐다. 대대로 자신의 조상들이 다스리며 키워온 나라, 그 조선을 등지며 떠나야만 하는 그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그마저도

비상시를 대비해 피난선을 준비해 놓은 충신 경욱의 직감과 탁왕자의 열정이 뭉쳐 준비한 피난 선박이 제때 마련된 덕분이었다.


당초, 경욱은 변경에서 반란의 뒤숭숭한 징후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그 진원지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한편으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탁왕자와 함께 피난선을 미리 확보하는 작업을 비밀리에 도모했던 것이다. 그들이 극비리에 조사를 진행한 이유는 혹시나 해당 내용이 신하들에게 공개될 경우 자칫 그동안의 내용이 변경지역의 관리들이 왕검성에 심어놓은 간자에 의해 누설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 절박한 심정으로 첩보의 진원을 파헤치던 경욱에게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취합된 상태였다. 반란의 진원지는 박사 위만이 다스리는 서쪽 변경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최종 확인만 남은 단계였다. 다만 반란죄는 중차대한 범죄여서 그 죄를 묻기 위해서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관계의 증좌가 필요했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왕실이 역으로 크게 당할 수 있었다.


경욱은 무공이 뛰어난 탁왕자가 박사 위만이 다스리는 서쪽 변경에 가서 조사를 완료하고 자신은 피난선으로 사용할 배들을 수배해서 마련하기로 협의한후 배를 준비했던 것이다. 특별한 상황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날 이후 탁왕자가 돌아오면 함께 조사 결과를 준왕에게 보고할 계획이었다.


이후, 탁왕자가 서쪽 변경으로 출발하고 남아있던 경욱이 여러 날을 거듭해 피난선의 확보가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그때, 반란이 일어났다. 탁왕자와 사전에 우려했던 특별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었다. 조선을 떠받치던 두 기둥이 각자의 역할을 마무리하기 위해 분산되었던 시점이어서 반란의 주역인 위만을 대비해야 할 두 주역이 왕검성을 비운 사이 쳐들어 온 것이었다.


하늘은 그렇게 준왕을 버리고 위만을 선택했으나 그럼에도 충신 경욱의 준비로 인해 준왕이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난리가 나자마자 잠결에도 불구하고 난리의 수습을 위해 급하게 왕검성을 찾은 경욱이 왕실에 닿았을 때 서쪽 변경에서 급하게 되돌아온 탁왕자가 얼마 남지 않은 왕실 호위대와 함께 치열하게 반란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피난선들은 왕검성과 가장 가깝고 규모가 큰 아사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선실이 제법 큰 열두 척의 배가 정박되어 있었다. 육지로 피난할 경우 준비할 수레나 말 등을 숨기기가 어려웠고 도피시 많은 피난 물품으로 인해 기동성이 떨어져 국경을 벗어나기 전 잡히게 될 것은 명확했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큰 배를 마련했던 것이다.


큰 배는 자칫 피난처를 즉시 찾지 못할 경우 먼 바다로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에 따른 것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경황중에 즉시 정착지를 결정할 여유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었다.


겨우 성밖으로 빠져나와 터벅터벅 힘없는 발길을 내딛으며 배에 오른 조선민족의 마지막 왕 준은 그렇게 이민족인 위만에게 왕위를 내어준 채 말을 타고서는 추격해 올수 없는 곳, 피난선에 몸을 실었다.


내뱉는 한숨 사이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자 준의 어깨가 휘청거렸다. 그러자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르던 경욱이 표나지 않게 어깨를 걸어 준왕을 지탱했다. 기울어진 권위를 그렇게 해서라도 유지되어야 했다..


왕의 승선이 완료되자 뒤를 이어 왕실 가족들과 신하들, 지근거리에서 왕실을 경호하는 정예병사 이천여 명 등이 최소한의 필수품만을 지닌 채 바쁘게 배정받은 배들에 올랐다. 그들 대부분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내전 상황에서 왕검성을 빠져나오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왕검성에는 뒤늦게 도착한 위만의 후속부대들이 속속 도착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성안에서 학살을 벌였던 까닭이었다. 때문에 피난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칼, 창, 활 등 병장기들은 경욱이 사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확보해 비치된 상태였다. 또한 음식 재료들도 많아서 여유 공간은 그리 많지는 않은 상태였기에 피난 행렬은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한 절박한 아우성과 서글픈 외침 등이 뒤섞여 난전을 방불케 했다.


“과인이 어리석고 또 아둔해서 하늘이 열어주신 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구나... 이 상황이 진정 현실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이 중죄를 선대의 왕들께 어이 고할 것이며 또, 이 몸이 죽는다 한들 조상님들을 어이 뵙겠는가! ... 정녕 믿을 수가 없구나.”


맨 앞쪽에 선 피난선의 뱃머리에서 준이 멀어지는 왕검성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참으려고 했지만 민망한 눈물은 염치도 없이 계속 흘러 내렸다. 굵은 눈물 속에 바다 저쪽의 여명이 빛을 발하며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이 비쳤다. 한참을 흐느끼는 준의 옆에 동생인 풍이 다가와 준의 어깨를 감쌌다. 황망하게 나라를 뺏기고 도망가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풍은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하늘의 자손을 대내외에 천명하며 수천 년을 이어온 큰 국가인 조선이, 대대로 조선인으로만 이어지며 지켜온 그 조선의 왕조가 지금, 한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잔인한 운명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두 형제가 파도 출렁이는 바닷가 위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서서히 뭉개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바다 위 초라한 패자인 준은 망망대해 속에서 무게도 없이 떠도는 맥 빠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가혹하고 비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바다속을 자맥질하며 죽고 싶은 일념으로 무너져 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마음 한구석에 지푸라기 같은 결심 하나가 걸려서 올라왔다. 목숨의 마지막까지 갔었던 그의 혼줄이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삶의 악다구니가 만든 희망이었다. 죽음의 수렁속에서 절규하던 그가 살아야할 명분을 스스로 세워 일으킨 것이다.

`이제부턴 내 마지막 삶의 목표는 조선의 수복이 될 것이야!`


바다 위에 떠 있음으로 하여 아비규환의 지옥을 겨우 벗어난 준은 이제 그에게 시련을 준 운명에 엎드려 굴복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새로운 운명의 이정표를 스스로 세우는 중이었다.


왕검성을 떠나 허허로운 바다 위에서 맞이하던 첫날 밤, 준은 온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암흑 속에 오랫동안 빛났다. 모든 것을 잃고 새롭게 시작할 결심을 세운 준에게 오래전 부터 말 갈기를 휘날리며 덮쳐오던 흉노의 핏빛 그림자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 흉노의 악몽을 털어내듯 위만의 더러운 비웃음도 이젠 다 떨쳐버릴 것이야, 암! ... 그래서, 살아야만 한다! 살아서 나의 백성들이 있는 고향 왕검성으로 돌아갈 것이야,`

악몽에서 깨어난 월지국 신지 준은 아직도 현실 같은 꿈속의 장면들이 너무도 생생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이를 악물며 입술을 깨물었다.

"새삼 왕검성이 보고 싶구나 ...허나, 너무나 멀어 아득하기만 한 것을 ...하아!"

고요했던 침전에 준의 조용한 독백이 메마리 쳤다.

"허허, 진정 현실이로고! 이 일을 어이할꼬! ..."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꿈같은 현실이었고, 현실 같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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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살수왕 조도일 NEW 18시간 전 1 0 21쪽
21 소문을 타고 날아온 엽기 사건 24.04.24 5 0 15쪽
20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24.03.04 19 0 21쪽
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2 0 16쪽
18 드러나는 적들 24.02.01 40 0 25쪽
17 맹인 검객 선우이치 24.01.21 44 0 50쪽
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0 0 45쪽
15 또 다시, 고수를 찾아서 23.12.22 49 0 15쪽
14 소도의 태동 23.12.14 52 0 12쪽
13 운명을 함께할 첫 궤를 걸다. 23.12.11 54 0 14쪽
12 인연을 엮는 여정의 시작 23.12.07 56 0 11쪽
11 고수 탐문 23.12.05 61 0 14쪽
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67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66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6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69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4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77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77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78 0 10쪽
» 회상 23.11.02 110 0 33쪽
1 악몽 +1 23.10.13 265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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