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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전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최근연재일 :
2024.05.13 19: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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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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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악몽

.




DUMMY

“으아악! 아니 된다! 아니 된다 이놈들아 ... 아니 된단 말이다 ... 흐흑~~”


조선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소국연맹의 맹주국 월지국의 지배자 신지 준이 땀자국으로 얼룩진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절규했다. 편히 잠들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요즘이었다. 오늘도 한동안을 뒤척이다 겨우 든 잠자리였다. 그마저도 잠든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서글픈 신음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깬 것이다.


비단 오늘만 갑자기 일어나는 증상이 아니었기에 침상 주변의 왕실 의관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며 잠시 진맥을 짚은 후 언제나처럼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만큼 빈번하게 겪는 일상이었으나 자칫 습관으로 굳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준은 처음 악몽을 꾸었을 때 곧 괜찮아질 하룻밤의 고통일 뿐일 것이라며 애써 자위했다. 그러나 애초 그 기대는 헛된 꿈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근세에는 본격적으로 그가 겪은 흉흉했던 지난 세월의 아픈 기억들 만큼이나 끈질긴 악몽이 지속해서 나타나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악몽의 경험은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그것들은 짧은 순간 온몸을 괴롭히다가 홀연히 사라진 신기루같은 아픔이었기에 쉬이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긴 밤을 연속해서 나타나는 고통스런 기억의 상처들은 차마 떼버릴 수 없는 슬픔이었다. 지치고 고단한 삭신을 창으로 찔러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마는 패전의 고통을 동반한 악몽의 밤은 그렇게 한동안 준의 꿈결을 지배했다.


“휴, 꿈이었구나.···”

악몽을 꿀 때마다 준은 매번 처음 겪는 일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서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몸은 의례 식은땀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이불자락은 잠결에 무심히 쏟아진 눈물자국들로 눅눅하게 얼룩져 있곤 했다. 악몽에서 깬 준은 늘 그렇듯 사시나무가 강풍에 떨리듯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켰는데 온밤 내내 슬피 운 다음에야 지쳐 쓰러져서 잠들 수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되었군,”

언제나처럼 멍하니 풀린 눈자위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준은 일순간 희미하게 메아리치는 자신의 탄식소리를 듣고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악몽을 꿀 때마다 반복하는 초라한 모습을 본 준은 그 모든 것이 왜소해져 버린 현재를 한탄하는 자신의 자화상인 듯하여 파리하게 위축되곤 했다.


월지국에서는 신지 준의 악몽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효과가 있는 처방이나 용한 의원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홀로 온몸으로 견디는 수 외엔 달리 다른 방안이 있을 리 만무했다. 파리하게 위축된 그의 침전 주변에 밤만 되면 늘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월지국의 신지 준. 그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중국 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한나라에 대항할 정도로 강대했던 나라인 조선의 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란을 일으킨 위만에 패한 후 급거 피난했던 월지국으로 터전을 옮긴 터였다. 반드시 조선을 수복하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와신상담하는 준이었기에 배신자 위만의 존재는 그가 몸서리치며 겪는 악몽의 온전한 원인이었다.


준왕은 피난 당시 월지국과의 분쟁을 우려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 지배층의 큰 결단으로 무혈입성하여 신지의 직책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조선의 아래쪽에 자리잡은 남부연맹의 여러 소국들은 각 국가간의 치세는 독립적으로 운영했지만 외교나 군사 분쟁, 물자교역 등 공동의 관심사나 중대사안에 대해서는 맹주국의 결정을 따랐다.


맹주국인 월지국의 신지에 의해 통치권을 부여받은 준은 조선국과 같은 강한 국가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토착민들에게 그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선진화된 큰 나라 조선에서의 정치력을 발휘해 주길 바라는 그들과 권토중래의 초석을 마련해야 하는 준왕간 이해관계가 완벽히 겹치는 지점이었다. 서로의 갈증이 해소될 수 있는 좋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준은 빼앗긴 조선을 되찾기 위한 꿈을 잠시 접어둔 채 소국연맹이 하나의 국가로 확립될 수 있도록 열심히 국정을 운영했고 그의 통치 체제는 빠르게 안정되어갔다. 각 연맹국의 상황을 들여다 보아 살릴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버릴 것은 과감히 정리하는 정책을 통해 연맹에 대한 소속감과 상호 친밀감을 끌어 올린 것은 부수적인 효과였다.

`조선만큼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잠재력이 있군`

자세히 들여다 본 남부연맹의 소국들에 흡족함을 느낀 준은 연맹의 발전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즈음, 준의 꿈에 위만에게 빼앗긴 조선의 왕검성이 무장한 위만군의 험악한 형상을 한 채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검성은 때로는 긴 칼을, 때로는 긴 창을 겨누며 시시각가 다가와 살기를 날렸다.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는 험악한 모습은 사뭇 경악스러웠다.

거대한 왕검성이 성큼성큼 다가올 때 준은 언제나처럼 뒷걸음질 치다가 비명을 지르며 급히 넘어졌는데 그때마다 잠에서 깨곤 했다.


늘 꾸는 악몽이었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 늘 살아있는 왕검성 수복의 꿈이 지극히 험난할 것임을 알리는 예지몽인 것 같아서 매우 괴로웠고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준은 늘상 꾸는 악몽 속 슬픔의 심연에서 어지러이 헤엄칠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 치지만 계속해서 더욱 큰 고통과 불행으로 떠밀려 가는 것 같았고 때로 어떤 악몽은 파도처럼 밀려와 한 번 휩쓸리면 결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을 던졌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조선 수복의 꿈을 잊지 않으려는 준의 의지는 늪에 빠진 듯한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온몸의 의지를 태웠다.


그랬다. 악몽은 예상치 못하게 겪은 반란에서의 패배와 그 난리를 다시금 자신의 힘으로 봉합하겠다는 회한과 갈등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생채기 때문이었다.

준이 처음 악몽을 꾼 것은 피난길의 뱃전에서였다. 위만에게 패한 후 육로를 이용할 경우엔 남부연맹에 닿기도 전에 잡히게 될 것이 분명한 형국이었기에 부득이 바닷길로 돌아서 내려가는 행로였다.


다행히 물결은 평안했으나 심신이 지친 준왕은 그 밤부터 계속하여 악몽에 시달렸다. 거센 파도를 타고 맹렬히 쫓아오는 위만군에 사로잡히는 악몽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며 준의 심신을 몸서리치는 공포에 물들게 했다. 다행히도 그 악몽은 월지국에 안착한 후 달포쯤 지나자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월지국에서의 생활은 바빴고 새로운 의욕도 생겼다. 소국연맹을 실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통치할 때 이상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조선을 되찾기 위한 힘을 이곳에서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을 잊고 오로지 소국연맹에 집중해 나라답게 키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힘을 모아야 했다.


그때 뜬금없이 왕검성이 나타나는 악몽을 꾼 것은 뼈저린 패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늘 이렇게 아파야 하는 것인가?...”

준의 탄식은 가늘고도 길었다. 악몽은 이렇게도 여러 날 위만에 당한 패배의 아픔에 시달리는 준에게 깊은 슬픔을 던졌던 것이다.


조선을 빼앗겼다는 결과만으로 보면 모든 잘못은 오롯이 위만의 배신을 감지하지 못한 자신의 몫이었다. 국정에 대한 최종 책임을 필경 왕의 부담으로 공유한 것은 단군왕검으로부터 내려온 선대왕들의 전통이었다. 신하들은 그저 잘잘못을 한 부분에 대한 책임만 지면 그뿐이었다.

“이 꼴을 하고 죽는다면 돌아가신 아버님을 무슨 면목으로 볼 수 있을까? 아! 아!”

예상치도 못하게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어버린 치욕으로 인해 준은 크게 흐느꼈다.


그의 굵은 눈물자국 속에는 그가 통치하며 보냈던 조선에서의 영욕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내렸다. 파란만장했던 그 세월 속에서 문득 오늘 같은 치욕적인 사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기억의 한 장면처럼 겹쳐 떠올랐다. 선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악몽은 지금 겪는 악몽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젊은 날의 왕세자 준은 의지가 굳은 사내였다. 당시의 조선은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강한 진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여있었다. 다행인 것은 조선의 위치가 중원에서 너무 멀어 직접 통치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에 부왕은 대륙 통일에 도움을 준 제후국들에게 줄 땅의 확보에 혈안이 된 진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진나라와 접경한 영토를 내어주는 대신 조선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바 있었다.


이후, 부왕은 겉으로는 진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굴복하는 척 했지만 이중삼중으로 펼쳐놓은 진나라의 감시망을 피해 조선의 변방에서 은밀히 군사력을 키웠다. 와신상담하는 아버지 부왕의 굳은 의지를 일찍부터 보고 자란 준왕은 자연스레 자주적인 강대국 조선의 건설이라는 원대한 꿈을 대를 이어 키워가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취임 초기, 젊은 왕 준은 넘치는 열정과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선대 왕들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국정을 펼쳤다. 안으로는 백성들의 결속을 다졌고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와 강한 군사력을 도모하며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몇 년이 흐른 후, 진나라에서 예기치 못한 낭보가 날아들었다. 천세보다 오랜 만세를 꿈꾸던 진나라의 시황 영정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았고 그것을 기화로 그 큰 진제국이 삽시간에 혼란에 빠진 것이었다. 절대자 시황의 부재는 치명적이어서 권력층간 갈등과 반목이 커져 관리들의 폭정이 가혹해지는 만큼 백성들의 원망이 쌓여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하늘 아래 누구도 개척하지 못했던 넓은 영토를 호령하던 진나라였으니 삼대 황제가 집권한 십오 년의 짧은 세월동안 숨죽였던 혼란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천하가 극도로 혼란에 빠진 것이다.


준왕은 진나라에 빼앗긴 옛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옛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강대국 조선 건설의 꿈을 완성할 수 있는 초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꿈은 이루어 내라고 있는 목표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언젠가 마주해서 실천해야 할 과제였다. 여러 경로의 정보를 분석한 결과, 이번이 묵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을 정립한 젊은 준왕은 준비된 일만 대군을 이끌고 거침없이 대륙으로 돌진했다.


“이렇게나 쉽게 옛 땅을 수복하다니 ... 감개무량할 따릅이옵니다.”

선봉장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던 대장군 석철이 감격에 겨워 말했다.

준왕의 군대가 국경을 마주하던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여 빼앗겼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는데는 채 달포도 지나기 전이었다. 통일된 큰 나라였던 진나라는 조선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버거운 상대였으나 분열된 지금 여러 개의 제후국과 개별적으로 싸우는 것은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넘쳤다. 마치 오래되고 익숙한 훈련을 수행하는 것처럼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군은 나아감에 거칠 것은 없었다. 매번의 전투에서 제후국들의 군사는 뒷걸음질 치며 꽁무니를 보이며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군의 엄청난 기세는 한 동안 계속 되었고 준왕은 옛 영토들을 하나씩 수복할 때마다 오랜 준비 끝에 따먹는 달콤한 과실을 맛보듯 감격스러웠다.


“더 많은 병력으로 조금만 더 빨리 일시에 몰아치면 ... 어쩌면 ... 하아!, 어쩌면 말이지 ... 이곳, 이 주인잃은 진제국의 거대한 영토를 우리가 점령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몇 번의 전쟁에서 크게 자신감을 얻은 준왕이 승리를 축하하는 피로연장에서 함께 흥에 겨워하는 휘하 신하들과 장군들의 호기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열띤 표정으로 말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숙연해졌다.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대한 그림이 갑자기 눈앞에 툭 떨어진 황당한 이야기였다.


“우리 조선이 온 천하를 호령하는 큰 국가가 될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 말이오?”

젊은 왕의 기세에 눌린 신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 형국이 되었다. 지금껏 살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생경한 경천동지할 사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에는 어느 누구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왕의 물음에 대한 답이 끝나지 않았기에 어색한 침묵이 계속될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선봉장인 대장군 석철이었다.

“전하께 올리기 송구한 말씀이오나 ... 우리 조선이 당장 지금 최우선하여 진행할 일은 수복한 옛 땅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 기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백성들이 계속 머물러야만 이곳까지 조선의 지배력이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수복지가 우리 백성들로 넘치는 때가 오면 그때 비로소 이곳이 군사적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전하의 꿈을 이루어 주는 초석이 될 것이란 말이옵니다.”


석철의 한수 한수 침착하고 꼼꼼한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하오나, 그 점을 통촉하시어 중원으로 진출하자는 하명을 보류해 주시옵소서,”

준왕은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고 석철도 자신의 주장을 거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 장군께선 그리 생각하는가? 흠, 먼저, 수복지에 백성을 이주시킨다면 외부의 침공이나 치안의 유지를 위해 군사를 나누어 주둔시켜야 할 것인데 ... 흠, 그러면 중원으로 갈 군사력이 약해 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고 말이야, 흐음...”

준왕은 내심 섭섭했다. 그는 아직 젊은데다 지금껏 조선군이 보여준 공격력은 천하에 거칠 것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기회를 놓친다면 제법 많이 아쉬울 것 같군,`

노련한 장수의 일리있는 의견으로 자신의 꿈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마냥 아쉬운 무언가가 있었다. 신하들을 석득할 더 효과적인 방안이 없다면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다수의 실전경험을 가진 명장 석철의 충언을 무시하는 건 부담스러운 결정이 될 것이었다.


“전하, 지금은 천하가 모두 어수선한 혼란기이옵니다. 항상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 주변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점, 통촉해 주시옵소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망설이는 준왕의 표정을 살피던 석철이 다시 한번 간언했다. 눈을 감은 준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건성건성 흘렸다. 연이은 승리에 도취된 젊은 왕의 가슴에 어느새 조선군이 최강이라는 자만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놈들은 지금 당장의 승리에 도취된 채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다람쥐 같은 허수아비들에 불과해, 더군다나 젊은 왕은 혈기만 왕성할 뿐 사리분별도 없으니 참으로 좋은 먹잇감이 될 게야, 그렇지 않나. 하하하,”

그날 밤, 조선군의 막사가 보일 듯 말 듯 한 먼 거리에서 동태를 살피던 사내가 뒤쪽에 도열한 군대를 바라보며 히죽 웃으며 말했다. 흉노의 대족장 선우모돈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흉노의 군사들은 몰아치는 비바람에도 꼼짝하지 않고 목표물에 눈을 박고 있었다.


그즈음 흉노군의 간자들은 은밀히 조선의 막사를 휘저으며 탐문했고 이는 실시간으로 대족장의 귀에 전달되고 있었다. 승리에 들떠 당초의 목표를 넘어 대륙의 주인이 되어볼 야심을 드러낸 준왕의 조선군은 멀리 중원을 애달프게 바라보고 있었기에 뒤쪽에서 접근한 그들이 보일리 만무했다. 조선군의 경계는 오직 대륙의 중심부로 향하는 먼 안쪽에 위치한 제후국들일 뿐이었다. 관심에서 멀어진 후방지대는 경계의 사각지대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 부실한 후방으로 흉노의 군대가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적의의 이유나 명분도 들을수 없었다. 순식간에 뒤엉켜 무자비한 공격과 반격으로 서로를 짓이길 뿐이었다. 아무런 준비 태세도 없이 순식간에 예기치 못한 싸움의 수렁에 빠진 조선군은 그들 스스로의 기대와는 달리 전세를 역전하지 못하고 공방은 길어졌다.


조선군은 처음엔 그들에게 패했던 제후국중 하나가 복수를 위해 기습했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뒤로 밀리기만 하는 현상이 지속되자 그들은 비로소 싸우는 상대가 다른 군사들임을 깨달았다. 그들의 무력은 허술한 제후국들의 병사들과는 천양지차의 격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조선의 군사들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기를 거듭하며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흘러갔다. 최강이란 자만감을 가졌던 조선군이 기습공격을 당하자 순식간에 오합지졸처럼 흔들렸고 이를 놓치지 않은 흉노군들이 이를 닥달하듯 구석구석 허점을 찔러온 것이었다. 마침내 조선군은 준왕의 안위마저 보장 못할 정도의 수세에 내몰리게 되었다.


“저놈들이 도대체, 왜 ... 왜 우리를 공격하는 게야, 미치겠군! 하아 ...”

광분한 준왕이 고개 숙인 장군들 앞에서 자조적인 한숨을 쉬었다. 이미 잘잘못을 따질 지경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었기에 그 어떤 대답도 의미가 없는 지경이었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형국에 싸움의 명분 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는 더더욱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저놈들과 우리는 나아가는 방향이 우연히 같앗을 뿐이야, 그저 그 이유 하나 뿐이었어!”

몸을 구부려 의자에 쳐박히듯 주저앉아 고민하던 준왕이 문득 몸을 솟구치며 소리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저놈들과 우리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운명이었어, 진나라의 몰락으로 어수선한 기회에 세력을 확장한 건 우리 뿐만이 아니었어 ... 우리는 제후국들만 보고 있었기에...중원을 비웃으며 조용히 힘을 키우던 먼 변방의 유목민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야, 참으로 후회스럽군 ... 평원을 지배하던 강적 흉노를 놓치다니 ... 우리가 중원으로 달릴 준비를 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런 대참사를 일으킬 줄이야.. 하아! 아! ...”

회한에 찬 준왕의 신음이 막사를 울렸다.


“이제, 어찌해야 하오?”

패기가 넘쳤으나 경험을 가지지 못한 젊은 왕 준은 신하들에게 해결방안을 물었다. 여러 신하들의 얼굴을 두루 살피던 그의 눈길이 경험 많고 노련한 대장군 석철을 앞에서 멈출 때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상심이 많으신 전하께 아픈 고언을 드리는 것이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전황이 불리한 것은 인정하셔야 하옵니다. 갈수록 밀리는 상황은 계속될 것이고 자칫 대책없이 싸웠다간 종국에는 전멸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누구보다 냉정하게 정세를 분석한 그였다. 더 큰 희생은 불 보듯 명확했다.


“최대한 빨리 후퇴한 후 뒷일을 도모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편으로 사료되옵니다.”

절박한 제안을 하는 그의 음성은 비통했고 비장한 적막만이 주변을 휘감고 돌았다.

준왕의 등에서 굵은 식은땀이 흘렀다. 석철장군의 의견대로 수복한 영토의 실효 지배를 위해 속히 조선으로 돌아가야 했었다는 후회가 일순 격하게 밀려온 탓이었다.

패전은 불가피했고 뒤늦은 후회는 결과로 순응하길 강요했다. 되돌릴 수 없는 갑갑한 현실은 빨리 타파해야 했다. 절박한 왕은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이며 석철의 말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를 원했다.


“전하께서 달성한 조선의 오랜 꿈을 흉노 때문에 내려놓아야 하는 현실이 심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더구나, 철군을 건의해야만 하는 현실은 더욱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드려야만 하는 것 또한 자칫 이 문제가 조선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석철의 음성이 허공의 메아리처럼 맴돌다 사라지자 주변의 공기는 가라앉는 난파선처럼 무거워졌다. 준왕의 이마가 짙게 패였다. 고민이 깊어진 탓이었다.


“예로부터 침략과 약탈을 일삼은 흉노에 대해 다들 두려워 했지만 정작 그놈들은 여러 부족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했기에 무시했던 것인데, 그런데 ... 그런데 ...하아, 어떻게 그놈들이 똘똘 뭉쳐 공격을 해올 수가 있는 것인지 ... 믿을 수가 없구나,”

준왕은 새삼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조적인 한탄을 내뱉었다.


“근래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지금의 흉노 족장 모돈선우는 흉노의 수 많았던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켜 흉노족의 통일을 이룬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싸움꾼이라고 합니다. 그의 등장을 아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은 그는 싸울 때 상대를 전광석화처럼 복속시켜 빠르게 흡수했기에 주변국들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듣기로 그의 지휘아래 현재의 흉노군은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이루었다는 소문이 있다 하옵니다.”

눈앞의 적을 인정해야만 하는 석철의 가슴을 울리는 진단은 준왕의 빠른 철군 결심을 더욱 촉구하고 있었다.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무모한 희생을 줄여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많은 군사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환해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침울한 한숨을 쉰 석철의 말을 경청하던 주변의 젊은 장군들의 표정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이를 지켜본 준왕의 얼굴이 우울해지자 젊은 장수들도 동요하는 낯빛을 숨기지 않았다. 왕이나 신하들이나 직면하기 싫은 현실을 엄숙히 직시해야 하는 불편한 자리였다.


“대장군의 말씀이 일견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자칫 명분도 실리도 다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빠질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쳐들어온 흉노의 군사들은 바람에 갈기를 날리는 말 위에서도 창칼을 무자비하게 휘두를 정도의 무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군사들도 일 만이라고는 하나 이 넓은 평원에서 기동성과 완력에서 앞서는 적들과 정면에서 싸워 무참한 패배만 맛보고 있사옵니다. 더 이상 속절없이 피해를 키우지 말고 이쯤에서 화친을 맺고 뒷일을 도모했으면 하옵니다.”

석철의 부장인 젊은 장수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의견을 보탰다.


준왕의 눈시울이 붉어져 갔다. 싸우든 화친을 맺든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조선에 유리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싸움에서 패자의 결정은 궁색할 뿐이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내일 적진으로 가 화친을 성사시키겠나이다. 저들도 복토한 옛 땅들을 양보받는다면 더 이상 우리와 싸울 명분이 없어질 것입니다.”


문득 싸늘한 바람이 등 뒤를 스치자 준왕은 몸서리를 쳤다. 잡았던 꿈을 내려놓는 것과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 요청이었으나 이 옛 땅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꿈을 한번 더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꿈은 언제나 아득한 먼 곳에서 빛날 뿐이었다.


`어쩌면 나의 당대에 다시 돌아오기란 불가능할지도...`

그것이 너무도 화나는 일이었다. 진나라의 몽염에게 무릎을 꿇었던 아버지 부왕처럼 자신도 흉노의 창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가혹한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딱 한 번, 눈앞의 저 흉노와 진검승부를 해서, 천운이 있어 이길 수만 있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대륙을 지배하는 대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흉노와 대치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하아!`

준왕의 갈등은 길었고 밤의 적막은 너무나 가혹했다. 잠을 뒤척인 준은 깊은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챙!챙!... ”

“펑!펑 ,,, ”

갑작스런 소란은 불쑥 눈을 뜬 준왕은 눈앞의 광경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의 군사들이 야습해왔던 것이다. 준왕은 이를 갈았다. 이미 석철장군을 통해 화친의 의사를 표한 바 있고 흉노에서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터였는데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내일 적진으로 가겠다는 통보를 했음에도 더러운 놈들이 기어이 일을 내고야 마는구나! 이런 천하에 신의없는 짐승같은 놈들 같으니!”

악에 바친 준왕이 조선군의 선봉에 섰다. 그 어느 때보다 용감하게 싸웠으나 하늘은 준왕을 외면했다. 조선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옛 영토에서 흉노의 말발굽 아래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그날, 조선군은 뛰어난 기마술을 바탕으로 야만스럽게 밀어젖히는 흉노에 치욕적인 대패를 당했다. 결국 준왕은 겨우 일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피눈물을 쏟으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준왕의 피난길은 초라했다. 축 처진 준왕의 어깨 위로 허약해져 덜렁거리는 전쟁의 공포가 걸터앉아 무겁게 짓눌러왔다. 왕검성으로 돌아온 준왕에게 패전의 기억은 길었고 그 기억은 무시로 악몽으로 찾아와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때마다 준왕은 무력감으로 온몸을 떨었다. 자괴감에 기인한 보이지 않는 공포는 그 어떤 실체 있는 공포보다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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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살수왕 조도일 24.05.13 1 0 21쪽
21 소문을 타고 날아온 엽기 사건 24.04.24 5 0 15쪽
20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24.03.04 19 0 21쪽
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2 0 16쪽
18 드러나는 적들 24.02.01 40 0 25쪽
17 맹인 검객 선우이치 24.01.21 44 0 50쪽
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0 0 45쪽
15 또 다시, 고수를 찾아서 23.12.22 50 0 15쪽
14 소도의 태동 23.12.14 52 0 12쪽
13 운명을 함께할 첫 궤를 걸다. 23.12.11 54 0 14쪽
12 인연을 엮는 여정의 시작 23.12.07 56 0 11쪽
11 고수 탐문 23.12.05 61 0 14쪽
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67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66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6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70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4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77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77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78 0 10쪽
2 회상 23.11.02 110 0 33쪽
» 악몽 +1 23.10.13 267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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