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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전기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최근연재일 :
2024.05.13 19:00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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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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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수 :
19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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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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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




DUMMY

“자, 지금부터 우리는 한번도 본 적 없는 모르는 사이요, 아시겠소? ... 명심하오,”

무심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던졌던 중년인을 생각하니 진혁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진지한 얼굴로 던지던 강렬한 눈빛을 생각하니 다시금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눈빛만으로도 상대에게 공포감을 심어준 절정 고수였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주춤 주춤 뒷걸음질 치던 공포를 준 사람이지만 그 불안함보다는 마음의 또 다른 한 켠에서 아스라히 피어나던 확신의 안도감이 더욱 강력하게 퍼졌던 순간이었다.

`사마 대협을 이렇게 만나다니 ... 이런 우연이 , 어서 왕자님을 뵈어야 할텐데 ...`


“진 장군의 기억을 거꾸로 하여 산을 오르도록 합시다.”

탁 왕자의 제안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했으니 누군가는 방향을 터야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혹여나, 그가 사마 대협이 아니면? ...”

진혁이 혼자 말하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확신했기에 자칫 실수했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무의식중에 표현된 것이었다.

“괜한 걱정은 붙들어 매시오. 어제 일로 실력이 입증된 데다 이 곳 사람도 아니라고 했으니 분명 사마 대협일게요... 아! ... 만약, 사마 대협이 아니어도 좋소이다. 우리로선 뜻하지 않게 새로운 고수를 발굴하는 행운이 온 것이 될테니 말이오... 자! 어서 갑시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탁 왕자가 발길을 재촉했다.


“이제보니, 이곳 풍경이 무척이나 정감이 있군요. 어제 적을 쫓는 것에만 온 정신이 팔려 급하게 스쳤던 그 산길들을 이렇게 여유롭게 지나니 새삼 편안한 풍경들로 가득한 곳이군요."

천천히 앞서 나가던 진혁이 뒤 쪽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둥글둥글하고 낮아서 오르내리기에 부담이 없는 곳이군요.게다가 산을 끼고 느릿느릿 흐르는 계곡물의 유유자적한 흐름도 한가롭군요. 이곳 불사국은 인생살이에 지쳐 피곤할 때 찾아오면 더없이 좋은 장소일 것 같습니다.”

진혁의 말을 받은 길태곤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사마 대협도 편안한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온 게 아닐까 하오. 혼란했던 대륙을 떠나 세상사의 시름을 잊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정하오,”

탁 왕자도 여유로운 자세로 주변 풍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 몇 갈래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저곳인 것 같습니다.”

진혁은 유독 좁은 오솔길을 향해 말머리를 틀어 앞장서 나갔다. 한참을 굽이쳐 돌자 눈앞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보행로가 만들어진 좁고 긴 산길이 길게 쭉 뻗어 있었다.

“이곳입니다. 갈태기 패거리의 전령을 놓칠 뻔했던 곳이기도 하고 사마 대협으로 보이는 은인을 만나 전령을 해치웠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마을이 아련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엔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 태풍을 맞은 듯 처참하게 부서져 그 잔재들이 어지러이 뒹굴고 있었다. 군데군데 파헤쳐진 흙더미와 부서진 돌 부스러기도 이리저리 뒹굴고 있어 마치 큰 싸움이 있었던 곳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단 몇 초식만으로도 이 정도 파괴력을 보였다면 ... 도대체 얼마나 강한 것인지! ... 하! 과연 천하제일의 용력을 가진 사내라는 별호가 무색하지 않은 모습이오, 대단하오!”

탁 왕자가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동안 주변을 둘러본 길태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 장군님의 얘기에 의하면 찰라지간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하니 과연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흠, 한편으론 사마 대협의 무공이 과연 어느 정도의 경지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만, ... 그건 조만간 적들과 싸울 때 충분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하하!”

길태곤이 호기롭게 웃었다. 강자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배움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적이면 죽여야 하나 친구면 또 다른 배움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부지런히 길을 재촉한 일행의 눈앞에 자그마한 너와집이 나타났다. 외관만 보아도 튼튼한 집이었다. 지붕 쪽에 껍질이 벗겨진 큰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되도록 눌러놓은 구조였는데 너와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인 듯 했다. 집 알쪽엔 아담한 밭이 있었고 집 뒤쪽으로는 다양한 과실수들이 가지런하게 곳곳에 심어져 열매들을 매달고 있었다.


“계십니까?”

진혁이 인기척을 내며 집 앞에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이후 몇 차례 더 시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 집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시지요.”

진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탁 왕자를 바라보았다. 일단 물러서야 한다는 의사였다.

“ 예, 그렇게 하십시다. 일단 철수했다가 내일쯤 다시 오는 것으로 합시다. 계속 기웃거리다간 할 자칫 초면에 실례를 범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래도 ... 잠시 기다린 후 그래도 만나지 못한다면 저녁에 다시 왔으면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농산물을 팔러 나갔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일단 사마철의 집으로 판단되는 곳까지 찾았으니 성급한 마음이 없어진 터여서 세 사람은 집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차분히 뜯어보니 이 집의 외관이 제법 세련된 듯합니다. 능숙하게 잘 가꾼 과일들의 탐스러운 모습이 새삼 진한 삶의 여유를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껏 흥취가 오른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아악! ”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울린 것은 그들이 파란 하늘의 새털구름 수를 셀 때였다. 분명 멀지 않은 곳이었고 다급한 음성의 떨림으로 보아 절박한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단말마의 절규였다.


“아니! 누가? ...”

말을 뱉자마자 길태곤의 신형은 벌써 소리가 터져 나온 곳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성격에 기인한 때문이었다. 잠시 후 길태곤이 도착한 곳은 마을로 진입하는 산길에서 오솔길로 접어드는 평지의 편평하고 넓적한 큰 바위 옆이었다. 젊은 사내 몇 놈이 참하게 생긴 소저의 길을 막고 위협을 가하며 희롱하는 중이었다. 옷매로 보아 부잣집의 자제들 같았는데 해 있는 이른 시간부터 추태를 부리는 것을 보니 몹쓸 짓거리도 서슴치않는 놈들임이 분명했다. 특히, 통행이 잦은 마을 쪽의 산길 입구에서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당돌한 놈들이었다. 아마도 마을에서도 내놓은 못말리는 파락호들이리라,


“무슨 일이냐!”

한 눈에 사태를 파악한 길태곤이 파락호들의 앞으로 당당하게 나서며 외쳤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그들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뚱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본 듯한 반응이었다.

“아!아!아! ... 아까 소저가 지른 비명 때문에 오셨구나? ... 그 일은 우리가 소저를 불렀더니 놀라서 지른 비명이오, 별일 아니니 오지랖 넓게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슈! 쓸데없이 나대다간 큰일을 당할 수 있으니 어서 가던 길이나 가슈!”

험상궂은 표정의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아무 일 아니라고? 그럼, 네놈들 뒤쪽에 있는 저 어여쁜 소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 불편한 모양새는 무슨 일이냐?”

길태곤이 화난 표정으로 장신구 하나 없는 남루한 옷을 입은 소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땋아 올린 머리로 보아 넉넉한 집안의 여식은 아니었으나 언뜻언뜻 스치는 눈길 속 소저의 모습은 청아했으며 특히, 맑은 눈빛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흠, 어린애가 장난으로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만 그 돌에 맞은 개구리는 장난으로 죽는 게 아리란 것은 다들 알고 있을 테지? 그렇지 않나? 얼간이 도령들!”

대충 사태 파악이 끝난 길태곤이 거친 반말을 쏟아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우리더러 얼간이 어린애라니? ... 하아! 이런 당돌한 놈을 보았나!”

놈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녀석이 불현듯 화를 내며 외쳤다.

“그럼, 그럼, 네놈들 하는 행실머리로 보면 아주 상것의 철딱서니 없는 얼간이 애들과 하등 다를 바 없으니...자!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숫자를 세는 동안 속히들 물러가라. 알겠느냐!”

길태곤은 자신의 선의에 거칠게 반발하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자 추상같은 일갈을 터뜨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포효하는 길태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천한 짓거리라? ... 정히 그렇게 죽고싶다면 우리가 네놈을 도륙내어 ... 허억! 윽!”

억지로 얼굴을 찌그리며 눈에 잔뜩 힘을 넣은 채 막말을 내뱉던 놈의 눈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호기롭게 터져 나오던 말꼬리가 슬그머니 신음으로 변한 것도 얼핏 드러난 길태곤의 가슴속 문신이 파랗게 이글거리며 쏟아져 들어온 그때였다. 근거를 알 수 없는 불길함으로 해서 온몸에 살을 에이는 삭풍이 물밀듯 퍼져온 감정도 함께였다.


“그! ... 그만 가도록 하지,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으니 ... 어서! 빨리!”

연장자인 그놈이 옆눈으로 다른 녀석들에게 부지런히 눈치를 주며 중단을 다그쳤다. 눈앞의 상대에게서 서서히 살기가 차오름이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 지역내 유력 파락호 집단의 간부로 있었기에 제법 칼질을 제대로 배웠던 터여서 고수들의 말투나 태도만으로도 그 수준을 예측할 정도는 되는 터였다. 눈 앞의 검객이 드러낸 태도로 보아 자칫 한마디만 더 대꾸한다면 무자비한 보복이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아! 뭣들하나! ... 어서! 어서! ... 빨리 돌아가세!”


“뭣들 하느냐! 삼한제일검께서 살려주신다고 할 때 만사 제쳐두고 도망가지 않다니!”

그제서야 급하게 현장에 도착한 진혁이 어정쩡하게 대치하고 있는 놈들을 채근했다. 보기만 해도 주눅 드는 길태곤의 위압적인 살기에 잔뜩 겁을 먹고 있던 그들은 진혁이 퇴로로 열어준 마지막 호통을 신호로 해서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혼비백산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흡사, 한순간의 쾌락을 쫓다가 호랑이를 만나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산토끼처럼 두서도 없는 줄행랑이었다.

“어제의 하늘은 사마 대협을 보내서 저를 도왔듯, 오늘은 철딱서니 없는 파락호 놈들이 제 입을 통해 목숨을 건지도록 해주셨으니 참으로 자애로운 하늘입니다.”

진혁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티 없이 맑은 하늘이 열려 있었다


“소저, 이제 아무 일 없을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길태곤이 소저를 일으키기 위해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가 고운 손으로 얌전히 허공을 세차게 저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끄러운 듯 길태곤에게 얌전하게 인사한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더니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탁 왕자와 진혁에게도 단정하게 꾸벅 인사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연약한 소저 혼자 이 산길에서 봉변을 당할 뻔 하셨소이까?”

탁 왕자가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그녀가 설움에 복받쳐 울먹이더니 눈가에 울음 방울이 맺혔다. 일행들도 무슨 말못한 사연이 있다는 생각으로 숙연해져서 먼 산을 보며 그녀가 슬픔을 삭힐 시간을 기다렸다.


“며칠 전, 병환으로 누워계시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길 혹시 변고가 생긴다면 꼭 사마철 아저씨께 연락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급한 집안일 몇 가지만 정리하고 오늘 급하게 아저씨께 연락드리기 위해 방문하는 길에 조금 전 그 불한당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큰 슬픔을 참고 나셨던 길에 큰 봉변을 당할뻔한 어린 소저였지만 보기와 달리 결코 약하지 않은 소저가 아픔을 안으로 삼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마 대협을 만나러 왔다고 ?”

화들짝 반색한 탁 왕자가 에상치 못했던 대답에 놀라며 혼잣말을 흘렸다. 옆에 있던 진혁과 길태곤도 반가운 표정으로 웃었다. 필경 좋은 징조였다.


그날 저녁, 늘 혼자만의 일상으로 한적했던 사마철의 너와집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의 웃음이 넘치며 적막한 고요를 깨고 있었다. 저자에서 과일을 다 팔고 돌아온 그의 집 앞에 뜻밖의 방문객들이 있어 일순 긴장이 감돌았지만 그들의 옆에 보고 싶던 친한 누님의 딸이 그를 반기자 그 절절한 반가움 때문에 낯선 방문객들에 대한 경계심이 금새 묻혀 버린 결과였다.


“우리 하선이를 구해주신 것, 진정으로 감사드리오.”

길태곤에 의해 곤경에서 벗어난 소저의 이름이었다. 불사국의 외진 산골에서 다른 이들과는 일체의 교류도 하지않고 농사만 지으며 사는 사마철이었지만 하선과 그녀의 어머니만은 유일하게 정을 주는 이웃이었다. 진제국의 붕괴로 오래 혼란을 겪던 제후국인 허나라 출신인 그는 많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장군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무인이었다. 그가 이끈 큰 승리 덕분에 그의 무공은 전설처럼 회자 되었으나 오히려 그를 꺾어서 명성을 내고픈 삐뚤어진 욕망을 시전하는 다양한 무인들의 도전으로 인해 고향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입자 주저없이 고향을 떠난 사마철이었다.


불사국은 이국이었기에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생계수단인 농사를 짓기에도 삼한의 어느 지역보다 좋은 곳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살기에는 이곳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태생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했던 사마철이 혈혈단신으로 고국을 떠나 먼 이국땅에 와서 의도적으로 대인관계를 단절한 터여서 그의 마음속엔 절절한 향수병이 깊은 터였다. 그 아픔을 이해하고 외로움을 달래주던 살가운 사람이 하선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에게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누님이었다. 가족의 정을 느끼지 못했던 고아 출신의 사마철이었기에 누님의 딸 하선 역시도 어느덧 그에겐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전에, 하아! 누님이 뭔가를 망설이시며 말씀을 안하기에 말씀하시라고 채근했더니 글쎄 ... 혹시 누님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하선이를 꼭 맡아달라며 부탁한다고 하시더니 ... 결국, 이렇게 급하고 허망하게 ... 하아!”

사마철은 하선에게 사정 얘기를 듣고는 깊은 회한의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그날 평소보다 수척하여 걱정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쓸쓸하고 그늘진 얼굴이 다 사연이 있었던 것이었네, 휴우! ...이젠, 그것마저 가슴 아픈 기억이 되겠구나,”


“어머니께서 원래 몸이 약했던 것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병환이 그렇게 악화될 줄은 몰라셨기에 미처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자리에 누우셨고,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진 것 같습니다. 나름 유명하다는 의원도 와서 진료했고 저도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고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니 모든 것이 제가 정성이 부족했던 탓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흑! 흐흑!”

하선의 울먹이는 사연에 사마철은 물론 탁 왕자 일행의 마음이 찢어질듯 아파왔다.

눈가가 촉촉해진 사마철은 하선이 보는 데다 상대적으로 젊은 탁 왕자 일행이 함께 하기에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감정을 추스르며 꾹 참고 있었다.


“혈육지간의 누님을 잃은 슬픔이 이런 것이라면 ... 하아! 너무 아프군, 흐흠! ...”

사마철이 희미하게 혼잣말을 내뱉은 후 바람이나 쐬겠다며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대한 그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문득 뒤를 돌아 하선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가에 아픈 가슴에서부터 비릿하게 밀려온 슬픔이 격하게 묻어났다.


“누님! 힘든 세상에 맘 아파한 나를 달래주시다가 홀연히 나만 남겨두고 먼저 떠나시다니요, 흐흑흑! ... 이제 이 세상 혼자 외로워서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흑흑!”

사마철의 절절한 흐느낌이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그의 절규는 집 뒤에서 흐르는 작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세상사의 모든 인연을 끊었던 나를 다시금 세상으로 되돌아오게 해주신 누님의 정을 결코 잊을 수 없는데 이렇게 먼저 가셨으니 해드릴 수 있는게 없네요, ... 아! 누님, 허나라에서 결혼을 약속했으나 전란 통에 잃어버린 약혼녀와 너무 닮은 나의 누님,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하아!”

사마철은 가슴을 옥죄어오는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을 부여잡고 있었다.

“누님, 지금 드릴 수 있는 약속은 하선이를 잘 키우겠다는 다짐뿐이네요... 제 딸처럼 예쁘게 키워 언젠가 누임이 하늘에서라도 웃을수 있는 멋진 사위를 볼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누님의 하나뿐인 딸 하선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이 다짐,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착 가라앉은 슬픈 감정이었지만 사마철의 깊은 심연에서는 그가 지켜주지 못한 누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새로운 간절함이 솟아났다.


“왕자님의 말씀을 백번 이해합니다. 다만, 함께 함에 있어 꼭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바람을 쐬고 들어온 사마철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꺼내었다.

“하선이와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주시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럼, 이 한 몸 온 힘을 다해 왕자님의 일에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처음, 다시는 세상에 나서기 싫다며 탁 왕자의 청을 수락하지 않았던 사마철이었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뭉클한 그리움이 어느 순간 하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각오로 변한 것이었다. 누님과 약속한 하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갈아 넣을 각오에 기인한 결정이었다.


“왕자님의 요청에 부응한 것은 누님이 하선이를 부탁한 것이 어느 정도 작용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평소 봐왔던 하선이가 보기 드문 고운 심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평소 딸처럼 귀하게 생각했던 내가 희생해서라도 하선이의 행복과 바꾸고 싶은 것 뿐이지요,”

속세를 떠난 마음으로 살고 있었기에 동참을 설득하기에 무척 힘들었던 사마철이 한바탕 슬픔을 배출한 후에는 오히려 적극적인 동참의지를 피력한 것은 인연을 소중히 여긴 하선 어머님이 베풀었던 인정이 만들어낸 선한 영향력때문인 듯했다.


“하선 낭자의 어머님을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새삼 그 고마움이 깊이 새겨집니다.”

탁 왕자가 기쁜 표정으로 말하며 웃었다.

“새삼, 하선 낭자에게 특히 잘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불현듯 밀려오는군요. 우리의 좋은 인연을 끝까지 이어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삼 다짐하듯 탁 왕자가 사마철에 대한 약속을 언급하며 재확인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어깨를 짓눌러 왔으나 천하 제일권인 사마철의 동참이 주는 수십 갑절 이상의 기쁨은 긴장된 마음을 순식간에 묻어버리는 마법이었다.


탁 왕자 일행은 며칠간 사마철의 집에 머무르며 사마철과 하선이 하선과 마을 여러곳에 뿌려놓은 인연들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첫 만남 이후 하선의 숙부가 된 사마철이 하선의 곁을 지키는 동안 탁 왕자 일행은 또 다른 고수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모든 것을 정리한 사마철과 하선은 함께 마한 월지국의 흠차대신 집으로 가서 기거할 예정이었다. 탁 왕자는 경욱이 보내어 늘 그림자처럼 뒤를 밟는 간자를 통해 이미 연통을 해둔 상태였다. 아라방 오누이도 먼저 와 있을 것이었다. 경욱은 대륙 출신인 그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천부인, 삼한과 소도 등 <천경보전>과 관련있는 여러 얘기들을 충분히 얘기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그 고귀한 동참이 가지는 목숨 이상의 가치에 대해 진심 어린 동의를 받아놓을 것이다.


그 사이 갈구하던 고수들의 동참이 차곡차곡 진행된 탁 왕자 일행은 조선은 물론 대륙의 강호에서 살수들의 전설로 불리는 살수왕 조도일을 만나기 위해 우유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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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살수왕 조도일 24.05.13 1 0 21쪽
21 소문을 타고 날아온 엽기 사건 24.04.24 5 0 15쪽
»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24.03.04 19 0 21쪽
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2 0 16쪽
18 드러나는 적들 24.02.01 41 0 25쪽
17 맹인 검객 선우이치 24.01.21 44 0 50쪽
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1 0 45쪽
15 또 다시, 고수를 찾아서 23.12.22 50 0 15쪽
14 소도의 태동 23.12.14 53 0 12쪽
13 운명을 함께할 첫 궤를 걸다. 23.12.11 54 0 14쪽
12 인연을 엮는 여정의 시작 23.12.07 56 0 11쪽
11 고수 탐문 23.12.05 61 0 14쪽
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67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66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6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70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4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77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78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78 0 10쪽
2 회상 23.11.02 110 0 33쪽
1 악몽 +1 23.10.13 268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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