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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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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작품등록일 :
2023.10.1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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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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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0쪽

맹인 검객 선우이치

.




DUMMY

“하아! 오늘도 한발 늦었구료, 마음은 급한데 왜 이리 계속 뒷북만 치는지 ...”

탁 왕자가 한숨을 쉬며 진혁을 바라보자 진혁도 난처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떨구며 희미하게 탄식했다. 길태곤과 함께 선우이치를 찾아다닌 지가 벌써 닷새가 된 때였다. 선우이치가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은 까닭이었다. 의지할 것은 수시로 흠차대신의 간자들이 보내는 전통문이었기에 늘 한발씩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도 타인을 의식해야 했기에 수소문은 더욱 늦어졌고 그 연유로 인해 선우이치를 제때 마주치지 못해 애를 먹는 것이었다.


선우이치는 변한에 속한 독로국 출신이었는데 어머니는 왜국 출신이었던 혼혈이었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힘이 장사인데다 다혈질이었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질이었다. 다만, 그 성격 때문에 수시로 손해를 많이 본 경험이 어릴 때부터 쌓이고 인이 배기다 보니 나이를 먹으며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는 법을 익힌 터였다. 그 덕에 어린 시절의 선우이치는 먹고 사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클 수 있었다.


“부조리 많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만한 의미는 있으니 재미있게 살 가치를 찾아라.그 이치를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깨치기 위해서는 공부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선우이치가 평탄하게 자라서 평범하게 살길 원했던 아버지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혐오는 하되,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니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는 교훈을 일찍부터 던지던 아버지였다.


“그 말씀은 부조리가 많은 세상에서 살아 갈 가치를 찾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나, 제가 지금껏 살면서 받은 혼혈인에 대한 차별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른 불평등의 문제는 어찌 보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타고난 신분이 있으니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까지만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니 제가 공부에 매진한다고 해도 좋은 세상은 결코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따라서, 그저 안타깝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저는 저 나름의 세상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선우이치는 스스로 배움을 중단했다. 짧게 배웠지만 선천적으로 명석했고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눈도 날카로웠기에 동네에서는 현명한 아이로 회자되곤 했다. 그러나 갈수록 타인과의 처신에 문제가 생겼는데 토착민들과 중국 대륙의 유민들이 대부분인 지역이었기에 왜국 혼혈인 선우이치는 이방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주변의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혼자서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때부터 스스로 강해질 방법을 고민했던 선우이치였다.


그즈음, 평범한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투전판에서 벌어진 싸움에 휘말려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투전판을 운영하던 조직이 덮어씌운 함정에 걸린 약자의 비애였다. 누구도 그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도록 촘촘하게 파놓은 덫이었기에 어렸던 선우이치에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거부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친 사건이었다. 가장의 부재는 금새 드러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설상가상 이방의 땅에서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그의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으며 병이 깊어갔다. 어린 선우이치는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힘이 동반되지 못한 현실은 그저 허공에 주먹 휘두르듯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저 주저앉아 펑펑 우는 것만이 힘없는 약자가 가슴속 응어리를 푸는 유일한 방법임을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두번 다시는 힘이 없어 울지 않겠다며 주멱을 꼭 쥐며 다짐한 어린 선우이치였다.


복수를 할 수 없다는 절망에 지친 후부터 선우이치는 보기 싫은 세상을 외면하려 억지로 부조리에 눈을 감는 습관을 키웠다. 눈을 뜨면 자신이 힐난했던 온갖 부조리들이 사방에서 그를 괴롭혔기에 그는 차라리 눈을 감고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살고 있는 집을 중심으로 활동 반경을 점점 좁혀 생활하면서 온종일 맹인처럼 눈을 감은 채 생활한 것이다.


그나마 생존을 위해 집 근처의 텃밭을 오가며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동내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외부활동이었다. 처음엔 눈을 감고 생활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으나 차츰 적응을 하니 점점 익숙해지게 되었다. 더불어,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과정에 온 정신을 집중하니 세상의 일들에 대해 점차 무심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 세월이 점점 더 쌓이자 평정심이 찾아왔다. 마음의 안정을 이룬 선우이치는 그제서야 세상에 나아가 현실과 마주해도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세월이 제법 흘렀는데도 세상은 여전하군. 변한 것도 별로 없고, 휴! 하아! ...`

선우이치가 자조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나온 세상은 여전히 힘세고 가진 것 많은 자들 중심으로 냉정하게 돌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원리대로 돌아가는 현실은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겨우 세상에 대한 편견을 털어내었건만 여전히 힘의 원리가 무시무시하게 작동하는 한 편히 살기란 아직도 힘들어 보였다.


`결국 바람이 세차게 불게 되면,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나 혼자만 산다고 강변해도 힘을 가진 놈들의 입맛에 따라 내 신세가 바람 앞의 낙엽처럼 통째로 흔들리고 휘둘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어이하여 세상은 이렇듯 불공평하게 만 돌아가는 것인지, 하아! ... `

세상사에 관심 끊고 인내하며 살겠다 결심하고 오랜 기간 은둔 생활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왔던 선우이치로서는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당한 비애를 내가 똑같이 느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 그 상황도 어렸던 시절 그때처럼 무기력하게 참아야만 하는 걸까? ... 아! 그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휴! ... 그 암울했던 상황을 다시 겪는다면, 만약 그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것은 ... 너무나도 분할 것 같다. 하아!`

두 번 다시는 험한 세상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선우이치는 눈을 감은 이후론 중단했던 검술을 다시금 연마하기 시작했다.


마른 체형에 키만 멀끔하게 커서 약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선우이치는 힘이 세었고 무공에도 소질이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 잠시 스쳤던 외갓집의 사촌형으로 부터 전수받은 호신술을 익히 전수받은 선우이치였다. 왜국의 정통 검법을 가르쳐준 사촌형은 잠시 머물다 왜국으로 떠났는데, 떠나면서 지팡이검 하나를 주었었다. 검은 삼한에선 본 적 없는 특이한 형태를 지녔는데 평소에는 지팡이로 사용하다가 필요할 때 무기로 사용하는 검이었다. 날은 일직선으로 선 데다 여렸지만 튼튼하면서 예리했다. 선우이치가 추후 어머니에게 물으니 사촌 형은 왜국에서 닌자로 활동한다고 했다. 그제서야 그가 배운 기술들이 닌자들의 호신술과 검술이었음을 알게 된 선우이치였다.


다시 검을 잡은 선우이치의 연마과정은 힘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 수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는 선우이치였기에 금세 두드러진 실력을 가질 수 있었다. 더불어 세상의 부조리와 부도덕한 인간들을 향해 휘두르는 검의 기류에 그를 괴롭히던 온갖 망상들이 휩쓸려 내려가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어느 날, 억겁의 세월이 흘렀다고 느껴질 만큼 수없이 휘두른 검을 잡은 그의 뇌리에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환한 대낮같은 풍경들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극히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엄청난 수련이 그의 감각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약관을 갓 지난 그가 부단하게 단련한 시간과 비례하여 일취월장한 무공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 그는 다시 한번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볼 자신이 생겼다.


다시 세상에 나아간 그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로 했다. 힘을 두려워했던 과거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자신이 혐오하는 불의를 피할 생각이 없었기에 불의를 느낄 때면 먼저 힘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쉽게 검을 뽑지 않았지만 한번 뽑으면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응징했다. 그 사이 그의 활약이 입소문을 통해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눈을 감은 채 싸우는 그의 능력은 어두운 시야의 야간 결투에서는 가히 무적의 경지였다. 다른 무사들은 오로지 소리와 육감에 의해 싸우는 선우이치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판단하며 얕봤지만 그것은 명확한 오판이었다. 오히려 시각외의 감각들이 포유동물로써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발달했기에 싸움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했고 빨랐다. 눈보다 세 배 이상 빨리 전달된 소리의 자극으로 인해 가공할 정도로 빨라진 반응속도는 상대가 인식할 틈도 없이 숨통을 베었던 것이다.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먼 곳의 친척을 찾았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선우이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간단한 요기를 위해 찾은 주루에서 대낮부터 젊은 주모를 희롱하던 부잣집 자제들과 맞닥뜨린 후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의 악행을 말리던 다른 손님들도 폭행을 당해 다들 벌벌 떠는 공포 분위기가 되다 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오죽하면 극한의 인내심을 가진 선우이치 조차 그만두라고 소리 지를 정도였다.


“아니? 그대는 맹인이 아니신가? ... 눈도 보이지도 않는 놈이 어른들 일에 간섭질을 하다니 ... 네놈은 그냥 저쪽 구석에서 쭈그리고 피해 있다가 어른들 볼 일이 끝나면 그때 쯤 얌전히 돌아가는게 신상에 이로울 게야, 알겠느냐!”

말썽을 피우던 망나니들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대머리가 안하무인격으로 화를 내며 발길질을 했다. 재빨리 피한 선우이치에게는 인내력이 한계에 달하는 결정적 상황이었다.


“칼을 뽑아라! 버러지같은 것들!”

선우이치가 지팡이검을 발검했다. 극도로 억제했던 살기가 동반된 거친 외침이었다.

“그래? 꼴에 ...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검은 휘둘러 보기는 한 게야? 나, 참! ...”

다섯 망나니중 삐쩍 마른 녀석이 선우이치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름 칼질에는 자신이 있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비웃음을 던진 그가 곧장 칼을 뽑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었다.


“오늘이 네 놈 제삿날인줄 알아라! ... 타앗!”

옆에서 말리던 손님이 겁이 나서 피하지도 보고만 있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저런, 저런 ... 큰일났네, 저 왈패들이 오늘도 사람 하나 잡는구나, 아앗! ...”

그들의 악행에 이골이 난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풍전등화같은 신세가 된 맹인검객을 걱정하며 가슴을 움츠렸다.


“챙! 챙! 챙! ... 파바박!”

나쁜 짓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많은 주민들을 괴롭히던 파락호들답게 그들은 비겁하게 순차적으로 선우이치를 공격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 그들이었기에 협공하면 손쉽게 제압되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우이치가 휘두른 단 한번의 날카로운 지팡이 검날 앞에 늦가을 휘날리는 앙상한 낙엽처럼 단 한맥없이 쓰러졌다. 힘없는 아녀자들이나 농락하던 악동들이 수년간 심신을 극단으로 내몰며 수련한 선우이치를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않은 대결을 자초한 그들로선단 한 명에게, 그것도 맹인을 상대로 그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처단당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인과응보야! 암, 하늘이 네놈들의 악행에 천벌을 내린 것이야, 그렇지 낳은가?”

숨죽이며 대결 결과를 바라보던 손님들이 하나둘 엎드렸던 곳에서 일어서며 속 시원하다는 듯 울분을 터뜨렸다. 힘으로 주민들을 제압하던 그들이 또 다른 강자에 의해 처단받은 건 여전히 세상은 힘에 의해 돌아간다는 순리를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삼한 전역에는 단칼에 악한들을 처단한 맹인검객의 화려한 활약담이 저잣거리에 약방의 감초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선우이치의 신상에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때부터였다. 처단된 파락호중에 그 지역 최고 명문가 집안의 외동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집안의 위세가 원체 대단하다보니 그 아들의 망둥이 짓을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 모른체하던 마을주민들과 달리 외지인인 선우이치는 악인은 처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들을 상대했던 것이다. 앓던 이 같던 파락호들이 처단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시원해하며 기뻐했으나 오직 한 집, 명문가 집안만이 선우이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우이치를 응징하겠다며 백방으로 움직였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 범인을 처단해 달라는 소를 올리는가 하면 살수를 수소문해 사적 보복을 기도하는 한편, 집안 차원에서 여러 고관에게 호소문을 써대어 해당 사건을 청부 살수인 맹인 검객에 의한 무차별 도륙 사건으로 비화시켰다. 삼한 전역에서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라면 현상금과 함께 내건 수배 방문과 용모파기가 첩부되어 선우이치가 한 장소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리대로 돌아가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행했던 선의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악인으로 둔갑한 선우이치는 결국 행선지를 정함이 없이 그저 발길 닳는 대로 살아가는 오리무중의 여행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공이라면 어디든 정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혹여나 주변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 심히 우려하여 결정한 결단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정처 없는 여행길이었기에 그와 맞닿는 세상의 추하고 악한 것들에 대한 응징은 가차 없었다. 싸움의 경험이 쌓일수록 노련해졌고 세상을 향한 날 선 비판은 날카로워져 갔다. 낡고 허름한 행색으로 능청스러운 농담을 하는 그에게는 경계심을 해제시키는 편안함이 숨어 있었다. 아주 가끔씩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무시한 악인들과의 싸움은 마지막까지 인내를 숨긴 선우이치의 야수같은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설적인 싸움을 벌인 이후에는 자신의 종적을 지우듯 홀연히 사라졌기에 그의 행적을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탁왕자 일행이 미오야마국으로 가는 이유가 가장 최근의 연통에 그의 행적이 묻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안마를 해주며 봉사료로 살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미오야마국은 사방이 넓은 평지로 형성된 나라였다. 한참이나 말을 달려도 조금 전에 본 그 산과 그 평야를 다시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광활한 평야에는 벼를 수확하고 남은 볏짚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큰 저수지도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농업에 특화된 나라임을 알 수 있었다. 띄엄띄엄 보이는 인가들에서는 수확한 벼 가마니를 쌓아놓은 큰 창고들이 보였다. 풍족한 지역이었고 즐겁게 일하고 있는 백성들을 탁 왕자는 절로 힘이 나서 웃음이 피워 올렸다. 뿌듯했던 것이다.


탁 왕자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제법 번화한 마을이었다. 큰 규모의 저잣거리에는 물품들이 가득 전시된 점포들이 형형색색의 장식을 한 채 손님들을 유혹했다. 사람이나 물품의 유통이 활성화된 곳임을 웅변해주는 풍경이었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진혁이 탁 왕자를 바라보며 물었고 누구랄 것 없이 함께 주루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에 주루가 보이는군요.”

길태곤이 멀리 보이는 주루를 가리켰다. 근처에서 규모가 가장 커 보이는 빨간색의 깃발이 보이는 건물이었다. 입구에 걸린 깃발의 중앙에는 당시 유행하던 서체인 전세체로 “여락루”라고 씌어 있었고 그 가장자리는 황금색으로 채색되어 고급스러웠다.


“나그네들이 즐겁게 쉬었다 가라... 그런 뜻 같습니다만, 다른 객잔들에 비해 크기도 크지만 그것보단 외관이 무척 깨끗한 게 마음에 드는군요.”

진혁이 앞쪽으로 나가며 그곳에 머물 것을 권했고, 잠시 후 그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풍요로운 느낌이오. 여유를 느끼며 사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맘이 편안하오.”

탁 왕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고수들을 탐문하며 바삐 지나온 여행길에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이곳은 주루만 있는 게 아닌듯합니다. 들어올 때 보니 별채도 있더군요. 외지인들을 위한 유흥시설이 있는듯합니다. ... 언 듯 보니 온천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탁 왕자를 밀착 경호하는 진혁은 항상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날리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 주루도 예외없이 분석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 그러하오? 그럼, 저녁 먹은 후 피로도 풀 겸 온천에 한번 가보도록 합시다.”

각자의 객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그들은 저녁이 마련된 별실에서 기름진 식사와 향긋한 술을 음미하며 격의없는 대화로 피로를 풀었다.

“자, 그럼 온천욕장으로 가서 하던 얘기를 계속 합시다.”

탁 왕자가 피곤한지 별채로 가자고 하면서 먼저 일어나자 두 사람도 따라 일어섰다.


“두 마리의 용이 새겨진 황금색 검집을 가진 남자 일행이 나타나면 반드시 주인님께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던데, 얘기 들었어요?”

별채 이 층에서 온천욕장이 있는 일 층으로 내려와 목적지를 향하던 탁 왕자 일행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종업원 둘이 하는 얘기가 언 듯 들려왔다.

“도대체 ... 누구길래 그 난리래요?”

“모르겠어요. 주인님이 무슨 말을 하면서 그렇게 지시했다고 하던데, 하여튼 우리같은 종업원 나부랭이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않겠어요, 또... ”

말을 하던 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감시하는 눈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탁 왕자 일행은 그저 손님일 뿐이었으므로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잠시 후 말을 했던 여자가 대화를 이었다.

“자기네들끼리 얽히고 설킨 것 사연을 우리가 알아서 또 뭘 하겠어요. 호호호”


여종업원들이 지나쳐 가자 진혁이 주위를 살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데, 좀 전에 지나친 여종업원들이 말한 검은 왕자님의 쌍용검인 것 같습니다만 ... 지금이야 금빛 보자기로 싸매져 있지만 분명 그들이 지목한 건 것 왕자님의 검인 것 같습니다. ... 흠,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듭니다. 일단, 객실로 되돌아갔으면 합니다.”

신경을 곤두세운 진혁이 급히 걸음을 늦추며 탁 왕자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 주루에서 뭔가 음모가 진행되는 느낌이군요. 왕자님의 이번 암행 여정은 극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동태를 주시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다니 ... 뭔가, 문제가 있어도 크게 있는 것 같습니다.”

길태곤이 말을 거들자 일행들 사이에서 신경이 곤두섰고 긴장이 확 떠밀려 왔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본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뒤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곳 온천욕장 영업이 끝났습니다. 모두들 객실로 되돌아가십시오. 이곳 급수시설의 고장으로 물 공급이 중단되어 온천욕을 할 수 없으니 어서 속히들 돌아가시오.”

온천욕장 쪽에서 맞은편 쪽으로 험상궂은 사내 하나가 건들 건들 다가오며 말했다.

말은 경어를 사용했지만 사내의 표정은 안하무인이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거칠고 투박한 말로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진혁이 뒤를 돌아보니 탁 왕자 일행을 따라오던 다른 몇 명의 손님들이 그 기세에 눌려 급하게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때마침 잘 된 듯하오. 우리도 서둘러 돌아갑시다.”

객실로 돌아서는 길태곤의 눈가에 사내의 칼집이 보였다. 급수시설이 고장나 고치러 왔다는 사내가 칼을 차고 있다니... 게다가 직업적인 무사로 보일 뿐 허드렛일을 하는 인부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웠으니 전후 과정을 복기해 보아도 그들의 행동이 탁 왕자 일행과는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우리를 제지했던 무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긴 합니다. 우리가 목표였다면 행동거지가 노출된 우리를 향해 야습을 했을테니 말입니다. 결국은 이곳 여락루의 내부 문제인 것 같습니다. ... 일단, 어서 가서 우리 문제나 고민하시지요.”

결론을 내린 길태곤이 더 이상 고민거리를 만들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한 건 이곳 여락루의 주인이 왕자님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고 비밀스럽게 수소문하는지를 신중하게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혁이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 점은, 나도 참으로 궁금한 것이오. 지금껏 나의 암행 활동은 마한, 그것도 월지국 내의 극소수 고위 관료들만 아는 비밀이었는데도 이곳 변한의 시골 마을 일개 주루에서 나를 탐색한다는 것에서 참으로 놀라고 있소이다. ... 하! 어찌 이런 일이...어쨌거나 이곳 여락루가 요지경 속 세상 같다는 생각이 드오.”

신경을 곤두세운 탁 왕자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했다.


“오늘 피곤하실 테니 먼저들 쉬시지요. 저는 밖에 나가서 좀 더 알아볼까 합니다.”

머리를 숙이며 탁 왕자의 객실에서 나가던 진혁이 탁 왕자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조심하시오. 뭔가 움직이는 것 같기는 하오,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는 않으니...”

탁왕자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이 썩 편치 않은 터였다.


생각해보면 오늘 저녁 일어난 사건들은 왠지 을씨년스러운 것들이었다. 닥쳐올 위기들이 스산하게 스며드는 신호 같은 모습이었다. 탁 왕자의 여정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던 길태곤은 대강은 알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의견을 내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조용히 관망할 따름이었다. 현재로선 그저 묵묵히 탁 왕자를 경호하는 역할이 최선의 책무라 판단했던 것이다.


잠시 후, 진혁은 주루 입구 계산대를 스치듯 지나 바깥쪽으로 걸어 나왔다. 계산대 쪽엔 주인장으로 보이는 대머리의 거구가 울룩불룩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런 복장을 입고 오가는 손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대머리는 중앙에 한 땀 한 땀 땋은 몇 가닥의 굵은 머리카락이 소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눈빛이 매서워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했다. 탁 왕자 일행이 스치듯 주루에 들어올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사나운 눈길이었다.


어쩌면 장사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진혁의 뇌리를 언 듯 스쳤다. 강호의 고수가 어떤 이유가 있어 정체를 숨기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아까 들었던 여 종업원들의 대화가 이해될수 있는 상황이었다. 진혁은 재빨리 주루에서 사라졌다.


여락루에서 점점 멀어진 그는 가끔 뒤돌아서서 여락루를 살폈다. 처음엔 허기로 지쳐 보이지 않던 건물의 모습이 밝은 달빛 아래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락루는 다른 주루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지은 데다 지나치게 큰 규모였다. 얼핏 보기에도 이곳을 지나치는 돈 많은 나그네들의 발길을 잡기에 매우 적합한 모양새였다. 이상한 것은 주루의 입구가 저잣거리와는 반대편에 위치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고, 주루의 담을 높게 쌓아 올려 맞은 편에 있는 혼잡한 저잣거리와는 등을 진 형국이어서 주루 안의 일을 바깥에서 볼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었다.


“하아!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수가 없으니, 하!”

진혁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한기를 느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깊어가는 저녁의 저잣거리에는 썰물 빠지듯 인파들이 줄고 있었다. 하루의 영업을 마감하는 점포들의 파장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남은 몇 군데 점포에서만 등잔불이 켜져 있어 주변이 희미했다. 곧 점포의 불빛이 사라지면 은은한 초승달의 가늘고 앙상한 달빛만이 멀리서부터 흘러내려 온 저녁을 밝히게 될 터였다.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진혁이 급히 발길을 돌렸다. 어느 틈엔가 저잣거리에서는 멀어져 버린 상태였다. 여락루와도 제법 멀어진 상태였다. 지극히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행인들의 그림자조차 없는 야심한 밤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밤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니라면 나다닐 사람은 없는 상황이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주변의 기류는 처연했다. 문득 낯선 곳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생각이 든 진혁이 발길을 돌렸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검은 복면을 한 괴한들이 갑자기 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이런! ... 뜬금없는... 갑자기 복면 괴한 이라니...’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는 와중에도 진혁은 이들이 자신들을 쫓아 움직이는 세력임을 직감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퍼졌다.

“... 미치겠군, 하아!”


“아휴, 놀래라! 갑자기 나타나 놀래킨 너희들이야말로 누구냐! ... 흠, 이 야심한 밤에도 복면을 쓴 걸 보면 필경 떳떳하지는 못한 작자들로 보이긴 하다만,”

순간적으로 나타난 적에 겉으로는 강인한 척 말했으나 내심은 모골이 송연해진 진혁이었다.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걸로 보아 그들은 고수였다.

‘아니다, 아니다 ... 내가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리라.’

복면인의 출현과 그 정체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해 대처방안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생각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진혁이었다.


`고수라면 ...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할 게고, 문제는 눈앞의 이놈들 외에도 저 보이지 않는 암흑 뒤편에 일당이 없다는 보장도 힘든 상황이라 ... 휴! 절대절명의 상황이군`식은땀을 흘리는 진혁의 등골 뒤로 위기일발의 섬전이 날카롭게 스쳤다.


“휴! 흐음! 이제 말씀드리리다. 나는 그저 이 지역을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오,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고자미동국으로 넘어가기로 했던 동행 친구가 저녁을 먹은 후 갑자기 없어져서 사방으로 찾아 다니다 이곳에 이른 것일 뿐이오.”

“그래? ... 어디서 왔느냐?”

“마한에서 왔소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진혁은 그들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을 느꼈다.


`아차!`

말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 진혁은 급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진한의 우유국 사람인데 이곳 변한 지역의 고자미동국에서 많은 보수를 주는 조개류 수거업무를 위한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한에 있는 친한 친구와 함께 이곳까지 온 것이오. 그곳까진 부지런히 걸으면 모레쯤 도달할 것이라고 합디다. 일이 힘들어 몸 좋은 사내만 구한다기에 급히 가는 길이외다.”


순간의 말 실수를 어쨌던 무마하기 위한 임기웅변의 거짓말이었다. 혹시나 한탁 왕자란 말이 나올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얘기로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바닷가마을 출신의 길태곤으로부터 패류를 수거하는 업무에 대해 익히 들었던 터라 어패류와 관련한 업무가 발달한 고자미동국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래, 네 이름과 친구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들도 진혁처럼 상대를 세심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진혁에 대한 의심이 커진 것이다.

“내 이름은 준학이고 친구의 이름은 선우택이외다.”

“그럼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여락루라는 주루에 머물고 있소이다.”

“그럼 일행은 두 명인 것이냐?”

“아니오! 세 명이외다.”

두 명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이 들었기에 편하게 대답했다. 아까 여락루의 여종업원들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그들은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진혁과 복면인들은 긴장을 유지한 체 무심히 시간을 흘렸다. 긴장한 채 웅크린 진혁과 달리 그들은 공격할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진혁에겐 일각이 여삼추같은 시간이었다. 괴로웠다.


“지금부터 내 말에 거짓을 고하면 그에 상응한 벌을 내릴 것이다.”

짙은 어둠에서도 반 백발의 중년 사내가 암흑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싸늘한 표정을 지은 그가 한 손을 젖자 복면인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깊은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던 그가 퀴퀴한 음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첫째, 네 놈의 복장이나 행색을 보면 단지 일감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까지 돌아다닐 정도로 구차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네가 찬 칼로 볼 때 너는 막일을 할 놈은 더더욱 아니다... 자! 무슨 용무로 이곳으로 왔는지 사실대로 소상하게 말해라.”

진혁에 대한 자세한 관찰 결과를 통보한 사내는 확신에 차서 다그쳤다.


“둘째, 우리가 이곳을 지킨 지 족히 세 시진은 되었다. 그 사이 개미 새끼 한 마리 오간 적 없다. 그러니 네가 일행을 찾는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지어낸 얘기다. ... 왜 거짓말을 하느냐? 거짓이 아니라면 이 궁금증들을 해명해보도록 해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진혁의 양쪽 주변에 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어 진혁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떼거지로 달려들 태세였다.


“이런, 이런! 내가 당신들의 질문에 왜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또,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무슨 큰 죄를 지은 놈 마냥 이렇게 추궁을 당해야 하는 것도 이해할수 없어. 해서, ... 왠지 당신들과 엮기면 어떤 결론이 나던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아 ... 기분이 나쁘다, 그말이지!”

단호하게 말을 한 진혁은 결심한 듯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뭐라고 하든 너희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멋대로 판단할 것이 뻔하니 이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어차피 죽든 살든 결딴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 진혁이기에 이쯤 해서 결판을 보기로 마음 먹은 진혁이었다. 이기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지만 최소한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도망갈 기회를 얻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 될 것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상황을 왕자에게 알리고 죽을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결과일 터였다.

도처에 깔린 적들의 동향을 알려야 한다는 긴박함과 그것을 위해 살기 위한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간절함으로 공격의 기회를 엿보는 진혁의 어깨 위로 싸한 밤 기운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이 일거에 달려들기 전에 어느 방향이던 약한 쪽을 선제 공략하여 도망가야 하는데 어느 쪽이 약한지는 알 수 없는 노력이었다. 그래도 어느 쪽으로든 한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결과는 오로지 하늘만이 아는 상황이었다. 마음의 각오를 한 진혁이 출수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막 공격을 개시할 그때였다.


“지금 내 친구 하나를 앞에 두고 도대체 몇 놈이나 붙어서 뭐 하는 짓거리들이냐!”

벼락같은 고함 속 분노가 가득 섞인 그렁그렁한 음성이 복면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길태곤이었다. 진혁의 귀루가 늦어지자 혹시나 하여 찾아 나섰던 길이었다. 길태곤은 주루 주변을 샅샅이 찾아 헤매다 가까스로 먼 곳에 있던 진혁을 찾았던 것이다. 그때 막 싸움이 시작되려 했기에 자칫 늦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길태곤은 내공의 힘으로 음파공을 쏘아 싸움에 끼어들며 우선 쌍방의 공격을 중단시킨 응급책을 쓴 것이었다. 이후 출상술로 황급하게 날아든 그가 등장하자 안도의 한숨을 쉰 진혁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것 보아라! 내 친구가 여기 보이지 않느냐, 더 이상 신경쓰기 싫으니 길을 물려라.아무런 이유 없이 너희들에게 헛된 개죽음을 선물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이 적당히 꾸며낸 얘기를 사실로 만드는 증인이 된 길태곤의 등장으로 기가 살아난 진혁을 바라보던 반백의 중년인 얼굴에 당황한 모습이 뒤엉키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본 사내의 말은 거짓임을 확신했는데 그의 말대로 친구인 건장한 무사가 등장했으니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나타난 사내는 한눈에 봐도 절정의 강호인이 분명했다. 음파공에 출상술, 거기다 그의 웅장한 칼집과 강인한 첫인상으로 보아 어쩌면 자신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절정 고수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쳤기 때문이다.


“오호, 네 친구를 보니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들은 일꾼이 아니고 패류 작업장의 호위무사로 가는 것이었어. 그래 그 자리라면 많은 임금을 받을수 있다고 들었어 ... 그렇다면 자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더구나 자네 친구도 왔으니 그 얘길 인정하마.”

반백발인이 천천히 말을하며 상황을 정리할 태세였다.

“여봐라, 칼을 거두어라. 자네들도 그만 화를 풀게나.”

상황이 역전되어 순간적으로 많은 상황을 고민했던 반백발인이 수하들에게 지시하며 무장을 해제했고, 한쪽에 선 진혁을 달래며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흠, 그럼 인연이 있으면 또 보세.”

칼을 거둔 복면인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반백발인도 어둠속에 몸을 던질 때였다.

“잠깐! 이곳에서 계속 누군가를 지켰다고 했는데 도대체 누구를 지켰다는 게요?”

허공을 향하는 반백발인을 향해 진혁이 급하게 물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다. 너희들은 상관 말고 너희들의 길이나 지체없이 가거라.”

귀찮다는 듯 훈계조의 대답을 한 반백발인이 다시금 암흑 속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길태곤이 도발적으로 강한 어조로 소리쳤다.

“어이! 거기 반쯤 백발 머리, 네 맘대로 가면 안돼! 빨리 와서 내 친구 말에 대답하고 가도록 해, 알겠어! 올 땐 맘대로 왔지만 갈 땐 너희들 맘대로 못가, 알겠어! 어서 속히 말하지 않으면 정말 혼나게 될거야, 나는 순한 이 친구와는 많이 다르거든!”

무심히 떠나려던 반백의 중년인은 길태곤의 갑작스런 반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잠시 멈춰선 다음 길태곤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의 안광이 날카롭게 솟아지며 길태곤을 향했으나 길태곤은 정작 태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찬찬히 길태곤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가슴에 새겨진 문신몇 조각이 보였다. 큰 체구에 어울리는 문신으로 인해 길태곤이 더욱 강인해 보였다.강한 외기를 뿜어내는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니 역시나 그의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빨리 피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자존심 때문에 응대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도 자칫 큰 싸움의 빌미를 줄 수도 있었기에 어쨌든 빨리 피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린놈이 무례하구나! 한참 어른에게 막말을 하다니 ... 내 시간만 많다면 오늘 네놈의 버릇을 고쳐주고 싶다만 급한 일이 있어 그냥 가니 고마운 줄 알아라.”

입으로 그렇게 얘기는 했지만 눈으론 길태곤의 눈치를 보는 반백발인이었다. 여전히 길태곤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반백발인의 정면을 응시하며 진지하게 진혁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하라며 다그치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여차하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반백발인은 즉각 짧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한 탁왕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되었느냐! 대답이 되었으면 그만 가겠다. 너희들도 어서 돌아 가도록 해라.”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날린 그의 신영은 금세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반백발인이 진혁의 물음에 짧게나마 답을 했기에 진지하게 일전을 준비중이던 길태곤으로서도 더 이상 그를 추궁하거나 쫓을 명분이 사라졌다. 애초부터 싸울 의향은 없었던 것이다. 진혁은 의심하던 바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자 더욱 정신을 가다듬었다.

‘왕자를 기다린다... 흠.’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확인되자 둘은 서둘러 주루로 향했다. 마음이 바쁜 만큼발걸음도 빨라져 어둠 속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탁 왕자의 객실을 찾은 그들은 별일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원된 인원도 엄청난 듯 하고요. 어쩌면, 이곳 주루가 그들의 본거지중 한 곳일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진혁은 자신이 나가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얘기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흠, 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군요. 그래, 지금부터 어찌하면 좋겠소?”

탁 왕자가 진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길태곤은 두 사람의 대화를 신중하게 들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떤 결론이 나던 함께 동행할 자신이 챙겨야 할 것이 있는지를 제대로 챙기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별채의 객실 아래쪽에서 갑자기 격렬한 싸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시작된 싸움은 즉시 격화되어 사방에서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물이 부서지는 소리, 문짝을 심하게 여닫는 소리, 칼에 맞아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 등이 연이어졌다. 사방엔 적막만 흐르던 심야였기에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격렬한 소리들이 강한 파공음을 타고 급속히 퍼지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을 대비해 대책을 강구하던 탁 왕자 일행은 급히 몸을 숙여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잠시 후, 길태곤이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히고 고개를 반쯤 내민 다음 주변을 살폈는데 그들이 머무는 이층 객실 쪽은 아무런 사태도 일어나지 않은 게 확실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길태곤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말하자 탁 왕자가 그만 문을 닫으라고 손짓했다.

“소리가 잦아드는 것으로 보아 끝이 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싸우는 것 같소이다... 일단 여기는 위험해 보이니 우리도 준비하여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합시다.”

주루에 더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한 일행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왕자와 진혁은 객실에서 짐들을 챙겨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로 햇다. 그사이 길태곤은 일층으로 내려가서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진혁의 예감처럼 주루에 왕자 일행을 노리는 세력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태곤이 고양이 걸음으로 조심스레 밖으로 나섰을 때, 모든 객실의 등잔불마저 꺼져버린 이층 객실의 어두운 문 앞으로 급하게 밀려 들어온 엷은 달빛만이 엷게 비치고 있었다.


길태곤이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객실의 끝 쪽 편에 도착했을 때 나무계단의 일부분이 베어져 그 잔재물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고 멀리 날아간 토막들은 일 층을 오가는 진출입로의 좌우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정원 쪽에는 흉기에 베인 무사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일 층 객실 쪽에서 시작된 싸움이 여러 곳을 오가며 격렬하고 빠르게 진행된 흔적이었다. 망설임없이 치고받은 형국으로 보아 고수들이 제법 많이 참전한 싸움으로 판단되었다.


조심스레 일 층으로 뛰어내린 길태곤에게 더 이상의 싸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곳에서 유독 무거운 공기 흐름이 포착되었다. 극도의 긴장과 살기가 방출되는 곳이었다. 그곳은 온천욕장에 딸린 안마실이었다. 숨을 죽인 채 다가간 길태곤의 시야에 지팡이 형태의 직도를 세워 쥐고 있는 무사 한 명과 그를 둘러싼 십여 명이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직도에 의지해 상대와 맞서고 있는 무사는 키가 크고 야위었는데 특이하게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격하게 칼날을 부딫혀 일전을 치른후 다시 대치하는 중이었다. 휴식을 취하는 듯 침묵이 흘렀지만 상대의 헛점을 찾기 위해 긴장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있었다. 길태곤은 그가 탁왕자에게 전해 들은 맹인검객 선우이치임을 직감했다.


탁 왕자에게 맹인검객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길태곤은 막연히 무공이 뛰어나더라도 맹인의 한계가 있어 절정의 고수는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결과를 놓고 보면 경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선우이치 혼자서 많은 적들과 대적하여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절반 가까운 적을 벤 것이다. 절정 고수임이 분명했다. 예측하지 못한 희대의 고수를 본 길태곤은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위기에 빠진 탁 왕자에게 자신 외에도 또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생긴 것을 확인한 데 따른 협객의 기쁨이 담긴 의로운 반응이었다.


“또 그놈이 보낸 자들이냐?”

“그놈이라니, 그 놈이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우리는 단지 네 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보고 온 것일 뿐이니 죽더라도 우리를 원망하지는 말아라!”

선우이치를 겁박하는 무사를 언 듯 보니 왕자 일행의 온천욕을 막은 자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포위망을 치고 일시에 공격한 것 같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희생자만 발생한 모양새였다.


그때 맞은편 정원 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대머리와 반백발인이 무언가 대화를 한 후 빠르게 대치중인 곳으로 진입했다. 대머리는 왼쪽 옆구리에 찬 도갑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언월도였는데 이례적으로 커서 무게도 상당할 것 같았다. 대머리의 큰 덩치에 걸맞게 특별제작한 것으로 보였다.

“멈춰라, 야심한 밤에 이 무슨 무례한 짓거리들이냐!”

대치중인 두 편의 중간에 선 대머리가 소리쳤다. 그의 고함이 얼마나 컸던지 선우이치의 맞은 편에 있던 무사중 하나가 귀를 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음파병기인 사자후였다. 음공인 사자후로 인해 동료가 넘어지자 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머리를 향하는 형상이 되었다.


“너희들의 공격으로 이곳 여락루가 쑥대밭이 되었다. 공사비가 많이 들어간 건물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주인인 내 허락도 없이 싸우는 바람에 피해가 막중하다. 하여, 내 너희들에게 피해 보상을 받고자 한다. 피해 금액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원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그게 안되면 너희들 모두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이다.”

“당신은 누구시오? 누군데 이놈을 도와주는 것이오.”

대머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무사가 당황하며 물었다.

무리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무척 혼란스러운 것이 역력했다.


“나! 나는 이곳 여락루의 주인인 민머린이다. 강호에서 한창 날릴 때는 철귀마장이라 불렸었지, 그 위명은 다들 귀가 있으니 익히 들어서 알 것이다. 또, 너희들이나 맹인 검객 모두 처음 보는 사이니까 너희들끼리 죽이든 살리든, 죽든 살던 하등의 알바가 아니다. 내겐, 너희들이 오늘 밤 내 재산을 축내면서 난동을 부린 가소로운 싸움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말이다. 내 말 잘 알아들었느냐!”

성질이 날대로 난 표정을 지은 민머린이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죄송하지만 ... 철귀마장께서는 잠시 비켜나 계시면 속히 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어차피 피해 보상금은 저희들이 현재 가진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합니다. 해서, 저놈의 현상금을 받아서 보상하고자 하오니 이점 참작해 주십시오.”

탁 왕자 일행의 온천욕을 막았던 자가 최대한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의 언행으로 보아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그는 민머린에 대해 잘 아는 듯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깍듯하고 부드러운 표정과 언사로 민머린을 대하고 있었다.


“현상금을 노리는 너희들의 실력을 보니 제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을 생포하려고 위력을 줄인 채 상대를 급박하다 보니 희생이 컸던 것도 알 것 같다. 그럼에도 협공을 통해 상당한 위력을 보인 것을 보면서 너희들이 오랫동안 공통의 경험과 노력을 해온 현상금 사냥꾼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해서 ......”

뜬금없이 호통을 치던 민머린이 자신들을 격려하는 말을 하자 무리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나 민머린의 말은 복선을 깔고 있었다.


지금 비켜선 채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둔다면 현상금 사냥꾼들은 필시 맹인 검객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보아하니, 강호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것이 확실하고 현상금 사냥을 업으로 할 정도의 무공이라면 이런저런 귀찮은 심부름도 두루 편히 맡길 수 있는 수하로 딱 괜찮아 보이는 놈들이었기에 적당한 시점에 싸움을 중단시키고 그들을 접수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생긴 것 때문이었다. 맹인 검객은 만만찮은 실력을 소유한 데다 내치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인정사정이 없었기에 자칫 중재가 늦다면 좋은 수하들을 거둘 기회를 잃는 것이 될 것이었다.


오랜 강호 생활을 무탈하게 살아내게 하는 힘이었던 빠른 눈치를 기반으로 험한 생존의 세월을 살아온 현상금 사냥꾼들은 민머린이 불쑥 내민 제안에 고민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대치를 푼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려는 듯 조금씩 의사전달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철귀마장이시라면 언월도를 귀신같이 사용하여 한때 강호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라던 실력자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세월이 제법 흘러서 그 명성이 옛날같지 않지만 아직도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고수이신데... 그런데, 그런 분께서 왜 이런 구석진 주루에서 주인장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 위명의 명성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것 이 상황은 어찌된 것입니까?“

현상금으로 보상하겠다고 제안한 무사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는 민머린의 말귀를 제대로 이해한 듯 했다. 자신들에게 새롭고 조정적인 밥벌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건 오랜 명성의 민머린이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고수인 맹인검객 둘 모두와 대결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표나지 않게 지켜보던 길태곤은 이런저런 상황들에 엮여서 길어지는 상황 때문에 돌아가는 사태의 정리에 고민스러웠다.

”누구?“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길태곤이 급히 자세를 낮추며 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추포검쪽으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무섭도록 빠른 동작이었다.

“쉿! 조용히”

진혁이었다.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한 그는 이윽고 수신호를 통해 즉시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도록 했다. 소란이 벌어진 후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기에 떠날 채비를 마무리한 한 탁왕자와 진혁은 급하게 떠날 준비를 한 후였다.


“왕자님께서 빨리 떠나자고 하십니다. 이곳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이제 곧 재미있는 구경하게 생겼는데 마저 보고 가십시다. 하하”

길태곤이 짓궂게 웃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결과는 어쩌면 이미 나와있는 것이었다. 민머린과 선우이치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둘은 감정적으로나, 이해관계에서나 나쁘게 엮인 게 없었다. 악감정이 없는데 싸우기에는 둘 다 자신을 잘 아는 고수들이였다. 선우이치가 현상금 사냥꾼들을 상대하며 신출귀몰한 무공을 공개했으니 오랜된 강호고수인 민머린이 굳이 자신의 패배할 가능성을 감안한 채 싸울 이유도 없었고 이긴다한들 얻을 실익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여락루가 있는 저잣거리를 조심스럽게 벗어난 세 필의 말들이 마을에서 멀어져가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사방은 온통 까만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초승달에서 비치는 가녀린 달빛만이 겨우 탁 왕자 일행의 여로를 인도했다. 긴 하루의 여정을 길에서 맞이하면서 다시금 갈 길을 재촉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사건이었다.


어쨌든 길었던 하루가 마감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던 하루였다. 신기하게도 몇 번씩이나 싸울 기회를 피했던 것이 어찌 보면 하늘의 도움이었고 탁 왕자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도 음해세력의 위협이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더구나 그 세력은 곳곳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여락루는 이내 정상화될 것이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왕자 일행을 색출하기 위해 다시금 눈에 불을 켤 것이다. 어느새 산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던 여명이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일행은 종일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계속하여 이동했기에 피곤했지만 웃으며 새벽의 햇살을 받았다.


문득, 길태곤이 탁 왕자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차분하게 물었다.

“선우이치는... 두고 가시는 겁니까?”

길태곤이 여락루를 떠나올 때부터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우리가 찾는 다른 사람들과 합친 후에 마지막으로 다시 올 것이오.”


탁 왕자가 씨익 웃으며 그 질문을 기다린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행적을 쫓는 무리들이 확인되었소. 더구나, 그들은 우리를 잡으려 곳곳에 함정도 판 듯하오, 여락루도 그중 한 군데였을 것으로 판단되오. 거기서 우리의 존재가 발각되었다면 앞으로의 우리에게 시련이 계속되었겠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문제가 없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조심해야 할 것이오.”


탁 왕자가 웃으며 얘기한다고 했지만 다소 긴장한데다 피곤이 겹쳐서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쉽게 정리하기 힘든 하루였다.


“우리는 지금부터 최대한 빨리 나머지 고수들을 찾아서 함께 돌아가야 할 것이오. 선우이치는 개인적인 은원으로 인해 쫒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오. 여행길에 함께 하면 우리 일행을 노리는 쪽과 선우이치를 노리는 쪽들이 함께 우리를 공격하는 결과가 되어 우리는 보다 많은 적들의 습격에 노출될 것이 분명해 보이오, 해서 다른 고수들이과 함께 동참해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될게요.”


그렇지 않아도, 민머린과 선우이치가 자칫 충돌했다면 길태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연계된 다른 세력들까지도 일시에 덤비는 상황이 될 뻔 했던 것이다. 생각만해도 끔직했다. 탁 왕자의 답변이 현실적인 해답이라고 생각한 길태곤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의 의사를 표했다. 아직은 <천경보전>이라는 보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무리들을 맞을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니 매사 불여튼튼해야하는 상황이 어느 때보다 피부에 절감되는 하루였다.


아침 바람이 불어오는 좁은 산길을 돌아 나가는 왕자의 발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진한으로 넘어가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의욕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탁 왕자의 말이 속도를 높였다. 덩달아 뒤따르던 다른 두 필의 말도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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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전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살수왕 조도일 NEW 11시간 전 1 0 21쪽
21 소문을 타고 날아온 엽기 사건 24.04.24 4 0 15쪽
20 산골 소저가 맺어준 인연 24.03.04 19 0 21쪽
19 천하제일권 사마철을 만나다. 24.02.09 32 0 16쪽
18 드러나는 적들 24.02.01 40 0 25쪽
» 맹인 검객 선우이치 24.01.21 44 0 50쪽
16 삼한제일검 길태곤 24.01.05 50 0 45쪽
15 또 다시, 고수를 찾아서 23.12.22 49 0 15쪽
14 소도의 태동 23.12.14 52 0 12쪽
13 운명을 함께할 첫 궤를 걸다. 23.12.11 54 0 14쪽
12 인연을 엮는 여정의 시작 23.12.07 56 0 11쪽
11 고수 탐문 23.12.05 61 0 14쪽
10 소문에 대처하다 23.11.28 66 0 13쪽
9 사방천지로 퍼지는 소문 23.11.24 66 0 11쪽
8 삼한의 탄생 23.11.21 66 0 20쪽
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23.11.16 69 0 12쪽
6 <천경보전> 23.11.14 74 0 14쪽
5 신선 이야기 23.11.10 76 0 9쪽
4 남부소국연맹 23.11.08 77 0 24쪽
3 뱃머리를 남으로 23.11.03 77 0 10쪽
2 회상 23.11.02 109 0 33쪽
1 악몽 +1 23.10.13 264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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