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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링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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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야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23
최근연재일 :
2022.01.13 06:05
연재수 :
1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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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78
추천수 :
876
글자수 :
1,035,798

작성
21.12.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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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55. 영웅

DUMMY

─어리석음이야말로 영웅의 조건이지.


딱히 교육의 목적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이 영웅 세계의 시민이라는 부분을 드러내면서 꺼낸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실제로 자라면서도 전해 들은 대목 중엔 가장 조소를 드러냈었다.

그래도 여태 속에 간직할 만큼 나름 멋지다고 여겨버린 부분.


그리고 그 수업 중에, 그 교실 구석에서 자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던 여학생이 하나.

그 존재를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밝게 빛난다.

피니체의 불꽃을 담아 그대로 타오를 것만 같다.


크롬은 나름 심각하게 미간에 주름을 새겨 넣었다.


하아.


어디선가 무심코 새어 나온 한숨에 대치하고 있던 둘은 한 번에 고개를 돌린다.

하루가 그곳에 서선 무척이나 귀찮다는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결정할래. 곧바로 잘 타는 연료가 될 것 같거든.”


하루가 슬쩍 가리킨 곳에 피니체가 무시무시한 불길을 뿜고 있다.

다행히도 지금은 붉은 제복의 사내에게 시선이 쏠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크롬은 고개를 숙이고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럼 하루는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네가 그 모양이니까 너보다 졸업생을 더 믿었던 거 아니야.”


윽.


순간적으로 효과음을 흘리던 건 크롬이었다.

너무 가슴을 후비는 이야기였던가.


얼마나 시간을 끌어댔는지 이번엔 지아와 함께 저만치에서 대기하던 스카우터들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외활동 초반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이번엔 믿어봐. 이 녀석들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볼 테니까.”


하루가 한 번 더 크롬을 설득하면 그제야 그는 굳은 의지가 담긴 눈빛을 드러냈다.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피니체의 울음이 공중에 울려 퍼지면 금세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어떻게 할 생각이냐.”


크롬의 물음을 기다려왔다는 듯 피요는 앞머리로 덮인 이마를 까 보였다.

작은 뿔 두 개가 자리 잡고 있다.


“제 학생부 못 보셨어요? 웬만한 저주에는 면역이거든요.”


크롬은 뒤늦게 그녀가 요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업화까지 면역이라는 결과를 기대할 순 없겠지만, 감긴 업화가 개방되는 찰나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문득 감긴 업화의 현 상황을 떠올리자니 크롬은 다급하게 눌라를 찾았다.


“저한테 있어요.”


웬걸, 영 엉뚱한 곳에서 답이 튀어나온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면 이곳에 있던 학생 중 한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배낭을 지켜보던 크롬이 불안한 눈동자를 띠면, 그녀는 씩 웃으면서 아직 풀리지 않았어요, 따위의 답으로 안심시켰다.


“눌라 녀석, 산이를 쫓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배낭을 몸에서 떼어낸 모양이더라구요. 폭발 전에 그 뒤에 있던 제가 챙겼어요. 업화는 다행히 아직 감긴 채구요.”


크롬이 속에서 진심을 담아 안도했다.

그럼 다시금 피요가 말을 이어갔다.


“일단 업화는 피니체의 속으로 집어 던질 거예요. 업화를 억누르는 매개체가 약해지는 과정을 우려한다면 배낭은 당연히 제 몫이고, 아쿠아와 함께 이동해서 접근할게요.”


피요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제 옆에 있던 또 다른 여학생이었다.


“접근했을 때의 폭염을 막아내지 못할 텐데.”


크롬의 의문에 아쿠아는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차분히 답했다.


“직접적인 불덩이를 가격당하지 않는다면 아마 괜찮을 거예요.”


그리곤 슬쩍 손바닥으로 위로 향해 농도가 짙은 점액질을 흘려 보여준다.


“어지간한 열은 식힐 수 있어요. 피니체의 열은 조금 별개인 것 같지만요. 그래도··· 선생님이 동행해주시면 가능할 건 같아요.”


어쩐지 부끄러운 듯 몸을 꼬면서 홍조를 띤다.

하지만 크롬은 기쁜 듯했다.

자신의 제자들이 역할을 자처하면서 보이는 특성들에 그만 흥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교육의 즐거움인지 뭔지는 하루로선 알 길이 없었지만,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붕 뜨는 기분이다.


“역할 분배가 끝났으면 슬슬 시작하자고. 더 지체했다간 이 지역 통째로 숯덩이가 되겠어.”


“예. 그럼 하루씨는 나머지 스카우터들에게 학생들의 보호를 요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건 진작에 단말기로 전달해뒀어. 물론 지금은 먹통이지만.”


크롬이 작전 수행의 신호를 주기가 무섭게 불구덩이가 이번엔 자신들을 향해 떨어졌다.

찰나 동안 흑연으로 몸을 감싼 하루가 흑갑을 드러내더니 불덩이를 그대로 공중에서 분해했다.


방금까지 붉은 제복에게 목표를 고정해둔 피니체가 막무가내로 불덩이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슬슬 혼자서 접근하는 학생들을 엄호하기 버겁다고 여길 때쯤, 붉은 달의 기사가 자신에게로 달려왔다.


가볍게 불길을 막아내더니 자신에게로 굳이 고개를 돌리며 웃던 그가 그렇게나 불편할 수가 없다.


‘빚이라도 지워둘 셈인가.’


붉은 달과 자신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일개 기사가 알 리가 없겠지만, 좋게 생각하려 할수록 불편한 얼굴들이다.

이윽고 붉은 달의 기사를 필두로 스카우터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단순 무력으로 어떤 대책도 통하지 않는 불사라는 존재를 다시금 통감하는 순간이다.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학생들과 크롬은 천천히, 확실하게 중심지로 내딛어가고 있었다.


뜨겁다.

생명이라고도 칭할 수 없을 재해 자체라고밖에는.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크롬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등 뒤에 제자들이 있다는 걸 충분히 자각하고 양손으로 펼친 방어술식에 한순간도 의식을 놓지 않았다.


이따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열이 손바닥에 전해져오면, 아쿠아의 커버로 얼추 버텨냈다.


나머지 학생들은 술식의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 지워지면 덧씌웠다.


“조금만 더!”


그렇게 조금씩이지만 점점 나아간 뒤 그들은 드디어 피니체의 중심지를 목전에 뒀다.


“여기서 할게요! 배낭이 더 못 버티겠어요!”


술식 안에서도 착실히 열이 전해지는 건지 이미 배낭의 그을린 부위로 구멍이 뚫려있다.

멈춰선 모두가 피요의 엄호에 힘쓰고 있을 때 피요는 다짐한 듯 배낭에서 감긴 업화를 꺼냈다.


붉은 실로 칭칭 둘려 있는 그것을 한 손에 들었다.

이내 던질 자세를 취하고 보면, 과연 ‘감긴’ 매개체가 저 중심지에 닿기 직전까지 버텨줄지 의문이다.


그럼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크롬의 눈을 마주했다.


“걱정하지 마. 어떤 식으로든 피니체에게 작용할 거야.”


사실 장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글러 먹은 교사의 보장되지 않는 말이었는데, 그녀는 어쩐지 입꼬리를 슬쩍 올려 보였다.


후읍


피요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포탄을 투척할 기세로 감긴 업화를 손에 들고 자세를 취했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전해질 압박감.


쿠웅!


피요가 딛고 있던 지반이 무너질 정도로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 힘 그대로 팔은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뻗어졌다.


투웅─

쿠와아아


던져진 업화가 술식의 바깥으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업화에 감긴 매개체가 타오른다.

마치 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르게.


“벗어나!”


크롬이 최대한 빠르게 뒤로 벗어나려고 할 때 이미 업화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어느 부위인지도 모를 일종의 뼈.


‘저게······’


그만한 온도 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하나의 업화.


곧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주변의 이들은 알 턱이 없었다.


단순한 굉음.

괴성에 가까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피니체의 형상이 일그러진다.

모두는 귀를 막았다.


그 속에서 차마 방어술식을 걷지 못하는 크롬의 귀에서 피가 흘러나올 만큼 피니체는 울부짖고 있었다.

마지막 발악이었을까.

마치 모든 걸 휘말리게 하려는 듯 거대한 화염 속으로 모두를 끌어들이려 한다.


모두가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서로를 지탱하고 있을 때,


부아아악─


무언가 찢기는 소리가 흐른다.


후우우욱


뒤이어서 허공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는데, 눈치채고 봤을 땐 불길이고 뭐고 이미 걷힌 후였다.


모두가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친 호흡 소리만 공존한다.


털썩


한쪽에서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 하루가 고개를 돌려보니, 지아는 다리가 풀린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가까이 다가가던 하루가 지아에게 물으면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피식 웃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지쳐 보이던지, 마치 피니체의 중심과 가까이 있던 일행보다 더 기력이 없는 듯 보인다.


정작 그 일행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한참 방황하는 눈동자를 허공에 굴리고 있었다.


“뭐, 뭐야? 해낸 건가?”


“업화가 반응한 거 맞지?”


크롬은 입을 다물고 쉽게 풀리지 않는 미간의 주름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있자니 문득 제 미간을 툭 누르는 손길에 그만 어벙한 표정이 지어졌다.


“끝났어요, 선생님.”


피요다.

그녀는 햇살만큼 포근한 웃음을 제 앞에 내비쳤다.


뒤늦게 크롬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도 잠시 무겁게 가라앉는다.


조금쯤은 기뻐해도 됐을 텐데.

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피요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먼저 건네왔다.


“미안해.”


터무니없이 기가 빠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되뇌고 있을 뿐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졸업생들에게 트라우마가 심어져, 도우러 온 은인들에 힘입어, 이곳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한 존재를 작게 만드는지.

그로써 자신의 제자들이 얼마나 더 큰 실망감이 새겨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떠올리기만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미안해요?”


그럼 피요는 그렇게 되물어온다.


크롬이 당황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게 있는 피요가 보인다.

막 저물어가는 노을엔 그녀의 오렌지빛 머리칼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다.


“···내 제자들한테 지울 수 없는 공포감을 새겨주고 말았어.”


시무룩하게 답하는 그의 말에 피요는 그 표정과 어울리는 당당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답답하네, 정말. 선생님은 우릴 영웅으로 만들어줬어요! 얘네 얼굴이 안 보여요?”


그제야 고개를 돌린 곳엔 피요 외에 그녀와 닮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드는 녀석들이 장난기 어린 시선들을 나누고 있다.


“공포가 되었을지 몰라도, 우리 힘으로 해내게끔 선생님이 도와주셨잖아요. 우리 손으로 직접 이뤄낸, 지울 수 없는 경험이에요.”


크롬은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애써 큰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춰도, 피요에게 발견 당한 이상 곧바로 놀림감이 되었다.

피요가 연신 놀려대는 바람에 다른 학생들도 다가와선 짓궂게 보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지아도 덩달아 입꼬리를 늘렸다.


“아하하, 크롬씨좀 봐요. 울면서 웃고 있어요.”


하루는 뭐가 좋다고 서로 웃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아의 말에 한 마디를 얹으며 동조했다.


“딱 멍청해 보이는 얼굴하고 잘 어울리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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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157. 협곡 21.12.07 40 2 12쪽
157 #156. 책임감 21.12.06 43 2 12쪽
» #155. 영웅 21.12.03 42 2 12쪽
155 #154. 돌발상황 21.12.02 43 2 13쪽
154 #153. 작당 21.12.01 42 2 12쪽
153 #152. 기획 21.11.30 46 2 13쪽
152 #151. 좋아 21.11.29 43 2 12쪽
151 #150. 학생 21.11.26 41 2 12쪽
150 #149. 학교 21.11.25 47 2 12쪽
149 #148. 시험지 21.11.24 41 2 12쪽
148 #147. 터무니없는 무게 21.11.23 44 2 12쪽
147 #146. 귀찮은 일 21.11.22 43 2 12쪽
146 #145. 페어리 포레스트 21.11.19 43 2 12쪽
145 #144. 퇴사 21.11.18 45 2 12쪽
144 #143. 서운하지 않아 21.11.17 47 2 12쪽
143 #142. 정보거래 21.11.16 43 2 12쪽
142 #141. 수호룡 21.11.15 46 2 12쪽
141 #140. 티타임 21.11.12 47 2 12쪽
140 #139. 메리 맨 21.11.11 43 2 12쪽
139 #138. 과거사 21.11.10 46 2 13쪽
138 #137. 수색 21.11.09 47 2 12쪽
137 #136. 습격, 의심 21.11.08 46 2 12쪽
136 #135. 수습기사 21.11.05 46 2 12쪽
135 #134. 운송 교육 21.11.04 43 2 12쪽
134 #133. 면접 21.11.03 45 2 13쪽
133 #132. 과거 [Myth] 21.11.02 44 2 12쪽
132 #131. 텐타클 21.11.01 45 2 12쪽
131 #130. 판코스미오 21.10.29 45 2 12쪽
130 #129. 문명의 톱니바퀴 21.10.28 49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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