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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블랑 님의 서재입니다.

역대급 무역천재가 사업을 잘함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르블랑
작품등록일 :
2023.10.16 10:21
최근연재일 :
2023.12.18 19:02
연재수 :
67 회
조회수 :
73,686
추천수 :
2,170
글자수 :
417,030

작성
23.10.1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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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5화 최종 보스 사장님

DUMMY

“사장님이 그걸 재가해 주더나?”


결재판을 책상 위에 놓고 자리에 앉으려는 나의 등 뒤에서 공장장의 의아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결재받았습니다.”


고개를 돌리는 나의 시야에 뜻밖이라는 표정의 공장장과 의심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부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인네가 단단히 노망이 났네. 어째 회사 말아먹을 일에 허가를 내주노?”

“그래도 그거 하나 대기업하고 직거래 한번 하는걸, 그걸 막아 버리네. 저 자식이.”


대 놓고 짜증과 분노의 말투를 표출하는 그들을 무시해버렸다.


자리에 앉아 결재받은 서류를 정리하다 보니 맨 뒤에 첨부된 서류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사장실에선 미처 보지 못했던 거다.

배광식네 회사에서 받은 오퍼가격이 H 상선보다 3,000원 이 싸다는 견적 가격 비교서.

어떻게든 물어뜯고 깔아뭉갤 궁리만 하는 여우와 승냥이로 득실거리는 회사.

뭐가 예쁘다고 그걸 아껴보겠다고 결재를 올린 거냐.

참 한심한 놈일세.


서류철에 끼워놓고 거래업체 연락처 파일을 집어 들었다.

이 기사 말로는 궁시각 이라는 화물차 영업 운전사가 수출품 운송을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너, 그 포워던지 뭔지 하는 회사에서 뒷구멍으로 뭐 받고 그러는 거 아니지?”


능글맞은 공장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H 상선보다 오히려 몇천 원이라도 더 싸게 운송비를 제시했는데 그 회사가 무슨 큰 이득을 본다고 뒷구멍으로 제게 뭘 주겠습니까? 거기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마치 비리를 저지르며 뒷돈이라도 받는 것처럼 몰아가니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져 그렇게 응수했다.


“앗쭈! 니, 입 뚫려 있다고 함부로 말한다? 니, 오늘 쪼끔 시건방지네?”


어이없다는 말투가 들려왔으나 나는 계속 무시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고 궁시각이라는 이름 옆에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궁시각 씨? 오늘 밤에 부산 CY(컨테이너 야적장)로 나갈 물건 있는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밤 9시까지 회사로 들어가면 되지요?”


그래도 녀석이 선적 스케줄을 이미 알고 연락까지 했나 보네.

대충 회사 돌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건가?

아니, 모른 척한 게 아니고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소심하고 찌질한 녀석은 자신을 멸시하고 다그치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저 함구했고 멍청하고 모자란 호구로 잡혔을 것이다.


“야! 차진구!”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오 부장의 화가 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돌아보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채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 있고 마 대리는 희번덕거리는 비웃음을 입가에 흘리고 있다. 공 주임은 자신의 노트북에 무엇인가 열심히 입력하는 중, 돌아가는 일에 관심도 없어 보인다.


“너 어디 함부로 공장장님한테 그 따위...”

“오 부장?”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삿대질하던 부장이 말도 끝내기 전, 위층 계단으로 연결된 문이 열리고 사장이 들어왔다.

그런 사장의 뒤를 따라 이사도 슬그머니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왜? 무슨 일 있나?”

“아...아닙니다. 사장님.”


갑작스럽게 표정 관리 들어간 부장이 사장을 향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 부장. 수금은 어떻게 됐어? 내일이 급여일인데?”

“한산정공하고 인향은 오늘 내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공 주임이 가서 수금할 겁니다.”

“거긴 몇 푼 되지도 않잖아. 다른 덴?”

“...그게...”

“안산 산흥철강 오늘까지 결재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 이번 달에 좀 빠듯한 모양입니다. 전부는 안 되고 4천만 먼저 결재해주겠다고...”

“고작 4천 갖다가 누구 코에 붙여?”


사장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금 힘든 게 산흥철강뿐이야? 내 코가 석 잔데 지금 누구 사정을 봐주고 있는 거야?”

“......”


양철판을 쇳조각으로 긋는 듯한 자극적이고 날카로운 사장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을 뒤흔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한 부장을 향해 사장이 계속 고함을 질렀다.


“내일 월급 나가야 하는 게 얼만 줄 알아? 내일까지 은행에 이자도 넣어야 하잖아. 맞지? 내일까지 이자 내야 하는 거.”

“예, 맞습니다.”


사장이 등 뒤를 향해 소리를 지르자 이사가 등을 굽신하며 대답했다.


“산흥철강이 또 현금 결재는 안 해줄 거 아냐! 그렇지? 오 부장!”

“....예에.”

“몇 개월짜리야?”

“......”

“아! 어음 몇 개월짜리로 끊어 주겠다 했냐고!!”

“..12개월입니다.”

“으이그! 영업 차-암 잘하네. 오 부장!! 그거 가져가서 할인하면 몇 푼이나 받겠어?”


크게 한숨을 내쉰 사장이 혀를 끌끌 찼다.


“내일까지 수금할 데 더 없어? 그게 다야?”

“한군데 더 있습니다. 마 대리, 학산철강 내일 오전에 수금하겠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한 부장이 마 대리를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아. 예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는 마 대리를 사장이 빤히 바라보았다.


“내일 오전에 수금되는 거 맞아? 그거 얼마나 돼?”

“..예에. 그게...”


사장의 번뜩이는 눈빛에 잔뜩 쫄아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한 마 대리.

두 손을 마주 잡고 손가락을 끊임없이 꼼지락거리고 있다.


“마 대리. 뭐해? 빨리 사장님께 말씀드려.”

“예에. 사장님. 그...그게..”


부장의 재촉에 마 대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원래는 내일까지 주겠다고 했는데 급한 사정이 있어서 며칠만 미뤄 달라고...”

“뭐야?!!”

“......”

“남 급한 사정 다 봐주면서 제 회사 직원들 급여는 못 챙기나?”

“...죄송합니다.”

“수출 나가는 거 은행 네고는 언제 해? 금요일이나 되야 지?”


고개를 돌린 사장이 이사에게 물었다.


“예, 선적이 끝난 후에야 B/L이 발급되니 금요일 오후나 돼야 네고 가능할 것 같습니다.”


“...휴우우우우우!!”


시뻘게진 얼굴로 사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내가 또 은행 찾아가서 은행 놈들한테 굽신굽신거려야 해? 이자 미뤄주고 돈 좀 달라고?”

“......”


“영업부 직원들 지금 자리에서 다- 뭣들하고 앉아있어?!!”


급여 직전 수금액 부족으로 문제가 되자 노발대발한 사장.


“영업부 직원들은 나가서 어떻게든 수금해 와. 급여 못줄만큼 수금 안 되면 오늘 아예 회사 들어올 생각 마! 알았지? 오 부장!!”

“...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오 부장이 눈치를 주자 마 대리와 공 주임이 자리에서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외근 준비를 한다.


“오늘 하루, 사무실 자리 지키면서 영업부 전화 오는 건 네가 좀 받아라.”

“예에.”


나를 바라보는 사장에게 대답하고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공장장하고 강 부장! 장부 가지고 따라 올라와! 고 이사도!”

“예, 알겠습니다.”


부리나케 외근을 나가는 오 부장과 두 영업부 직원의 뒷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던 사장이 계단 쪽으로 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사장을 따라 이사도 문밖으로 사라졌다.


“강 부장, 지금 시재(時在) 어떻게 돼?”

“지금 남아있는 게 거의 없죠.”


공장장의 질문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경리부 강 부장이 대답했다.


“지난주에 사천 얼만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오 부장 그거 생각하고 있던 거 같더만.”

“왜요. 지난주 목요일에 원자재 사 온 대금 나갔잖아요. 오 부장님 알고 있을 줄 알았더니...”


이제 알겠네. 서로 의사소통이 삐끗하다 보니 이 사달이 난 것.


“아-! 죽겠네. 참! 올라가면 꼬투리 있는 대로 잡을 텐데.”

“영업부 수금 못한 불똥이 왜 나한테 튀어?”


불쾌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리며 공장장과 경리부 강 부장이 장부를 들고 나란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사무실은 편안함과 고요함에 휩싸였다.


오늘 하루 아무 눈치 볼 사람도 어떠한 거슬리는 말도 내 귀에는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틀 만에 처음으로 평온하고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이미 오늘 배송될 물품은 다 머릿속에 있었다.

오전 배송 마친 이 기사가 들어오면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 배송 세 군데만 같이 확인하면 되는 것.

물론 오늘은 자정이 가까워야 퇴근이 가능할 것이다.

수출품을 화물차에 싣고 캐노피로 덮고 안전하게 운송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하고 퇴근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생존할 방법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밤새 한숨도 눈을 못 붙인 탓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진구의 회사 이메일 계정을 찾아 들어갔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녀석이 보낸 거래업체 중, 두 곳에서 답신을 보내왔다.

한 업체는 대만에 있고 다른 한 곳은 미국...


”..뉴...뉴욕?“


[Home DIY Steel] NY. USA.


리스트에서 흘끗 보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뉴욕에 있는 수입업체서 답신이 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규격의 샘플 몇 가지와 견적서를 보내달란다.


”...휴우.“


한순간 뉴욕에서의 생활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낮은 한숨이 나왔다.

그런 화려했던 삶이 천년만년 계속 될 줄 알았건만.

칵테일 파티에서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내 모습을 거울속에 비춰보던 때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정신 바짝 차리고 현실을 직시한다!

양 손바닥으로 볼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치자, 경리부 직원 둘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엉뚱한 짓이냐는 표정.


그러나 말거나 화면을 뚫어지게 보면서 가능성을 계산해본다.

얕은 내 지식으로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뉴욕이 어딘데. 운송비만으로도 얼마나 될 거야?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네.


그래도, 거래하자는 긍정적인 답신은 두통이나 받은 건 사실.

그것도 모두 내가 아니라 이 몸 주인인 차진구가 한 일이다.


초보이긴 하지만 녀석이 올려놓은 디딤돌을 밟고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무역인으로서 새로 태어나기 위한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부장을 비롯해 마 대리와 공 주임은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도 회사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밤 10시가 막 지난 후였다.


인터넷을 뒤져 또 다른 해외 철강 수입업자들을 찾아 거래 제안 이메일을 모두 보냈을 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수출품 생산 끝냈습니다.”


야간조 직원 중 겨우 스물 두셋이나 될까 한 녀석이 내게 다가와 생산내역표를 건넸다.


“차 공장 안으로 들어왔어요. 지금 실으시라는데요?”


말을 끝내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그는 부랴부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거대한 낚싯바늘처럼 생긴 쇠갈고리에 코일을 포장한 연결고리를 걸고 호이스트 버튼을 누르며 운전하고 있었다.


어제오늘 시간 날 때마다 현장에 들어와 호이스트 작동법을 익혔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가.

줄에 매달린 코일 더미가 마치 그네처럼 흔들렸다.

똥오줌 못 가리고 땀을 뻘뻘 흘리던 나를 근처에서 지켜보던 야간조 조장 김 주임이 더 참지 못하고 내게 다가왔다.


“아니, 차진구 씨! 내내 잘하다가 갑자기 왜 이리 호이스트 운전을 못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른 후반의 가무잡잡한 얼굴을 한 그가 나무라듯 투덜거렸다.


“아. 답답하네. 이리 좀 줘봐.”


나에게 손을 뻗는 그에게 호이스트 조작판을 건네주고 한걸음 물러섰다.

목장갑을 두툼하게 낀 그의 오른손이 나에게서 건네받은 호이스트 조작판을 움켜쥐었다.


- 드르르르르르륵


양손으로 버벅대며 조심스럽게 운전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건만 그의 한 손에 조작되는 호이스트는 경쾌하고 재빠르게 허공을 가른다. 그럼에도, 조금의 진동이나 흔들림도 없다.


“혹시 사무실에 전화한 건 아니죠?”


그런 나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나의 시야에 화물차 기사인 궁시각 이 들어왔다.


“아뇨. 직접 궁시각 씨한테 전화한 거예요.”

“예. 고맙습니다.”


언뜻 이해 못할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나 보다.

그가 표정을 바꾸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영업하려고 하는데 회사가 놓아주질 않아서요. 계약기간 끝났는데도 연장하라고 협박하네요. 거래처 알아내서 독자적으로 영업 못하게 하겠다면서...”

“...아.”

“사무실 통해서 영업하자니 커미션을 너무 많이 떼어서 제 손에 들어오는 게 얼마 안 돼서 말이죠.”

“알겠습니다.”

“다음에도 계속 제게 직접 연락 부탁드립니다.”

“예, 그렇게 하죠.”


그렇게 말하며 김 주임이 운전하고 있는 호이스트에 매달려있는 코일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지 말고 그냥 퇴근해. 내가 다 실어서 출발시킬게.”

“..예에?”


뜻밖의 말에 그렇게 말한 김 주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 얼굴이 피곤해 절었는데 뭐. 그리고, 이걸 다 싣고 나면 버스도 끊어질 텐데 어떻게 퇴근하려고?”

“그냥 택시를 타고...”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일이 끝나면 택시를 탈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택시비는 경비로 처리해 주겠지? 설마 회사 일로 늦게 퇴근하는데 그걸 안 해주려고?


내 말에 김 주임이 피식 웃었다.


“이 시간에 여기가 어딘데 택시가 있어?”

“......”

“그러지 말고 아직 버스 있을 때 들어가. 수출품 실어 내보내는 거 한두 번 하나?”

“그러세요. 제가 나가면서 태워드리고 싶은데, 다 싣고 나가면서 계량해야 하는데 계량소가 반대편인데다가 거기서 곧장 고속도로 타야 해서요.”


궁시각 씨도 옆에서 장단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 피식 웃던 김 주임이 고개를 돌렸다.


“은호야! 장은호! 이리 와 봐!”


작은 쪽지를 손에 쥐고 한쪽에 쌓여있는 코일을 확인하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다가왔다.

좀 전에 사무실로 생산내역표를 가지고 왔던 젊은 녀석이다.


“왜요?”

“차진구 씨 버스 정거장까지 태워다주고 와.”

“걸어가죠. 뭐.”


주머니에서 자신의 차 열쇠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는 김 주임을 보며 느긋한 척 말했다.


“여기서 버스 정거장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데? 열 시 반이 막찬데, 걸어가면 탈 수 있을 거 같아?”


그가 가리키는 대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15분을 지나고 있다.


“가요.”


어린 사내가 앞장서서 현장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죄송한데,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슬며시 고개를 숙여 김 주임과 궁시각에게 인사를 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내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건넨 그들의 호의가 한없이 고마웠다.


“걱정말고 먼저 가세요. 부산 CY 도착해서 아침에 제가 전화드릴게요.”

“나중에 저 녀석 일 때문에 사무실 가면 자판기 커피나 한잔 뽑아줘.”


내 앞으로 먼저 부리나케 걸어 나가고 있는 젊은 사내를 김 주임이 가리켰다.

다시 고개를 꾸벅하고는 몸을 돌려 젊은 사내를 따라 잽싸게 발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버스 정거장에 차가 도착했을 때, 마지막 버스는 바로 전 사거리에 서 있었다.

운전해 준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날리듯 던지고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 달려오는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탔다.


많지 않은 승객.

자리를 잡고 앉아 내려야 할 정거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채 앉아있다 보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몰래 잠깐 끄덕거리며 졸다가 놀라 눈을 떴다.

창밖의 풍경을 확인해 보니 아직 몇 정거장 더 가야 한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고 버스의 앞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세 번째 앉아있는 남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뒷모습.


“...허억!”

‘...나다.‘


그렇다. 틀림없는 내가 앉아있었다.

2017년 10월 24일의 나. 홍두식.


기이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에 뒷목이 서늘해지고 머리칼이 쭈뼛 섰다.

남의 몸에 들어와 과거의 내 뒷모습을 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내 뒤통수가 저렇구나.

그때 이 시간에 나는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스물여덟이었을 때 나는 미국에 유학 중이었는데, 왜 이 버스에...


“아!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계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가 그 해, 이맘때였다.

장례식을 치르고 열흘 정도 후, 10월 말이 다 되어서 다시 미국의 학교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이 버스를 타고 나는 어디로 가는 길일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버스를 탔던 기억조차 없다.

앞으로 가서 슬쩍 아는 척하고 싶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또 너무 두렵다.


여튼, 그런 내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마음 한구석에 스멀거리며 몰려오는 감정이 있었다.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이건 미움을 너머 증오다.

나를 바라보는 온몸이 혐오로 파르르 떨고 있다.

나도 모르게 불끈 쥐고 있는 주먹.


“...휴우우!”


뜻밖에 넘쳐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어어!”


어느새 지나쳐버린 정거장.


부리나케 벨을 누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문 앞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 다시 한번 흘끗 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정차했다.


-드르르르륵


열린 문을 통해 뛰어내리듯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멀어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였지? 그 엿 같은 느낌은?”


여전히 몸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을 떨구려고 양손으로 가슴을 탁탁 털었다.

급히 오느라 갈아입지도 않은 회사 작업복에 붙어있던 먼지가 뽀얗게 피어오른다.


언뜻 돌린 나의 시야에 건널목의 신호등에 초록색 불로 막 바뀐 것이 들어왔다.


터덜거리며 막 도로 위로 발을 옮겼을 때였다.


“어어어어....!”


등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고개를 돌린 나의 시야에 환한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피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 쿠쿵!


전신에 뜨겁고 날카로운 고통이 폭발하듯 덮쳐왔다.

한순간 나의 시야가 바뀌고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봐요! 괜찮아요?”

“어머 어떻게 해. 피 좀 봐.”


아득히 먼 곳에서 어떤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와 여성의 비명이 메아리치듯 울려왔다.

그리고 그다음,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한순간 눈이 떠졌다.

마치 고통스러운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


그런 나의 시야에 책상 뒤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인천특수철강] 이라는 글자의 자수가 놓아진 청색의 점퍼를 입고 있는 50대 사내.


“...허억!”


놀란 나는 순간 두 손으로 온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차에 치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왜 이 곳에...


“너 지금 뭐 하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나를 보면서 고 이사가 어이없다는 비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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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8화 몬스터 길들이기 +4 23.12.01 765 23 13쪽
47 47화 타석에 들어서다 +3 23.11.30 787 26 12쪽
46 46화 첫 번째 대화 +1 23.11.29 773 30 14쪽
45 45화 사장 아들의 등장 +5 23.11.28 812 28 12쪽
44 44화 찾아드는 행운 +3 23.11.27 845 27 13쪽
43 43화 앨리슨 드부아 +5 23.11.26 868 3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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