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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블랑 님의 서재입니다.

역대급 무역천재가 사업을 잘함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르블랑
작품등록일 :
2023.10.16 10:21
최근연재일 :
2023.12.18 19:02
연재수 :
67 회
조회수 :
73,676
추천수 :
2,170
글자수 :
417,030

작성
23.10.17 12:15
조회
1,895
추천
42
글자
19쪽

3화 최강 빌런 마 대리.

DUMMY

내 앞에서 발을 멈춘 사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메모지 줘 봐!!”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던 마 대리가 손을 내밀었다.

넓적한 사각 얼굴 전체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마치 하룻강아지를 내려다보고 털을 빳빳이 세우고 있는 범의 모습과 흡사하다.

당장이라도 덤벼들어 내 목을 물어뜯을 기세다.


“찾아봤는데, 메모지가 없는데요?”


가능한 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거 내가 한 거 아니거든.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주인이 한 거거든.


“....뭐어?”


그의 미간이 삽시에 일그러졌다.


“버렸나 봐요.”

“그걸 버렸다고?”


이제 그의 표정은 마치 경악을 한 것처럼 변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꽉 쥔 그의 오른쪽 주먹이 파르르 떨었다.


“아니, 아무리 내가 메모지에 대충 적어줬다고 해도 그렇지. 그게 다 증빙서류인데 네 맘대로 버렸다고?”

“......”

“너! 뭐 하자는 거야 지금! 학산철강 거래 끊겠다고 나한테 전화하고 난리야! 전화로 사정사정해도 안 먹히길래 내 차에 싣고 찾아가서 다시 사정해보려고 하고 있다고! 넌, 숫자 하나도 제대로 못 읽냐? 도대체 일을 이따위로 하면 어쩌란 말야?”


천둥 같은 목소리에 경리부 직원들도 고개를 들고 마 대리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부장은 이 상황을 무시하듯 눈을 내리깔고 있고 공장장은 빙글빙글 웃고 있다.


“무슨 일이야?”


위층에 있던 고 이사까지 계단을 내려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드렁한 말투로 툭 내뱉은 마 대리가 자기 책상으로 걸음을 옮겨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일을 엉망으로 해 놓는 바람에 죽겠습니다. 이사님.”


그 말에 이사가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마치 이 사무실에서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나인 거라는 것을 진작부터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좀 있으면 사장님 출근하시니 사무실 분위기 좀 밝게 하자. 잘못된 일 있으면 빨리 고치고!”

“다녀왔습니다.”


이사가 말하는 동시에 사무실 정문이 열리며 서글서글한 표정의 사내가 들어왔다.


“이 기사. 납품 다 끝냈어?”


갑작스럽게 부드러운 말투로 바뀐 이사의 목소리.


“예, 네 군데 다 돌고 왔습니다.”

“또 갈 데가 있던 거 같던데. 오 부장?”

“..네.”


이사의 말에 영업부 부장이 고개를 쳐들고 이사를 바라보고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구한테 시켰으니 보낼 겁니다. 야! 차진구.”

“..예?”

“부장님, 저 너무 배고파서요. 점심만 먼저 좀 먹고 출발할게요. 헤헤.”


부장을 바라보는 나의 등 뒤에서 넉살 좋은 말투의 이 기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해. 그럼.”


부장의 말에 빙긋 웃음을 짓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이 기사님?”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그가 몸을 돌렸다.


“갑자기 또 웬 존댓말이여. 왜 그런대애?”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웃음을 흘리는 그의 입 밖으로 구수한 사투리가 섞여 흘러나왔다.


‘아, 그래도 친하게 반말하면서 대화하는 사람도 있긴 했나 보군.’


“한산정공하고 산흥....”

“알고 있어~. 지난주 토요일에 말했잖어. 한산하고 산흥 두 군데 가야 한다고. 점심 먹고 내가 후딱 실어서 출발할게.”


다행하게 녀석이 그래도 지난주에 이 기사와 이미 얘기가 된 터였나보다.


“아,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어디다 버려?”

“쓰레기?”


이미 먹을 욕 다 먹었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저렇게 비인간적인 태도와 말투로 부하직원이라고 멋대로 대하는데, 혹시라도 저 마 대리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사무실 안의 쓰레기통에 없다면 어제저녁에 청소하는 사람이 쓰레기봉투에 담아 놓았을 것이다. 쓰레기차가 와서 수거해가기 전에 꼭 확인해 봐야겠다는 갈망이 불끈불끈 솟아나 견딜 수 없었다.


“왜 그려? 뭐 잘못 먹은겨? 저어쪽에 두잖어? 저 창고 뒤쪽 공간.”


그가 팔을 쭉 뻗어 현장 건물과 연결된 마당 맨 끝부분을 가리켰다.

창고와 같은 작은 가건물과 그 뒤 좁은 공간에 비닐 비스무리한 것이 비죽 나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글구 인제부터 쓰레기 버리는 거 같은 건 하지 말어. 무역하는 사람이 사무실 쓰레기 청소까지 하고 있어? 시켜도 걍 못한다고, 배째라고 그려~.”


그렇게 말하고 빤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경비실 뒤쪽에 있는 작은 회사 식당을 가리켰다. 그런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앞마당을 가로질러 부지런히 창고 뒤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의 온갖 허드렛일을 이 녀석이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 제대로 된 일을 할 시간이나 여력이 있었을까. 창의적인 일도 편안함과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쓰레기를 가득 채운 커다란 비닐봉투 세 개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다.

맨 안쪽 봉투의 내용물은 사무실에서 나온 쓰레기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앞의 두 개 중 한 개 안에 녀석이 지난주에 버린 쓰레기가 들어있을 터.


묶어놓은 끈을 풀고 쓰레기를 바닥에 쏟아냈다.

바닥에 깔려있던 먼지가 뽀얗게 허공으로 비산한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쏟아져 흩어진 쓰레기를 하나씩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작은 메모장이니 대충 눈으로 확인해서는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는 일.

찢어진 종이 한 장 한 장을 마치 세 듯 집어 들며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 * *



20분이 걸렸지만, 첫 번째 비닐봉투 안에는 마대리가 건넸다는 메모지는 없었다.


먼지로 시커멓게 된 손을 탁탁 털고 두 번째 비닐봉투를 집어 들려던 순간이었다.

봉투 중간 부분에 비치는 숫자가 한순간 눈에 들어왔다.

접혀있는 뒷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학산이라는 글씨와 120이라는 숫자가 큼지막하게 씌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거다.”


뭔지 모를 희열감에 입술 끝에 웃음이 흘렀다.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비닐봉투를 뒤집어 들어 그 부분까지 천천히 쓰레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에 쥐어진 메모장 하나.


학산철강

120 x 2.5 68kg

13일(토) 오후 5시 이전까지 배송완료 할 것.

● 5시에 퇴근하니 그 이전에 틀림없이 배송 확인


손에 쥔 메모를 몇 번이나 읽으며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미 점심시간은 절반이 지나갔지만 한 끼 굶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닌 일.




회사 안마당을 가로질러 건너는 나의 눈에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히죽거리며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마 대리.

그리고, 그의 옆에서 요지로 이빨을 쑤시며 느긋하게 걷고 있는 오 부장과 공장장도 보였다. 또 다른 키 작은 사내는 경리 부장일 터.


다가오는 나를 발견한 마 대리의 표정이 삽시에 일그러졌다.


“뭐냐? 그 꼴이.”


먼지와 쓰레기 가득한 곳에서 정신없이 움직였으니, 양손은 시커멓고 작업복의 가슴팍도 시커먼 먼지가 붙어있을 터.

툭툭 손으로 가슴을 턴 후, 그에게 손에 들고 있던 메모장을 내밀었다.


“뭔데 이게?”

“지시내용요. 확인해 보세요. 120에 2.5 맞죠?”


내 말에 그가 받아 쥔 메모장을 펴들었다.

부장도 공장장도 고개를 빼고 그의 어깨 너머로 메모장 안을 넘겨보았다.


“우린 먼저 들어간다.”


얼굴 가득 희멀건 웃음을 띤 부장과 공장장이 사무실을 향해서 발을 옮겼다.

표정이 빳빳이 굳어있는 마 대리를 빤히 바라보며 나는 슬며시 가슴 위로 팔짱을 끼었다.

이제 저 뻔뻔스러운 얼굴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쉽게 나오지 않는 사과를 하겠지.


그런데 그의 표정이 내 예상과는 정반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그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거 찾으려고 쓰레기통 다 뒤졌냐?”


마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내가 잘못 말했다는 거 입증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뻔뻔한 마 대리의 표정을 보면서 기가 막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간이 제멋대로이고 개이기적이라고 해도 이런 개재수없는 놈이 또 있을까?


”잘못한 거죠. 제대로 사과하세요. 자신이 틀린 거면서 남한테 뒤집어씌우려 했으면 최소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야! 너 많이 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던 그가 다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너 지난주에 여권 잃어버리고 파출소 가서 신고하면서 난리블루스 춘 거 내가 다 커버해줬잖아. 사장님한테 그 얘기 들어갈까 봐 쉬쉬하면서 너 빨리 여권 만들라고 하지 않았어?“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너, 어디 산 구석에 처박혀있어서 남들 생판 모르는 전문대 나왔대도 회사생활 편하라고 내가 해준 게 한두 가지야? 나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뭐? 그깟 일 가지고 날 더러 사과하라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경멸의 빛이 번뜩였다.

비열함과 치졸함으로 똘똘 뭉친 인간의 집합체가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신 차려라. 네 주제나 제대로 파악 잘하고!“


마치 벌레를 보는 듯, 나를 한번 노려본 후 내가 뭐라고 반응도 보이기 전, 그가 휙 돌아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멋대로 상대방에게 굴욕감과 모욕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자주 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가 34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런 망할 인간쓰레기 종자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내 몸뚱이를 한 이 녀석은 이곳에 취업한 뒤에 계속 저 인간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왔을 터.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이건 회사 내 집단 따돌림에 괴롭힘의 범주를 넘어서는 거 아닌가?

글로린가 뭔가 하는 학창 시절 폭력의 성인용 회사 버전이다.


”여기서 뭐 해?“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며 동시에 어깨에 누군가 툭 건드리는 느낌이 왔다.

돌아보는 나의 시야에 이 기사의 해맑은 얼굴이 들어왔다.


”점심 안 먹어? 아줌마 이제 막 정리하는 거 같던데...“

”난 괜찮아. 오늘은 입맛이 없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게서 몸을 돌렸다.


”...저기.“


순간 뭐라고 그를 불러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길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이 기사?


”왜?“


그가 다시 내게 몸을 돌렸다.

이미 주변 직원들에게 모자란 놈으로 낙인이 찍힌 게 확실하니 더 이상 어리버리한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혹시 말야. 현장에서 거래처별 제품 생산된 내용 어떻게 다 알 수 있어? 그거 가지고 배송하는 거 아냐?“


내 말에 그의 한쪽 눈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거야 그냥, 마 대리나 공 주임한테 작업 요청서를 달라고...“


하던 말을 멈춘 그가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한 측은함과 연민을 어떻게 놓칠 수 있으랴.


”퇴근 전에 공장장한테.... 아니다! 현장 윤 반장한테 영업부에서 내려온 작업 요청서 슬쩍 보여달라고 해. 뭐 하나 확인할 거 있다고 하고. 간 김에 현장 작업 계획서도 보여 달라고 해서 보면 스케줄표도 보여줄 겨.“


그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여전히 이채의 빛이 감돌고 있다.


”근데 지금까지 그렇게 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했지. 근데 이상하게 오늘 내가 깜빡깜빡하는 게 잠깐씩 정신줄을 놓네.”


입을 벌리고 헤헤하고 웃는 나를 보면서 그제야 그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스트레스땜시 그려. 나도 어떤 때는 다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막 올라오는데, 그럴 땐 할 일도 잊어먹고 그러더라고...”


그렇게 말한 그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는 밝은 웃음을 흘렸다.


“나 아까 말한 그 두 군데 물건 실어다 주고 올게.”


나의 팔을 툭 친 그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시끄럽게 소음이 울리는 현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거였어?’


어이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왕따만 시킨 게 아니고 지들이 일 잘못한 것까지 독박 씌우려고 제대로 자료도 주지 않고 일 시킨 거구만?


날 얕보고 막 대하는 인간들에게 한 방 먹이려면 놈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내가 해야 하는 일과 전반적인 회사 돌아가는 것까지 내 머릿속에 전부 다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


기필코 놈들에게 이 녀석이 당한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 백 배로 돌려주리라.


“나는 네놈들이 아는 차진구가 아니고 ‘홍두식’이야! 이놈들아!”


주먹을 불끈 쥐고 슬며시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게 말야. 허허허”

“그랬다니까요. 낄낄낄.”


사무실 문 안쪽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가득하던 분위기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사드라들었다.


눈꼬리로 흘끗 바라본 마 대리는 여유롭게 책상에 앉아 커피를 찔끔거리며 처마시고 있다.

그런 그의 입꼬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마 대리님 학산 철강 안 가세요?”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은 빼고 그래도 부드러운 말투로 마치 교과서 읽듯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시선은 그를 보지 않은 채, 내 책상 서랍을 향하고 있다.

오전에 서랍을 뒤질 때 녀석의 지갑과 잡다한 소지품이 보였다. 이제 천천히 녀석의 경제 사정과 사는 곳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퇴근하면 녀석의 집으로 가야 할 건데.


“넌, 네 일이나 해.”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할 말이 궁색하겠지. 그렇게 나에게 면박을 주면서 개지랄을 떨더니 별일도 아니었구만. 그렇게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나 처마시고 있는 꼴을 보니.


- 그쪽에서 거래 끊겠다 했다면서? 네 차에 물건 싣고 미친 듯이 달려가서 무릎 꿇고 사정하겠다면서?


그렇게 내뱉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니 입을 꾹 닫고 참았다.

또 무슨 개소리로 내가 한 말을 덮을 게 뻔한 일이다.

좀 전에도 무슨 여권을 잃어버려 경찰서를 들락거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가만, 그런데 여권을 잃어버리면 경찰서에 신고하는 게 맞긴 한 건가?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니면 여권 민원실에 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여튼, 내가 여기 돌아가는 일 빠삭하게만 알게 되면 그때부턴 절대로 가만있지 않아.


“할 일 없나 본데 이거나 컴퓨터에 입력해놔라.”


둥근 집게로 윗부분을 물려 놓은 거래명세표 한 묶음을 그가 내 자리로 툭 던졌다.


잠자코 종이 묶음을 집어 들고 책꽂이에서 <컴퓨터 자료 입력방법>이라는 이름의 두툼한 검은 파일철을 꺼냈다. 커버를 넘기자 그 안에 영업부에 쓰이는 자료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이 비닐 속 페이지마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녀석, 이런 건 또 잘해 놨네.’


이제부터는 내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일을 배워놓느냐에 따라 회사에서 나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다.


비닐 커버로 된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거래명세표 입력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을 찾았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분위기는 무시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숙지하기 시작했다.




* * *




“근데, 오 부장은 수출품 납기를 왜 그렇게 짧게 잡은 거래요?”


출퇴근용 봉고차 안에서 내 맞은편에 앉은 유상록 씨가 나를 보며 언뜻 물었다.

현장 입구에 가까운 압연기에서 작업하며 오전에 윤 반장을 불러준 사내다.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빤히 그가 바라본다.

나야, 왜 수출품 납기를 짧게 잡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대답할 수 없을 수밖에.


“그러니까 자꾸 불량이 나는 건데. 이번에도 벌써 300 킬로 넘게 불량 난 거 고물로 처리하고 버렸거든요. 폭이 6.5 짜리라 불량 나면 다른데 쓸 수도 없으니, 공장장이 슬쩍 서류 여기저기 고쳐서 감쪽같이 만들어 놓긴 했지만...”


오호! 그런 일이 있었군. 그 능구렁이같은 공장장이 뒤로는 장부를 속이고 있었네?


“그런 얘긴 뭐하러 해? 사무실 직원한테.”

“아! 답답하잖아요. 일을 처리하는 꼬락서니가. 그리고, 차진구씨가 어디 사무실 직원인가? 현장하고 더 친하잖아. 안 그래요? 차진구씨.”

“그래도 그런 말을...”

“...그럼요!”


봉고차에 탄 현장 직원들을 돌아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현장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제가 현장 돌아가는 일을 사무실 가서 꼰지를까봐요?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럼. 그럼!”


유상록이 맞장구를 쳤다.


“차진구씨 빼고는 사무실 직원들 다~ 비싼 자가용 몰고 다니면서 사실 우리 좀 우습게 알잖아? 썩은 표정으로 되지도 않는 말 찍찍 해대면서 납품 날짜 맞추라고 생떼나 부리고. 그러니 그 말도 안 되는 납품 일자 맞추느라 불량이 나지.”

“자가용이야, 자기가 제 돈으로 사서 몰겠다는데 네가 왜 열을 내냐?”

“꼴에 잘난 척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콧구멍만한 회사에 월급 쥐꼬리만큼 받는 거 뻔히 아는데 거들먹거리는 거 눈꼴시잖아.”


그렇게 말한 그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 순간 봉고차가 길가에 멈췄다.


“차진구 씨 내려야지. 내일 아침 일곱 시 반에 봐요.”


머리가 듬성듬성한 운전사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오며 차 안을 향해 목소리 높여 인사했다.


“잘 들어가고 내일 봐요.”

“진구씨 내일 봐.”

“먼저 들어가요.”


닫히는 문 사이로 밝게 웃는 얼굴들이 사라졌다.


쓰레기가 한쪽에 쌓여있는 볼품없는 작은 공원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녀석의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주소의 건물 앞에 섰다.

틀림없는 녀석의 집이라는 것은 건물의 대문 기둥에 쓰인 주소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의 액정화면 지도 위에 깜빡이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은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다주택 건물.

B01 이라 하니 그중에서도 지하의 낡고 좁은 방이 틀림없다.


스물아홉의 녀석.

생전 겪어보지 못한 녀석의 하루는 내겐 마치 일주일, 아니 한 달은 보낸 듯 느껴졌다.

피곤함에 절은 몸으로 나는 천천히 열린 문으로 들어가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녀석이 아홉수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도, 그 액운으로 인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조차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미 나의 머릿속은 그에 못지않은 녀석의 저주스러운 현실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32 베르겐
    작성일
    23.10.17 12:20
    No. 1

    주인공의 돌파가 기대됩니다. 미생이 떠오르네요.
    작가님 재밌게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2 르블랑
    작성일
    23.10.18 10:07
    No. 2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르겐님 소설 넘 잼있게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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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49화 소문 +4 23.12.02 730 26 12쪽
48 48화 몬스터 길들이기 +4 23.12.01 765 23 13쪽
47 47화 타석에 들어서다 +3 23.11.30 787 26 12쪽
46 46화 첫 번째 대화 +1 23.11.29 773 30 14쪽
45 45화 사장 아들의 등장 +5 23.11.28 812 28 12쪽
44 44화 찾아드는 행운 +3 23.11.27 845 27 13쪽
43 43화 앨리슨 드부아 +5 23.11.26 868 3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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