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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백작가 망나니 소드마스터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4.02.28 12:34
최근연재일 :
2024.03.27 12:20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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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52
추천수 :
608
글자수 :
171,580

작성
24.03.2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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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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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미치광이 대관식

DUMMY

설국의 남서쪽.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놓인 영역. 그 끝자락에 작은 섬 하나가 있었다.


소위 켈티카 지방이라 불리던 곳에 자리 잡은 섬이었는데, 그곳에 살던 소수민족 웨일은 적룡의 후예를 자처하며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민요가 바로 ‘팬드래건’. 붉은색 고룡의 후예 아르토리우스가 말세에 부활하여 만인을 요정의 땅으로 인도하리라는 노랫말이었다.


[적룡이 백룡을 물리친다.]

[성검을 뽑아 용의 목을 치고.]

[새하얀 비늘을 찢어 대지를 불게 물들인다.]

[아르토리우스.]

[그의 이름은 아르토리우스 팬드래건.]

[웨일의 드루이드는 먼 훗날 태어날 그를 위해 제사를 준비하라.]

[우리는 용의 우두머리를 위해 땅을 일구리라.]


여느 소수민족의 민요가 그렇듯. 팬드래건 신화 또한 민족의 부흥을 바라는 희망사항을 녹여낸 노랫말에 불과했다.


민족이 멸망하면 사라지고 말았을 전통.


연명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촛불.


팬드래건과 웨일의 운명이 이런 꼴이었고, 이를 노래하던 웨일족 역시 이러한 운명을 모르진 않았다. 패권 경쟁에서 밀리고, 주류 문명으로부터 배척당한 소수민족의 말로는 서서히 말라죽는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이러한 흐름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천재.


메를리누스, 혹은 멀린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렸던 마법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삶이란 가능성의 바다요. 무한하게 펼쳐진 논밭이니. 연명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웨일의 부흥 또한 이뤄지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연명에 연명을 거듭하였고, 수백 년에 걸쳐 실력과 인맥을 쌓아오며 언젠가 도래할 기회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극야의 시대가 시작되고, 열강이라 불리던 나라들이 눈보라와 어둠 속에서 몰락하는 시대가 되었을 무렵.


기나긴 세월을 인고해온 메를리누스의 시선에는 눈 덮인 이 세상이 백룡으로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저 설원이. 지하로부터 넘쳐 흐르는 에테르의 바다가. 종잇조각처럼 찢겨나가는 옛 시대의 문명이.


모든 징조가 말세가 도래하였음을 노래하였고, 메를리누스는 마침내 임금이 될 자를 위해 땅을 일궈내기 시작하였다.


드높은 하늘에 새겨진 아르토리우스의 별이 땅에 임하도록 세상에 사악을 파종하였다.


악행이 없으면 선행이 빛날 여지가 없어지듯이.


옛 시대의 문명에 사악이 창궐하면 구세주의 별마저 침묵을 깨고 내려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성검이라 불리던 것들을 모아 연구하여 새 시대의 임금이 쓸 도검을 벼려내었다.


심연으로 가라앉은 설국의 수도에서 채굴해온 광석을 모아 요정향의 보검을 완성하였고, 그 이름을 칼리번이라 지었다.


도검성의 주목을 받은 인물을 찾아내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새 시대의 임금 아르토리우스는 성검의 계시를 받은 자이니, 이를 찾다 보면 팬드래건의 이름을 계승한 자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새 시대의 소드마스터.


재능 하나만큼은 역대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천재.


천상에 박제된 도검의 별자리들이 호시탐탐 눈여겨보던 문제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후. 메를리누스는 루퍼스 시에 뿌리내렸던 사업체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 시대를 열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기도 하거니와, 구시대의 악행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결과. 그는 저 젊은 소드마스터에게서 팬드래건의 이름을 계승할만한 자격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출중한 실력. 적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냉혹함.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자비는 베풀 줄 아는 마음가짐. 이 모든 것을 갖춘 이상 인망은 따르기 마련이었고, 실력에 더해 인망까지 갖춰지면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록 외모가 웨일족이 아닌 이민족의 것을 닮았다는 점이 흠결이었지만.


혈통의 결함 따윈 사소한 흠집처럼 보일 정도로 다인에겐 적룡의 이름을 계승할만한 자질이 차고 넘쳤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마지막 드루이드 메를리누스는 자신이 일궈낸 요정의 땅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주십시오, 나의 왕이시여.”


메를리누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 준비된 성검이고, 당신을 왕좌에 앉힐 왕홀이며, 당신의 나라를 일궈낼 깃발입니다. 이 검을 뽑으면 당신은 화관으로 된 왕관을 쓰고, 검을 깃발 삼아 사람을 이끌게 되실 터이니. 부디 이 땅에 깔린 꽃잎을 즈려밟고 왕도를 걸으시옵소서.”


왕이 사라진 시대에 왕이 된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영주의 무릎을 꿇게 하고. 지상에 남은 대도시를 정벌하며. 지하에 자리 잡은 해신과 마왕의 영토마저 개척해내는 것.


그리하면 이 땅의 겨울은 끝나게 될 것이고, 세상은 진정한 봄에 이르러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메를리누스는 마법으로 봄을 구현하여 그에게 간청했다.


잠깐의 봄마저 이리도 달콤한데, 완연한 봄은 어떻겠나이까. 당신이 새로 일궈낼 땅은 오롯이 당신의 법도에 따라 움직일 터이니. 더럽고 추잡한 구시대의 문명 따윈 밑거름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시대를 꽃피우소서.


숲 전체가 다인을 향해 속삭였고, 이와 동시에 다인은 땅에 꽂힌 검으로부터 목소리를 들었다.


[임금이 되지 못할 이유는 또 뭐가 있겠니?]


천진난만한 요정의 목소리로. 별의 힘이 담긴 성검 칼리번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역죄니 역성혁명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핑계에 불과해. 애초에 네가 만든 적도 없는 법도를 따를 필요는 또 뭐가 있겠어. 너는 그런 법률에 동의한 적도 없고, 따라야 할 이유도 없어. 너는 이미 온전히 자유로운 몸인걸.]


요정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꿈만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햇살 아래에서 그의 이름을 외쳤고, 미인이라 부를만한 처녀들이 찾아와 애첩으로 삼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고고하던 루퍼스 백작가의 고성에 적룡의 깃발이 걸리고, 지도에는 그가 개척해낸 영토가 늘어났으며, 지상의 뭇 백성들은 그의 이름 아래 인류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떠났다.


아, 이 얼마나 완벽하기 짝이 없는 계획인지.


다인은 드루이드의 간청, 요정검의 속삭임, 그리고 봄을 향한 갈망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황금을 닮은 반딧불의 검이 그의 손에 쥐어지길 기다리고 있었고, 다인은 자연스레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검을 뽑은 자, 웨일의 왕이 되리라.]


선정의 검 칼리번 땅에서 뽑히고, 적룡의 우두머리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다인은 반딧불 검의 검신을 쓰다듬었고, 요정은 노래를 부르며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웠다.


“아아... 마침내...!”


메를리누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왕이시여! 웨일의 왕 아르토리우스 팬드래건이시여! 부디 명령을! 군주를 참칭하는 자들의 죽음을 명령하소서! 이 한 몸, 당신을 위해 바치겠나이다!”


흩날리는 꽃가루. 만연히 피어난 신록. 재잘거리는 요정의 웃음소리. 광기에 절은 드루이드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을 곱씹으며, 다인은 웨일의 왕으로써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그는 메를리누스의 앞에 예전에 쓰던 성검인 퓨리오소를 떨어트렸다.


“드루이드 메를리누스는 자결하라.”


그 말에 메를리누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왕의 위엄이 담긴 사형선고가 뇌리에 꽂히자 그는 잠시 혼란스러워하였으나, 이내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광소를 터트렸다.


“그렇군요! 알겠나이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요!”


드루이드 메를리누스. 다른 이름은 켈티카 백작. 그는 언젠가 도래할 구세주를 위하여 이 땅에 사악을 일궈냈다.


구세주가 오지 않는다면 멸망할 세상이고, 온다고 하면 기뻐해 마지않을 일이었으니.


이까짓 목숨. 그날이 오면 기꺼이 바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추악함을 절개함으로써 팬드래건의 이름은 완벽해지리라!


“웨일의 왕 앞에 영광 있으라!”


사악한 구시대의 마법사. 웨일족 최후의 드루이드. 켈티카 백작.


수많은 이름으로 살아온 괴물이 성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렀다.


그리고 온전히 숨이 끊어지기 직전.


한때 예언자라 불리었던 드루이드의 뇌리엔 먼 훗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마치 주마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택한 왕이 태양을 되기 위한 여정에 오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 수많은 인연. 수많은 칼날. 수많은 인과를 거쳐서.


멸종위종이었을 터인 소드마스터는 끝내 극야를 몰아내어 기나긴 겨울에 종지부를 끝냈다.


다만 거기까지 본 순간.


메를리누스는 자신이 무언갈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웨일족도 아니었고. 임금도 아니었다.


오히려 여정의 끝에 그가 택한 길은 검을 내려놓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는 과도로 요리를 하였고. 이따금 보육원에 방문하곤 하였으며. 원예에 재미를 붙이더니 연인에게 화초를 선물하곤 하였다.


임금! 저런 자가 임금이라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였으나. 그의 의식은 점차 흐릿해졌다.


그렇기에 숨이 끊기기 직전.


그는 세상을 구할 위인에게 선정의 검을 맡겼음에 만족하면서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를리누스가 죽은 것을 확인한 직후.


다인은 화관을 땅에 내팽개친 뒤 그의 목에 박힌 퓨리오소를 뽑았다.


[아깝지 않은 거야? 나는 분명 너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선정의 검 칼리번. 요정향의 반딧불. 새 시대를 밝힐 황금빛.


그녀는 아쉽다는 듯이 다인을 향해 말을 걸었고, 다인은 칼리번을 땅에 눕힌 뒤 퓨리오소의 칼날을 양손으로 잡았다.


“아까울 리가 없지.”


검을 쥔 두 손과 손잡이의 크로스가드에 오러가 담겼다.


모르트슐라크. 혹은 살격검.


칼날을 양손으로 쥔 뒤 검을 곡괭이처럼 휘두르는 검술.


먼 옛날 해신 숭배자의 성채를 부술 때 사용하였던 검술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검은 한 자루면 충분하고, 짐은 가벼울수록 좋으니까.”


흑심을 품었던 것은 찰나에 불과했을 뿐.


왕이 되고 싶었던 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경비조장이니 보안관이니 하던 것들도 지긋지긋하던 참이었는데 여기서 임금 노릇까지 해야 한다니.


그래서야 평생을 왕관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루퍼스 백작이 일하는 모습을 보아온 몸으로써, 그런 자리에 앉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가 왕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이유였다.


[너의 앞날을 응원할게.]


크로스가드를 무게추 삼아. 한 줄기 혜성이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찰나의 순간. 요정의 검은 마지막 웨일의 왕을 향해 축복했다.


[부디 네가 바라던 봄을 손에 거머쥘 수 있기를.]


검의 형상을 한 혜성이 칼리번이 놓인 땅을 부쉈고, 굉음과 함께 땅이 울리며 요정의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마지막 웨일 왕의 통치는 한순간에 끝나고 말았다. 웨일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왕조를 통틀어봐도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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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순백나무 숲의 괴담 (3) +3 24.03.24 325 1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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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광란 (1) +3 24.03.17 489 14 13쪽
18 칼부림 (3) +3 24.03.16 488 17 13쪽
17 칼부림 (2) +2 24.03.15 511 16 13쪽
16 칼부림 (1) +3 24.03.14 537 15 13쪽
15 집도 (6) +4 24.03.13 527 13 13쪽
14 집도 (5) +2 24.03.12 530 14 14쪽
13 집도 (4) +2 24.03.11 577 12 13쪽
12 집도 (3) +2 24.03.10 663 15 13쪽
11 집도 (2) +2 24.03.09 786 18 13쪽
10 집도 (1) 24.03.08 907 16 13쪽
9 잘린 머리의 무게 (6) +4 24.03.07 927 20 14쪽
8 잘린 머리의 무게 (5) +3 24.03.06 937 24 14쪽
7 잘린 머리의 무게 (4) +1 24.03.05 957 23 14쪽
6 잘린 머리의 무게 (3) +1 24.03.04 1,017 29 14쪽
5 잘린 머리의 무게 (2) +1 24.03.03 1,149 21 12쪽
4 잘린 머리의 무게 (1) +1 24.03.02 1,460 2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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