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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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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88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13 13:00
조회
54
추천
1
글자
6쪽

그와의 불화15(끝)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긴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주위의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에 뒤집어썼다. 침대 곁에서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깐 쪽잠을 청했던 L은 무안해졌다.

“밤새 그러고 계셨어요? 아, 나 어떡해...”

이불 속에서 그녀가 말했다. 험험, 헛기침을 하고 난 뒤에 L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난 그럼 가볼게.”

L이 천천히 현관을 나설 때에도 이불 속은 묵묵부답이었다. 아침 햇살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을 즈음, 휴대폰에 그녀의 문자가 수신되었다.

‘죄송해요. 너무 창피해서 고맙단 말씀도 못 드렸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찌푸렸던 L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까부터 심통이 난 듯 계속 바지 앞섬을 두드리던 하초가 이죽거렸다.

“좋냐? 새꺄?”

“좋다. 새꺄!”

L은 하루 종일 놀란 눈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뒤집어쓰던 그녀의 영상을 떠올리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었고, 하초는 칼집에 잠기지 못한 날 벼린 칼날처럼 잔뜩 약이 올라 있었다. 저녁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하고 지냈어요?”

“그냥, 좀 쉬었어요. 언니 짐도 정리해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서요. 아저씬 안 피곤하세요?”

“난, 뭐... 오늘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을까요?”

“네. 제가 대접해드릴게요.”

“대접은 무슨...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외출을 준비하는 내내 L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장롱 한 구석에 묵혀두었던 양복을 꺼내 입고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르며 부러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간단없이 엉덩이를 찌르는 통증도 L의 즐거운 기분을 막을 수 없었다. 참 좋은 분이신 거 같아요... 간밤의 그녀의 목소리가 무슨 주문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보다 못한 하초가 심드렁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아주 지랄을 하세요!”

파업을 푼 하초는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일해보고 싶었지만, L은 근사한 저녁식사로 그녀를 미소 짓게 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언니의 짐 정리도 함께 도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가능하다면, 그녀의 잠든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그냥 거기까지만.


아저씨는 저한테 선물 같아요... 언니가 먼저 가면서 저를 위해 남겨준.


“애매한데...”

얼마전에 묶었다던 K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L이 물었다.

“그렇잖아. 넌 그냥 언니를 잃은 스물다섯살 여자아이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나선 거 아냐? 일테면, 딸내미가 아빠한테 ‘아빠가 곁에 있어줘서 너무 든든해요’하고 다를 게 없잖아?”

K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남녀의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밋밋하고 잔잔했다. 뭐, 격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응당 남녀간의 사랑이란, 활활, 타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야,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냐.”

허스키한 목소리의 D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꼭 섹스를 해야만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에로스도 있고, 아가페도 있는 거니까. 뭐, 명확히 구분 지을 수는 없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연민도, 우정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냐?”

D가 말 끄트머리를 쳐올리며 매달리고 싶은 팔뚝을 지닌 W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어라? 기분 탓일까? W를 바라보는 D의 눈빛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W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가페! 좋은 말이지. 근데 문제는 그 주인공이 L이라는 거야. 그게 말이 되냐?”

K가 반박했다.

“왜? 뭐? 난 아가페 하면 안되냐?”L이 반문했다.

“안될 건 없는데... 좀 이상하긴 하네.”

내가 웃자, 모두들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자그마치 이천 명이 넘는 여인들과 잠자리를 했고, 어느날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이 고자가 되었다던 L이 이제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한다니... 개도 웃을 얘기이긴 했다. 하지만 단 한 명, L은 웃지 않았다.

“나도 나한테 놀라긴 했는데, 정말 아껴주고 싶고, 마음이 짠하고 그래. 그 애를 만나면... 희고 가는 팔뚝만 보면 자꾸 뭐라도 먹이고 싶고,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면 괜히 지켜주고 싶고, 당장 쳐들어가자는 아랫도리를 꾸욱 누르며 참아야 하고, 집에 돌아와서 드러누우면 자꾸 그 아이 얼굴이 떠오르고... 이거 사랑 아니냐?”

“사랑이지, 암, 사랑이고 말고. 근데 너 고자 아냐?”

내가 물었다.

“파업 풀었어. 아주 그애한테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다, 이 새끼.”

L의 손가락이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축하한다, 새꺄! 우리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야, 그럼 뭐가 문제야? 너희가 무슨 쌍팔년도 하이틴로맨스 주인공도 아니고, 스물다섯이면 그 여자아이도 알 거 다 아는 나이 아닌가? 게다가 니 옆에서 잠도 잤다며? 그걸 그냥 둬? 모르긴 몰라도 그 여자 정말 잠든 게 아닐지도 몰라. 아마 지금쯤 이 자식 고자 아냐, 하고 생각하고 있을걸?”

K는 다소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L은 단호했다.

“지켜주고 싶어. 그녀가 준비가 될 때까지.”

쩝, 마흔다섯 노회한 총각의 순정이라...

“이름이... 수린이라고 했나?”

“응, 장 수린.”

이름을 발음하며 L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 세상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우리들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했다. 혹자는 단순한 호르몬 교란으로 인한 화학작용이라고 하고, 혹자는 숭고한 그 무엇, 또 다른 이들은 그냥 성욕의 메타포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혼란스럽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L이 느끼는 남다른 감정, 다른 무엇으로 대체 불가능한 그 무엇이 그 혼란스러운 존재의 명확한 그림자가 아닐까?

“잘 해봐라!”

어깨를 두드리자 L이 어색하게 웃었다.

“축하한다, 새꺄!”

우리들은 일제히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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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10 18.05.25 40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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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4 18.05.18 51 1 4쪽
18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3 18.05.17 64 1 5쪽
17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2 18.05.17 42 1 4쪽
16 농담2.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 1 18.05.16 59 1 4쪽
» 그와의 불화15(끝) 18.05.13 55 1 6쪽
14 그와의 불화14 18.05.12 55 0 9쪽
13 그와의 불화 13 18.05.11 53 1 6쪽
12 그와의 불화12 18.05.10 62 1 5쪽
11 그와의 불화11 18.05.09 63 1 5쪽
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7 1 7쪽
9 그와의 불화9 18.05.07 46 1 4쪽
8 그와의 불화8 18.05.06 68 1 4쪽
7 그와의 불화7 18.05.05 57 1 3쪽
6 그와의 불화6 18.05.04 67 1 6쪽
5 그와의 불화5 18.05.03 68 1 9쪽
4 그와의 불화4 18.05.02 68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6 1 5쪽
1 그와의 불화1 +3 18.04.27 113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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