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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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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90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1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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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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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그와의 불화14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L은 그녀가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검은 상복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L에게 목례를 하고는 이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 이제 그만 울어요. 이러면 언니도 편하게 못 떠나.”

“죄송해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무섭고, 겁이 났어요... 많이 놀라셨죠?”

“아니 뭐, 놀라진 않았는데... 밥은 먹었어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밥 같이 먹읍시다. 나도 좀 출출한데.”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게다가 채 소화되지 않은 맥주는 L의 뱃속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금방 차려올게요.”

“그러지 말고, 옷 갈아입고 같이 나갑시다.”

그녀가 외출 채비를 하는 동안, L은 현관 앞에 나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낮 동안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밤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하초가 물었다.

“밥만 먹는 거냐?”

“술도 한잔 해야지. 슬픔을 잊고 푹 자는 데에는 술이 최고지.”

L이 대답했다.

“그럼, 술만 먹는 거냐?”

“아놔, 이 새끼.”

그녀는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차림으로 나왔다. 여즉 얼굴엔 울음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L의 눈에는 눈이 부실 만큼 예뻤다. 험, 험, 헛기침을 해대면 L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에 문을 연 식당으로 갔다. 감자탕과 소주, 그리고 밥 두 공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도 알려드리지 못했네요. 제 이름은 수린이에요. 장 수린.”

그녀가 처음으로 웃음기를 비쳤다. 수린... L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되뇌어 보았다. 예의 또 엉덩이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고맙단 인사도 못했어요. 울 언니 마지막 가는 길 지켜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내 웃음기를 띤 그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밥이나 먹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

L이 돼지뼈의 살을 발라 그녀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그녀가 마지못한 듯이 한술 입에 넣었다. L은 소주를 마셨다. 마른 몸피와 가녀린 흰 팔뚝이 자꾸 L의 눈에 들었다. 숟가락을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듯 위태롭고 연약해 보였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좋은 데로 갔을 거예요. 걱정 말고 많이 먹어요. 그래야 언니도 마음 편하게 가지.”

L이 위로랍시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녀가 밥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저도 한 잔 주실래요?”

“뭐, 그럽시다.”

L이 잔에 술을 채웠다. 그녀가 냉큼 잔을 비우고는 가만히 진저리를 쳤다.

“좋으신 분 같아요. 울 언니하고는 어떤 사이셨어요?”

빈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물었다. 글쎄,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L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실상 어떤 사이랄 것도 없었다. 해서 그녀의 죽음 앞에서 사흘 밤을 세워야 할 이유도 없었고, 이렇게 그녀의 동생과 마주 앉아서 안타깝게 그녀의 밥을 먹는 양을 지켜 볼 이유도 없었다. 젊은 시절 단 한번 같이 잔 사이... 숨기고 싶은 그녀의 치부를 한번 본 사이,,,

“언니는 저한테 엄마였어요. 늘 거기 있었고, 언제든 품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그게 너무 미안해요. 이렇게 좋은 분이 곁에 있었는데도 저 때문에 흔한 연애도 못해보고...”

“아, 뭐 그런 사이는 아닌데... 그냥 친구였어요, 친구.”

“아, 그러셨구나.”

L은 연신 그녀의 빈잔을 채우고, 고깃점을 숟가락 위에 얹어주었다. 그녀는 여린 아기새처럼 작은 입을 벌려 술을 마시고, 배를 채웠다. 식당 주인은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L은 눈 앞에 있는 겁에 질린 아기새가 든든히 배를 채우고, 술에 취해서 깊은 잠이 들기를 바랐다.


수린... 발음할 때 혀끝이 가볍게 입천장을 건드렸다. 술에 취해 잠이 든 그녀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L은 몇 번인가 그녀의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침대 위에 눕히자, 그녀가 끄응, 깊은 신음을 토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L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L은 이상하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졸립지도 않았다. 다만 꿈을 꾸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릿한 엉덩이의 통증과 함께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이란, 당최 터무니가 없었다. 어째서? 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큐션 좋은 침대에 폭 파묻힌 채 낮게 코까지 골고 있는 그녀 곁에서 L은 자신이 한심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은 여전히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터무니없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혼자임을 알게 되고, 또 무서워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잠을 자긴 틀렸군... L은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여인네와 단둘이 밤을 지내게 된 지도 참으로 오랜만이란 생각도 들었다. 뭐, 엄밀히 말하면 단둘은 아니었다. 파업을 해버린 수다쟁이 하초가 있긴 했다. 그의 갑작스런 파업으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L은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지금 L의 곁에 누워서 깊은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L에게 있어서 과거 무수한 여인네들의 밤에 있어서 느끼지 못하던 전혀 생소한 것들이었다. L은 그런 자신이 낯설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해서 오늘 밤, 그녀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파업중인 수다쟁이 하초였다. 아까부터 줄곧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눕히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지금은 아예 바지를 뚫고 고개를 내밀 기세였다.

“야, 너 아까부터 왜 그래?”

L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서 묻냐?”

하초는 다소,아니 심하게 흥분해 있었다.

“뭘?”

“네가 아무리 아닌 척해도 난 다 알아. 너 저 여자 좋아하잖아.”

“임마, 그게 말이 되냐? 난 저 여자 언니랑 밤을 지낸 사이라고. 게다가 저 여자는 이제 겨우 잠이 들었어. 근데 뭘 어쩌자는 거야?”

“뭘 어쩌자는 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난 자율신경이잖아. 정직하게 네 감정에 반응할 뿐이라고.”

하초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빳빳이 고개를 든 채였다.

“야, 그럼, 진정한 사랑이 어쩌고 하면서 파업할 때는 뭐, 네 잘난 의지가 아니었단 말이냐? 멀쩡한 사람 고자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딴 소리네.”

L은 화를 냈다. 그러자 하초가 달래듯 말했다.

“생각해봐. 그 역시도 내 의지는 아니었어. 무수한 여자들을 만나면서 매번 같은 욕구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상이란, 결국 네 마음속에 긴장과 자극을 반감시켰지. 무수한 여인네들의 축축하고 음밀한 그곳은 더 이상 차가워진 너의 피를 뜨겁게 데울 수 없었던 거야. 그건 결국 쾌락도 뭐도 아닌 고역이 되어버린 거지.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듣고 보니, 하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일상이 되어버린 섹스는 L에게는 그저 감흥없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저 여인이 거기 있고, 한번 해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뿐이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당연한 조건반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뭐가 달라졌는데?”

이번에는 L이 다소 풀이 죽은 체로 반문했다.

“이번은 분명 달라. 넌 지금 저 여자를 갖고 싶은 마음과 편히 재우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잖아. 아주 바람직한 자세야. 방금 전에는 그녀가 잠을 깼을 때, 혼자라는 사실을 서글퍼 할까봐, 밤새 곁을 지켜주기로 마음먹었잖아.”

“이젠 독심술도 하냐?”

“너 뭔가 오해하고 있나본데, 나는 너야. 너랑 나는 하나란 말이야.”

“근데, 난 자꾸 네가 나란 생각이 안 드는데?”

“그건, 뇌와 심장이 차이라고나 할까? 뭐 어쨌든...”

하초가 말을 이었다.

“난 저 여인네 몸 속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어. 그게 내 칼집이라는 확신이 들었거든. 이게 네 심장과 내가 내린 결론이야.(로미오와 줄리엣)”

하초는 결심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거야. 난 저 여인의 잠을 지켜줄 생각이거든. 추호도 저 여인을 더럽히고 싶은 생각이 없어.”

L도 단호하게 말했다.

“너 사랑하는구나?”

“야, 알게 된지 며칠도 안 됐어. 뭔 사랑타령이야?”

“잘 생각해봐. 기억이 나진 않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넌 저 여인을 알게 된지 아주 오래됐어... 어쨌든 난 저 여자의 몸 속에 들어갈 거야. 파업은 끝났어.”

“뭔 소리래...”

그들의 대화를 알 리 없는 수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L은 마음속으로 시간이 좀더 천천히 흘렀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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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3 18.05.17 64 1 5쪽
17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2 18.05.17 42 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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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의 불화14 18.05.12 5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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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와의 불화11 18.05.09 63 1 5쪽
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7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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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와의 불화6 18.05.04 67 1 6쪽
5 그와의 불화5 18.05.03 68 1 9쪽
4 그와의 불화4 18.05.02 68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6 1 5쪽
1 그와의 불화1 +3 18.04.27 113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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