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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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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93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02 21:25
조회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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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6쪽

그와의 불화4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어떠한 징후도, 미심쩍은 전조도 없었다. 마흔 줄에 접어들고 난 뒤에도 L은 여전히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또 아침밥을 굶지 않았다. 단지 평소 꾸준히 해오던 운동의 무게를 본의 아니게 조금 줄인 정도가 전부였다.

“나이가 들수록 관절의 유연성은 점점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과도한 무게를 들거나, 무리하게 운동 강도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지요.”

L은 중년에 접어든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 하지만 뭐, 벌어놓은 돈도 있었고, 집도 한 채 있었다. 노후를 대비해 들어놓은 보험도 잘 유지되고 있었고, 여자들도 끊이질 않았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괜찮은 삶이었다. L은 그런대로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앞으로도 잘 되어 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역에의 오류’였다.

병아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닭으로 자라나기까지 주인은 매일 아침, 먹이를 뿌려주었다. 하여 병아리는 생각한다. 주인의 손은 매일 아침마다 먹이를 뿌려주는 손이구나. 주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어느날, 먹이를 뿌려주던 그 손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다가온 닭의 모가지를 쥐고 비튼다...


늦은 저녁, L은 평소와 다름없이 알몸의 여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능숙한 쉐프처럼 요리를 시작했다. 현란한 칼놀림으로 여인을 현혹시키고, 정교한 양념으로 그녀의 미각을 사로잡았다. 여인의 반응은 뜨거웠다. L은 거만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안달이 난 여인은 어서 메인요리를 맛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L은 조금 뜸을 들였다. 에피타이저에 사로잡힌 혀를 화이트 와인으로 헹궈낸 뒤, 다시 좀더 강렬한 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나서야 L은 비로소 메인요리를 꺼냈다. 그런데.... 오븐에 불을 켜는 걸 깜빡한 걸까? 요리는 아예 조리도 되지 않았다. L은 당황했다. 스위치를 바삐 올리고, 오븐의 온도를 확인했다. 온도가 오르지 않았다. 신선하던 야채들은 숨이 죽어가고 있었고, 고기는 아직 꽁꽁 얼어 있었다. 여인이 메인요리를 재촉했다. 어서.... 어서.... L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는 수없이 에피타이저를 다시 준비했다. 여인이 또다시 반응했다. 그러나 메인요리는 준비되지 않았다. 결국, L은 절망스럽게 디저트를 내놓았다. 다행히 여인은 디저트를 맛있게 먹어주었다.

“괜찮아.... 오빠가 좀 피곤했나봐... 난 만족해. 푹 쉬면 나아질 거야.”

여인이 L을 위로했다.


‘오븐이 망가졌다’


L은 여인을 보내고 나서도 당혹스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도 충분히 잤고, 평소처럼 운동을 했고, 밥을 먹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예고 없는 정전이었다...


암흑 속에서 L은 당황했다. 이리저리 손을 휘젓고, 여기저기 부딪혔다. 가히 공포스러웠다. 좀 지나면 다시 불이 들어오려나 기대했지만, 아나똥이었다.

“정상인데... 뭐 심리적인 이유가 아닐까요?”

비뇨기과 전문의는 정신과에 찾아가보라고 했다. L은 정신과에서 여의사에게 한 달간 상담을 받았다. 물론 상담만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 여의사 역시 L의 남성성을 되돌리는 데는 실패했다.

“뭐, 전 괜찮아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제가 한번 치료해볼게요. 전 평생을 두고 당신을 치료하기로 마음 먹었는걸요. 물론 치료비 따윈 필요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의 고백은 L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암흑 속에서, 아주 잠깐동안이나마 아련한 빛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동창 모임에서 알게 된 약사가 직업인 여자 동창으로부터였다. L의 고민을 듣고 나서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뭘 고민해. 약 먹어.”

약효가 있었다. 예전처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거사를 치를 정도는 되었다. 그는 안도했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봄비에 후두둑, 꽃잎를 떨구는 목련처럼, 점점 더 많은 양의 약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궁극에는 어떠한 신약에도 반응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약사인 여자동창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제약회사를 다니는 K도 결국 과도한 양을 요구하는 L에게 고개를 돌렸다.

“임마, 너 그렇다가 죽어.”

빛은 사라졌다. L은 절망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쾌락과 기쁨은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암흑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채다가 상처만 남긴 L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난 고자야. 그렇게 되어버렸어.”

친구들은 L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그게 큰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L은 시간이 지나면서 타의에 의해 강요받은 금욕 생활을 인정하게 되었고, 좋든 싫든 삶을 영위해나갔다. 다행히도 아침 식사는 거르지 않았으며, 운동도 꾸준히 해나갔다. 종종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셨고, 몇몇의 여인네들을 만나기도 했다. 주로 영화를 보거나 뮤지컬을 보거나, 아님 근사한 맛집을 다니면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건전해진 L과 만난 여인들은 오래지 않아서 L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흔다섯.... L은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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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7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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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와의 불화8 18.05.06 68 1 4쪽
7 그와의 불화7 18.05.05 57 1 3쪽
6 그와의 불화6 18.05.04 67 1 6쪽
5 그와의 불화5 18.05.03 68 1 9쪽
» 그와의 불화4 18.05.02 69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6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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