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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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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78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0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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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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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9쪽

그와의 불화5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하긴... 너무 괴롭히긴 했지. 계산을 해보니, 그건 나와 관계한 여인들이 자그마치 이천명이 넘더라구.”

L은 심란한 표정이었다.

“수명이 다한 거지...”

K가 사망선고를 하듯,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매달리고 싶은 팔뚝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K의 등짝에 거칠게 떨어졌다. 듣기 좋은 마찰음과 함께 K가 비명을 지르며 등짝을 어루만졌다.

“야, 친구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K가 억울한 듯 W에게 말했다.

“뭐가 너무해! 야, 말이 이천 명이지, 그렇게 한번만 했겠냐? 세 번씩만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나누기 삼백육십오일 하면.... 꼬박 십칠 년이야. 자그마치 십칠 년동안 매일 쉬지 않고 한 거라고! 야, 아주 닳아 없어졌겠다!”

W가 뒷머리를 긁었다.

“야, 그건 좀 너무 했네...”

L은 말이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최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였다. 뭐, 적어도 17년이라는 세월을 혹사당한 L의 사망소식에 심심한 애도를 표할 밖에는. 더불어 그 숫자가 의미하는 L의 삶에서의 섹스란, 물론 물리적인 시간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야, 너무 상심하지마. 나도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해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위로랍시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역시 L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랑, 아예 하지 못하는 거랑은 엄밀히 다른 얘기야.”

맞는 말이었다. 다른 얘기다.


“식상해...”

분명 방안에는 L 혼자였다. L은 혹시 컴퓨터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인지 확인해보았다. 스피커는 꺼져 있었다.

“아래를 봐. 나야.”

어허, 이거 미치겠네... L은 말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았다. 책상 밑을 확인했고, 혹시나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요즘 몸이 허해졌나? 웬 헛소리가.... 그때, 답답해진 목소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고. 네 몸의 일부!”

L이 팬티를 들춰보았다. 하초였다. L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그러자 수북한 터럭 속에 잔뜩 구겨져 있던 하초가 발끈했다.

“야! 내가 오죽 답답하면 말을 하겠냐?”

“넌.... 누구냐?”

“아, 정말 답답하네. 너라고 너! 그간 어둡고 습한 곳에서 너의 쾌락을 위해 죽어라고 일하던 네 몸의 일부!”

헤헤.... L은 실소가 비어져나왔다... 내가 미쳤구나.... 드디어 내가 미쳤어....


물론 L은 미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귀신을 보거나, 동물치료사가 애완동물의 말을 알아듣거나 하는, 조금 특수한 능력이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L의 말로는 그의 하초는 꽤나 수다장이 임에 분명했다.


이 새끼가... 여간 귀찮은 게 아냐.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아랫도리가 뿌듯하더라고, 해서 혹시 이 자식이 맘을 돌렸나, 하고 팬티를 들춰보니까, “야, 기지개도 못 켜냐? 오해 하지마. 난 다시 일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거야. 게다가 운동을 좀 심하게 하는 날에는, 지가 역기를 든 것도 아닌데, 불편하게 몸을 일으키면서 운동 그만하지 않으면 트레이닝복을 뚫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어쨌든 참 고약한 놈이야. 내 어쩌다가...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얘기였다. 어쨌든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까.

L의 예기치 않은 동거는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L도 조금은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왜 삐뚤어졌는지 어림짐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거야. 나야 뭐, 그냥 이 여자다 싶으면 함께 즐기긴 했지만, 그는 언제나 불 꺼진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갈 뿐이었니... 일견 미안한 맘도 들고, 또 그 자식의 파업이 이해도 되고 그래.”

다시 만난 L은 처음에 비해 좀더 편안해보였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러나 J는 오지 않았다.

“약은 왜 효과가 없는 거야?”“그 자식 말에 의하면, 처음엔 괜히 힘이 뻗치고, 이상하게 땡기고 그랬대. 근데 말이지, 결국엔 더 허무해진다는 거야. 이건 아니다, 싶더래. 그래서 그만뒀다고 하더라.”

“그게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둬지나? 일종의 화학반응 같은 건데?”

K가 물었다. 그러자, L은 갑자기 키득키득, 혼자 웃었다. K가 이유를 물었다. 왜, 웃어?

“아나똥이란다! 얘가.”

L이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친구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J 그 자식 어쩌냐? 아직도 만나고 있는 눈치던데...”

D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 처자식도 있는 놈이 어쩌려고.”

“야, 안 들키면 되잖아.”

“오늘도 거기 간 건가?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세는 줄 모른다더니...”

“우리들이 한번 진지하게 충고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어린애냐? 그러다가 정신 차리겠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때였다. L이 맥주잔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난 단 한번도 J처럼 사랑을 해본 적이 없더라.”

“뜬금없이 뭔 소리야?”

우리들은 멀뚱한 표정으로 L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L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사랑 말이야. 그날 J 얘기를 듣고 온 날, 이 자식이 밤새도록 날 까더라고... 정말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냐고, 눈물이 날 정도로 누군가를 안아본 적이 있느냐고.... 없더라. 단 한번도 여자를 섹스의 대상 이외에 마음 깊이 사랑해본 적이 없더라고.... 이천 명이 넘도록 단 한번도...”


L은 자신의 하초가 말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현실을 인정하고 난 뒤에 둘은 좀더 편안해졌다. 그럴 수밖에. 둘은 어쨌든 한 몸이 아닌가.

“오늘은 왜 하루 종일 말이 없어?”

L이 물었다.

“응, 날씨도 꾸물꾸물하고, 좀 우울해지네.”

하초가 말했다.

“뭐, 좋은 음악이라도 들려줄까?”

“빌리 홀리데이로 부탁해.”

둘, 아니 한 몸인 그들은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뭐, 서로 취향도 비슷하긴 했다. 기괴한 일이었지만, L은 그의 존재에 대해 다소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가끔 귀찮도록 말이 많은 것을 빼면, 그런대로 괜찮은 말벗이었다.

“근데 말야, 네 취향이 좀 맘에 들지 않아.”

하초가 말했다.

“뭐가? 왜?”

“레오파드 팬티 말야... 무슨 표범도 아니고, 그냥 좀 편안한 단색을 입어줄 순 없어?”

“그거야 뭐... 그러지 뭐.”

L은 팬티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부탁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해도 될까?”

“야, 또 뭔데?”

“좀 헐렁한 트렁크를 입어줄 순 없을까? 당최 불편해서.”

“알았어, 알았다고.”

L은 다시 팬티를 갈아입었다.

“휴, 이제 좀 살겠네. 고마워.”

“그래, 이제 좀 자자.”

“잘 자.”

둘, 아니 한 몸인 그들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근데 말야...”

이번엔 L이 말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을까? 날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 말이야... 뭐,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몸도 허락하고, 섹스도 하고, 그러는 거 아냐? 자그마치 이천 명인데, 그 중에 적어도 몇 명은 정말로 날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야 모르지..,. 중요한 건, 넌 전혀 그녀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었다는 거야. 사랑이란 게 원래, 두 사람이 간절히 서로를 원하고, 알고 싶고,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거든. 넌 그 간절함이 없었던 거야. 단순히 그냥 하고 싶은 본능, 그러니까 성욕만 발동한 거지... 그 여자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뭘 좋아하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잖아.”

하초는 단호했다.

“쩝...”

“혹시 이천 명이 넘는 그 여자들 다 기억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그냥 어렴풋이 생각나는 이름 몇 개 정도지.”

“거 봐. 넌 그 여자들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야. 말하자면, 그냥 간판도 없는 좌판에서 음식을 사먹는 일과 똑같은 거야. 다 먹고 그 자리를 뜨고 나면, 뭘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하지. 그건 사랑이 아니야.”

L은 그간 만났던 여인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봐! 잠이나 자.”

그러나 L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애절하고 간절한, 서로를 원하고 알고 싶어하는, 하여 온전히 서로를 몸에 새기고 싶은.... 그런 사랑이란 게 뭘까? 난 그동안 수많은 여인네들과 무얼 했던 것일까? 엉킨 실뭉치처럼 L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마지막으로 말야....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

J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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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11(끝) 18.05.26 39 1 7쪽
25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10 18.05.25 40 1 5쪽
24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9 18.05.24 46 1 4쪽
23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8 18.05.23 53 1 5쪽
22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7 18.05.22 52 1 4쪽
21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6 18.05.21 48 1 6쪽
20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5 18.05.19 57 1 4쪽
19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4 18.05.18 50 1 4쪽
18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3 18.05.17 63 1 5쪽
17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2 18.05.17 41 1 4쪽
16 농담2.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 1 18.05.16 59 1 4쪽
15 그와의 불화15(끝) 18.05.13 54 1 6쪽
14 그와의 불화14 18.05.12 55 0 9쪽
13 그와의 불화 13 18.05.11 53 1 6쪽
12 그와의 불화12 18.05.10 62 1 5쪽
11 그와의 불화11 18.05.09 62 1 5쪽
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6 1 7쪽
9 그와의 불화9 18.05.07 46 1 4쪽
8 그와의 불화8 18.05.06 67 1 4쪽
7 그와의 불화7 18.05.05 57 1 3쪽
6 그와의 불화6 18.05.04 67 1 6쪽
» 그와의 불화5 18.05.03 68 1 9쪽
4 그와의 불화4 18.05.02 68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5 1 5쪽
1 그와의 불화1 +3 18.04.27 113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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