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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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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74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04 15:02
조회
66
추천
1
글자
6쪽

그와의 불화6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밤새 L이 생각해낸 여인은 이천여 명 중 고작 세 명이었다.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수많은 여인들 중에 그나마도 연고나 나이, 이름 따위의 수소문해볼 만한 이력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뭔가 남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닐까? L은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부질없는 짓이야.”

하초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L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일단 만나봐야겠어. 어쩌면 그 중에 나를 정말로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제 와서...”

“그게 말이야, 난 확인하고 싶어. 단 한 명쯤은 있지 않았을까?”

L이 처음 찾은 여인은, L의 첫 여자, 그러니까 박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이었다. 처음엔 절대로 안된다고 정색을 하는 경찰 친구를 설득하고 협박해서 받아낸 주소를 들고, L은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 무렵,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을 나오는 그녀를 만났다.

“오랜만이야.”

그녀는 쓰레기봉투를 손에 쥔 채로 그 자리에 잠시동안 굳어 있었다. 하긴, 벌써 이십팔 년 전 일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지... L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통통하던 볼살은 중력을 이기지 못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고, 눈가도 볼살의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다. 허술한 옷차림 속에 비치는 실루엣은... 그 어디에도 L이 간절히 탐하던 빛나던 시절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녀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던 자신이 대견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 잠깐만...”

그녀가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다시 L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대뜸 물었다.

“무슨 일이야?”

뭐, 반갑게 맞아 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대뜸 용건부터 말하라는 건가? L은 기분이 좀 상했다.

“뭐,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리고 지금 여긴 내 식구들이 사는 동네야,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내 입장이 뭐가 되니?”

그녀는 연신 주위를 살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난 그냥...”

“잘 지내는 거 알았으면, 조용히 돌아가. 여기서 길게 얘기할 시간 없어.”

“그래, 알았어.”

L은 떠밀리듯 돌아섰다. 그때였다.

“명함 있으면 줘. 혹시 나중에 시간 되면 연락할게.”

L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아선 채 명함을 내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현관으로 돌아갔다.

“거봐. 내가 부질없다고 했지?”

하초가 이죽거렸다. L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L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럴 만하지, 그럴 만해... 매일 밤, 폭죽처럼 터지던 교성과 환호, 그리고 매일 아침 새벽출근하면서도 늘 정갈하게 차려놓았던 아침상... 따귀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L은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고, 하초도 그의 심경을 이해하는 듯 내내 말이 없었다.

그날 밤 둘, 아니 한몸인 그들은 조용히 불을 끄고 누웠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선잠이 들었던 L을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나야... 아깐 너무 놀라서 그랬어. 많이 서운했지?”

“아냐, 난 괜찮아. 근데 지금 몇 시니?”

“세 시... 넘 늦었지?”

“아냐, 괜찮아. 근데 무슨 일이야?”

“아까 저녁 일이 내내 맘에 걸리기도 하고... 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 사실 많이 반가웠어.”

깊은 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는 L의 안부와 근황을 물었다. L은 드러누운 채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그렇지... 그냥 그래... 회사 다녀... 그랬구나, 잘 됐네...

“신랑은?”

“자.”

“혹시 술 마셔?”

“응... 근데, 나 가끔 너 생각했어.”

“그래?”

“응. 그때, 네가 떠나고 나서 한동안 참 힘들었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너와 함께 지낸 밤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 세월이 이렇게 지냈는데도... 떠올릴 때마다 온몸이 짜릿짜릿하고, 막 뜨거워지고 그래.”

“내가 좀 잘 하긴 하지. 흐흐”

“그래, 그 뒤로 지금껏 너 만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한번 만날까?”

생각 좀 해보자... 그녀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다. 깊은 밤에 신랑을 재우고, 혼자 나와 술을 마시면서 전화를 한다... 그리고 만나자고... L은 그녀에게 물었다.

“너 나 사랑했냐?”

그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그런 것 같아. 널 잊을 수가 없었어... 아, 미안해... 내가 술을 많이 마셨나봐... 나중에 또 연락할게.”

전화기가 끊겼다. L은 뜨거워진 전화기를 귀에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반성했다. 그 여인은 빛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난다 한들 결코 그때로 돌아갈 순 없으리라. 더군다나 L은 본의 아니게 고자가 되었다.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만으로 그녀를 대접할 순 없었다.

“정신 차려.”

하초가 말했다.

“깼어?”

“그럼, 너라면 잠이 오냐?”

하초가 길게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여자, 널 사랑한 게 아냐. 착각하지 말라고.”

“야, 사랑했다잖아! 만나고 싶다잖아!”

L이 반박했다. 그러나 L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이란 결국 지긋지긋한 성욕의 다른 이름이란 걸. 하초는 자상을 들쑤시듯 일침을 놓았다.


“그건 말이야. 널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 날 만나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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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4 18.05.18 50 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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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와의 불화15(끝) 18.05.13 54 1 6쪽
14 그와의 불화14 18.05.12 55 0 9쪽
13 그와의 불화 13 18.05.11 52 1 6쪽
12 그와의 불화12 18.05.10 62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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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6 1 7쪽
9 그와의 불화9 18.05.07 46 1 4쪽
8 그와의 불화8 18.05.06 67 1 4쪽
7 그와의 불화7 18.05.05 56 1 3쪽
» 그와의 불화6 18.05.04 67 1 6쪽
5 그와의 불화5 18.05.03 67 1 9쪽
4 그와의 불화4 18.05.02 68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5 1 5쪽
1 그와의 불화1 +3 18.04.27 113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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