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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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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72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10 12:59
조회
61
추천
1
글자
5쪽

그와의 불화12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소녀는 처음부터 과학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계량기와 비이커, 알콜램프와 스포이드, 가지런히 놓여진 각종 화학용액과 방부액에 절여진 짐승들의 사체. 소녀는 매번 그곳에 들어설 때마다 등줄기가 뻣뻣해지곤 했다.

그날, 실험용 테이블 위에는 진한 황산과 물, 그리고 알코올램프 따위가 놓여 있었다. 정면의 칠판에는 ‘염산의 성질’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밑에는 흡사 암호와 같은 화학기호들이 적혀 있었다. 염산의 성질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소심한 소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실험이 시작되었다.


“사고였어요. 황산이 제 교복 치마 위로 쏟아졌어요. 놀란 친구들은 그 위에 물을 부었어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지금은 괜찮아?”

“오래 전 일인걸요. 이젠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아요. 다만... 흉터가 생겼어요, 배꼽 아래부터 사타구니와 허벅지에.”

“그래서 불을 켜지 못하게 했구나.”

“네, 아주 끔찍한 흉터에요, 볼 때마다 진저리가 처질만큼.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어.”

어둠 속에서 L이 말했다. 그녀가 내내 숨기고 싶어 했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가늠해볼 수 없었지만, L은 자신이 거뜬히 그녀의 상처쯤은 보듬어 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동은 이미 켜져 있었고, 연료는 충분했다.

“많이 놀라실 거예요.”

그녀가 다시 긴 한숨을 내쉬고는 조명을 켰다. 그녀의 몸을 가렸던 가운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L은 그녀의 하체를 잠식하고 있는 거대한 흉터를 보았다. 마치 용암처럼 흘러내려 딱딱하게 굳어진 살들은 붉게 변색된 채로 사타구니를 따라 깊은 골을 만들고 있었다. 불빛 아래, 그녀는 L의 처분을 기다리는 듯이 바른 자세로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L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연마되지 않은 돌덩이처럼 표면이 거칠고 딱딱했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L은 혼란스러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그녀를 품고 싶었지만, 시동은 어느새 꺼져버렸다. 입술을 탐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어떻게든 다시 시동을 걸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흉터는 외면하려 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결국, L은 그녀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전 괜찮아요.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 맘 같지가 않네.”

그녀가 웃으며 L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그래도 다른 남자들처럼 꽁무니를 빼지는 않았잖아요. 전 이해해요. 제가 보기에도 끔찍한 걸요. 대리님은 참 착한 사람 같아요.”

그들은 다시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그러나 L은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만치 않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날 보았던 그녀의 흉터는, 그녀에 대한 연민, 죄책감, 당혹스러움 따위의 감정들과 함께 L의 기억 속에 선명한 화인으로 남게 되었다.


“근데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야... 어째서 그녀를 선뜻 품을 수 없었을까?”

그녀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L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흉터 때문이라며?”

하초가 삼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초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게 여즉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비위가 굉장히 좋은 편이거든. 어째서 그녀에게만 그럴 수 없었는지, 지금도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아. 뭐,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말이지, 난 그녀랑은 꼭 하고 싶었거든.”

기실, L이 그녀를 찾고 싶었던 것은, 이전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사랑 따위를 굳이 확인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다만 그날의 일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그녀의 치부에 자신이 얹어주었던 수치심과 민망함에 대해, 다음날 몰래 옷을 챙겨입고 그곳을 빠져나온 자신의 무책임함에 대해, 그리고 매번 미소를 지어주는 그녀에게 아무 일 없는 듯 사무적으로만 대했던 몰인정함에 대해 L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그녀는 암병동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하여 여즉 뽀로통한 하초를 이끌고 그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사과를 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다급함이 L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게, 네 몸에 아주 심한 화상이 있었거든.”

하초가 말했다.

“화상? 난 그런 거 없는데?”

L이 반문했다. 그러자 하초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너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아주 오래 전 일이야.”

뭔, 개소리야? 화상 따위를 기억할 리 없는 L은 중얼거렸고, 하초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L 또한 그날 밤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골몰하고 있는 둘 아니 한몸인 그들을 태운 열차는 지하로 뚫린 길을 따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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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10 18.05.25 40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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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2 18.05.17 41 1 4쪽
16 농담2.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 1 18.05.16 58 1 4쪽
15 그와의 불화15(끝) 18.05.13 54 1 6쪽
14 그와의 불화14 18.05.12 55 0 9쪽
13 그와의 불화 13 18.05.11 52 1 6쪽
» 그와의 불화12 18.05.10 62 1 5쪽
11 그와의 불화11 18.05.09 62 1 5쪽
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6 1 7쪽
9 그와의 불화9 18.05.07 46 1 4쪽
8 그와의 불화8 18.05.06 67 1 4쪽
7 그와의 불화7 18.05.05 56 1 3쪽
6 그와의 불화6 18.05.04 66 1 6쪽
5 그와의 불화5 18.05.03 67 1 9쪽
4 그와의 불화4 18.05.02 68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5 1 5쪽
1 그와의 불화1 +3 18.04.27 113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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