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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님의 서재입니다.

농담1. 그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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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71
작품등록일 :
2018.04.27 17:25
최근연재일 :
2018.05.26 10:0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1,571
추천수 :
25
글자수 :
59,728

작성
18.05.0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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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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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4쪽

그와의 불화9

그것은 아주 사소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일말의 진정성에 하릴없는 장난기를 조금 섞어 치댄다. 다소의 취기를 첨가하고, 근거없는 상상력을 골고루 뿌린 후에 오븐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지루한가? 그렇지 않다. 달궈진 오븐 안에서는 제멋대로 부풀어오른 추잡한 상념과 도덕율이 격렬히 부딪히고, 또 폭발한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오븐을 열었을 때, 의도와는 다른 낯선 결과물에 황망해지고 만다... 무언가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거나, 과열되었거나, 오븐에 너무 오래 넣어두었거나.




DUMMY

아직 어둠 속에서 L이 눈을 떴다. 심한 갈증과 숙취로 인한 어지럼증에 L은 한동안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L의 잠을 깨운 것은 처음엔 아주 작은 소리였다. 사귀가 맞지 않는 문틀의 삐걱임 같기도 했고, 귓속말로 전하는 연인들의 밀담 같기도 했다. 처음엔 무시해도 될 만한 작은 거슬림은, L의 혼미하던 의식을 현실의 어둠 속으로 지긋이 되돌리고 있었다.

L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서, 소리가 들려오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소리는 조금도 확성되었다. 낮고 긴 흐느낌이었다. L이 문틈을 조금 벌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흐느끼고 있었다.

주여.... 주여....

간헐적인 여음구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 대부분의 중얼거림은 흐느낌에 묻혀 버렸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표정이 낯설었다. L은 어정쩡하게 문틈을 붙잡고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어느덧 흘러내린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모았던 손을 풀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북받친 그녀의 언어들은 말이 되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다. 문틈을 잡고 있는 L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동안 이어지던 통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미동도 없었다. 잠이 든 걸까? L은 착찹한 심경이 되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깜짝 놀랄 정도의 무표정인 채로 성경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L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벽에 걸린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두 모자의 사진... 그 배후에 도사린 도저한 상처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L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아들의 침대 귀퉁이에 앉아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말했다.

“그냥 나, 여기서 살까? 여기엔 내 가족이 있잖아... 지난 세월 동안 못해준 것들도 해주고, 함께 교회도 다니고.”

“이봐, 자네답지 않게 왜 이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가족이 아니야.”

하초가 말했다.

“왜? 그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면서 돌봐주고, 교회에도 같이 가고, 가끔 좋은 데로 놀러도 다니고... 다들 그렇게 살잖아?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냐? 내 아이라고, 그 아이를 혼자 키워낸 여자고. 지금이라도 내가 살뜰히 돌보면서 지내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뭐, 좀 늦긴 했지만, 그거야, 살면서 내가 더 노력하면 되잖아.”

"이봐, 정신 차려.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그녀를 괴롭히지 말고...“

“내가 뭘, 괴롭히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잘 해주면 되잖아.”

L은 다소 흥분했다.

“그냥 두 모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떠나자고... 그녀도 그렇게 믿어주길 바라고 있잖아.”

“아냐, 내가 그 두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난 할 거야.”

L이 고집을 피우자, 하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기 책상 두 번째 서랍을 한번 열어봐.”

열어본 두 번째 서랍에는 흰 규격봉투의 편지들이 수북했다. 군사우편이 아니었다. L은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남 해남우체국 사서함 6호 박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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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11(끝) 18.05.26 39 1 7쪽
25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10 18.05.25 40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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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4 18.05.18 50 1 4쪽
18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3 18.05.17 63 1 5쪽
17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2 18.05.17 41 1 4쪽
16 농담2.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 1 18.05.16 58 1 4쪽
15 그와의 불화15(끝) 18.05.13 54 1 6쪽
14 그와의 불화14 18.05.12 55 0 9쪽
13 그와의 불화 13 18.05.11 52 1 6쪽
12 그와의 불화12 18.05.10 61 1 5쪽
11 그와의 불화11 18.05.09 62 1 5쪽
10 그와의 불화10 18.05.08 46 1 7쪽
» 그와의 불화9 18.05.07 46 1 4쪽
8 그와의 불화8 18.05.06 67 1 4쪽
7 그와의 불화7 18.05.05 56 1 3쪽
6 그와의 불화6 18.05.04 66 1 6쪽
5 그와의 불화5 18.05.03 67 1 9쪽
4 그와의 불화4 18.05.02 68 1 6쪽
3 그와의 불화3 18.05.01 88 1 5쪽
2 그와의 불화2 18.04.30 125 1 5쪽
1 그와의 불화1 +3 18.04.27 113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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