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이별 (5)
170.
“아... 혹시 제가 방해한 거라면 저... 정말 죄송합니다. 허나 제가 한가을 이사님을 오래 붙잡아 둘 순 없는지라...”
경비실 안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읽고 허둥대는 넬슨이라는 노인. 허나 뭔가 한겨울 역시 역으로 허둥대며, 노인에게 대꾸할 뿐이다.
“아... 방해하신 거 아니에요. 넬슨 아저씨. 야야. 한가을 왔대. 가자.”
“... 말하려던 거 있는 거 아니었냐.”
“아. 음. 있긴 한데... 이따 밤에 집에서 얘기해도 돼?”
“... 니 맘대로 해라.”
“흐히히... 그럼 빨리 가자.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대.”
나의 대답에 음흉하게 웃으며, 경비실 밖으로 나가는 한겨울. 이렇게 또 내 방에 들어오는 걸 기정사실화 시켜 놓는구나. 영악하다, 영악해.
한편 정문 쪽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고급 승용차 안에 탑승한 한가을이 차 창문을 내린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겨울이 왔구나? 메시지 보낸 지 11시간 만에 올 줄은 몰랐네. 아무튼 반갑다. 한 달 만이지?
“... 친한 척 하지 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
“남이라니, 오빠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조금 섭섭한데. 하하-”
“역겨우니까 닥쳐. 쓰레기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이런. 우리 겨울이 많이 거칠어졌구나. 그간 고생 많았나 보네.”
“... 우웩. 짜증나.”
한겨울이 헛구역질 하는 시늉을 했지만, 한가을은 계속 젠틀한 웃음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아버지 면회 시간은 이미 끝났어. 안정이 필요하신 터라, 의사가 허락한 시간이 짧거든. 그래서 말인데... 겨울아. 오늘은 간만에 집에서 자고 가지 않을-”
“여기서 자고 가라고? 내가 왜? 미쳤어?”
“...”
“그리고 집? 웃기지마. 여긴 내 집 아냐. 내가 여기 온 건 아버지, 아니지. 그 인간 얼굴 보러 온 게 아니라, 니들이랑 절연 선언 하러 온 거야. 그냥 여태 그랬던 것처럼, 영원히 연 끊자 말하러 온 거라고.”
한가을이 벌처럼 쏘아붙였음에도, 그저 넉살 좋게 웃는 한가을.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후회할 자신 있다면 말이지.”
“... 뭐?”
“말했잖아? 아버지 위태위태하시다고. 형제자매 한 명을 잃는다는 건 정말 너무 아쉽지만... 겨울이 네가 상속 포기해 준다면 나야 좋지. 입이 하나 줄면 내 몫만 배로 느니까.”
“...”
“네 남편, 아니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아니다. 이건 내가 거론할 바 아니지. 여튼 연 끊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아버지께 말씀드려. 내겐 아직 권한 없는 일이거든.”
수상하다.
띠링-!
[ 한가을 ( 26세 ) ]
[ 마나량 : 15 ]
[ 주의 !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 마나량입니다. 클론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
지금 눈앞의 한가을이, 사실 원격으로 조종하는 클론이라는 점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워낼 ‘저쪽 세계’의 한가을 역시, 대외활동은 항상 클론으로 했으니까.
“그나저나 겨울아. 내일 아버지 만날 거면 차라리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나랑 같이 아버지 보러 가는 건 어때?”
진짜 수상한 점은 바로, 녀석이 한겨울과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연신 내 쪽을 힐끔대고 있다는 것.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뭐? 내가 왜 여기서 자?”
“왜긴. 아직 연 안 끊었으니까 우린 가족이고, 여긴 너희 집이니까. 언제든지 네가 와서 잘 수 있는 너희 집.”
“...”
“흐음... 권민성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룻밤 자고 가시는 것에 대해서요.”
녀석이 처음으로, 내 쪽으로 발톱을 드러냈다.
---
한가을의 승용차를 타고 정원 안쪽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사용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슈마허 본가의 잡무는 다 로봇이 맡아서 한다면, 이곳 매지시아 본가는 그 일들을 모두 사용인들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가을의 승용차가 멈춘 본채 정문 앞에도, 역시 정중한 복장의 중년의 여자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가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도련님. 근데 같이 오신 여자분은... 설마...”
“아. 엠마 아주머니. 바로 알아보시네요. 맞아요. 우리 막내 겨울이.”
“예? 하... 하지만... 한겨울 아가씨께서는...”
“무슨 소리세요. 겨울이는 그저 잠시 가출했었던 거잖아요.”
“...”
“기억하시죠? 아주머니?”
“오... 오호호! 그랬었죠. 내 정신 좀 봐. 나이를 먹으니까 당연한 걸 기억을 못 하네. 이사님 말씀대로에요. 오랜만이에요. 한겨울 아가씨. 오호호호...”
어쩔 줄 몰라 하던 엠마가 억지로 웃으며 한겨울에게 인사했지만, 한겨울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저 한가을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한편 한가을은 씨익 웃으며, 이번엔 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겨울이 남자친구, 이니시움 아카데미의 권민성 교수님. 그 얼마 전에 누명을 쓰셨는데, 마침 오늘 수배가 풀리셨더라고요.”
“아. 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권민성 교수님.”
“... 반갑습-”
쿡.
인사하려니까 한겨울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살짝 찌르는 가운데, 한가을은 웃으며 엠마에게 지시했다.
“전 일단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두 사람 방 하나만 안내해 줘요. 아. 겨울이 가출하기 전에 쓰던 방 있죠? 거기가 좋겠다. 거기로 안내해 줘요.”
“예? 예...”
“겨울아. 오빠는 이만 들어가 볼 테니 오늘 밤은 남자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고, 내일 이야기하자.”
“... 당장 꺼져. 너랑 말도 섞기 싫으니까.”
---
“에... 여기가 두 분 방이에요.”
집사 엠마로부터 우리가 안내받은 곳은, 평범하게 침대와 테이블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는 평범한 손님맞이용 방이었다. 방 어디에도 한겨울이 사용했던 흔적 따위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가운데.
“... 무슨 일 있으시면 침대 옆의 호출벨을 눌러 주시면 되고요... 그...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펴... 편히 쉬세요.”
꾸벅- 달칵.
엠마는 황급히 인사를 마치고, 거의 도망치듯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모습에, 한겨울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에휴. 엠마 아줌마 저러시는 거 처음 보네... 하긴 뭐. 내가 돌아올 거라 생각 못 했던 거겠지.”
“...”
“그보다... 너 일로 와 봐.”
그리 말하고선, 내 손목을 세게 잡고 침대로 끌고 가는 한겨울.
털썩- 스븍-
녀석은 나를 침대 위에 집어던지듯 앉힌 다음, 내게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고서는 내 무릎 위에 올라타서는, 자기도 꼬물꼬물 이불 안으로 들어오더니.
우우우웅-
‘... 됐다.’
마나를 운용해 작은 전구 모양의 [빛]을 만들어, 이불 안을 밝혔다.
“... 너 뭐 하냐.”
‘응? 아. 우리 여기서 그냥 얘기하면 안 돼. 아마 이 방에 카메라랑 도청기 있을 거고... 이렇게 해야 감시를 피할 수 있어.’
입모양만으로 대답하는 한겨울... 그런 거였냐. 난 또.
‘야. 그나저나 대체 왜 자고 간다 한 거야? 한가을 그 새끼 딱 봐도 뭔가 꾸미고 있잖아.’
‘나도 알아. 오히려 녀석이 뭘 꾸미고 있나 알아내려고 들어온 거야.’
‘굳이?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아까 만났을 때 족치면 됐잖아.’
‘... 아까 그거 한가을도 아냐. 원격으로 조종하는 클론이지.’
‘클론이라고? 내가 아는 한가을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었는데? 하는 짓도 똑같고.’
‘... 클론이니까 똑같이 생긴 건 당연하고, 조종도 한가을이 직접 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한가을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려고 자고 간다 한 거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네... 뭐야. 그런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좀 해주지. 난 또 니가 나 이 집안사람들이랑 화해시키려는 줄 알고... 혼자 삐질 뻔 했잖아.’
뾰로통한 얼굴로 작게 속삭이는 한겨울. 삐질 뻔한 게 아니라, 내가 볼 땐 이미 살짝 삐졌었다.
‘...’
‘...’
한편 얘기가 다 끝났음에도,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도, 내 허벅지에서 내려올 생각도 않는 한겨울. 묘하게 민망해져,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
‘...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고?’
‘... 응? 나도 몰라. 뭐... 근데 그냥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나? 이히히.’
‘... 안 될 건 없긴 한-’
띠링-! 띠링-!
순간 이불 밖에서 들려오는 마나블렛 소리에, 뭔가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나와 한겨울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 나가자.’
‘... 응.’
파하-
고작 이불 몇 분이나 뒤집어쓰고 있던 것만으로, 녀석이나 나나 얼굴이 온통 새빨갛고 땀도 조금 흘린 가운데, 나는 마나블렛을 살폈다.
[ 라가놈 -> 권민성 : 허허. 수배 풀린 것 축하하네. ]
[ 라가놈 -> 권민성 : 두부라도 사다 줘야 할 터인데, 아쉽게 됐군. 허허. ]
메시지의 발신자는 다름이 아니라, 꼴도 보기 싫은 노인네였다.
[ 권민성 -> 라가놈 :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
[ 라가놈 -> 권민성 : 자초지종은 방금 윤재 군에게 전해들었네. ]
[ 라가놈 -> 권민성 : 그 원로운인지 이원인지 하는 작자가, 시간을 역행하려 한다지? 허허. ]
“...”
[ 권민성 -> 라가놈 : 그거 관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
[ 라가놈 -> 권민성 : 물론이네. 2000번대의 삶에서, ‘시간 역행’에 관련해서 실험을 해 본 적이 있거든. 허허. ]
[ 라가놈 -> 권민성 : 일단 결론만 이야기하면, ‘시간 역행’ 현상이 일어나면 타임 패러독스가 발생하게 되네. ]
“... 타임 패러독스?”
라인하르트의 알 수 없는 말에, 혼잣말을 한 바로 그 순간.
똑똑-
“계십니까?”
문 밖에서 한가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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