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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07,310
추천수 :
3,569
글자수 :
1,721,531

작성
22.12.29 22:00
조회
219
추천
4
글자
21쪽

북쪽 전선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198화



“X발. X발. 씨이이이팔.”


우주를 뛰어 넘는 와중에도 욕이 술술 나왔다. 몇 번을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어떻게 그 타이밍에 움직일 생각을 다 했을까.


“아니. 괜찮아. 애초에 마인드부터 글러먹었던 거야. 안 다치면 되지. 상처 없이 신을 패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시 메달을 따러 가면 된다. 걱정은 자신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한결 차분한 마음으로 집결지로 향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커맨드 센터와 같은 곳이다.


해방군 소속들은 상황이 터지자마자 각자 맡은 구역으로 향했지만 이 몸은 해방군 소속이 아니다. 그래서 이곳에 들러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으로 향할 생각이다.


겸사겸사 돌아가는 상황도 숙지하고.


집결지는 분주했다. 여럿이 달려들어 신이 움직이는 의도를 분석하고, 이를 반영하여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중이다.


희생자가 적지 않다 들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필멸자가 신을 죽인다. 그 신이 악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배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들은 그 열망의 끝을 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었다.


해방군의 활동을 구경하고 있자니 누군가 다가와 나를 맞이해주었다.


“박상혁. 지금 온 건가?”


마르고 지적인 인상의 남성이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목소리는 익숙하다.


“사엘?”

“그래. 실제로는 처음 보는 군.”


날 맞이해준 이는 해방군의 스카우터였다. 맨날 운석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니 조금은 반갑다.


“그런데 사엘은 여기 왜 있어요?”

“이제 곧 총력전이잖나. 신병들은 신의 손짓 하나에 펑펑 터져나갈 텐데 굳이 목숨을 허비시킬 필요는 없지.”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그럼 지금은 한가해요?”

“그럴 리가. 너를 호출한 뒤 곧바로 상황실로 넘어갔다. 지금은 이곳 일을 돕고 있다.”


역시. 우주 중소기업 해방군. 잉여인력을 남길 리가 없다.


“마침 잘 되었어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에요? 신은 왜 지금 움직였대요?”

“잘은 모르지만 변수를 만들고 싶은 것 같다.”


사엘은 상황판을 가져와 지금까지의 상황을 도식으로 나타냈다.


“해방군은 신을 말라죽일 생각이었다. 상대의 세력을 줄이고 고립시킨 뒤 쓰러트린다.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지 않나. 우리가 유리한데 굳이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상황판에는 날짜의 변화에 따른 예상 승률의 추이가 기록되어 있었다.


70%를 전전하던 승률은 어제를 기점으로 95%를 기록했다. 해방군의 작전이 먹혀들었다는 방증이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승률 100%를 다 채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도 무사히 메달을 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데 신이 움직이고 말았다.


“그대로 말라 죽느니 아직 확률이 남아 있을 때 뭐라도 해보려고 한 것 같아. 우리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이지. 얌전히 뒈질 것이지. 쯧.”


사엘이 혀를 차며 손가락을 퉁겼다. 상황판의 도식이 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전력을 4개로 나누어 신 주위를 포위한 상황이다.”


고개가 기울여졌다. 총력전을 해도 간당간당한 판에 전력을 쪼개다니?


거기에 바로 들이 박는 게 아니라 포위? 싸우라고 나를 부른 게 아니었나?


사엘은 내 의아함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황판의 도식을 또 한 번 바꾸었다.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 이해는 가. 그런데 어쩔 수 없다고. 자. 봐봐.”


상황판에는 해방군이 한 군데 모여 신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엘은 그 중 신의 모형을 붙잡아 이동시켰다. 방향은 해방군이 있는 반대 방향이었다.


“자. 이러면 어떻게 막을래?”

“신이 도망을 간다고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우주는 굉장히 넓다. 신이 잠적하고 자취를 감춘다면. 그래서 힘을 회복한다면 해방군에게는 최악일 것이다.


그렇게 쉽게 놓아주려고 지금까지 힘을 빼둔 게 아닐 테니까.


“포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알겠지?”

“신을 포위만으로 죽일 수는 없을 텐데요.”

“그렇지. 결과적으로는 포위망을 좁혀 한 번에 공격할 거야. 그럼 협공이랑 다를 게 없잖아.”


내 고개는 한층 더 기울어졌다.


“포위망을 좁히기 전에 신이 망을 뚫고 도망가면?”

“절대 그럴 리 없어.”

“왜요?”

“근처에 행성이 있거든. 너라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거 같은데.”


사엘의 말대로 짚이는 게 있었다. 녀석들은 행성을 방패로 삼은 게 아니다. 인과율을 방패로 삼은 거지.


운명도, 이 우주도. 신이 정한 규칙대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규칙은 너무나도 정교해 신조차도 함부로 어기지 못한다.


만약 신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내가 있는 지구를 깨부쉈으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과율은 신의 만행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을 이용하여 우리 우주에서 신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엘과 해방군은 내 승리를 참고삼아 전략을 짠 것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각 방위마다 초월자 셋 씩 붙었으니까. 제약이 걸린 신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사엘은 자신만만했지만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뭔가 엉성하다. 왜 그렇게 엉성한가 생각을 해보니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신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은 안 써도 되었겠네요.”

“... 아쉽지만 그렇지.”


적의 도망을 막기 위해 포위를 했다. 그럼에도 각개격파를 당하는 게 두려워 요행을 준비한 것이다.


애초에 신이 도망을 못 칠 정도로 억누를 수 있다면 이런 요란한 작전은 안 짜도 되었을 것.


몰아붙이는 쪽이 약하기 때문에 나온 아이러니함이다. 그래서 이렇게 엉성했던 거고.


“에휴. 뭐. 어쩔 수 없죠.”


신이 뉘집 개도 아니고. 강한 건 당연하다. 구질구질하더라도 방법을 찾아야지.


게다가 나는 해방군 소속도 아니지 않나. 작전을 주도하는 건 해방군이다. 나는 협조하는 역할일 뿐이고.


“그럼. 저는 뭘 하면 될까요?”

“포위망 중 북쪽을 맡아줬으면 해.”


초월자는 13명이고, 지켜야 하는 방위는 4쪽이다. 그러니 숫자도 3, 3, 3, 4로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엘이 걱정하는 곳은 다름 아닌 4명의 초월자가 있는 곳이었다.


“다른 방위는 해방군 지고의 세 분께서 한 곳씩 맡으셨어. 오히려 안전하다고 볼 수 있지.”


지고의 3인, 통칭 3거두는 초월에 초월을 거듭한 사람들이다. 신에 준하는 이들이며, 잠시 동안은 신을 맞상대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위험한 쪽은 오히려 북쪽이라고 할 수 있어. 아마 신이 그쪽으로 향하면 우리는 4명의 초월자를 잃게 될 거야. 그러니 그 곳을 지켜줘. 그게 우리 해방군이 요구하는 거래의 대가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엔 갚을 차례다. 상대방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력해야지.


그래도 조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만약 신의 목적이 도주가 아니라면? 비장의 한 방이 있는 거라면 어느 누구는 크게 다칠 텐데요.”


최소한 4방향 중 한 쪽은 걸레짝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사엘은 그마저도 예상을 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다. 신이 인과율을 어기면 그의 능력에 제약이 걸린다. 그 제약이 중첩되면 죽음에 이르고. 한 부대가 궤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면 싸게 치른 셈이야.”


정면대결을 한다고 해서 사상자가 적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의 말대로 4분의 1이면 싸게 먹힌 걸지도 모른다.


내가 지휘관이었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주변의 눈총이 따갑다. 원래 전장에서 사기를 저하시키는 발언은 금물이다. 부정타는 소리를 한다며 처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만약 내가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경을 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누군가는 고깝게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고.


하지만 이 몸은 초월자인데?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인데? 전력이 모자란 상황이니 내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흠. 갑자기 내 안의 못된 심보가 고개를 내밀었다. 상황이 답답한 것도 한 몫 거들었다.


나는 궁시렁거리는 녀석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쟤네가 뭐라 그러니까 갑자기 가기 싫어지네.”


사엘의 눈이 커졌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농담이지?”

“농담 같아요?”

“이건 거래지 않나!”

“거래죠. 그런데 내가 눈치를 봐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던 거 같은데?”


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운석을 통해 나를 오랫동안 지켜본 녀석이니 나의 심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내 취미가 서열정리고, 특기가 갑질이라는 사실 또한 알겠지.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죄 없는 사람을 건드리지는 않는데. 설마 자기 동료가 찍힐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가 머리를 긁으며 양해를 구했다.


“중요한 상황이야.”

“그럼 더 신중히 행동했어야죠.”

“긴장을 하다보면 예민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나.”

“나도 긴장할까요? 예민해지면 좋겠어?”


검정 상혁이라도 불러오지 않는 한 내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상황실의 지휘관에게 찾아갔다.


지휘관은 처음에 짜증을 냈다. 상황이 터진 상황실이 얼마나 바쁜데 방해를 한다고.


그러나 안건을 듣고는 생각을 수정했다. 그만큼 나는 계획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었다.


둘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에게 돌아와 결정사항을 전했다.


“저들의 잘못을 인정하네. 그러나 지금은 전시 상황. 한 명, 한 명의 인재가 부족하여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게.”


험담을 하던 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발걸음을 돌려 금메달을 다시 따러 갈까 고민했다. 만약 지휘관의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실례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그래서 자네의 북쪽 지원에 몇 명 정도 수행원을 붙여줄까 하는데. 어떤가?”

“수행원은 제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거. 마음에 드네요.”


사과를 시키거나, 처벌할 경우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현장 지원을 선택한 모양이다. 밟을 거면 안 보이는데서 밟으라고.


현장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북쪽 전선의 사령관인 내가 정도껏 덮을 수 있는 일이다.


만족스러운 거래를 끝낸 우리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질 수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별로 훈훈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그건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나는 수행원들을 붙잡고 곧바로 북쪽 전선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 * *


“오! 드디어 왔군.”

“후... 이제 뒈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4명의 초월자가 마중을 나왔다.


“어라? 혼자 온다고 들었는데 이 비실비실한 애들은 뭐야? 죄다 기절했네?”

“상황실에서 데려왔어요. 똑똑하다니까 뭐라도 의견을 내겠다 싶어서. 그런데 조금 급하게 온다고 다들 정신을 잃었나 봐요.”


사실 정신을 잃은 건 다른 이유에서지만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첫인상부터 폭군의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급하게 왔다는 말에 초월자들의 표정이 감동으로 물든다.


“이야. 사람을 기절시킬 정도로 급하게 왔다니. 고맙네. 고마워.”

“그러게 말이야. 감동이야.”


과한 환대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저들은 신과 싸우게 될까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엘의 말마따나 평범한 초월자 4명이면 신에게 박살이 날 테니까.


그래서 해방군 소속이 아닌 나에게도 이렇게 경의를 표하며 열렬히 환영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뭐. 어쨌든 나에게는 좋은 일이다. 나는 모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북쪽을 맡은 박상혁입니다. 이번 작전 죽지 말고 잘 해봐요.”


4명의 초월자 또한 웃으며 자신의 소개를 끝마쳤다. 처음 만났지만 그들의 능력을 연구했던 적이 있는 만큼 익숙한 얼굴들이다.


“일단 상황부터 들을게요.”

“뭐. 별다른 건 없어. 전선을 유지한다. 상황실의 연락이 오면 포위망을 좁힌다. 신이 이상 행동을 보이면 곧바로 상황실에 연락을 취한다. 이렇게 세 가지가 끝이야.”


간단한 임무다. 그러나 그 간단한 임무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신.


“신이 가만히 있지 않아. 사방을 돌아다니며 전선을 확인하고 있어. 분명 무언가 계획하고 있을 거야.”


신과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아닌 척 하더라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감정이다.


단순한 임무라고 해서 꼭 수행하는 게 간단하리라는 법은 없다.


상대가 언제 공격에 나설지 모른다. 상대가 공격에 나서면 자신은 죽는다. 이 두 가지 사실이 해방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죽으면 아프려나? 어떤 느낌이지? 이딴 쓸 데 없는 생각에 잡혀 공포심만을 키우는 것이다.


분명 경비를 서고 있는 인원들 중 일부는 차라리 전투가 벌어지길 바랬을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공포보다는 차라리 편안한 안식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죽는다면 더 이상 위험지역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될 테니.


신은 바보가 아니다. 불리한 와중에도 기만전술을 통해 해방군들에게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초월자들을 시켜 북쪽의 모든 인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뒤, 정점의 DNA 출력을 80%까지 끌어올렸다.


나의 심장에서 막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집어삼켰다. 단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선사했다.


모두가 한 순간이나마 신의 존재를 잊을 정도.


그 사실을 깨달은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의 부대에도 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으니.


초월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소리 높여 나를 칭송했다.


“사령관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우리는 생존한다!”

“신의 모가지를 따고 우주에 평화를 가져오자!”


병사들은 이에 호응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와아아아!!!”


침체되어 있던 북쪽 전선의 사기가 올라갔다. 이 정도면 작전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으리라.


나는 소리를 지르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는 초월자들과 막사로 돌아갔다.


“좋아. 이제 좀 제대로 굴러가는 느낌이 드는구만. 고마우이.”


초월자 중 하나인 세프니아가 내 등을 두드렸다. 시간 조작 계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초월자로, 내가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이기도 하다. 친밀성이 높은 것 같다.


그런데 왜 반말을 하는 걸까. 군대에서는 계급이 전부인데. 다른 초월자들에 비해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초월의 영역에 이르면 노화가 멈춘다. 저들은 몇 백 살, 몇 천살 살았으니 이제 19살이 된 내가 어린 애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힘이 더 센데... 서열정리 한 번 들어갈까?


꼰대는 아니지만 내 안의 유교 정신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외국인? 외국 문화? 내가 사령관으로 있으면 이곳이 바로 한국이다.


당장 세프니아의 군기를 반짝이는 전투화처럼 바싹 갈고 닦고 싶었지만... 참았다. 기껏 올라간 사기를 떨어트릴 정도로 무능한 사령관은 아니다.


눈을 깜빡거리는 세프니아에게 미소를 지어줄 뿐이다. 일단은 먼 길 왔으니 막사에서 선잠이라도 잘 생각이다.


그런데 내 미소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을 발생시켰다. 초월자 중 하나가 자기 막사로 안 돌아가고 내 쪽으로 향한 것이다.


“다르미안. 여긴 제 막사인데요.”

“알고 온 거야. 후훗.”


행성여왕 다르미안.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들로 도시를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호색가다. 나에게도 러브콜을 보낸 적 있고.


만날 때부터 경계했는데 어쩐지 잠잠하더라니.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막사 밖으로 밀었다. 그러나 다르미안은 권능을 사용하여 내 방 안으로 잠입했다. 오히려 상의를 벗으며 유혹하기까지.


“하아... 다르미안. 지금은 전시잖아요. 사리분별을 했으면 좋겠는데.”

“이해해 줘. 죽다 살아났잖아. 난 이럴 때 성욕이 강해지거든. 봐봐. 벌써 젖었어.”

“쯧. 오늘은 참으려 했는데.”


참지 않겠다는 말에 다르미안이 반색한다. 침대에 올라 자세를 취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가는 일은 없다.


나는 막사 밖으로 나가 초월자들에게만 들릴 말을 나지막히 내뱉었다.


“파스트 페이스. 파스트 페이스. 초월자들은 전투태세를 갖춘 뒤 내 막사 앞으로 집결하도록.”

“으에? 농담이지?”


초월자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설마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군기를 잡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에는 살기를 담아 흩뿌렸다.


“두 번은 말 안한다. 5초 남았다.”


살기는 즉효성이 빠르다. 막사 안에서 움찔하는 동작이 느껴지더니 초월자들이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다르미안은 홀딱 벗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나의 카운트는 절대로 느려지지 않았다.


“3, 2, 1.”


결국 그녀는 제대로 옷가지를 걸치지 못하고 내 앞에 기립했다. 살갗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모인 이들에게 말했다.


“본 사령관은 자네들에게 실망했다. 방만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4명 모두 행성을 지배하는 초월자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 내 힘의 편린을 보고 왔는데 어떻게 이빨을 들이밀 수 있겠는가.


그래도 억울한 건 있는지 입술은 삐죽인다.


“억울한가? 나를 악마로 만든 것은 자네들이다. 본 사령관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자네들의 태도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다.”


멘트가 술술 나왔다. 몸소 체험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분위기를 더 살리기 위해 챙이 달린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일단은 팔굽혀펴기부터 하지. 단. 모든 힘을 제한한 상태로.”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권능을 제한하더라도 팔굽혀펴기 정도는...”

“분명. 모든 힘이라 말했다.”


그러자 초월자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어라? 어? 갑자기 힘이 안 들어가는데?”

“내 힘! 권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그들은 현재 평범한 인간과 다름 없는 상태일 테니까.


내 권능으로 상대의 모든 힘을 봉인해버렸다. 팔굽혀 펴기가 쉽다고? 그렇다면 어렵게 만들면 그만이다.


“하나에 내려가고. 둘에 올라옵니다. 하나 하면 ‘사령관님’이라 외치고, 둘 하면 ‘깝치지 않겠습니다’라고 소리 지르세요. 자 하나!”


초월자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호령을 떨어트렸다. 그들이 빠르게 자세를 취하며 악을 질렀다.


“사령관님!”


팔이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린다.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빠르게 깝치지 않겠다고 외치며 올라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그렇게 쉽게 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잠시 무미건조하게 초월자들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그들의 땀이 땅을 적시고, 정신이 한계에 이르기 직전 둘을 외쳤다.


“깝치지 않겠습니다악!”

“하나.”

“...”


설마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잘못은 당사자가 용서할 때까지 빌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

“사령과아아안님!!!”


그 때부터는 악과 깡, 눈물이 줄줄 흐르는 정신교육 시간이었다.


훈육을 마친 뒤 네 사람의 눈빛은 잘 벼려진 군인의 그것과 같았다. 이제 좀 만족스럽다.


“그럼 잘들 자요.”

“네. 주무십쇼.”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막사에 들어가 누웠다. 정신을 차린 다르미안은 내 쪽 막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등짝에 여자친구들의 손바닥 도장이 찍힐 일은 없을 것 같다. 정말 큰 위험이었다.


* * *


내가 임무를 맡은 이래로 몇 번의 전진이 있었다.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신이 위협하며 북쪽을 향해 공격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나선 덕에 사상자는 없었다.


우리 군의 사기는 더욱 치솟았다. 이제 몇 번만 더 나아가면 사방에서 신을 공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에 들어간다.


작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신을 격살하고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그런 희망이 병사들 사이에서 번질 즈음. 사건이 발생했다.


“동쪽 전선이 붕괴되었습니다! 신이 이동했습니다!”

“옘병.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니.”


아무래도 신은 곱게 죽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호작, 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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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검정 상혁과의 만남2 22.12.29 225 5 22쪽
196 검정 상혁과의 만남 22.12.28 232 5 18쪽
195 고3의 숙명 22.12.27 232 5 17쪽
194 사랑의 형태 22.12.24 245 4 19쪽
193 사랑과 전쟁 2 22.12.23 233 5 22쪽
192 사랑과 전쟁 22.12.22 237 5 19쪽
191 흑역사 박람회 22.12.21 246 5 18쪽
190 차원의 틈 22.12.20 222 5 18쪽
189 참교육 22.12.17 235 5 17쪽
188 주제파악 22.12.16 228 5 19쪽
187 힘을 숨긴 찐따?가 되다 22.12.15 248 5 22쪽
186 졸업, 입학 22.12.14 251 5 15쪽
185 관측 22.12.13 266 5 18쪽
184 악마와 함께하는 제주도 투어 22.12.10 257 5 18쪽
183 바엘 22.12.09 230 5 20쪽
182 제주도 현장학습 22.12.08 253 5 25쪽
181 샌드백 필요 22.12.07 26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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