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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07,307
추천수 :
3,569
글자수 :
1,721,531

작성
22.12.23 22:00
조회
232
추천
5
글자
22쪽

사랑과 전쟁 2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193화



한별은 채 1시간이 안 걸려서 카페로 도착했다. 오늘도 촬영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걸까.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달려가 승윤이의 어깨를 붙들었다.


“승윤아 그게 무슨 소리야? 고백을 한다니! 그런 말은 없었잖아. 데이트까지라며!”

“응. 그랬는데 갑자기 이상한 여자가 나타났어. 잘은 모르겠지만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별 누나와 승윤이는 오래 전 나의 주선으로 친구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고 서로 의지하던 관계인만큼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도 나눴을 터.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응원하면서도 경쟁하는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윤이가 한별 누나를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의리를 지키자는 마음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동맹이라거나.


경쟁자가 늘어나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반갑지 않을 테니. 지금은 힘을 합쳐 외세의 적을 물리치자는 의도가 담겨 있었으리라.


한별은 승윤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크리스티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 본 것이다.


물론 크리스티나의 외모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저래 보여도 방송계를 주름잡는 여배우. 금세 혼란을 가라앉히고 적의를 불태웠다.


“유한별입니다. 남의 데이트에 다짜고짜 찾아와 깽판을 놓으셨다고 들었어요. 어지간히 급하셨나 봐요?”

“헬로~ 크리스티나에요. 배우시죠? 요즘은 외모보다는 연기가 중요한 시대인가 봐요? 연기 잘하시게 생겼어요.”


단지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상처가 난자했다. 승윤과는 달리 한별은 성격이 유하지 않다. 강한 편이다. 강과 강의 대결이었기에 살벌할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중학생을 노리시는 거에요? 소아성애자? 20대 남자한테는 안 먹히는 얼굴인가?”


외모 공격을 받은 한별은 곧바로 나이를 걸고 넘어졌다. 여자들의 세계에서는 노화만큼 민감한 문제가 없었고 효과는 굉장했다.


“하. 하하. 말을 좆같이도 하시네요. 상혁님만큼 능력 있는 남자라면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죠. 그리고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본데 남자들은 당신네 같은 풋내기보다는 저를 더 좋아한답니다?”

“응. 상혁이가 20대 중반만 되어도 계란 한 판~ 주름 자글자글~ 할망구~”

“야! 이런 미천한 계집년이!”


크리스티나가 이성의 끈을 놓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를 패퇴시킬 만큼 한별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승리를 차지한 한별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승윤이에게 돌아갔다.


“와. 언니 멋져요!”

“그래. 우리 이쁜 동생이 자리를 마련해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승윤과 한별이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크리스티나는 이를 아득 갈며 원칙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결정은 상혁님이 하실 거에요.”

“뭐. 그렇죠. 그런데 상혁이는 어디 있어요?”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영원히 찾아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도 언젠가는 찾아오는 법이다.


크리스티나는 내가 누워있는 카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앓아누웠어요.”

“뭐라고요?”

“아니에요. 언니.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놀랄만한 정보를 많이 들어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절대 언니가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닐 거에요!”


승윤이 덕에 큰 위기는 넘겼다. 하마터면 눈을 뜨자마자 곤란한 상황에 처할 뻔 했다.


어찌어찌 진정한 한별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옆에 앉았다.


“괜찮은 거 맞아요?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병원에 가는 것도 좋은 흐름이다. 샘숭 병원에 아는 의사들이 많으니 잘만 하면 장기 입원처리도 가능하리라.


그렇게 될 수만 있으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다. 아프다는 사람보고 고백의 결과를 돌려달라고 닦달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승윤이나 한별 누나는 내가 아프다고 해도 믿겠지만 크리스티나가 문제다.


그녀는 초인류 협회의 수장답게 내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다.


폭력배 무리를 도륙하는 걸 생생히 목격했고, 악마를 두들겨 패는 것도 지켜봤다.


그런데 고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고 쓰러져 누웠다는 걸 믿을 것 같나.


아마 지금도 내 의식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이제 슬슬 깨울까요?”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티나가 운을 띄웠다. 방법이 있냐는 승윤의 질문에 그녀는 손가락을 칫칫 까딱이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잠든 왕자님을 깨우는 건 미녀의 키스 뿐이죠.”


크리스티나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내 머리를 붙잡았다.


“안 돼!”

“미쳤어?”


승윤과 한별이 다급히 제지하려 했지만 거리가 있었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이었다.


엄습하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눈을 뜨니 아쉬워하는 크리스티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추행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아요.”

“자는 척을 한 사람 잘못 아닐까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밀어냈다. 크리스티나가 사라진 자리에는 한별이 서 있었다.


앙다문 입술과 가늘게 치뜬 눈에서 그녀의 분노가 새어나왔다.


“내가 온 걸 알면서도 자는 척을 한 거야?”

“어...”


산 넘어 산이다. 답이 없는 디펜스 게임을 하는 것만 같다. 쉬어갈 틈이 없네.


“내가 그렇게 싫어? 부담스러워? 별로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내 마음이 우습니?”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눈을 돌리니 웃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낯이 보였다.


지혜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원하는 상황을 유도하는 건 그녀에게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나이 공격 때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했던 모양.


나는 그녀에게 눈짓으로 경고를 준 뒤, 한별을 소파에 앉히며 달래주었다.


“아니야. 누나. 우습게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정말?”

“그럼. 지금까지 내가 쌓아올린 모든 업적과 내 타고난 연기력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나는 실없는 말을 뱉는 사람이 아니다. 한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거친 숨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연기력은... 흐윽. 내가 가르친 거잖아... 흐윽. 타고난 거 맞아?”

“그럼. 이래 뵈어도 대한민국 최초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흐윽. 나는 여자 주인공인데. 푸흐.”


이제는 농담을 할 정도로 진정된 것 같다.


한별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후,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는 거 같아.”

“그랬나? 잘 모르겠는데.”

“아냐. 너랑 처음 만난 날에도 감독님한테 연기 못한다고 혼나서 엉엉 울었는걸?”


아. 기억난다. 기껏 선택한 드라마가 망할까봐 걱정이 많았지.


돈을 벌기 위해선 드라마의 흥행이 필수였고, 그러려면 여자 아역의 각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엉엉 울고 있는 한별 누나를 도와줬던 기억이 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다.


“그 날 이후 네가 계속 신경 쓰였어. 자꾸 보고 싶고, 더 알고 싶고. 그러다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되었지.”

“그래.”

“그런데 이제는 더 나아가고 싶어. 네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나도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안 될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지금까지 많은 호감표시를 받아 봤지만 직접적인 고백은 처음이다.


한별 누나는 가장 늦게 도착했으면서도 가장 먼저 고백을 한 셈.


분위기가 묘해졌다. 누군가의 진심어린 사랑 고백은 주변을 데우는 법이다.


승윤이는 얼굴을 붉혔고, 크리스티나는 의외라는 듯 한별 누나를 보았다.


“왜 그렇게 봐...? 자기들도 고백했으면서.”


그녀를 제외한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고, 정적이 흘렀다.


“나만 한 거야...?”


답은 없었다.


어른스러운 척 하면서도 허당 끼가 있는 게 한별 누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잠시 꿈틀 거리더니 이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대답 들려줘. 고백 나만 했다며! 그럼 대답을 제일 먼저 듣는 것도 나여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선택의 시간이 임박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다.


나는 세 사람의 간절한 눈빛을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시간아 멈춰라.”


기이한 기운이 시공간을 붙들었다. 멈춰버린 세상 속 움직이는 건 나 혼자였다.


압박에서 벗어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좋아. 이제 정해보자고.”


이미 상당히 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질질 끌면 모두에게 피해가 갈 테니 물리적인 시간이라도 멈추는 수밖에.


초월자에게는 초월자만의 사랑법이 있는 법이다. 추하더라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이 행성의 초월자는 나뿐이니까.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셋 전부에게 마음이 간다.


승윤이는 가장 애틋하고, 크리스티나는 사람이 마음에 들며, 한별 누나는 하는 짓이 귀엽다.


누구 하나를 고르는 것이 정말, 아주 정말 어렵다. 모두 좋은 사람이니 당연한 결과인가.


혼자서 고민하다간 머리가 뻥 터져버릴 것 같았기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두뇌야?”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두뇌는 전 우주의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 자부한다. 그러니 나의 고민도 깔끔하게 해결해 줄 것...


‘대답 거부. 등신임? 나한테 묻게?’


같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두뇌는 초월해도 저렇게 버릇이 없는 건지.


강제적으로 답을 도출해내는 방법도 있지만 두뇌는 권유하지 않았고, 나 또한 두뇌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녀석의 말대로 이건 계산의 영역으로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연애상담 같은 건 받으면 좋겠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 상담사가 될 만한 사람을 손꼽아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린 쌤. 인격자인 그녀는 분명 부드럽게 나를 안아주고 같이 고민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고민이 ‘3명의 여자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부드럽게 대해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직접 가르쳤던 승윤이를 편파적으로 밀어줄 수도 있고.


그러니 기각.


그렇다면 어머니? 아니. 어머니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는 걸 반기지 않으실 것이다. 소중한 아들이 떠나갈 거라고 기절하시겠지. 그러니 이 또한 기각.


그러다 할머니에게 생각이 머물렀다. 우리 할머니는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똑부러지는 현명한 여성이시다.


다만 할머니의 연애관이 정상적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이견이 있다.


믿기지 않지만 소싯적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남이셨다고 한다. 좋다고 매달리는 여자들로만 야구 팀을 만들 수 있을 정도.


그리고 할머니는 그 연적들을 모조리 꺾어버리고 당당하게 할아버지를 차지했다.


그러니 할머니에게 묻는다면 과격한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배틀로얄이 열리거나, 데스매치가 형성되거나. 내 옆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건 그만큼 독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경쟁자들을 책망할지도 모른다.


결국 할머니에게 조언을 받는 것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 남은 건 누가 있느냐.


초인류 협회 사람들은 능력은 있는데 이번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크리스티나를 밀어줄 사람들이다. 아니, 유전자에 대한 집착이 강하니 자기 친인척을 소개시키려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후보군이 더 늘어나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샘숭의 이제이도 똑똑한 사람이지만 초인류 협회와 같은 이유로 기각이다. 어떻게든 샘숭 일가에 나를 포함시키려 노력할 사람이다. 아저씨의 딸 은하가 벌써 고등학생인가 그럴 것이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을 리스트에 올렸다가 이내 머리에서 지웠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던 것 같은데 어떻게 도움이 될 만한 어른은 한 명도 없다.


“역시 믿을 건 나뿐인가... 어?”


갑자기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그래. 내가 있었다. 나만큼이나 나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높은 식견을 가진 존재. 그건 바로 내가 아닌가.


이왕 초월자가 되었으니 초월적인 짓거리를 좀 하더라도 문제는 없겠지.


예를 들면 다른 우주의 나에게 상담을 받는... 건 힘들겠네 X발.


“맞다. 나 혼자였지.”


나와 검정 상혁을 제외한 모든 우주의 박상혁들은 신에 의해 제거 당했다. 그러니 상담을 받아줄 상혁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잠깐 검정 상혁을 부를까 생각도 해봤지만 고개를 저었다. 한창 신이랑 싸우는데 연애상담 해달라고 부르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


“하아. 미래시 같은 걸로 결과를 보고 고르면 안 되나.”


가능하면 미래를 엿보고 싶지만 그것도 힘들다. 과거는 존재하는 개념이지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니 관측 또한 불가능하다.


“외롭네.”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나는 잠시 궁상을 떨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불가능? 까짓 거 억지로라도 이뤄내면 그만이지.”


초월이란 무엇인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초월에 초월을 거듭한 이 몸에게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 명의 여자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 무엇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으리라.


심장에 깃든 초월의 힘을 가동했다.


흘러넘치는 기운을 통제하여 지구 곳곳으로 흩뿌렸다. 흩어진 기운들은 이 행성의 모든 DNA를 수집해 돌아올 것이다.


수집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타차원에 10만분의 1 사이즈의 지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집된 DNA를 미니 지구에 넣은 뒤 복원 작업을 거쳤다. DNA가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DNA 한 가닥으로 사람을 만들다니. 이게 웬 개소린가 싶겠지만. 현재 나는 소의 털 자락 하나만으로도 진짜 소를 생성해낼 수 있는 경지였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지구가 완성되었다.


나는 구성원들에게 원 주인의 기억을 심은 뒤, 힘을 한층 끌어올려 미니 지구의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감았다.


한 10년 쯤 흘렀을 때, 그러니까 저 곳의 내가 25살이 되었을 때 시간을 멈추었고 미니 지구의 박상혁을 내가 있는 차원으로 소환했다.


조각처럼 잘생긴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녀석은 10년 후의 박상혁.


정확히는 나 자신은 아니지만 복사본을 변질시킨 것이기 때문에 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청년 상혁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필요 없어. 나는 너니까. 상황은 다 알고 있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나는 기대에 찬 눈빛을 그에게 보냈고, 청년 상혁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들려주지. 그 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다오.”

“물론이야. 얼마든지.”

“너는... 일단 좀 맞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년 상혁이 내게 달려들어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똑같은 상혁이라고는 하나 열화판인 만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주먹 속에 담긴 억울함은 진짜였다. 조금은 미안했다.


진솔한 대화시간을 가진 것은 한참을 때리던 청년 상혁이 헉헉거리며 떨어져나간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 명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 세 명이 아니다. 네 명이다.”


청년 상혁이 날 보자마자 주먹을 휘두른 이유가 있었다.


나조차도 세 번째 고백을 받았을 때 혼절했는데, 네 번째가 등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 힘든 충격을 입었으리라. 그나마 이렇게 필터를 한 번 거쳤으니 망정이지.


“나는 네 번째를 만들 정도로 막 그렇게 난봉꾼으로 살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아니. 있어. 너랑 친분이 있으면서도 네가 신세 진 사람이.”


청년 상혁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미안해서 고백을 거절하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히 신세를 졌다는 소리인데.


봉식 아저씨? 우웩. 그럴 리가 없지. 이제이? 우욱. 왜 자꾸 남자만 생각나는 거야.


그렇다면 누구지... 아!


“유성아씨?”

“그래. 성아가 네 번째다. 세 사람과의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나니 어디선가 튀어나와 참전하더군. 나 그 때 처음으로 탈모라는 걸 겪었다.”


그랬겠지. 밥 먹고 별만 들여다보는 연구원이 갑자기 나를 좋아한다고 그럴 줄은 누가 알았겠나.


조짐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의 꿈을 이뤄준 것도 나고,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것도 나다.


때문에 성아 씨는 언제나 나를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게 사랑일 줄이야.


“거절은 못했겠네?”

“못했지. 그동안 일한 보상으로 유전자만이라도 달라는데. 사랑 따위는 못 받아도 되니까 미혼모라도 시켜달라는데 내가 어떻게 밀어내겠어. 안 그래도 부정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될 줄 알고. 나는 그런 꼴 못 봐.”


녀석의 선택은 곧 내 선택이나 다름이 없다.


성아는 그동안 내 밑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혁혁한 공도 세웠고. 그런데 염치가 있지, 그녀가 몰락하는 꼴을 지켜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네 명이랑은 어떻게 했어?”


나는 차원의 틈에서 과자를 꺼내 들었다. 내 이야기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런지 흥미진진했다.


청년 상혁은 힘이 없기에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뭐 어떻게 하긴. 도망갔지.”

“와. 남자도 아니다.”

“니가 할 말은 아닌 거 알지?”


물론이다. 그러나 초월자는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 단죄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별의 별 짓거리를 다 해봤어. 잠수도 타 보고, 넷 다 거절도 하고, 위장 결혼도 해 보고. 그런데 그녀들은 포기를 하지 않더라고.”


네 사람의 진심에 코끝이 찡해졌다. 청년 상혁 또한 뭉클한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결정했어. 이렇게 계속 도망가느니 넷 다 품기로.”

“네다리? 욕 안 먹었어? 아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몰라. 최선을 다하다 보니 살려는 주더라.”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답이 1개인 객관식 문제를 4개 다 찍은 셈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마음은 편안한 것이 어쩌면 내가 바라던 게 녀석의 선택과 같은 모양새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았다.


“결혼은? 다른 건 몰라도 결혼은 다들 포기 안 했을 텐데. 호적 문제도 있고.”

“일부일처제를 폐지시켰어.”

“네 명이랑 결혼하려고 결혼 문화를 바꿨다고?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청년 상혁은 비릿하게 웃었다. 저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아 어깨가 축 처졌다.


쟤가 한다는 건, 미래에 나도 할 거라는 뜻. 저 멀리 고생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도 도입 자체는 어렵지 않았겠네. 국회의원들 구워삶는 건 지금도 할 수 있으니까. 그 대신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든 바꿔야겠는데... 아. 주인공이 하렘을 구축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잔뜩 때려박는 방법도 괜찮겠다.”


청년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자고로 사람들의 정서나 신념은 문화를 통해 변화시키는 게 정석이다.


오죽했으면 문명이라는 게임에 문화승리가 있을까.


그래도 일부일처제를 폐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진 바 모든 것을 모두 동원해야 간신히 이뤄낼까 말까다.


청년 상혁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도움은 되었냐?”

“어. 많이. 고마워.”

“각오는. 되었고?”


‘각오’는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지를 새길 차례였다.


“응. 이제 결정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청년 상혁은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 미니 지구로 돌아갔다. 육아를 도와야 한다나. 분명 같은 상혁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어깨는 보다 넓은 느낌이었다.


“후우...”


미니 지구의 시간 흐름을 조금 느리게 조정해두었다. 우리 지구가 미니 지구의 시간을 따라잡으면 다시 합칠 생각이다.


원래 하나였으니 다시 하나가 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터.


이제 내 일이나 잘 하면 된다.


“후우...”


다시금 숨을 골랐다. 결정은 내렸다. 가능하다면 나도 넷을 모두 품고 싶다.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다. 엄연한 내 의지의 발로다. 아마 보지 않았더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힌트를 얻은 덕에 방황하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던 것 뿐.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하는 건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분명 실망하고, 괴로워할 테니까.


그래도 더 이상은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책임을 지려 한다.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 카페로 돌아와 시간의 흐름을 되돌렸다.


“대답해줘.”

“그 다음은 제가 듣고 싶어요 상혁님.”

“상혁아. 나는 상혁이가 진짜 좋다는 것만 알아줘.”

“승윤아! 언니 고백 아직 안 끝났잖아!”


언제 시간이 멈췄냐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나온다.


승윤이, 한별 누나, 크리스티나까지. 모두가 예쁘고 호감이 가는 매력적인 여성들이다.


나는 그녀들 한 명씩에게 눈을 맞춘 뒤 선언했다.


“나는 넷 중 어느 한 사람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모두를 사랑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세 사람은 입을 모아 똑같은 비명을 질렀다.


“넷?”

“아...”


각오를 너무 한 나머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이 곳에 있는 건 세 사람 뿐인데... 여성진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해명을 요구했고. 나는 다시금 시간을 멈춰 차원의 틈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너무 춥습니다. 바람도 많이 불어요. 독자님들 모두 따뜻하게 입고 다니셔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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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리셋 22.12.31 240 6 22쪽
200 신의 선택 22.12.30 240 5 18쪽
199 구원자 22.12.30 227 5 23쪽
198 북쪽 전선 22.12.29 219 4 21쪽
197 검정 상혁과의 만남2 22.12.29 225 5 22쪽
196 검정 상혁과의 만남 22.12.28 232 5 18쪽
195 고3의 숙명 22.12.27 232 5 17쪽
194 사랑의 형태 22.12.24 245 4 19쪽
» 사랑과 전쟁 2 22.12.23 233 5 22쪽
192 사랑과 전쟁 22.12.22 237 5 19쪽
191 흑역사 박람회 22.12.21 246 5 18쪽
190 차원의 틈 22.12.20 221 5 18쪽
189 참교육 22.12.17 235 5 17쪽
188 주제파악 22.12.16 228 5 19쪽
187 힘을 숨긴 찐따?가 되다 22.12.15 248 5 22쪽
186 졸업, 입학 22.12.14 251 5 15쪽
185 관측 22.12.13 266 5 18쪽
184 악마와 함께하는 제주도 투어 22.12.10 257 5 18쪽
183 바엘 22.12.09 230 5 20쪽
182 제주도 현장학습 22.12.08 253 5 25쪽
181 샌드백 필요 22.12.07 26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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