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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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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2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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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9 22:00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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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22쪽

검정 상혁과의 만남2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197화



“상혁아? 밥이 맛있는데 이 분은 왜 우는 걸까...?”


어떤 이에게는 평범한 순간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순간일 수 있다.


검정 상혁은 가족과의 식사를 통해 그 동안의 서러움을 털어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소중한 순간도 반대로 누군가에게 평범한 순간이기도 하다.


검정 상혁은 감동에 잠식되어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옛날 어르신들은 식사 자리에서 우는 아이한테 밥맛 떨어진다며 숟가락을 던지고는 하셨다.


그 말처럼 우리 집 식사 분위기도 바닥을 뚫고 지하암반을 돌파했다.


다 큰 청년이 밥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을 콸콸 쏟으니 다들 당황할 수밖에.


그나마 할머니는 연륜이 있는 만큼 무언가 사정이 있겠거니 추측하고 계셨지만, 엄마는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안절부절못하는 중이다.


잘못하면 어색한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검정 상혁의 사정을 대충이라도 설명하기로 했다.


“이 분이 고향이 한국인데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타지 생활을 오래하셨대요. 그래서 아마 감동을 받으신 거 같아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끝내 운명을 극복한 비운의 주인공이 한 순간에 외화벌이 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엄마와 할머니의 눈빛에 이해심과 따뜻함이 차올랐다.


“으구. 밥 다 식겠다. 뜨뜻한 걸로 바꿔주마.”

“갈비찜 많이 먹어요. 소고기가 몸에 좋대요.”


할머니는 밥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으로 바꿔 담으셨고, 엄마는 검정 상혁의 밥그릇에 고기를 올리셨다.


젊은 청년이 고생을 한다니까 남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실제로 남이 아니기도 하고.


검정 상혁은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한 바가지 더 쏟아냈다. 끄윽끄윽 울음을 삼키면서도 밥과 반찬을 입에 우겨 넣는 모습이 짠하면서도 흐뭇했다.


결국 검정 상혁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할머니, 엄마에게 붙잡혀 후식을 먹어야만 했다. 그래도 이제는 진정이 된 건지 떡을 오물오물 삼키면서도 두 사람의 질문에 곧 잘 대답했다.


“그래. 잘 곳은 있고?”

“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서. 숙식 문제는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나이도 어리신데 장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참고로 검정 상혁의 겉모습은 평범한 20대 후반 남성과 같다. 살아 있는 암흑물질 상태로 걸어 다닐 수는 없었기에 대충 위장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원본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나와 비슷한 외모 덕에 우리 가족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분위기는 시종일관 훈훈했다. 굳이 따지면 오랜만에 만난 사촌과 같은 느낌?


“상혁이랑은 어쩌다가 알게 된 사이에요?”

“일하다가 만났고, 지금은 서로 돕고 돕는 관계입니다.”

“오. 되게 뛰어난 분이신가 봐요!”


엄마에게는 ‘상혁=뛰어나다’가 기본 값이기 때문에 검정 상혁 역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게 검정 상혁에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왔나 보다. 불운했던 전생에는 엄마에게 자랑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검정 상혁은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기 시작했다. 엄마와 할머니가 집중하기 좋도록 이야기 중간, 중간 나를 끼워 넣으면서 말이다.


그가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설정을 푸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행복해 보이는 검정 상혁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 제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집을 나설 때까지 한참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고, 나갈 때 즈음엔 보다 친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언제든지 밥 먹으러 와요.”

“네. 어머님.”

“은주야. 밥은 내가 하는 거 아니냐?”

“하하. 밥 맛있게 먹었습니다. 할머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무리 반가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집에 있을 수는 없다. 검정 상혁은 아쉬움을 삼키며 우리 집을 떠났다.


나는 그를 데려다 주겠다고 따라 나와 같이 걸었다. 검정 상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운을 만끽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네.”

“싫었어요?”

“싫었겠냐.”

“그렇겠죠.”


알고 물어본 것이다. 몇 백 살은 어린 꼬마 앞에서 엉엉 우는 모습을 보였으니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이렇게라도 적당히 놀리지 않는다면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검정 상혁은 실제로 조금 멋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후련해 보인다.


“신세졌어. 오늘의 일은 꼭 보답할게.”

“에이. 보답은요. 신 본체 쓰러트리면 또 밥이나 먹으러 와요.”

“야. 원래 결전 앞두고 그런 약속 잡으면 죽는 거 몰라?”

“모르겠어요?”


검정 상혁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즐거워져 같이 웃었다. 검정 상혁은 삐져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흠. 그렇다면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뭐를요?”

“내가 아무리 클리셰를 쌓아도 안 죽는다는 걸 말이야.”


그가 팔을 구부리며 알통을 만들어보였다.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아마 빈말은 아닐 것이다. 원래도 대련은 하려고 했었으니까.


다만 타이밍이 조금 묘한 것이. 부끄러운 민낯을 보인 뒤, 힘자랑을 한다고 하면 누가 봐도 잃어버린 체면을 복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설마 검정 상혁이 그렇게까지 추할까 싶었지만 그의 본질은 박상혁이다. 내가 어떤 놈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아마 대련을 통해 땅에 처박힌 위엄을 조금이라도 끄집어내려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대로 대련을 회피하고 계속 검정 상혁을 놀리는 방법도 있으나.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 체면을 세우려고 아득바득하는 검정 상혁을 내가 이겨버린다면 더 재밌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겠는가?


상대가 아무리 해방군의 3거두 검정 상혁이라 하더라도 나는 자신 있다. 나 역시 초월에 초월을 거듭한 사람이니까.


단순히 호승심을 앞세우는 게 아니다.


그가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초월의 영역에 이른 내 두뇌가 비밀리에 움직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계산 내용은 당연하게도 대련의 승리 확률.


두뇌는 나의 승리를 점쳤다. 그 차이가 굉장히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비장의 한 수를 남겨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우세한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당하게 검정 상혁의 대련 신청을 받아 줄 생각이다.

나는 손가락을 퉁겨 차원의 틈을 열었다.


“자. 가시죠. 드루와. 드루와!”


검정 상혁은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웃음을 흐느낌으로 바꾸어주겠다고 다짐하던 차, 그가 담담하게 고백했다.


“참고로 말하면 지금의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아.”

“그거 패배 클리셰...”

“아니. 진짜. 아까 식사를 마치며 내 경지가 한 단계 높아졌음을 느꼈거든.”


아무리 눈물을 흘린 게 부끄러워도 그렇지. 저렇게 의미부여를 하고 싶을까. 할머니 음식을 먹었다고 경지를 초월하면 우리 할아버지는 이미 신보다 강했게?


그렇게 차원의 틈으로 들어간 지 1시간가량이 흘렀다.


나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느꼈고, 진짜 초월자가 강해지는 수단에는 별의 별 게 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검정 상혁은 확실히 식사 이전에 비해 몇 배는 강해진 상태였다.


두뇌의 음습한 계산이 쓸모가 없어졌다. 덕분에 나는 초월자가 된 이후 아주 오랜만에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 * *


“맛있는 밥을 먹여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엄마한테 다 말할 거야.”

“하하. 그건 좀 봐줘라.”

“신세진 걸 보답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검정 상혁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게다.


새로 얻은 힘을 테스트도 안 해보고 무작정 휘둘렀으니.


내가 이렇게 허리를 두드리며 골골대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굉장히 강하던데. 까딱하면 내가 질 뻔 했어.” 개인적으로 승리자가 건네는 위로는 기만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직 비장의 수단도 남아 있잖아?”


그건 검정 상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고.


내가 굳이 말로 내뱉지 않아도 검정 상혁은 내 속마음을 다 알아들었다. 나를 닮은 양반이 머리를 긁으며 사과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건 아니네요.”

“그렇지?”


그랬다. 검정 상혁은 거의 신과 비슷한 존재다. 그러니 오늘의 대련은 최후 결전의 리허설이 되는 셈.


참고가 많이 되었다. 오늘 맞은 만큼 결전의 날에는 덜 아플 것이다. 보다 나은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겠지.


“흠. 조금 있으면 돌아가야겠네.”


검정 상혁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어느새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초월자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렇다고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격이 높은 존재의 시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지 않겠나.


신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모든 시간의 기준은 신이 되리라.


한 마디로 우리가 아무리 지구에서 시간을 조작하더라도 신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며.


신이 언제 해방군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소리이다. 그러니 검정 상혁도 슬슬 돌아가야만 한다.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검정 상혁은 어디선가 소파를 꺼내 앉고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웠다. 조금 강해졌다고 저렇게 플래그를 남발하다니 역시나 추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가 담배 한 대를 내게 권유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충동이 심했는데, 요즘은 참은 게 아까워 손도 안 대고 있다.


그 대신 커피를 2잔 뽑아 소파에 걸터앉았다.


“시끌시끌한 하루였네요.”

“보람찬 하루였지.”


갑작스럽게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당황했지만 생각만큼 어색하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저 사람도 나였으니까. 내가 두 명 있는 것처럼 편했고, 잘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외동이라서 잘 모르지만 형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거 같기도 하고.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렇게 멍을 때리다가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검정 상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 최근에 고민하던 게 있거든요. 나 말고는 아무도 공감 못하겠다 싶어서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하나 더 나타난 거네? 말해봐. 뭔데.”


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쩐 일로 그가 믿음직해 보인다.


“그러니까 제가 세계를 거의 다 정복 했잖아요. 그런데...”


진로에 대한 고민을 들려주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 걸린 선택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만큼 꼴사나운 짓은 또 없지만 검정 상혁은 남이 아니다.


나보다 높은 식견을 가진 박상혁이다.


그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소설 좋아하냐. 막 마왕 나오고 용사 나오고 그런 거.”

“그렇죠. 출퇴근하면서 읽으면 재밌잖아요.”


갑자기 화제가 넘어갔지만 일단 성실히 대답했다. 박상혁은 장난은 좀 쳐도 뻘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혹시 소설 읽으면서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왜 용사가 나오는 소설에서는 항상 마왕이라는 놈이 튀어나오는지?”

“... 둘이 세트라서? 용사가 있으면 마왕도 있어야죠.”“아니지. 주인공은 용사야. 마왕은 언젠가 용사에게 죽을 운명이고. 그럼 용사만 등장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예를 들면 마왕이 쓰러진 다음의 세계라던지.”


생각해본 적 없는 발상이다. 그러나 의외로 대답은 금방 나왔다.


“그럼 재미없을 거 같은데.”

“그래. 재미없겠지. 그게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답변이야. 평화라는 건 원래 조금은 지루하다 싶은 법이거든.”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평화를 추구해. 그런데 평화라는 게 마약처럼 누리고 있으면 막 뽕이 차고, 행복함이 두뇌를 잠식하고 막 그런 게 아니거든.”


그의 말이 나의 인식을 뒤바꿔 놓는다. 어쩌면 나는 해피엔딩이라는 걸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형적인 개념에게 확실한 리턴을 바라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은 달성한 순간이 최고로 행복하다. 그 이후로는 점점 익숙해질 뿐이다.


위협도 없지만 자극도 없으니. 무미건조한 삶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는 세상을 전부 제패해 버렸으니 안 그래도 모자란 자극이 씨가 마르고 말았다.


지금 내 상황은 ‘방황’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검정 상혁의 말에 처음으로 현 상황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럼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그냥 살아야지. 우리는 초월자지만 신은 아니야. 지극히 완벽에 가깝지만 결코 온전하지는 않지. 그러니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게 될 거야.”

“그 부족함을 찾고, 고치는 게 남은 인생의 여흥이 되겠네요.”


검정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그건 확실한 즐거움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스스로를 관조했다. 이 몸에 얼마나 부족한 게 남아 있으려나 파악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너무 완벽한 나머지 발전할 부분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정 상혁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가득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분명 너도 네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경험하게 될 거야.”

“예를 들면?”

“자식. 곧 성인이니까 금방 자식을 가질 거 아냐. 여자친구도 4명이나 되면서.”

“아...”


자식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빠가 되는 건 분명한 미지의 영역이다.


아기들은 나를 닮을까? 아니면 아내를? 어떤 성격일까, 무엇을 좋아할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루하던 일상에 색체가 더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좋은 아빠가 되는 것. 장래희망으로써 부족함이 없다.


“고마워요. 역시 나이는 짬으로 드신 게 아니네요.”

“당연하지. 이래 뵈어도 신에 가장 근접한 사람 중 하나라고?”


그는 멋진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어깨를 쭉 폈다.


저러지만 않았으면 진짜 멋있었을 텐데. 신과 맞다이를 뜨던 위엄 넘치는 간지 캐릭터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가슴은 후련하다. 그동안 쓸 데 없이 자리만 차지하던 고민을 온전히 털어버린 기분이다.


별로 대단한 조언은 아니었지만 큰 울림이 있었다. 일반 상담사가 똑같은 말을 했다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내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검정 상혁에게 상담을 부탁하길 잘했다. 역시 나를 잘 아는 건 나밖에 없다니까.


검정 상혁은 콧대를 높이며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언젠가 부모가 되는 것도 익숙해지는 날이 올 거야. 어쩌면 정말 모든 것을 이뤄낼지도 모르고. 그럴 땐 방황하지 말고 일단 받아들여. 다음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지.”

“다음 이야기가 오지 않으면?”

“그걸로 만족하자. 그게 너의 해피엔딩이니까.”

“나의 해피엔딩...”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엔드라인에 도달했다.


검정 상혁에게 연애에 대해 말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행복은 자신이 인식하기 나름이라고 말했었는데. 그 사실을 잘 아는 것처럼 말했는데 정작 그 말이 내 고민의 해답이었다니. 부끄럽다. 쥐구멍이 어디 있나 몰라.


나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니까. 전쟁 이후 플랜은 다 짜놨겠네요? 완전 완벽한 걸로다가.”

“생각이야 오래 했지. 그러나 결정을 내린 건 오늘이야.”


의외라면 의외였다. 멋지게 대답하길래 자기 앞가림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너무 길었어. 신과 싸우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지. 그러다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더구나. 그런데. 네 세상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우리는 박상혁이다. 내가 그에게 영감을 받듯, 그 또한 나에게 영감을 받는다.


내 두 번째 삶은 검정 상혁의 속죄로 시작했다. 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라고.


이는 그가 못다 이룬 바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이뤄낸 경치는 그에게 있어 이상향과 같을 것이다.


나의 해피엔딩은 이미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검정 상혁은 설레는 표정으로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나도 환생 비슷한 걸 할 생각이야.”

“제가 좋아보였나 봐요?”

“그래. 부럽다. 특히 젊은 게 부러워. 이제야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100살이 넘은 할아버지로 살 수는 없잖아.”


지당하신 말씀. 검정 상혁도 양로원 에이스가 되기 위해 신과 싸우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아기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으니까 한 20살 정도로 돌아가야지. 번듯한 회사도 세우고. 많은 사람도 만나고 떵떵거리며 살 거야.”

“아무렴요.”

“아. 그리고 군 면제도 받아둬야지. 이미 한 번 갔다 왔는데 재입대를 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군 면제를 받아 뒀던가...?


내 명석한 두뇌가 받은 트로피들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제기랄.”


욕설이 나왔다. 대회를 그렇게 휩쓸면서 군 면제를 생각 못하다니. 통한의 실수다.


옛날에는 세계 선수권 대회 입상만 해도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 올림픽 메달 말고는 보충역으로 빠질 방법이 없다.


국가대표 발탁 과정이 부담스러워 바로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우선하다보니 이렇게 결국 중요한 문제를 깜빡하고 말았다.


“너는 군대 다시 갈 생각이야?”


내 표정이 심각하자 검정 상혁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마도 내가 그를 향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미쳤어요?”

“그럼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그거야 당연히 문제가 생겼으니까 그렇지.


현재의 상황을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감동적인 영화가 끝이 났다. 주인공은 해피엔딩을 맞았으며 주인공 일행들의 행복한 모습이 엔딩 크레딧과 함께 화면에 상영된다.


그런데 갑자기 칼을 든 괴한이 자연스럽게 무리 속으로 끼어드는 걸 목격한 것만 같은 소름 돋는 상황이다.


분명 해피엔딩이긴 한데. 굉장히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불길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금 딱 그런 심정이다.


사정설명을 들은 검정 상혁이 반문했다.


“너 이제 19살이지 않아? 아직 시간 넉넉하잖아.”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모든 우주의 시간은 신을 기점으로 흐른다. 사건은 시간의 흐름대로 터지고.


만약 내가 군 면제 수단을 마련하기 전에 신이 난동을 피우면? 최후의 결전이 열릴 것이다. 그럼 나는 차출되겠지.


싸우다가 내가 부상이라도 입었다고 생각해보자. 어쩌다 모든 힘을 다 잃게 되었다거나.


정점의 DNA가 없는 나는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이 없다. 군 입대를 피할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미 시간의 여유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검정 상혁은 낯빛을 굳혔다. 비약이 심하다고 하기에는 그 또한 신의 심성을 잘 알고 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라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신이다.


신은 박상혁을 미워한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상혁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군 면제를 방해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검정 상혁은 담배를 비벼 끄고 다급하게 일어났다.


“일단 군 면제부터 따 두자. 내가 시간의 흐름을 조작할게. 가장 가까운 메달이 언제일려나.”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나 역시 정저의 DNA를 활성화시켜 그를 도왔다.


과거를 조작하는 건 쉽지만, 미래를 건드리는 건 굉장한 부담을 지는 일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직접 겪지도 않았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쪼개며 들어왔다.


그래도 견뎌냈다. 군대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기에. 그 쪽으로는 소변조차 누기 싫단 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신이라는 작자가 얌전히 있기를 기원하는 것뿐이다.


설마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나를 노리겠어? 내가 그 정도로 밉다고? 에이. 우리 생각보다 친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없던 친분마저 만들며 시간의 흐름을 견뎌냈다. 어느새 주변의 광경이 바뀌었다.


이곳은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리는 장소였다.


올림픽은 짝수 년에 열린다. 그러니 2011년에 메달을 걸기 위해서는 아시안 게임을 택해야만 했다.


종목은 스노보드. 사실 어떤 종목이라도 상관없다. 무엇을 하더라도 금메달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빨리 경기를 끝마치고 메달을 목에 걸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윽고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결승까지 오른 쟁쟁한 후보들의 차례가 끝나고, 내가 나설 시간이다.


“빨리. 빨리. 빨리.”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부정출발을 면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그리고 드디어 심판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세상이 멈췄다.


품 안에서 운석의 목소리가 새어나와 정적을 깨트렸다.


“신이 움직인다. 빠르게 전선으로 오도록!”


스노보드 고글 위로 화살표가 떠올랐다. 다른 우주에 있을 전선을 향한 나침표였다.


“X발. 1분만 있다 가면 안 돼요?”

“당장 약속을 이행해라! 네가 늦는다면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약속을! 이행해라!”

“제기랄.”


이럴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어쩐지 좆됐다 싶더라니.


주변을 돌아보니 검정 상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보다 먼저 신호를 받고 복귀한 모양이다.


“에효. 인생아.”


나는 고글을 벗어 던진 후 우주를 건넜다.


역시. 나는 신이 싫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말씀드린 대로 2편이 올라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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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재미없고 지루한 해피엔딩 +2 23.01.01 348 6 27쪽
202 22.12.31 271 6 29쪽
201 리셋 22.12.31 239 6 22쪽
200 신의 선택 22.12.30 240 5 18쪽
199 구원자 22.12.30 227 5 23쪽
198 북쪽 전선 22.12.29 219 4 21쪽
» 검정 상혁과의 만남2 22.12.29 225 5 22쪽
196 검정 상혁과의 만남 22.12.28 231 5 18쪽
195 고3의 숙명 22.12.27 232 5 17쪽
194 사랑의 형태 22.12.24 244 4 19쪽
193 사랑과 전쟁 2 22.12.23 232 5 22쪽
192 사랑과 전쟁 22.12.22 237 5 19쪽
191 흑역사 박람회 22.12.21 246 5 18쪽
190 차원의 틈 22.12.20 221 5 18쪽
189 참교육 22.12.17 235 5 17쪽
188 주제파악 22.12.16 228 5 19쪽
187 힘을 숨긴 찐따?가 되다 22.12.15 247 5 22쪽
186 졸업, 입학 22.12.14 251 5 15쪽
185 관측 22.12.13 265 5 18쪽
184 악마와 함께하는 제주도 투어 22.12.10 257 5 18쪽
183 바엘 22.12.09 230 5 20쪽
182 제주도 현장학습 22.12.08 252 5 25쪽
181 샌드백 필요 22.12.07 267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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