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간단한걸!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잔디가 깔린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우진은 곧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이브의 말에 멈칫했다.
[끝났습니다.]
“좋았어. 드디어 끝이군.”
내핵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젠 균열로 고생 안 해도 될 것이다. 우진이 만족스럽게 웃고 희미한 빛의 형태로 정원에 나타난 가이아를 바라봤다.
“수고했다.”
“힘들어.”
힘들어도 해야 하는 일인데 별수 있나. 우진은 빛 덩어리에서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는 가이아를 보며 아공간에서 약초 열 뿌리를 꺼내 내밀었다.
“먹어. 열 개 다 먹으면 족히 1만 년은 될 거다.”
“으응? 이렇게나 많이? 진짜 다 먹어도 돼?”
뭘 자꾸 물어? 어차피 약초야 아공간에 넘치도록 많은데.
“마력 다 때려 박았지?”
“으응. 더 튼튼하게 하고 싶어서.”
“잘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관리해.”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문제 생기지 않게 관리할게.”
“그래. 이걸로 마력 채워서 차원 방벽도 더 튼튼하게 하고 이젠 궤도도 제자리로 돌려야지.”
“아! 그게 아직 남았구나.”
태양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지구가 받는 온도가 내려갈 것이다. 그리되면 이상기후와 폭염으로 발생한 여러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가이아가 약초 열 뿌리를 천천히 씹어먹고 가만히 눈을 감는 모습에 우진이 대청마루 끝에 걸터앉아 씩 웃음을 흘렸다.
“이젠 우주만 해결하면 큰 문제는 없는 거지?”
[네. 이젠 가이아님도 있으니 지구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후, 다행이다.”
이제야 안심해도 되겠네.
“그럼 수명 얼마나 늘었어?”
[내핵 하나에 1021년 늘었습니다.]
“헉! 진짜?”
[마력이 더 있었으면 더 늘었을 겁니다.]
“헐, 더 줄 걸 그랬나?”
[당장 급한 건 아닙니다. 마력량과 수명은 다르고 앞으로도 꾸준히 마력을 주입하면서 관리하면 되니까요.]
그거야 문제없지. 세계수가 성장할수록 마력이 더 풍부해질 거니까.
“그런데 고작 내핵 하나로 그렇게 늘다니 신기하네.”
[지구의 중추니까요.]
이브의 말대로였다. 만약 내핵이 완전히 깨지기라도 하면 지구 또한 파사삭 부서질 테니까.
“그럼 지금까지 총 얼마나 늘어난 거야?”
[1397년으로 안정권에 들어섰습니다. 여기에 우주도 해결하면, 어쩌면 멸망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미친. 이 간단한 걸 가지고 그 개고생을 했다고?”
[세계와 차원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해결했으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빨리 끝날 수 있었는데 1년을 넘게 허비한 거잖아!
“아오, 안 해도 될 고생을 했다니 억울하네.”
[그건 아니죠. 화산이나 바다, 방사능, 쓰레기, 오염 정화를 먼저 해서 기반을 다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극적인 변화는 없었을 겁니다. 숲을 만들어 정화작용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결론은 내가 잘했다는 거지?”
[뭐 잘하긴 했죠.]
뭐야, 그 떨떠름한 칭찬은? 이왕이면 곱게 해주지. 우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곧 들려온 이브의 말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멸망을 막지는 못했을 겁니다.]
“큼, 내가 좀 했지.”
[부려먹은 게 대부분이지만요.]
일절만 하렴.
“멸망이 사라지다니, 기분이 묘하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초 치지 말고.”
[지구가 여러모로 특이합니다.]
그건 부정 못 하겠다. 일단 에르다 덕분에 세계수의 성장부터 달랐으니까. 거기다 다른 곳은 초반부터 의지와 힘을 합치는데 지구는 일 년 동안 숨바꼭질했지.
그것도 모자라 내핵에 문제가 생겨서 멸망 막바지에나 생겨나는 균열이 초반부터 나와서 고생했고, 난데없는 차원 격류로 식겁했었다.
“참나,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왜 지구만 달라?”
[마스터가 문제 아닐까요?]
“응. 아니야.”
[그래도 마스터가 역대 가장 빨리 멸망을 막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마스터를 앞설 관리자는 없을 겁니다.]
또 모르지. 에르다가 작정하고 붙들겠다고 했으니까 저보다 더 오래도록 버티는 후보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다른 후보자는 모르겠고, 주변 차원 후보자는 오래 버텼으면 좋겠네.”
[이왕이면 다른 차원도 응원하시죠.]
알게 뭐야. 지구만 안전하면 그만이다. 의지도 없이 악조건 속에서도 몇백 년을 늘릴 동안 정말 쉴 틈 없이 움직였으니까.
“내가 계약을 잘했다니까.”
에르다와 신수들뿐만 아니라 금동이와 은동이 덕분이기도 했다. 그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그 많은 일을 일 년 안에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는 여전히 정화 중이기도 하고. 물론, 한꺼번에 처리하는 바람에 인간들 수도 반 토막이 나고 여기저기 부서지고 난리가 났지만, 그거야 뭐.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던 만큼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젠 의지 덕분에 멸망을 벗어날 수 있게 됐으니 앞으로만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이젠 좀 느긋해져 볼까.”
[폐기물 쓰레기 치우셔야죠. 세 번째 숲도 만들어야 하고요. 또 지하수도 채워야 하고 강 청소와 정화도 필요하고 세계 공장도 정화 마법진을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댐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댐 안쪽도 쓰레기와 오염이 심합니다.]
“댐은 홍수 문제가 심각한 곳은 그대로 둘 거야. 그리고 댐 청소는 나중에 은동이한테 부탁하면 돼.”
[그럼 나머지라도 하세요.]
“한다니까.”
누가 안 한다니. 그저 기분 좀 내겠다는데 그새를 못 참고 닦달이다. 우진이 한숨을 내쉬다가 모습을 감췄던 가이아가 다시 나타나자 기대로 두 눈을 반짝였다.
“이브, 결과는?”
우진의 물음에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다녀왔어.”
“수고했다. 잠시만 기다려. 이브가 근원에 접속한 것 같으니까 이제 곧 결론이 나올 거야.”
“근원? 그럼 멸망이 사라진 거야?”
“아마도? 잘하면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그보다 또 다 때려 박았니? 마력을 채워줬더니 그걸 또 몽땅 사용했나 보다.
또다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일렁이는 모습에 우진이 혀를 차고 아공간에서 약초 다섯 뿌리를 더 건넸다.
“또? 무슨 마력초가 이렇게 많아?”
“언제든지 말만 해. 아직도 많으니까.”
태초부터 존재했던 곳이라 약초 종류도 엄청나게 많고 하나같이 마력량도 어마어마했다. 덤으로 뛰어다니는 놈들도 있을 정도니 뭐.
한마디로 보물창고랄까. 그 보물창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존재라고 해봐야 후보자가 전부인데 아무도 약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하여간, 멍청한 놈들이라니까.”
“누구?”
“있어. 기회를 발로 뻥뻥 차버린 놈들.”
“으음, 모르겠어.”
몰라도 돼. 어차피 만날 일도 없으니까.
“그보다 한 번에 몽땅 때려 넣지 말라니까.”
“어쩔 수 없는걸. 궤도를 너무 벗어났어.”
“그 정도였냐?”
“으응. 한번 벗어나니까 속도가 빨라졌나 봐.”
까딱했으면 큰일 날뻔했네.
“그런데 이브는 뭐 하는 거야?”
“멸망이 그대로인 거 아니야?”
조용히 해라?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우진의 노려보는 시선에 가이아가 움찔거리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렇게도 기다리던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됐고. 결과는?”
[아직이요.]
“엥? 왜?! 내핵도 고쳤고 차원 방벽도 고쳤고 궤도도 맞췄잖아?”
[아직 불안정합니다.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멸망을 가속할 원인이 남아 있는 경우죠.]
“더 남았다고?”
[아마도 우주 방사능이 원인 같습니다.]
우주 방사능? 그게 왜? 우주에는 원래 방사능이 있는 거 아닌가?
[태양이 궤도를 벗어나고 차원 흐름이 잠시 끊긴 이유로 현재 방사능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졌습니다. 차원 격류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걸 방치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죠.]
“하, 돌아버리겠네.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마스터가 할 건 없습니다. 가이아님이 방사능 농도를 낮추면 됩니다.]
“가이아가? 그럼 마력은 어느 정도 들어?”
[한 번에 낮추려면 최소 3만 년에서 최대 5만 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꼭 한 번에 낮춰야 하는 거야?”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 방사능은 계속 차오르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뭐 해야지!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이아를 대청마루에 앉히고 아공간에서 마력초를 한 무더기 꺼냈다.
“이, 이거 뭐야?”
“뭐긴. 먹어.”
“이걸 다?”
“응. 꼭꼭 씹어먹고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갈무리해.”
“너무 많은데?”
“괜찮아.”
어차피 죽는 것도 아닌데 뭐. 우진의 재촉에 울상을 한 가이아가 팔뚝만 한 약초 한뿌리를 뿌리부터 줄기까지 꼭꼭 씹어먹었다.
먹는 족족 마력을 갈무리하면서 약초 수십 개를 꾸역꾸역 다 먹어치우자 우진이 만족스럽게 웃고는 가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아무리 마력이라도 한꺼번에 먹는 건 힘들어.”
잘만 먹고는 새삼스럽게. 우진은 미간을 한껏 구긴 채 투정하는 가이아를 향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오늘 중으로 멸망 없애야지. 딱 하나만 하면 돼. 우주 방사능, 현재 수치가 높아졌다니까 그거 반으로 낮춰.”
“방사능? 그것 때문에 멸망이 해결 안 된 거야?”
“응. 이브 말로는 그게 위험성이 있단다.”
“알았어. 다녀올게.”
가이아가 사라지고 우진은 아공간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초조함을 애써 누르며 2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마스터, 끝났습니다. 예상이 맞았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 설마, 벗어난 거냐?”
[네. 멸망은 사라졌습니다.]
“좋았어! 으아아아! 최고다. 내가 해냈다고!”
우진이 두 팔을 번쩍 들고 버럭 소리치자 놀고 있던 율과 정령들, 세계수 위에 있던 영물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아저씨!>
“뭐야? 무슨 일이야?”
“진! 드디어 미친 거야?”
미쳤다니! 이놈의 자식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뭐 너무 기뻐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긴 하지만!
“우후후후, 쪼꼬미들, 그리고 우리 영물들. 드디어 지구가 살았다.”
“헉! 멸망 사라졌어?”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일까. 내가 해냈다는 거 아니냐. 으하하하!”
우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율이를 번쩍 안고는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 우진의 행동에 정령들도 신이 나서 날아다니고 영물들도 흐뭇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참, 녀석들한테도 말해줘야지. 그런데 가이아는?”
[운석 치우고 있습니다.]
이젠 쉬워도 되는데. 계약하고부터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우진이 만족스럽게 웃고는 에르다와 신수들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저녁에 정원으로 와. 축하 파티다!>
<응? 뭐야? 무슨 축하?>
<오늘 무슨 날이야?>
<축하라면. 설마, 멸망이 사라진 거냐?>
<의지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사라졌습니까? 이렇게 빨리요?>
<허, 진짜라면 놀랍군.>
<역시 진! 믿고 있었다고!>
<해낼 줄 알았다. 고생했다.>
고생은 뭐. 우진이 어깨를 으쓱이고 율을 바닥에 내려준 후 급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수고해준 녀석들을 위해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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