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득한 높이에서 바라본 세계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더더욱 현실감각이 떨어진달까. 어느 순간 미몽에서 깨어나 개꿈 타령을 할 것처럼.
‘문제는 현실이란 말이지.’
이미 받아들이기로 한 현실이고 일말의 기대감도 품고 있지만, 막상 낯선 이곳에서 살아가자니 불안하고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진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마시죠. 복 날아갑니다.]
이미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게 됐는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니 그보다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너 진짜 별걸 다 아는구나?”
[그 정도야 우습죠.]
칭찬 아니다만? 그 뻐기는 말투는 뭔데.
“실없기는. 그보다 부탁 좀 하자.”
[뭡니까?]
“내 기억 좀 봉인해줘. 강우진의 일생 말이야. 지구에 대한 거나 일반 상식적인 기억은 놔두고 인간관계는 무조건 봉인해줘. 가능해?”
[가능합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뭐야. 앞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추억이 깃든 기억이나 소중한 지인들의 기억이 남아 있으면 그게 더 힘들 것이다.
오래 버틸수록 좋다는데 고작 그리움 때문에 나 몰라라 하고 지구로 도망치면 큰일이지 않은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인간의 정신력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무너질 수 있으니까.
말짱 도루묵이 되지 않으려면 가장 조심해야 할 감정이었다. 일종의 안전장치랄까. 최상의 결과를 가지고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기억 못 하는 게 나아.”
[알겠습니다. 강우진의 기억은 봉인하겠습니다.]
“고마워.”
대답과 동시에 눈을 감은 우진은 좀 전까지도 뚜렷했던 기억이 막을 씌운 듯 흐릿해졌다가 한순간에 텅 비어버린 듯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게 느껴졌다.
상실감에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눈을 떴다.
“기분 더럽네.”
[본인이 해달라고 했습니다. 원망하지 마시죠.]
안 해, 인마. 어차피 봉인이야 나중에 풀면 그만이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황당한 일의 연속인데 이 정도쯤이야.
“아, 그리고 부탁 하나만 더 하자.”
[또 뭡니까?]
“툴툴거리지 말고. 너, 내 안에 같이 있다고 했지?”
[정확히는 강우진 님과 하나가 됐습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운명적인 사이죠.]
미친. 소름 돋으니까 비유를 그따위로 하지 말아줄래?
“그냥 시스템이랑 연결된 거 뿐이잖아!”
[그게 그겁니다.]
달라, 이 자식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도 모르냐?
[됐고 부탁이 뭡니까? 이왕이면 공손하게 부탁하시죠.]
얼씨구? 말하는 본새 봐라? 아니, 소설 속 시스템은 세상 친절하던데 이 녀석은 왜 이 모양이래?
물론, 소설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녀석과 대화할수록 뒤통수를 거하게 맞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라고.
[불순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응. 지랄 말고.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인간성을 잃지 않게 해주라고.”
뭐야? 왜 말이 없어? 뭔 말만 해도 약 올리면서 따박따박 따지고 들더니 왜 조용해?
“설마, 안되는 거냐? 만능이라며?”
[그건 아닙니다만. 꼭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 있고말고.
“내 나이가 서른둘이다. 지극히 사회적이고 이성적이며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그렇다고 치죠.]
“치긴 뭘 쳐! 하여간, 잘 들어봐. 앞으로 이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잖아? 그래야 힘도 생긴다며?”
[맞습니다. 오래 머무를수록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인 내가 그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정신이 마모되면 어떻게 되겠어?”
[일단 후보자가 된 이상 인간은 아니게 됐습니다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잘못하면 다 늙어서 끔찍한 중2병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습게 볼 게 아니라고. 지금이야 내가 이성적이라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어떤 식으로 변질할지 모른다는 말이지.”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라도 아득한 세월 앞에서도 굳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이라고는 없는 이곳에서야 오죽할까. 오히려 어디 한군데 고장이 나거나 완전히 미칠 가능성도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요?]
“거참, 답답하네. 생각해봐. 인간성은 다 사라지고 힘만 강해졌다고 치자. 그 힘으로 기껏 지구로 돌아가서 으하하하! 지구를 망치는 인간 바퀴벌레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다! 이 지랄을 하면서 날뛰면 어쩌냐고.”
죽어도 미치광이 중2병은 싫단 말이다!
[···소름 돋는 느낌이라는 게 뭔지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런 기분이군요.]
나도 소름 돋았다, 인마.
[확실히 좋은 인간성은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군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걸 한 대 때릴까?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비축분을 많이 쌓아놓고 시작해서 부담없이 연재합니다.
선작,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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